로널드 레이건

 




'''로널드 레이건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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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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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이름'''
'''로널드 레이건
RONALD REAGAN
'''
'''분야'''
'''텔레비전'''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bgcolor=#dda0dd> '''{{{#ffd700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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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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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윌슨 레이건
Ronald Wilson Reagan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911년 2월 6일
미국 일리노이 주 탬피코
'''사망'''
2004년 6월 5일 (향년 93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벨에어
'''재임기간'''
제33대 캘리포니아 주지사
1967년 1월 2일 ~ 1975년 1월 6일
제40대 대통령
1981년 1월 20일 ~ 1989년 1월 20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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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잭 레이건
어머니 넬리 윌슨 레이건
'''배우자'''
제인 와이먼[66] (이혼)
낸시 데이비스 레이건 (재혼)
'''자녀'''
모린 레이건 (1941 ~ 2001)[67]
마이클 레이건 (1945 ~ )[68]
크리스틴 레이건 (1947 ~ 1947)[69]
패티 레이건 (1952 ~ )[70]
론 레이건 (1958 ~ )[71]
'''학력'''
딕슨 고등학교 (졸업)
유레카 대학교 (경제학, 사회학 / B.A.)
'''종교'''
개신교 (장로회)[72]
'''최종 계급'''
미국 육군 대위[73]
'''신장'''
185cm
'''정당'''

'''상훈'''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1993)
의회 명예 황금 훈장 (2000)
'''약력'''
미국 육군 대위
WOC 라디오방송국 스포츠아나운서
미국노동총연맹 영화배우협회 회장
제33대 캘리포니아 주지사
'''미국 제40대 대통령'''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생애
2.1. 성장기
2.2. 배우 활동
2.3. 정치 입문
2.4. 대통령 재임기
2.5. 은퇴 이후
3. 평가
3.1. 긍정적인 평가
3.1.1. 미국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다
3.1.2. 냉전 종식에 큰 역할
3.2. 부정적인 평가
3.2.1. 인권
3.2.2. 부패 사건들과 법치주의 훼손
3.3. 그 외의 평가
3.3.1. 정치적 분야
3.3.1.1. 긍정적 평가
3.3.1.2. 부정적 평가
3.3.2. 군사, 외교적 분야
3.3.2.1. 긍정적 평가
3.3.2.2. 부정적 평가
3.3.3. 경제적 분야
3.3.3.1. 긍정적 평가
3.3.3.2. 부정적 평가
4. 대한민국일본과의 관계
5. 어록
6. 선거 이력
7. 일화
8. 마거릿 대처와의 비교
9. 기타
10. 대중 문화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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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

1. 개요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로널드 레이건의 대선 캠페인 슬로건.[1]

미국의 제40대 대통령.
1911년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나 1937년부터 1965년까지 영화배우로 활동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공군 기지의 부관으로 종군한 뒤 1962년 공화당에 입당했다. 1967년부터 1975년까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냈으며, 1980년 대선에서 민주당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을 상대로 승리하고 1984년 월터 먼데일을 상대로 재선에 성공하여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임기를 지냈다. 퇴임 후 알츠하이머 병과 투병하다 2004년 향년 93세로 사망했다.
당시 역대 최고령의 나이로 취임한 미국 대통령이자[2] 미국 대통령 선거 사상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다음으로 가장 큰 선거인단 수로 이긴 대통령이었다.[3] 뛰어난 언변을 앞세워 국민들과의 소통을 중시하여 '위대한 소통가(the Great Communicator)'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4]
영국마가렛 대처와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건축한 대표적인 지도자로 손꼽힌다. 또한 미국 보수층과 공화당 지지자들의 정신적 지주에 근접한, 80년대 이후 현대 미국 보수층를 대표하는 존재로 평가되며, 이에 21세기 현재의 미국 공화당은 레이건 행정부를 계승하는 정당임을 자처하고는 한다. 일례로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경선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레이건의 1980년 대선 선거구호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재사용하여 캐치프레이즈화하였다.

2. 생애



2.1. 성장기


1911년 2월 6일, 일리노이 주의 도시인 템피코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구두 외판원이며 알코올 중독자였다. 미국인들은 잘 먹지 않는 내장을 개먹이용이라 둘러대고 정육점에서 얻어와 먹는 게 일상이었을 정도로 레이건은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추운 겨울날 외근을 갈 때면, 여관에서 잘 돈도 아까워서 차 안에서 떨면서 밤을 지샜다고. 그 때 몸이 상해서 늘그막에 잦은 심장발작에 시달렸을 정도였다.
십대 때부터 왕성한 사회 활동을 했는데, 강가에서 아르바이트로 안전 요원 일을 한 것부터 시작해 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 회장, 학교연감 편집장, 수영부 주장, 미식축구팀 주전, 육상부 주전, 농구부 응원단 멤버를 동시에 맡았다. 또한 일리노이의 드넓은 평원에서 말 타기를 즐겼다.[5] 역시 일리노이의 유레카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미식축구팀 주전, 수영부 주전, 육상부 주전, 학생회 멤버 겸 학생회장, 연극부 멤버, 농구부 응원단장 등을 맡았다. 수영을 너무 잘해서 수영부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 코치로 올라갔다.

2.2. 배우 활동


[image]
배우 시절 독일 국방군 육군 병사를 연기한 모습.
[image]

1949년작 It’s A Great Feeling에 출연한 모습.
유레카 대학교를 졸업한 후[6] 아이오와 주 디모인 지역방송국에서 라디오 아나운서로 스포츠 중계를 하다가 그의 잘생긴 외모를 눈여겨 본 워너 브라더스 사에 의해 배우로 데뷔하면서 1937년부터 1965년까지 《Kings Row》 등 수많은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했다. 배우 커리어 동안 비중이 적은 배역을 주로 맡던 2류 배우였지만[7] 레이건만한 미남은 할리우드에서도 흔치 않아서 정상급 스타가 아니었을 뿐 대중적 인지도는 있었고, 유명 여배우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8]
오히려 그 시절 레이건은 민주당에 입당하여 전미영화배우협회장을 지내는 등 정치활동에 집중했고 영화계 내 반공 운동의 선도주자를 달려 배우들의 사상을 FBI에게 일일이 보고하고 의회에 증인으로 적극적으로 나설 정도였다.[9] 성향도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 민주당에서 탈당하여 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원래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해리 S. 트루먼을 지지하는 등 민주당 성향이였으나 아내 낸시를 만난 후 점점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띄게 되어 아이젠하워닉슨을 지지하였다. 후에 그의 정치적 변화를 그는 '''"나는 민주당을 떠나지 않았다. 민주당이 날 떠났다"'''라고 여러 번 설명하기도 했다.[10] 또한 메디케어가 1961년에 시작되자 미국의 자유를 위협하는 법으로 사회주의에 가깝다며 비판을 하기도 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베리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는데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전국의 관심을 받았다.[11] 이 연설 하나로 레이건의 연설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골드워터 진영이 받은 후원금이 백만 달러에 육박했을 정도였다. 비록 골드워터는 그의 강경한 성향과 이를 겨냥한 데이지 걸 광고 때문에 낙선했지만, 레이건은 공화당 유권자들에게 큰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군 생활을 1937년 아이오와 주방위군 육군 제332기병연대 예비역 이병으로 시작, 같은 해에 예비역 육군 기병소위가 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육군 항공대로 전속되었는데, 복무 중 실제 전투에 참여하거나 파병된 적은 없고 주로 국방부 선전 영화를 만드는데 참여했다. 신분 분류 상 연예병사의 장교버전인 공보정훈장교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1945년 12월 9일에 전역했고 최종 계급은 육군 소령이다.
네이버 영화에 의하면 로널드 레이건은 총 22편의 영화에 출연했다고 한다.

2.3. 정치 입문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자리에 도전하면서 두 가지 공약을 내세우는데, 첫 번째는 '복지 혜택을 받는 백수들을 다시 일하게 만들겠다'와 두 번째는 당시 반전운동의 중심지였던 '버클리 대학교에서의 사태를 청소하겠다' 였다. 레이건은 당시 두 번 주지사를 지낸 민주당 정치인 팻 브라운을 꺾고 당선되었다.[12]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써 간접세 인상, 주 정부 규모 축소, 복지 개혁으로 재정흑자를 만들었고 버클리 대학교에서의 반전운동을 주방위군을 불러서 맞서기도 하였다. 이때의 강경대응으로 사망자도 발생했고 레이건이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에 동조하는 교수대표단과 험악하게 비난을 주고받는 장면이 생중계로 전파를 탔다.
이 시기 그의 모습은 '전통적인 미국을 지키는 투사'의 이미지였다. 항상 화나있고 상대방을 언변으로 압살하는 인상이었는데, 이런 결기서린 모습이 공화당 유권자들에게는 무너져가는 미국을 지킬 수 있는 보수의 아이콘으로 비춰졌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장기화에서 비롯된 히피 문화와 극단적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마오주의 또한 반기독교 마약남용 등 전통적인 미국에 반하는 움직임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었고, 그렇게 사회적 분열과 국력의 소모를 감내한 보람도 없이 월남의 공산화로 베트남전이 끝을 맺으면서 미국은 패배주의와 자국혐오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다. 또한 '로 대 웨이드(Roe v. Wade)'라는 역사에 남을 연방대법원 판결이 선고되어 낙태가 헌법적으로 허용되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드는 등 미국은 근본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겪고 있었다. 워터게이트로 정국 주도권을 완전히 헌납한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에게 친근한 언어와 강단있는 어조로 '''전통적인 미국을 회복하자'''고 부르짖는 레이건은 당연히 보수층에서 인기를 끌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레이건의 주 지지층의 입장과는 달리 좌파진영에서는 레이건을 시대정신에 무관심한 상류층 셀럽 출신의 기득권자로 비난했으며 폴리테이너라고 봤다. 보수층 중에도 레이건을 생각없이 말만 앞서는 위험한 인물로 경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또한 정치 스펙트럼으로 보면 레이건은 정신나간 호전광이라고 욕들어먹으며 낙선한 배리 골드워터의 보수주의를 이어받은 강경파 계보에 속했고 당대의 미국은 그런 지도자를 맞을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이런 요인 때문에 레이건은 대선경선 재수생이었고, 비록 주목을 끌기 시작한 대권 잠룡이기는 했으나 혜성처럼 등장해서 대통령이 된 인물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image]
1980년,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과 함께 선거 유세를 벌이는 레이건. 맨 오른쪽이 당시 부통령 후보였던 조지 H. W. 부시.
캘리포니아 주지사 임기 이후 당시 인기가 별로 없던 현역 대통령 제럴드 포드에게 도전하여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될려고 했다. 현역 대통령이 당 경선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13] 포드의 당선이 거의 확실시 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공화당의 보수표를 결집시키며 남쪽과 서쪽에서 승을 거두며 온건 보수 성향을 띄는 포드를 거의 이길 뻔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다. 그 후 포드 지지를 선언하면서 그의 선거 유세를 도왔지만, 포드는 지미 카터에게 패배하게 된다. 4년후 그는 다시 대통령의 자리에 도전했으며 공화당 경선에서 조지 H. W. 부시를 쉽게 꺾고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결국 포드 - 카터로 이어지는 시기동안 미국이 대내외적으로 거의 그로기 상태에 빠지자 레이건은 인기를 잃은 지미 카터를 쉽게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4. 대통령 재임기


대통령이 된 후 그가 펼친 정책은 미국과 적대하는 국가들에 대한 강경한 대외 정책과 더불어 통화긴축과 감세를 통한 경제 안정화, 그리고 슈퍼무기 개발이 그 주요 골자이다. 레이건은 소련에 대해서 강경한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물이 바로 스타워즈라고도 불리는 우주에서의 전쟁과 지금도 미국이 러시아 등을 견제하는 주요 수단인 미사일 디펜스이다.
사실 레이건은 집권 2기에는 대소 유화 정책을 펼쳤다. 소련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가 말이 통하는 것 같으니 과감하게 대소 강경 정책에서 유화 정책으로 돌아선 것이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며 강경하던 레이건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 개혁적인 모습을 보이자 소련을 비난하여 자극하지 않고 유화 정책을 펼쳤다. 비록 레이건이 상호확증파괴 개념을 극단적으로 싫어해 SDI에 집착해서 SDI 포기를 요구하는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에서 갈등이 있었지만 레이건은 SDI 기술을 소련과 공유하겠다며 미국과 소련이 SDI를 공유하면 핵무기가 무력화되어 결국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게 될 거라는 이상론을 주장했다(...) 사실 집권 2기 레이건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모든 핵무기를 폐기해야 된다고 수시로 주장했고 화성인이 침공하면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야 할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14]
비록 SDI 문제로 갈등이 있었지만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INF 협정을 체결했고 레이건은 소련을 방문해서 더 이상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베를린에서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장벽을 허무시오!''라는 명연설을 하기는 했지만 립서비스였고 레이건은 집권 2기에 냉전 승리를 위해 특별히 큰 공작을 하지는 않았다.
레이건의 이러한 성향은 리버테리안 경향이 강한 미국인들의 성격에 가장 걸맞는 대통령이였다. 베트남전 이후로 패배감에 사로잡혀있던 미국인들에게 미국에 대한 자신감과 그에 기반한 패권주의, 낙관주의를 불러일으켰다.
레이거노믹스로도 불리는 경제 정책의 경우 감세, 규제철폐, 작은 정부라는 3개의 핵심 가치를 내걸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큰 정부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신자유주의자였다. 그러나 레이건은 군비 지출로 재정적자를 늘렸고, 약속했던 것만큼 정부 규모를 줄이지도 못했으며 감세 정책도 그 자체만으로는 생각보다 큰 효과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정부 지출로 경기를 부양시켰다는 해석을 하는 입장에서는 레이건을 '군사적' 케인지언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갈리는데, 지출만 놓고보면 레이건은 케인지언이 맞다. 그러나 가령 폴 볼커의 정책만 보더라도 케인지언들이 싫어하는 통화주의에 기반한 개념이었다. 레이건이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 주력한 것이나 그가 큰 비중을 둔 공급 중심의 정책도 엄밀히 말하면 케인지언적인 접근은 아니었다. 어찌됐건, 그가 케인지언이건 아니건 간에 중요한 것은 당시 말라죽어가던 '''미국의 경제를 살렸다는 것'''. 오죽하면 좌파 진영에서도 '레이건이 실제로 정책적으로 기여한 것은 없지만 낙관주의와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레토릭 측면에서 큰 일을 했다'고 보는 이들이 있을 정도.
그나마 레이건이 60% 득표를 넘기지 못한 데에는 1982년에 발발한 포클랜드 전쟁 당시 레이건이 너무 노골적으로 영국편을 들자 이에 반발한 히스패닉 탓이 좀 있다. 먼데일은 미네소타에서 간신히 4천표 차(0.18%)로 이겼는데 히스패닉이 없었다면 뒤집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레이건은 미국 50개 주에서 모두 이길 뻔 했다(...) 당시엔 공화당을 파란색으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아서, 레이건은 "수영장 대통령"이란 별명을 얻었다.[15]
이런 그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1986년에는 레이건의 3선을 노리고 대통령 출마 3번 이상을 금한 미국 수정 헌법 22조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공화당 의원들에 의해 하원에 제출되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었고 레이건 본인도 개헌에는 찬성하지만 자신은 그 혜택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나 레이건 집권기는 고위공직자들의 만연한 부패, 범죄가 판치는 길거리로 얼룩져있기도 하였으며, 심각한 재정적자와 양극화, 러스트 벨트의 형성이 시작되는 등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집권 2기에는 이란 콘트라 사건으로 의회와 특별조사위원회 등 6개의 수사기구가 백악관을 정조준했으며 레이건의 치매 전조 증상으로 국정장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현직 부통령인 조지 H. W. 부시는 공화당 차기 대선주자 경선에서도 당내 타 후보들에 밀려 부진하다가 역전승으로 후보지명을 거머쥔 것이었으며, 대선 본선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매사추세츠의 젊은 마이클 듀카키스에게 초반에 12%의 지지율 우세를 허용하는 등 고생 끝에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 중에 암살 시도를 겪었다. 1981년 3월 30일 호텔에서 나서던 도중 존 힝클리 주니어가 레이건을 향해 탄환을 6발 사격했다. 존 힝클리 주니어는 곧바로 시크릿 서비스 경호원들과 경찰관들에게 제압되고[16] 레이건은 바로 차량에 옯겨졌는데, 직격하지는 않았지만 방탄차에 튕긴 총알에 맞았고 현장에 있던 백악관 대변인 제임스 브래디와 시크릿 서비스 경호원 팀 매카시, 경찰관 토마스 델라한티 3명도 총상을 입었다.[17]
레이건의 부상이 확인되자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탄환 제거 수술을 받았다. 고령의 나이로 위험할 수 있던 상태였는데 탄환이 폐를 살짝 건드린 정도라 부상에서 회복해 테쿰세의 저주를 처음으로 깬 대통령이 되었다. 총격을 당한 다른 3명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제임스 브래디는 이마에 직격해 뇌가 파열되어 하반신 마비와 정신착란 증상으로 평생을 훨체어 신세로 살다가 2014년 8월 4일 74살 생일을 얼마 안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18] 회복 후 연설 도중에 총알이 빗나갔다며 농담을 할 정도로 담대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고령인 몸에 중상을 입고 가까스로 살아난 탓에 이 사건 이후에 급격히 쇠약해졌다고 한다. 한동안 산소통을 백악관에 상비할 정도였고 집무 중에 피를 토한 적도 있다. 고령에 마취를 동반한 수술이 치매 증세를 가속화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큰 충격과 후유증을 남긴 암살미수를 일으킨 존 힝클리 주니어를 구속한 후 철저하게 조사했는데, 어이없게도 배후가 없는 건 물론이고 대통령을 살해하는 데 동기부여가 될만한 정치적 이유도 없었다. 단지 '''대통령을 저격하면 자신이 동경한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가 자기에게 고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19] 희대의 과대망상이자 관심종자. 조디 포스터가 미성년자 매춘부로 나온 영화 택시 드라이버[20]의 영향을 받은 듯. 원래라면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었겠지만 중증 정신병자로 판명나서 처벌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완치판정시 석방이 가능한 무기한 치료감호를 선고했다.

2.5. 은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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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공식석상에서 찍힌 마지막 사진
1996년 7월 당시 모습
2000년 2월 89세 생일 당시 아내 낸시 여사와 함께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 레이건은 각종 재단을 세워 후원활동을 하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1992년에 연설 중에 반핵주의자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1994년에 찾아온 알츠하이머 병은 그의 인격을 서서히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1992년 말에 이를 짐작케 해주는 전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82세 생일 파티에 참석한 마가렛 대처에게 똑같은 말을 하면서 계속 건배를 하질 않나, 같은 제스쳐를 계속 취한다거나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해내지 못한다거나...

친애하는 미국민 여러분!

나는 최근에 본인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수백만 미국인들 중의 한 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낸시와 나는 이 사실을 우리의 개인적인 비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여러 사람들에게 알릴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예전에 낸시는 유방암을 앓은 적이 있었고 나는 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이 병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결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검사를 받았기에 기뻤습니다.

그들은 암의 초기에 치료를 받았고 정상적이고 건강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이러한 것을 여러분들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내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알림으로써 이 병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이 유발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은 괜찮다고 느끼는 지금, 나는 신이 나에게 준 이 땅위에서의 나머지 인생을 지금까지 항상 해온 일들을 하면서 지낼 것 입니다. 나는 내 인생의 여정을 사랑하는 아내 낸시와 내 가족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나는 지지자들과 함께 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내가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병이 점차 심해지면 가족들이 힘든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내 아내 낸시를 이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구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가 오면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그녀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굳게 맞설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일할 수 있었던 큰 영광을 준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언제일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집으로 나를 부를 때, 나는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조국의 장래에 대한 영원한 희망을 가지고 떠날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의 황혼기로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앞날에는 항상 밝은 아침만이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친구들, 신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결국 레이건은 그 해 8월 자신이 치매 진단을 받게 되었음을 자필 편지로 국민들에게 알릴 수 밖에 없었다. 레이건의 말년은 여느 치매 환자와 같았고 어찌 보면 더 심각한 증상까지 보였다. 워낙 고령에 정신적 문제를 수반하는 건강문제가 평소에도 있었던 탓에 현대 미국 보수주의 진영과 공화당의 정신적 지주인데도 생각보다 퇴임 후 활동은 적었던 이유이다. 치매 진단 직후 아내 낸시 레이건 여사는 남편의 지병을 보고 알츠하이머 연구 재단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레이건 대통령이 알츠하이머 투병을 하며 가장 슬퍼했던 때는 더 이상 을 탈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었을 때라고 한다. 생애 단락에서 나왔듯 그는 승마를 좋아해서 유년기를 일리노이 주의 드넓은 평원에서 말타면서 보냈고, 이후에도 틈틈히 말타기를 즐겼는데 더 이상 못하게 되었으니... 결국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21]
말년에 가서는 병이 악화되어 거의 어린아이 수준의 인지능력으로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본인미국 대통령이었던 것도 거의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고 낸시 여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변했다. 낸시 여사는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곤 문안객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2001년 CNN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내 남편은 사람들이 옛날의 레이건으로 기억해주길 바랄 것이다."고 할 정도면 상태가 꽤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03년 겨울 이후로는 걷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깨어있는 때도 드문 상태일 정도로 병세도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나중에는 그토록 사랑했던 낸시 여사조차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도 임종 직전에는 낸시와 눈을 마주치며 교감한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로널드 윌슨 레이건. 전직 유명 영화배우 출신으로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에 최고령의 나이로 올랐지만 옛 미국이 숭상했던 전통적인 가치에 뿌리를 둔 젊은 낙관주의로 가득찼던 인물. 그가 어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그의 집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 2004년 6월 6일,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한 뉴욕 타임스 기사.

이후 2004년 여름, 자택에서 만 93세 4개월을 일기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기준으로는 존 애덤스 2대 대통령을 제치고 역대 대통령 중 최장수였다.[22] 생전에는 장로회 신자였지만 장례식은 미국 워싱턴 국립 성공회 성당에서 치뤄졌다.
그의 알츠하이머 치료를 위해 이제껏 낙태를 결사 반대해 온 레이건 측이 냉큼 태아를 연구재료로 이용하는 것에 찬성했다. 마이클 무어가 이것을 비꼰 바 있다.[23] 다만, 당시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조지 W. 부시 측은 이를 반대했는데, 이로 인해 낸시 레이건과 두고두고 서먹한 관계가 되었다는 비화가 있다. 낸시 레이건은 레이건의 치매 간병을 그가 눈을 감을 때까지 손수 도맡은 것으로 유명했다.
미국의 최고령 전직 영부인이었던 낸시 레이건 여사도 장수하였다. 남편 사망 이후에는 크게 언론에 노출되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다 2016년 3월 6일, 94세를 일기로 울혈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3. 평가


현대 미국 보수주의신자유주의 체제를 상징하는 인물인만큼 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평가는 견해에 따라 크게 갈리는 편으로, 명과 암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통령으로 자주 손꼽힌다.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정치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이 장벽을 허무시오(Tear down this wall)" 연설 등을 비롯해 냉전 종식의 주역이라는 점과 오늘날의 강력한 미국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훌륭한 소통능력을 보여준 대통령이라는 점을 들어 옹호하지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전문가들은 지나친 군비 확장, CIA를 앞세운 제3세계의 정치적 혼란 초래, 사회보장제도의 축소, 전통적 가치들의 복원을 위시한 기독교 근본주의 확산과 그로 인한 폐해 등을 들어 그를 비판한다. 경제학자들은 1970년대말부터 80년대초까지 20%대에 달하던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때려잡고 물가를 안정시킨 업적을 높게 평가하지만 동시에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저소득층의 큰 증가는 실책으로 평가된다.
백인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선 현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최고로 사랑받는 대통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2차 대전 이후 집권한 대통령 인기 조사에서는 거의 1등, 못해도 2등은 따놓은 당상이라 할 정도. 존 F. 케네디 역시도 인기 있는 대통령이긴 하나 미국 내에서는 레이건의 인기가 압도적이다. 역시나 가장 큰 이유는 냉전을 종식시켰다는 것이지만 레이건에게서 풍기는 긍정적인 분위기와 그의 재치있는 연설, 뛰어난 언변 능력, 대중 커뮤니케이션에서 보여준 국민과의 공감 능력 때문이다. 공화당 성향 미국인들에게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으며, 당내에서는 현대 미국 공화당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24] 그리고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레이건에 대해서 호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에 대중적인 지지를 폭넓게 받는 편이기도 하다. 정책적 지지 여부를 떠나 대중 스피치에서 보여준 그의 소통 능력과 공감 능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2009년 2월 전화 인터뷰를 통해 진행된 USA 투데이/갤럽 인기투표에서는 링컨과 국부 워싱턴, 케네디를 뛰어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25]
그러나 흑인히스패닉을 위시한 유색인종, 극단적 우파를 제외한 X세대와 Y세대와 같은 적령기 세대들 저소득층, 이민자, 그리고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 사이에서의 평가는 좋지 않은데, 이란 콘트라 사건의 장본인으로서 CIA가 코카인을 들여와 미국 사회에 마약을 만연하게 만들고서는 마약과의 전쟁을 벌여 흑인 사회의 게토화를 더욱 촉진시켰으며 레이거노믹스로 감옥이 민영화되었으며 보석금 제도가 자리잡아 빈민 유색인들의 재소율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는 등, 많은 유색인들에게 레이건은 큰 비판을 받고 있다. 후술되는 NWA의 경찰 폭력 풍자곡 Fuck Tha Police나 래퍼 킬러 마이크의 디스곡 '레이건(Reagan)' 등은 그러한 흑인 사회의 목소리를 잘 보여준다. 또한 미국의 전통적 가족윤리를 내세우며 소위 '뒷골목 낙태'와 에이즈 창궐 등에 큰 책임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3.1. 긍정적인 평가



3.1.1. 미국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다


"많은 미국인들은 6, 70년대의 혼란상과 점점 비대해지는 정부의 규모가 통제범위를 넘어섰다고 느꼈습니다. 레이건은 그 사람들이 원하던 것을 잘 짚어냈어요. 언제부턴가 미국에서 사라졌던 투명성과 낙관주의, 역동성과 기업가정신을 그들은 원했던 거죠."

- 버락 오바마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시작으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베트남 전쟁과 히피 문화의 급격한 확산,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살인사건 중에 하나인 샤론 테이트 살인사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사임, 전임자인 지미 카터의 무능, 그리고 오일 쇼크 까지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던 당시 미국의 정국을 빠른 속도로 안정시켰으며 미국의 국력을 다시금 전세계에 과시했다. 적어도 뛰어난 대국민 소통 능력을 가졌다는 것만큼은 미국에서 좌우를 안 가리고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이봐, LBJ, 오늘은 몇명의 젊은이를 죽였나?"라는 구호가 유행하고, 현직 대통령이 사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이 자기 국민들에게 "지금 경제가 어려운건 너희들의 의식이 썩어서 그렇다"고 호통치는 혼란스러웠고 절망적였던 6, 70년대를 레이건은 토마스 페인의 말마따나 "우리(미국인)가 세상을 다시 만들 수 있다"라는 낙관주의로 극복해내며 어둡고 혼란스러웠던 6, 70년대 암흑기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80년대를 열었다.

3.1.2. 냉전 종식에 큰 역할


레이건 독트린을 통해 소련을 고립시켜 데탕트 무드를 유도하였고, 이는 평화적인 냉전 종식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3.2. 부정적인 평가



힙합 그룹 Run The Jewels의 멤버 Killer Mike가 로널드 레이건을 디스하는 곡인 "Reagan".
'''가사'''
[1] 당시 미국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해 경제가 악화되어 상당한 피해를 받고 있었는데, 레이건은 이때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악화된 미국 경제를 반대로 선거 운동의 발판으로 삼아 유권자들 사이에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다.[2] 취임 기준 만 69세 349일, 이 기록은 2016년 도널드 트럼프에게 깨졌으며, 트럼프 또한 4년 후 조 바이든에게 깨졌다.[3] 525명 VS 13명 이라는 엄청난 차이로 이겼다. 루스벨트는 1936년 선거에서 레이건보다 적은 523명을 확보했지만 공화당 후보가 불과 8명을 획득했기 때문에 515명 차로 압승했다.[4] 레이건 대통령에게 붙은 이 별명은, 명료하고 유창한 언변을 활용한 연설을 앞세워 평소에도 기자회견을 꺼리지 않고 자주하고, 국민들과의 소통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의회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대화하려고 했던 자세에 힘 입은 바이기도 하다. #[5] 청년 시절 딕슨의 로웰 파크에서 인명구조대로 일하면서 6년간 총 77명의 사람을 구했는데, 말년에 알츠하이머로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도 자신이 당시 사람들을 구조한 기억은 자랑스럽게 회고했다고 한다.[6] 경제학, 사회학 복수전공이였는데 학점 평균이 C였다고 한다. 유레카 대학교는 레이건을 자교 홍보용으로 잘 써먹고 있다.[7] 유일한 예외라면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B급 반공영화 《전쟁 포로》 정도이며, 레이건 DVD 박스셋이 미국에서 나온 적이 있는데 주연작이 한 두개 밖에 없었을 정도다.[8]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 대신 캐스팅 될 뻔도 했었다. 만약 캐스팅되었더라면 대통령 레이건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9] 배우 시절의 레이건을 단순히 삼류배우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 동료 영화인들을 휘어 잡을만한 정치력과 언변이 됐다는 소리다.[10] 민주당의 정치적 성향은 트루먼이 퇴임한 이후에 많이 좌경화되었다.[11] 연설문은 레이건 본인이 쓴 것이었다. 당시 레이건은 골드워터의 지지연설을 하는 유일한 조건으로 "연설문에 간섭하지 마시오"를 요구했다. 한마디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 다 하겠다고 한 것.[12] 팻 브라운의 아들인 제리 브라운은 로널드 레이건의 두 번의 주지사 임기가 끝난 뒤에 34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재임했다. 그 후 다른 일을 하다가 2011년에 다시 49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재임했다.[13] 현역 대통령에게 경선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물다.[14] 그래서 극단적인 강경파도 아니었던 닉슨도 집권 2기의 레이건이 지나치게 소련에 유화적이라고 레이건을 비판하기도 했다.[15] 공화당이 적색, 민주당이 청색으로 정착된 건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부터다. 그전까지는 공화당을 청색, 민주당을 적색으로 표시했는데, 레이건 행정부 때부터 언론에서 공화당을 적색, 민주당을 청색으로 표시하기 시작했고 2000년 대선 때 미국의 언론사들이 어떠한 합의를 하지 않았음에도 색상 표기를 일치시켰던 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16] 당시에는 힝클리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망상으로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상태였기에 입막음용으로 살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둘러싸고 경계해야했다.[17] 매카시 요원은 레이건 대통령이 방탄차 안으로 무사히 대피할 수 있도록 레이건을 몸으로 가렸는데, 이는 전세계에서도 몇 안되는 근접 경호사례로 남아있다. 영상에서 회색 정장을 입고 있다가 총맞고 그 충격으로 튕겨져나갔다가 바닥에 쓰러져 부들거리는 경호원으로 시크릿 서비스 경호요원들은 보통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존본능을 억제하고 경호대상을 지키도록 훈련받지만 아무리 숙달된 특수 요원들이라도 인간인 이상 총이 날아오는등의 급작스러운 상황에서는 몸을 웅크려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거나 피하기 마련이다. 총성이 울린 직후 힝클리가 레이건을 마음놓고 저격할 수 있을 만큼이나 전방의 경호 인력들이 다 비켜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저런 상황에서도 생존본능을 억누르며 임무에 충실한 것은 초인이 아닌 이상 힘들다.[18]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총기 규제법안이 빌 클린턴 정권에서 통과되는데, 통칭 '브래디 법'이라고 부른다.[19] 훗날 2013년 조디 포스터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스스로 레즈비언이라 커밍아웃 함으로써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셈이 되버렸다.[20] 주인공 트래비스 비클(로버트 드 니로 분)은 미성년자 매춘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 분)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편, 사회에 대한 분노와 상류층에 대한 열폭,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던 여인 베시가 자기를 차버린 것에 대한 원망 등의 이유로 베시가 지지하던 대통령 후보 팰런타인을 저격하려다 실패한다. 보면 알겠지만 대통령 후보를 죽이려고 한 거랑 조디 포스터랑 딱히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이후 트래비스는 아이리스가 있는 매춘굴에 쳐들어가 갱단들을 죽이고 아이리스를 구출해 본의아니게 영웅이 되긴 하지만, 정작 아이리스는 매춘부 생활에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고 있었고 트래비스를 사랑한다는 암시는 영화 어디에도 없다. [21] 사실 퇴임 후에도 말타기를 하다 낙마를 하여 크게 다친 경험이 있다.[22] 이후 최장수는 간발의 차이로 2006년 겨울에 93세 5개월로 사망한 제럴드 포드에게 넘어갔다가 아버지 부시가 2017년, 이 기록을 넘겼다(확실한 시기는 2018년 6월 12일로 아버지 부시의 생일). 그리고 지미 카터가 2019년 생일(10월 1일)을 보내어 95세가 된 관계로 레이건은 4번째로 장수한 미국 대통령. 5번째는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와 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 참고로 90대 이상을 산 실제 2번째 미국 대통령은 후버.[23] 무어 曰 '''"태아고 나발이고가 문제냐? 기퍼(레이건의 별명)가 죽게 생겼는데!"'''[24] 흔히 공화당 위원들이 공화당을 지칭할때 "위대한 레이건의 공화당"이라고 지칭할 때가 많으며 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레이건의 선거 구호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자신의 것으로 쓰기도 했고, 취임식 당일 레이건과 링컨의 성경을 사용해서 선서하였는데 이 두 인물들이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기 때문이었다.[25] 이 투표에서 케네디와 레이건은 각각 민주당, 공화당 성향의 투표자들에게 몰표를 받았으며 정치 성향에 따라서 지지도가 극적으로 갈렸다. 워싱턴, 프랭클린 루즈벨트, 특히 링컨의 경우는 지지도에선 밀렸지만 정치 성향은 물론 세대 차이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모든 계층에서 고르게 고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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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nald Reagan]
Our government has a firm policy not to capitulate to terrorist demands
우리 정부는 테러리스트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제도가 있습니다

That no-concessions policy remains in force
그런 제도는 물론 아직도 유효하고요

Despite the wildly speculative and false stories
추측에 근거한 거짓 소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About arms for hostages and alleged ransom payments
인질이랑 무기를 바꿨다거나 몸값을 지급했다는

We did not, repeat, did not trade weapons or anything else for hostages
우리는 정말, 다시 강조하지만 정말로 인질을 위해 무기나 어떤 것도 바꾸지 않았고

Nor will we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Verse 1]
The ballot or the bullet, some freedom or some bullshit
총알이나 투표권이나, 자유를 얻든가 개소리를 듣든가

Will we ever do it big, or keep just settling for little shit
계속 작은 것에 안주하면 큰 것을 얻을 수 없어

We brag on having bread, but none of us are bakers
빵이 있다고 자랑하지만 굽는 사람은 없어

We all talk having greens, but none of us own acres
배춧잎이 있다고 해도 땅을 가진 사람은 없어

If none of us on acres, and none of us grow wheat
땅을 사진 사람도, 농사하는 사람도 우리 중에 없으면

Then who will feed our people when our people need to eat
우리가 배고플 때 누가 우릴 먹여 살리겠어

So it seems our people starve from lack of understanding
그렇게 우리는 이해의 부족으로 굶주리고 있지

Cause all we seem to give them is some balling and some dancing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것은 농구선수와 춤밖에 없으니

And some talking about our car and imaginary mansions
우리의 차나 상상 속의 저택 이야기나 하지

We should be indicted for bullshit we inciting
우리가 뱉는 개소리 때문에 기소당할만해

Hand the children death and pretend that it's exciting
아이들에게 죽음을 건네고 멋진 일인척하지

We are advertisements for agony and pain
우린 고통을 광고하고 있어

We exploit the youth, we tell them to join a gang
젊은 아이들을 착취하고 갱에 들어가라고 말하고 있어

We tell them dope stories, introduce them to the game
약 파는 이야기를 해주며 그런 삶으로 인도하지

Just like Oliver North introduced us to cocaine
Oliver North가 우리에게 코카인을 가져다준 것처럼

In the 80's when the bricks came on military planes
80년대에 군 비행기에 실어서 말이야



[Ronald Reagan]
A few months ago I told the American people I did not trade arms for hostages
몇 달 전 미국 국민들에게 저는 무기와 인질을 바꾸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My heart and my best intentions still tell me that's true
제 가슴과 제 마음은 그게 사실이라고 아직도 말하지만

But the facts and the evidence tell me it is not
진상과 증거에 의하면 아니라는군요



[Verse 2]
The end of the Reagan Era, I'm like 'leven, twelve, or
레이건의 시대가 끝날 때 나는 열한 살이나 열두 살이었지

Old enough to understand the shit'll change forever
모든 것이 변할 거라는 걸 이해할 수 있는 나이였어

They declared the war on drugs like a war on terror
그들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처럼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

But it really did was let the police terrorize whoever
사실은 경찰에게 원하는 누구든 공포에 떨게 할 권리를 부여한 것이었지

But mostly black boys, but they would call us "niggers"
대부분은 흑인 남자아이들이었지만 그들은 우릴 '깜둥이'라고 불렀고

And lay us on our belly, while they fingers on they triggers
우릴 엎드리게 해놓고 그들의 손가락은 방아쇠 위에 놓았지

They boots was on our head, they dogs was on our crotches
그들의 신발은 우리 머리 위에 두고 개들은 x을 물고

And they would beat us up if we had diamonds on our watches
시계에 다이아가 박힌 손목시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릴 두들겨 패곤 했지

And they would take our drugs and money, as they pick our pockets
우리의 마약과 돈을 가져가고 주머니를 털었어

I guess that that's the privilege of policing for some profit
그게 바로 돈 벌려고 하는 경찰직의 특권이겠지

But thanks to Reaganomics, prisons turned to profits
레이건의 경제 정책 덕분에, 감옥은 영리시설로 변했지

Cause free labor is the cornerstone of US economics
미국 경제의 초석은 자유민의 노동이잖아

Cause slavery was abolished, unless you are in prison
노예제도가 없어졌지만, 감옥에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You think I am bullshitting, then read the 13th Amendment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하면 헌법 13조를 읽어봐

Involuntary servitude and slavery it prohibits
강제노동과 노예제도는 폐지됐잖아

That's why they giving drug offenders time in double digits
그러니까 마약사범들이 두자릿수 형을 받는 거지

'''Ronald Reagan was an actor, not at all a factor'''
'''Ronald Reagan은 배우였지 전혀 인자한 사람이 아니지.'''

Just an employee of the country's real masters
그도 그저 이 나라의 진짜 주인들의 직원일 뿐이지

Just like the Bushes, Clinton and Obama
부시 대통령 둘이나 클린턴이나 오바마 같이

Just another talking head telling lies on teleprompters
프롬프터에 써 있는 걸 읽는 떠드는 대가리 중 하나일 뿐

If you don't believe the theory, then argue with this logic
내 이론을 믿지 않는다면 이걸 반박해 봐

Why did Reagan and Obama both go after Qaddafi?
왜 Reagan이란 Obama둘 다 Qaddafi를 쫓았지?

We invaded sovereign soil, going after oil
우린 남의 나라를 침략해 석유를 찾지

Taking countries is a hobby paid for by the oil lobby
나라를 빼앗는 것이 석유 로비스트들이 후원하는 우리의 취미지

Same as in Iraq, and Afghanistan
이라크랑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마찬가지

And Ahmadinejad say they coming for Iran
Ahmadinejad는 그들이 이란을 침략할 거라 하지

They only love the rich, and how they loathe the poor
그들은 부자들만 사랑하고 빈민은 증오하지

If I say any more they might be at my door
내가 더 말을 한다면 내 문 앞에 나타날지도 몰라

(Shh...) Who the fuck is that staring in my window
(쉿...) 내 창문 안을 쳐다보는 저거 누구야

Doing that surveillance on Mr. Michael Render
Michael Render[74]를 감시하는 저 사람 말이야

I'm dropping off the grid before they pump the lead
나를 죽이기 전에 이곳에서 사라져야지

I leave you with four words: '''I'm glad Reagan dead'''
한마디만 하고 갈게: '''나는 Reagan이 죽어서 기뻐'''



Ronald Wilson Reagan
Ronald Wilson Reagan

Ronald Wilson Reagan
Ronald Wilson Reagan

Ronald (6) Wilson (6) Reagan (6)
Ronald (6) Wilson (6) Reagan (6)

Ronald (6) Wilson (6) Reagan (6)
Ronald (6) Wilson (6) Reagan ('''666''')

3.2.1. 인권


니카라과에서 테러와 학살을 자행하던 우익 민병대 '콘트라'를 몰래 지원한 이란 콘트라 사건이 대표적이지만 임기 초에도 엘 살바도르 군을 지원해 800여 명의 시민이 학살당하는 걸 그대로 방조하거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정권을 지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남아프리카의 인종주의 정권에 대한 제재 법안이 상하원을 통과하자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물론 미 의회는 다시 투표해서 통과시켰다.
자국민의 인권도 후퇴시킨 측면이 있는데, 안보를 이유로 미국인에 대한 도감청을 늘린 점이나 마약과의 전쟁을 하면서 흑인 사회를 게토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 점이 그것이다. '''정작 CIA가 비행기로 코카인을 실어와 흑인 사회를 현재의 마약소굴로 타락시켜버린 것도 레이건이라''' 앞뒤가 안 맞기에 더 욕을 먹는다.
또한 교도소를 민영화해버렸다. 정부 지출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한 건데 재정 측면으로는 효과가 어느 정도 있었던건 사실이나 문제는 감옥의 주목적인 '교정'은 완전히 실패해버렸다. 사기업이 감옥을 운영하다 보니 열악한 수감환경이 큰 문제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수용자가 없어서 감옥이 망하면 안되니까 경범죄를 저질러도 감옥으로 집어넣는 풍조가 생겨났다.''' 그리고 갱단이 교도소를 장악해도 막지도 못했으며 그 결과로 경범죄로 들어간 범죄자가 갱단에 가입한 뒤 범죄를 제대로 배워 중범죄자가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또한 마약과의 전쟁과 맞물려서 마약 관련 사범들의 수용률이 대폭 증가했다. 물론 그 주요 대상자는 만만한 흑인이나 히스패닉. 이는 당연히 재범율 증가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현재 미국은 교도 업무 전반이 민영화된 탓에 '''보호관찰업체'''라는 이상한 회사가 생겼는데 이들이 하는 주요 업무는 용의자를 최대한 실형이 나오도록 판사에게 뇌물을 먹이는 등 형기를 조작해서 어떻게든 징역을 살린다. 그런데 당사자인 용의자들이 징역형을 선고받으면 되려 어떻게든 석방시켜주게 한다. 이게 아이러니해보일 수도 있지만 보호관찰회사가 용의자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보석금'''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어떻게든 보석금을 뜯어서 자기들 똥배에 기름칠하고 있는게 바로 미국의 보호관찰회사이다. 어떻게든 징역형을 선고받게 만들고 징역형을 선고받은 용의자에게 어떻게든 보석금을 유도한다. 이 때문에 보호관찰회사는 매일같이 돈벼락을 맞고 살고 있다. 쌓이는 돈이 장난이 아니다.
마약관련 초범자가 중형을 살고 나와서 완전히 인생이 망가져 손도 못쓰는 마약중독자로 추락하거나 경범죄 저질렀다가 감옥가서 흉악범이 돼서 나온다거나 등등... 거기에 80년대까지만 해도 일선 경찰력이 많이 썩어있던 상황이라 소위 dirty cop들이 비백인 인구를 대상으로 온갖 구실을 잡아 체포하거나 증거를 조작하는 일도 꽤 있었다. 경찰들이 유색인종 때리고 구타하고 쏴죽이고 불법수색한다고 "경찰 좆까"를 부르짖는 N.W.AFuck Tha Police가 발매된게 1988년으로, 이런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당시 유행하던 HIV/AIDS에 대한 대응은 방치에 가까웠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처음 검출되어 유행하기 시작한 에이즈를 두고 레이건 정부는 다분히 호모포비아적인 태도를 취하며 거진 아무 관심을 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백악관 대변인은 한 기자가 에이즈 문제의 정부 지침에 대한 질문을 하자 "혹시 기자님이 에이즈에 걸리기라도 한건지요?"라며 조롱했을 정도로 의도적인 방치를 했다. 이로 인해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성교육의 부재 및 헤로인 주사 바늘 돌려쓰기 등으로 인해 저소득층이 많은 흑인히스패닉 등 유색인 커뮤니티에게도 매우 큰 타격을 불러 왔다. 키스 해링, 안소니 퍼킨스, 이지-E, 아이작 아시모프 등 미국의 많은 문화예술인들도 에이즈에 스러져 갔다. 레이건은 그나마 정권 말기에 가서야 잠깐이나마 관심을 보였고 그때까지는 공식석상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3.2.2. 부패 사건들과 법치주의 훼손


레이건 정권의 모든 범죄자들을 모아놓고 찍은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모여있는걸 보지 못했어! 그래, 지금까지 225명이나 되지. 225명의 레이건 정권 사람들이 사임했거나, 잘렸거나, 체포됐거나, 기소됐거나, 유죄평결을 받았거나, 법이나 공직자 윤리규정을 어겼더군!

- 조지 칼린

레이건 재임기 동안 행정부의 여러 부패 사건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주택도시개발부의 장관을 비롯한 공화당 인사들이 빈민주택공공사업을 자기들과 친한 사업가들에게 용역을 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은 역대 최대의 주택도시개발부 스캔들로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은 기소위기를 맞고, 내무부 장관은 무려 24건의 중범죄로 실제로 기소되었다. 이 밖에도 환경보호청, 국방부 등에서 고위공직자들이 자금을 유용하거나 기밀을 빼돌리는 등으로 사익을 취했다.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레이건 본인은 '난 모르는 일'이라고 죄다 선을 그었다.
또한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콘트라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때 레이건은 자신은 아는게 전혀 없다고 조사관들 앞에서 증언하였고 공개적으로도 거듭 그렇게 주장하였으나 주범인 올리버 노스 중령은 회고록에서 레이건이 모든 것을 알았다고 썼다. 이 사건에 대해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와 본 문서의 군사 외교분야 단락을 참고.
물론 레이건 본인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운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레이건의 '무관심함'이 정권 내에서 부정부패가 일어나는 것을 방치했다고 본다. 특히 고령에 건강도 좋지 않았으며, 정권 말기로 갈수록 치매의 전조도 나타나 의사소통을 잘 못하거나 국정을 파악하지 못하는 일도 잦았다.

3.3. 그 외의 평가



3.3.1. 정치적 분야



3.3.1.1. 긍정적 평가

그 자신은 매파였지만 당내 온건 보수들을 포용하려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부통령으로 제럴드 포드를 지명하려고 하기도 했으며[26], 그게 불발되자 역시 온건파인 조지 H. W. 부시에게 부통령을 맡겼다. 결과적으로 표의 확장성 측면에서 본인도 이득을 봤지만, 레이건의 반대파를 끌어안으려는 행보는 미국인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줬다.
당장 현대 공화당은 레이건의 정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선 경선 토론때마다 대부분의 후보들이 '''"내가 바로 진정한 레이건의 후계자"'''라고 서로 누가누가 더 레이건을 존경하는지 경쟁을 벌인다. 그만큼 레이건이 제시한 보수주의의 방향;"미국은 신이 점지한 특별한 국가다"라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확신, "우리는 뭐든 해낼 수 있다"는 낙관주의, "큰 정부를 믿지말라"는 신자유주의는 레이건 정부이래 30여년 동안의 미국 보수주의의 진로를 결정지었으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동안 결정지을 것이다.
또한 낙태 반대를 거듭 천명하고 전통적 사회가치를 수호하겠다는 입장을 강경하게 하면서 기독교세를 보수우파 쪽으로 대거 전향시켰다. 그 덕에 현재 미국의 바이블벨트는 죄다 공화당 강세 지역. 이렇듯 레이건이 규정해놓은 새로운 보수주의는 세계적인 뉴라이트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당장 45대 미국 대통령이자 공화당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던 도널드 트럼프만 해도 레이건 신드롬의 수혜자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인데, 트럼프 캠프의 상징인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는 로널드 레이건이 사용한 슬로건을 그대로 다시 차용한 것이었다. [27]

3.3.1.2. 부정적 평가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는 공적 의무보다 사적 이익을, 공공선보다 정경유착을, 노동과 가족보다 부와 명성을 중시했습니다. 80년대는 탐욕과 이기심, 무책임과 무절제, 방기의 전성기였습니다."

- 1991년 빌 클린턴

레이건은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을 정치화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또한 수정헌법 개정을 통한 낙태 금지, 학교에서의 기도 부활 등을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등 정책적으로도 이를 위협했다. 종교와 정치를 섞는 순간 골아픈 일이 일어나는데, 더이상 정치가 토론이나 타협의 영역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딴 나라들처럼 종교로 치고박고 하지 말자는게 토마스 제퍼슨이 수정헌법 1조를 쓴 이유다.
그 외에는 언행이 너무 교양없고 무식하다는 공격도 받았다. 특히 대통령이 되어서도 점성술사 조앤 퀴글리의 조언에 따라 공식일정을 바꾸고 자신이 본 영화의 내용과 현실을 착각하거나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여러번해서 측근들을 당황하게 만드는게 예사였다. 가령 ICBM은 발사 뒤에 취소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화성인의 침공에 맞서 소련과 미국이 힘을 합쳐야 할거라고 걸핏하면 이야기하는 통에 콜린 파월을 아연실색하게 하다못해 "또 저러시네"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만들어버렸다.
그의 대국민 소통정책도 한국어로 '쇼통'이라고 비난받았는데 그도 그럴게 레이건 정부의 백악관 공보실이 제작해 배포한 영상은 무려 이전 정권 다섯 개 분량을 다 합친 것보다 많았으며, 레이건 본인 또한 이 영상들을 제작하고 그걸 찍기 위해 연기하는데에 상당한 시간을 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레이건이 실시한 교도소 민영화로 인해 한 번 징역을 살게 되면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 이걸 올리버쌤이 레이건이라고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정책 중 교도소 민영화를 비판한 부분이 있다.
이 비판에 의하면 별로 그럴싸하지도 않은 이유[28]로 일단 체포부터 하고 본 뒤 벌금이나 징역을 살게 한다. 징역의 경우 실제로 수감시키기 보다는 보석금을 노리고 징역을 선고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로 인해 민간 보호관찰업체는 날이면 날마다 돈이 쌓이는 반면 이런 트랩에 걸린 서민들은 빚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보호관찰업체 자체가 교도소를 민영화시키기 때문에 생기는 회사로, 만약 교도소가 국영화 되어 있다면 보호관찰회사가 생기는 게 아니라 미합중국 법무부가 보호관찰을 담당하게 된다.

3.3.2. 군사, 외교적 분야



3.3.2.1. 긍정적 평가

레이건은 강경 보수 성향답게 집권 1기에는 군사 초강경파에 속한 인물이었지만 2기에는 유화파였다. 레이건의 군비 강화 정책은 소련과의 군비 경쟁을 불러일으켜 안 그래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침체되어가던 소련의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게 해 결국 동구권 붕괴를 불러왔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이런 평가는 특히 동유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2011년에 레이건 탄생 100주년 기념 당시 미국에서는 조촐한 행사로 차분하게 기념한 반면 동유럽에서는 수도에 동상을 세우거나 그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드는등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다.
2005년에 공개된 기밀문서들에 의하면, 레이건은 잘 알려진 고르바초프와의 관계 외에도 그의 전임자들인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그리고 체르넨코와의 개인적인 대화에 매우 신경을 많이 썼다. 이를 바탕으로 단순한 '냉전 전사'(Cold Warrior)가 아닌, 대화로 냉전을 풀어가려는 레이건의 모습을 재탐구하는 책들이 씌여졌다. 관심이 있다면 자세한것은 제임스 그레이엄 윌슨(James Graham Wilson)이 지은 《즉흥적인 대화의 승리》(The Triumph of Improvisation)와 제임스 맨(James Mann)이 지은 《로널드 레이건의 반란》(The Rebellion of Ronald Reagan)을 참조해보자. 해당 문서들은 National Security Archive에 온라인에 공개되어있다.
그리고 이 양반, 아이슬란드 레익캬빅에서 하마터면 소련고르바초프와 함께 모든 핵무기들을 영구폐기시킬뻔했다.[29][30] 다만 레이건이 우주에서 대륙탄도미사일에 레이저빔(...)쏘는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 기술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고르바초프도 쉽사리 핵무기를 내려놓지 못했다.[31] 당시 대화내용을 보면 레이건이 관련 기술들을 소련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고르비로서는 믿을수가 있나.
재밌게도 소련 망국의 마지막 지도자인 고르바초프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소련을 무릎꿇려서 냉전을 끝내고 핵전쟁 공포를 종결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레이건은 끝내 받지 못하였다. 레이건은 '''힘에 기초한 평화'''를 자신의 평생 안보 독트린으로 삼았던 인물인데, 레이건 시대에 앞서서 비슷한 기조를 추진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켰던 윈스턴 처칠 역시도 노벨 평화상을 받지 못하고 노벨 문학상을 받았었다. 대선 후보 시절 '전쟁광'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소련에 대한 강경파에 속했으며, 소련-아프간 전쟁을 지원하고 이란 콘트라 사건에 책임이 있는 등의 행보가 원인이 됐지 않았나 짐작될 뿐이다. 한국과 관련해서는 김대중이 사형 집행 당하는 것을 막고 6월 항쟁 시기에는 전두환 정부의 군 병력 출동을 막았다.

3.3.2.2. 부정적 평가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미국의 스타워즈 계획을 뚫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미국의 스타워즈(SDI) 계획에 들어가는 비용의 단 10분의 1이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얻었을 정도로 미군의 군비 지출은 낭비적인 측면이 컸다. 미국내에서는 이를 영화배우를 대통령으로 뽑은 결과라는 자조적인 평가도 나온다. 한마디로 '''쇼에 능했지 디테일에 충실하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확실히 소련은 '''군비경쟁 때문에 무너진게 아니라 공산주의의 모순으로 무너진 것'''이라는 견해가 인류사학적으로 합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이것 말고도 냉전사학계에서 냉전의 붕괴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소수의견들이 뜨겁게 오가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연구를 해보는걸 추천한다. 레이건 시대의 군비 확장은 이미 지미 카터 때부터 시작되어 왔던 것으로 군비 예산 증가율은 두 대통령의 재임기간 거의 비슷했다. 다만 레이건은 카터때보다 실속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말이다. 이렇게 치솟던 군비 지출은 후임인 조지 H.W.부시대에 이르러 정리되기 시작한다.[32]
또한 니카라과콘트라 반군 지원과 이 과정에서 이란과 커넥션이 있었다는 게 밝혀진 이른바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외교 정책에서 지나치게 강경하고 비인도적이다라는 욕을 먹었다. 이게 언뜻 보기보다 심각한 이유는 의회가 '콘트라 지원하지 말라'고 법을 통과시켰는데도 이걸 무시하고 행정부가 폭주를 했기 때문. 거기에 레이건은 '이란과 인질을 대가로 무기를 거래한 적이 없다'고 TV 담화를 했는데, 이게 완전한 거짓말이었던 것이 불과 몇 달만에 탄로가 난 것이다.

"몇 달전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인질과 무기를 교환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 마음과 선의는 여전히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사실과 증거들은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결국 몇 달만에 이런 궁색한 말로 간접적이나마 자신의 책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제소까지 당해 패하는 봉변을 당했었다. 당연하게도 미국은 이 판결에 불복하고 니콰과라에 보상을 하지 않았다. 다만 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내렸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사건의 주범인 올리버 노스 중령이 청문회에 임하는 자세가 대중의 동정을 사는 등 국민 여론이 "탄핵까지 갈 사안은 아니다" 쪽으로 쏠려서 여차저차 마무리되었다.
또한 그 외 성과를 거둔 정부 정책(소련과의 군축 합의라든가)도 결국 카터 시절에 만들어진 거 레이건이 받아먹은 거 아니냐는 비난이 있다. 비슷하게 이란이 억류하고 있던 미 대사관 직원들이 레이건이 취임하자마자 풀려나서 '레이건은 나약한 카터와는 다르다'라는 국민들의 인식을 공고히 해줬는데, 사실 카터 행정부가 자기들이 퇴임하기 직전까지 끈질기게 협상한 결과물을 레이건이 받아먹은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이슬람 반군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씨앗을 뿌린 것 역시 퇴임 1년 여 전의 카터 행정부였지만, 레이건은 이 공작을 대폭 확대해서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공산주의 정권들을 속속 무너뜨리고 흔들어댔다. 무자헤딘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이들은 우리의 건국의 아버지들과 도덕적으로 대등하다"'''고 치하한 것이 레이건이고,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미국의 최초 지원의혹이 있는 시점도 레이건 시절. 물론 곰덫(Bear Trap)은 효과적으로 작동해서 소련을 빈사상태로 만들고 침몰시키지만 레이건 퇴임 후 10여년 뒤에 미국도 그 덫에 걸리고 만다.
1982년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에서 너무 대놓고 영국마가렛 대처 편을 들어주었다는 것으로도 비난받았다. 물론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는 침략자들이고, 영국을 핵심 우방국으로 삼는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영국을 편을 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이러한 행보와 교도소 민영화로 인해 히스패닉들에게는 완전히 불구대천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있는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과반수가 히스패닉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레이건의 이런 행보는 반쯤 자충수인 셈이다.
1985년 4월에 2차대전 유럽 전선 종결 40주년을 맞이해 서독을 순방하던 중 나치친위대 전사자들이 묻혀 있던 비트부르크의 묘지를 방문해 조의를 표한 것 때문에 엄청나게 까였다. 레이건은 '그들은 나치의 끄나풀이기는 했지만, 복잡한 정세 속에서 상황 판단을 못한 희생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고 변론하고 일정 중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 방문을 추가하는 것으로 반발을 무마하려고 했지만, 미국 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물론이고 라몬즈프랭크 자파 같은 뮤지션들에게도 각각 'My Brain is Hanging Upside Down (Bonzo Goes to Bitburg)', 'Reagan at Bitburg'같은 노래들로 대놓고 디스당했을 정도.

3.3.3. 경제적 분야



3.3.3.1. 긍정적 평가

초유의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는 등 경제관료와 학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지원해 준 점이 이후 미국의 호황과 제2의 전성기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다.
사실 그의 재임 초기에 인플레이션을 때려잡는 과정에서 강력한 긴축 정책을 실시하는 바람에 철강 산업 등이 쇠퇴하고 실업자가 속출하는 등 비난 여론이 크게 일어 그의 지지율이 곤두박칠쳤다. 레이건이 아닌 다른 어지간한 정치인이었다면 불만 여론 때문에 긴축을 풀고 결국 인플레이션을 때려잡는데 실패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레이건은 자신의 지지율에 단기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관료 및 학자들의 의견을 깊이 경청하고 결국은 고통이 따르더라도 인플레이션을 때려잡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확고하게 밀어붙인 결과 2~3년만에 물가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경제정책에 있어서 정치적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은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경제학자들은 그를 무척 높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레이건이 집권을 시작한 시기는 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미국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또한 2차 세계 대전 이후, 매년 큰 경기변동 없이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대전으로 인한 유효 수요가 바닥이 나자 성장률마저 점점 떨어지게 되었다.
당시 미국 경제는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발생하는 초유의 스태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레이건은 카터 시절 임명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폴 볼커의 경제 정책을 끝까지 지지했다. 볼커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고금리정책을 유지했다. 문제는 볼커의 이러한 고금리 정책이 단기적으로 엄청난 불황을 초래했다는 점이다.[33] 실업률이 무려 10%를 넘었다.
레이건은 온갖 공격과 위협을 받던 폴 볼커에 대한 신임을 유지하였다. 당시 연준은 금리를 '''21%'''까지 끌어올렸는,데[34][35] 이로 인해 단기적으로 경기불황과 자산가치 저하로 많은 기업과 부동산들이 헐값에 매각되었고(당시 엄청난 버블경제를 구가하던 일본이 많이 매수했다), 당연히 레이건 정부에 대한 분노와 볼커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르듯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 끝에 1982년경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성공했고 미국 경제는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레이건 취임 당시 15%였던 인플레이션이 1983년 3%로 급감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미국은 버블을 방지하고 경제를 구조조정할 수 있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전후로 일본에 대해서도 공세적 입장을 유지하며, 이를 바탕으로 빌 클린턴 대통령 시대에 이르러서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경제호황을 누리게 된다.
그밖에 이전 민주당 정권이 오일쇼크 때 행하던 가격 통제 정책 등 부작용이 많았던 경제 정책들과 규제들을 대거 철폐한 것도 높이 평가받는다. 이러한 규제 철폐가 90년대 빛을 발하며 훗날의 경제호황에 기여했다.
결과적으로 레이건 행정부는 그 전 8년의 제럴드 포드와 지미 카터 정권보다 대부분의 지표에서 큰 우위를 점하였다. 경제성장률은 평균적으로 약 3.6%였는데, 이는 그 전 8년의 2.6%보다 높았다. 1인당 GDP 증가율 역시나 2.6%였는데, 기존 8년은 1.9%였다. 실업률 역시나 7.2%에서 5.5%로 하락하였으며, '미저리 지수'(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을 합친 지표이다) 역시 19.33에서 9.72로 반토막났다. 또한, 레이건 행정부에서 양극화가 급격히 이루어 진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절대로 하류층 소득의 하락이 아니었다. 2007년 달러 기준으로 $10000 이하의 소득을 얻는 가구는 1980년의 8.8%에서 1988년 8.5%로 감소하였고, $75,000 이상을 벌어들이는 가구의 숫자는 무려 20.2%에서 25.7%로 5.5%p나 증가했다.
또한 중동이 오일 쇼크를 일으킨 다음 여전히 높았던 유가를 마가렛 대처와 함께 일명 "석유 자유화 정책"으로 치킨게임을 유발, 엄청난 폭으로 낮추었다. 물론 여러 미국 석유업체들이 파산하기도 하였으나, 여러 다른 산업들과 국민들의 체감 유가는 오히려 좋아졌다. 또한 이 정책으로 OPEC의 단합력을 와해시키며 제 3차 오일 쇼크의 발발을 억제하기도 했다.그밖에도 이로 인해 여러 국가들이 저유가의 득을 보기도 했다.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의 정책으로 민간 기업과 스타트업의 대규모 활성화가 이루어졌으며, 월 가의 세계 금융 패권이 이루어 질 수 있게 하였다.

3.3.3.2. 부정적 평가

'''부두교 경제학'''(voodoo economics)

-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 대선후보를 놓고 경쟁하던 조지 H. W. 부시가 정부규모를 크게 줄이지 않고 감세만으로도 재정흑자가 가능하다는 레이건의 경제정책을 두고 한 말이다.

'''"노숙인들은 그들의 선택으로 노숙인이 된 것이다."'''

- 1984년 인터뷰에서 레이건의 발언. '경제적 소외계층'과 양극화에 대한 레이건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다. [36]

[37]

오늘날 미국의 심각한 부채 및 양극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도 레이거노믹스에 있다는 평가가 있다. 레이건이 많은 비판을 받은 분야 중 하나가 안 그래도 많이 들어가는 군비 지출을 더욱 확대시킨 것은 당시 감세 정책을 펼치던 미국 정부의 재정에 크나큰 악화를 불러온 원인으로 여겨진다. 일례로 레이건 행정부 아래에서 정부 예산은 1년에 2.5%씩 증가했으며, GDP 기준 국가부채 비율은 26%에서 41%로 늘어났다. 또한 지니계수는 0.36에서 0.39로 크게 악화하면서 미국의 급격한 양극화의 시작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른바 미국 정부의 악명높은 "쌍둥이 적자"로 불리는 무역 수지와 재정 수지 동시 적자는 그의 정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폴 볼커가 시행한 미국 경제의 구조조정은 위에 나왔듯 단기적인 불황을 초래했는데 이때 사라진 일자리 중 대부분이 제조업 분야였고, 이 일자리들은 경제가 회복된 뒤에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고금리로 인해 실업율이 10%를 돌파하고 미국의 농업, 제조업, 자영업 분야가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투자도 줄어들었다. 또한.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높은 이자율을 붙인 채권을 팔았는데, 이로 인하여 전 세계의 투자자들이 미국의 채권을 사기 위하여 달러를 구매하자 달러화의 절상효과가 나타나 메이드 인 재팬 상품들의 가격경쟁력이 상승함으로써 미국의 제조업 분야에 이중고를 안겼다. 고금리 정책이 끝난 이후 레이건 행정부는 플라자 합의로 이를 해결하려 했지만 미국의 블루칼라 일자리가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다.
Garn-St. Germain Depository Institutions Act(간-세인트 저메인 예금기관법)로 금융규제를 풀고 정부의 감독기능을 마비시켜 1989년 저축대부조합 파산사태를 일으킨 것도 비난받는다. 카터 정부 말기부터 레이건 정부 초기까지 폴 볼커의 지휘 아래 이뤄진 인플레 대책은 저축대부조합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저축대부조합들은 금리가 급상승하기 이전의 고정이율을 적용하고 있었던데다 특성상 이율을 금리보다 높일 수 없게 되어있었고, 80년대 초반의 불황으로 자산시장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즉, 투자자 입장에서는 시중 은행보다도 매력이 없었고 이것이 조합들의 심각한 유동성 위기로 나타난 것이었다.
레이건 행정부가 추진한 법안은 조합들의 이율 제한을 철폐하였고, LTV 규제를 완화하였으며, 연방보험이 보장되는 예금을 이용한 위험대출을 허가하였고 규제당국 예산을 줄였다. 즉, 저축대부조합들에게 숨통을 틔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려움은 지속되었고 파산이 잇따랐는데, 이 때문에 미국의 연방예보 또한 심각한 자금 고갈이 발생하였다. 결국 레이건 행정부는 연방예금보험의 붕괴를 막기위해 진작 문을 닫아야할 불량 저축은행들조차도 계속 영업을 허가하였다. 이 시기 저축대부조합들은 이러한 모럴해저드를 기반으로 50%가 넘는 성장율을 이루었다.
1989년, 레이건 집권 전 1%에 불과했던 부실조합 비율은 30%가 훌쩍 넘어있었다. 결국, 조지 H.W 부시와 빌 클린턴 집권기에 의회에서는 제 일을 하지 못한 규제당국과 이미 파산상태에 이른 예보를 폐쇄하였으며, 대규모 베일아웃을 결정하여 대공황 이래 가장 큰 규모인 '''1240억 달러 (현재 달러-원 환율로 130조 육박)의 국민 세금을 투입''', 국가가 나서서 예금을 보장하고 부실조합들과 은행들을 청산, 업계를 구조조정하게 되었다. 또한 이 사태의 영향이 너무 큰 나머지 주정부 주도의 예금보험이라는 개념자체가 사라졌다.
금리 인상이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방향성 자체는 카터 때부터 있었던 것이고, 민주당이 공동발의한 초당적 법안이기도 하였지만 엄연히 레이건 행정부가 적극적으로 확대추진한 정책이었으며, 막대한 재정적자 문제에 대해 자기 대에서 일을 키워놓고 다음 정부로 해결의 책임을 떠넘기는 무책임함은 분명 큰 비판거리다.
레이건 시기의 금융규제 완화와 빈부격차 심화는 빌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추가 규제 완화와 함게 훗날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기여하였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또한 큰 대가를 치르며 인플레이션을 억제시켰던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구조조정의 의미를 퇴색시키게 되었다. 결국 레이건 시대부터 이루어진 규제 완화 기조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2008년의 금융위기를 불러왔다는 평.

4. 대한민국일본과의 관계


전두환박정희의 핵무장 프로그램과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키면서 레이건의 대통령 취임 후 최초로 백악관을 방문한 외국 정상이 되었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한 바 있다. 레이건 역시 1983년에 미국 대통령으로서 방한을 하는 등[38] 찰떡같은 한미공조를 이뤄냈다. 오늘날에도 한국의 보수 우파 성향 정치인들언론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대통령이며, 당대 민주화 운동가들 입장에선 한반도 전술핵무기 배치, 농산물 등 수입개방 때문에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

다만 그렇다고 전두환의 뒤를 무조건 봐준 것은 아니라서 1987년 6.10 민주 항쟁 때에는 전두환 정권에게 압박을 가해 군대가 투입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게 하면서(일명 레이건 친서 사건),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걸 방지하여 한국이 민주화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2016년에 공개된 외교문서를 보면, 전두환 측에서 제5공화국 헌법에 대한 공개 지지를 표명해달라고 했지만 내정간섭을 우려해 거절했다.# 그러나 6월 민주 항쟁에서 미국은 6.29 선언을 종용하고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을 지지하기도 했다.[39] 직선제가 16년만에 처음으로 치뤄진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은 대놓고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논평을 내서 한국 내의 반미감정을 자극하기도 했다.(KBS, MBC)
당시 카터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신군부에 의해 수감되고 사형판결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구명하기 위해 외교채널을 통해 노력했으며 신군부를 승인하고 전두환을 백악관에 초청했던 것은 김대중의 사면과 미국망명이라는 반대급부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이런 면 때문에, 한국의 보수 우파 진영 내에서도 어느 정도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하지만 한국인 최초의 미 국무성 통역가 통 김(Tong Kim, 한국명 김동현)의 증언에 따르면 퇴임 이후 알츠하이머 때문에 서서히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었던 레이건은 전두환과 만나는 4번째 회담임에도 불구하고 회담을 30분 남겨둔 브리핑 자리에서 전두환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참모들이 레이건에게 전두환을 "서울에 방문했을 때 (서울에 있는) 학생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말하던 사람"이라 설명했다. 레이건은 그때야 비로소 "'''아, '학생들은 죄다 공산당(빨갱이)'이라고 했던 그 친구!'''"(...)라며 기억해냈다.
그리고 일본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와 절친했다. 오죽하면 그들이 서로를 불렀던 호칭인 '''론-야스'''라는 말이 미일 정상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관용어로 자리잡았을 정도. 조지 워커 부시고이즈미 준이치로가 그런 관계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런 두 정상 간의 친밀함에도 불구하고 플라자 합의 등 미국의 대일 통상 압박은 어느 때보다 강했다.

5. 어록


배우 출신답게 재치있는 언변과 깔끔하고 위트있는 어투를 구사했고, 이런 어휘력으로 자신의 인간미를 살리면서 인기 비결 중 하나로 삼았다.[40]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 이후에도 자신의 장점을 잘 살려 토요일 대통령이 직접 자신의 생각을 밝힌 라디오 국정연설을[41] 생방송으로 진행해왔으며 특히 취임 후 '''첫해 무려 7회'''에 달하는 TV 국정연설을 해왔다. 이러한 매스미디어를 적극 앞세워, 자신의 장기인 위트넘치는 화술으로 재선 당시 압도적 지지율로 임기를 연장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42]
대선 당시 TV 토론의 수혜를 입었다는 평가가 있다. 당시 레이건은 카터의 공격에 "또 시작이군요." 라는 식으로 여유있게 웃으며 받아쳤고, 이러한 자신있어 보이는 레이건과 뭔가 짜증나 보이는 카터의 모습이 대조적인 이미지로 TV 시청자들에게 어필하여 결과적으로 대선 승리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또한 TV 연설에서 카터는 "지금 미국의 문제는 국민 너희들이 잘 못해서 그렇다." 라는 '불쾌한 연설(malaise speech)'를 한 데 비해, 레이건은 국민들을 꾸짖는 대신 '미국을 다시 발전시키겠다.' 라며 자신이 희망의 등대가 될 것을 어필해서 큰 효과를 봤다. 사실 TV에 멋있게 나오는 것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배우이니... 물론 이 당시 이미 레이건이 지지율에서 꾸준히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TV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는 평가도 많다. 카터의 인기가 워낙 바닥을 기기도 했고.

1980년 대선 유세 중 그를 반대하는 좌파 시위대들이 야유를 부리는 통에 연설 진행을 못하자 일갈하는 장면. '''"Oh, Shut up."'''
병원으로 이송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사건 발생 몇 주 후 일기에 "총을 맞는 것은 아프다." 며 "나를 쏜 젊은이에 대해 증오심을 느꼈으나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고 썼다. 그는 또 "나는 낸시가 그곳에 있는지 찾으려고 눈을 떴다. 그녀가 그곳에 없는 날을 맞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며 낸시 여사에 대한 각별한 애정도 드러냈다.

“'''If history teaches anything it teaches that simple-minded appeasement or wishful thinking about our adversaries is folly. It means the betrayal of our past. the squandering of our freedom.'''”

“만일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순진한 유화정책이나 적에게 희망적인 생각을 가지는 행위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가 주는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며 우리의 소중한 자유를 부수는 행위다.”

- 1983년 '악의 제국' 연설 中

'''"I now begin the journey that will lead me into the sunset of my life. I know that for America there will always be a bright dawn ahead.'''"

'''저는 이제 인생의 황혼을 향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저는 미국이 언제나 빛나는 아침을 맞을 것이라 믿습니다.'''

자신이 알츠하이머로 투병중인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편지에서, 레이건이 왜 위대한 소통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예시.

'''"Mr. Gorbachev, open this gate! 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

고르바초프 서기장님, 이 을 여십시오! 고르바초프 서기장님, 이 장벽을 허무십시오!

1987년 6월, 베를린에서 한 유명한 연설. 이 말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물론 동유럽 공산권의 '철의 장막' 붕괴를 상징하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43]

'''Trust, but verify'''

'''상대를 믿되, 반드시 검증하라'''

원래는 소련의 속담이었는데 레이건이 가져와서 잘 써먹었다. 소련과의 군축협상을 임하는 자세를 설명하는데에 썼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만약 그들이 빛을 보지 못한다면 그 열기를 느끼게 하라'''

자신의 감세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한 말. 의원들이 감세정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국민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라는 뜻이다. 후에는 낙수효과를 뜻하는 상징적인 말로도 받아들여졌다.

"불경기란 당신의 이웃이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불황이란 당신이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경기회복이란 지미 카터가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80년 선거전 당시 어록으로 카터의 경우 재선 도전이었다. 원래는 33대 대통령인 해리 S. 트루먼이 한 말로 그 뒤에 카터를 까는 표현을 추가한 것.


"How do you tell a Communist? Well, it’s someone who reads Marx and Lenin. And how do you tell an anti-Communist? It’s someone who understands Marx and Lenin.”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레닌을 읽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반공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이해한 사람입니다. "'''

“Freedom is never more than one generation away from extinction. We didn't pass it to our children in the bloodstream. It must be fought for, protected, and handed on for them to do the same, or one day we will spend our sunset years telling our children and our children's children what it was once like in the United States where men were free.” "'''자유가 말살되는 데에는 단 한 세대도 걸리지 않습니다. 자유는 우리 후손들에게 혈통을 통해서 유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쟁취해야하며 지켜야 되고 후손들도 그런 자유를 누리라고 물려주는 것입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날 깨워도 좋소이다. '''국무회의 중이라도 얼른 나를 깨워주시오."'''

레이건은 국무회의 중에 자주 졸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본인이 자학개그를 한 것.[44]

"경제학자란 현실에서 발생하는 뭔가를 보고 그게 이론적으로 성립할지 여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다."

"제가 보청기를 착용한다는 건 비밀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에 갑자기 작동이 잘 안 됐습니다. 알고 보니 '''KGB제 보청기에 도청장치를 했더라고요.'''"

"소련과 미국 헌법은 모두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은 '''표현 이후의 자유'''도 보장한다는 것이다."

"미국인소련인이 자기 조국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인이 "우리 나라에서는 백악관으로 쳐들어가서 대통령의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며 '대통령 각하, 난 당신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소련인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크렘린으로 쳐들어가서 '서기장 동무, 난 레이건 대통령이 자기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라고 할 수 있다고요."

고르바초프에게 이 유머를 들려줬는데 '''그도 웃었다고 한다.''' 영상

'''Future doesn't belong to the faint-hearted. It belongs to the brave.'''

"미래는 나약한 자들이 아니라 용감한 자들이 만들어낸다."

1986년 1월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참사를 추모하는 대국민 연설 중에서.

'''Government is like a big baby - an alimentary canal with a big appetite at one end and no responsibility at the other.'''

"정부란 커다란 아기와 같아서 식욕은 왕성하지만 배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못한다."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66
미국 주지사 선거
캘리포니아

'''3,742,913 (57.55%)'''
'''당선 (1위)'''
'''초선'''
1970
미국 주지사 선거
'''3,439,664 (52.83%)'''
'''당선 (1위)'''
'''재선'''
1980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43,903,230 (50.75%, 489명)'''
'''당선 (1위)'''
'''초선'''
1984
미국 대통령 선거
'''54,455,472 (58.77%, 525명)'''
'''당선 (1위)'''
'''재선'''

7. 일화


그의 일화들을 보면 그는 평소 엄청난 입담과 유머 센스를 자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유머가 미국인들에게 크게 다가와 현재 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으로 꼽히게 된 큰 근거가 되었다.
  • 배우였던 시절에 유일한 히트작이 《폭풍우의 청춘》이라는 영화였는데, 레이건 재임시절 이 영화를 반복시청하는 것이 레이건에 대한 충성심의 증표라는 우스개가 있다. 어느 정치인은 무려 60번을 봤다고 유머러스하게 주장했다. 첫 결혼상대였던 제인 와이먼[45]은 이혼 사유를 묻자 "《폭풍우의 청춘》은 이제 질리도록 봤으니까"라고[46] 말했다고 한다. 물론 이건 그냥 하는 말이고 실제 이혼 사유는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얼마 못 가 병으로 죽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후 방황하던 와이먼이 동료배우와 바람을 피우며 이혼을 요구해 레이건은 무척 힘들어했다고 한다. 이런 뒷사정이 있어 이혼전력이 레이건에겐 치명상이 아니었던 측면이 있다. 그래선지 레이건은 평생 첫 번째 아내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간혹 동료 정치인들과의 모임에서 그의 이혼이나 전처가 화젯거리가 되면 정색을 하는 탓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고. 사실 지금도 할리우드에서는 이혼이 많지만 당시 할리우드 배우들은 이혼이 더 많았는데, 전 부인 제인 와이먼처럼 4~5번 이상 이혼하고 혼자 늙는 것이 평균 수준이었을 정도였다. 2차대전 이전 할리우드에서 유명했던 배우들 중 2번 이상 이혼 안 한 배우들이 드물 수준이라 레이건처럼 단 한 번 이혼한 것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 등 공산권 여배우들도 이혼이 많았고 한국과 일본 연예계가 그나마 이혼이 적은 편이다.
  • 강경한 중화민국 지지자였다.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을 밀어내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인정되었을 당시, 매우 불쾌해하며 미국이 국제기구를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뿐만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지국인 탄자니아 대표단이 승리의 춤을 추자 그들을 '원숭이', '식인종'에 비유하며 비난했다.
  • 1984년 대선 당시 경쟁 후보였던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과 레이건의 2차 대선토론은 미국 대선토론 역사상 명장면 중 하나이자 레이건의 입담을 나타내는 예시로 꼽힌다. 사회자가 레이건에게 너무 고령이라 직무수행에 차질이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하자 "전 나이를 가지고 문제를 삼지 않을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상대 후보가 너무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는걸 절대 정치적으로 공격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재치있게 받아친 것.[47] 좌중은 웃음바다가 됐고 먼데일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48] 이후 레이건은 49개주에서 선거인단 525 대 13로 승리를 거두는 압승을 기록했고 이는 미국 대통령 선거 사상 최대의 선거인단수로 승리한 선거였다. 그만큼 그의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승리를 거두지 못한 곳은 먼데일의 고향미네소타와 골수 민주당인 워싱턴 D.C 뿐이었다. 먼데일은 최초의 여성부통령 후보인 제럴딘 페라까지 앞세워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려고 했지만, 오히려 중도층의 반감을 사서 역사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후로도 상상을 초월한 압도적인 패배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본인이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것 뿐만 아니라 공화당의 위치를 강경보수로 재정립하여 흔들리던 위상을 회복시킨 것으로 인해 정치 전문가들은 그를 공화당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로 표현하기도 한다.
  • 언젠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 공화국데즈먼드 투투 주교의 방문을 받았는데, 투투 주교는 레이건의 면전에서 미국과 레이건의 강경정책을 비판했다. 투투 주교가 돌아간 후 누군가가 "투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투투(TuTu)라는 이름의 운율에 맞춰 "So-So(그저 그랬어요)"라고 말해서 좌중이 뒤집어졌다고. 이 일화는 레이건의 장례식날 한 번 더 언급되었는데, 이 때도 폭소가 터졌다. 마지막 가는 날까지 사람들을 웃긴 셈.(...)
  • 대통령 후보 시절 카터와 TV 토론을 벌였는데, 토론이 끝난 후 참모들이 "처음 토론에 나선 것 치고는 꽤 훌륭하셨습니다."라고 말하자 덤덤하게 "무슨 소리! 나는 존 웨인과 같이 촬영한 적이 있는데!"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무명배우인 자신이 존 웨인 같은 대배우와 같이 촬영 할때도 안 떨었는데 카터와 맞서서 덜덜 떨 까닭이 있겠느냐는 농담으로 자신이 무명배우였다는 걸 강조한 자학개그이자, 동시에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사실 존 웨인보다 못한 인물이라는 식으로 상대를 돌려 깐 것이기도 하다.[49]
  • 카터와의 TV 토론 때 카터가 자신을 비판할 때 씨익 웃으면서 "또 시작이네요(There you go again)"라고 받아넘기는 행동이 유명세를 탔다. 당시의 실제 동영상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레이건의 이 행동은 토론에서 상당히 초조하고 불안정해 보이는 카터에 비해서 레이건은 상당히 여유있고 위트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레이건의 뛰어난 이미지 활용을 보여주는 사례.
  • 뉴햄프셔 주에서의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상대방 후보 조지 H. W. 부시의 연설이 끝난후 상대방 후보를 지지하는 탤래그래프 지의 편집장인 진행자 존 브린이 음향 담당자에게 "레이건씨의 마이크를 꺼버려."라고 하자 "미스터 그린, 이 마이크를 쓰는 비용은 내가 내고 있소."라고 일갈했다. 비용 얘기가 나온 이유는 저 경선토론회를 여는데 들어간 비용을 전적으로 레이건 선거본부에서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본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말그대로 폭풍간지. 브린을 그린이라고 부른 것은 한마디로 이름도 헷갈릴 정도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이 토론에 감놔라 배놔라 한다는 뜻.
  • 생사를 다투는 상황에서도 꽤 위트있는 농담을 했는데, 1981년 암살 시도로 부상을 입어 들것에 실려나갈 때는 자신의 상처 부위에 응급처치를 하던 간호사들에게 "내 아내 낸시에게 허락은 받고 만지는 건가?"라는 말을 했고, 수술실에 도착했을 때는 의사들에게 "여러분들이 공화당원이기를..."이라는 말을 했다.[50] 그리고 그 때문인지, 살았다.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아내 낸시 레이건에게 "여보, 수그려야 하는데 총을 피한다는 것을 깜빡했어(Honey, I forgot to duck). 내가 아직 영화배우였으면 피했을텐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고. 이 말은 뎀프시롤로 알려진 미국의 유명한 복서 잭 뎀프시가 1926년 진 터니에게 패한 후 자신의 아내에게 한 유머로 유명한데 적절하게 리바이벌한 것.
  • 대통령 재임 시절 야당인 민주당을 불황의 이유로 들며 비판하자, ABC 뉴스의 샘 도널드슨이 "최근 지속 경기침체에 대해 연준의 실수와 국회탓을 하는데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하자, "네, 저도 오랫동안 민주당원이었으니까요"('Yes, because for many years I was a Democrat)"라고 응수했다.
  • 재선에 도전 중이던 1984년 8월 11일에는 대국민 주례연설 직전 국민 여러분. 저는 방금 소련을 멸망시킬 명령을 승인했습니다. 5분 후에 우리 군의 폭격이 시작될 것입니다라는 흠좀무한 멘트를 남겼다. 사실은 방송 직전에 입을 풀기 위한 조크였고, 실제 방송에도 나오지 않았지만 소련군에서 이 내용을 인지하고 약 30분간 긴급대기 태세에 돌입했다는 후문. 원본
  • 위트 있는 레이건도 멕시코에서 어리버리를 탄 적이 있는데, 멕시코 국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는데 그들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레이건이 연설을 마친 후 한 멕시코 고위관리가 일어나 스페인어로 연단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의 연설에 멕시코 국민들은 박장대소했으며 연설이 끝나자 열화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았다. 머쓱했지만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레이건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는데 옆에 있던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가 이렇게 귀띔했다. "저 사람은 각하의 연설을 통역한 것 뿐입니다."(...)

8. 마거릿 대처와의 비교


[image]
신자유주의의 서막을 여는 지도자로서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서로 많이 비교된다.
비슷한 시기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호감도와 평가가 지역, 계층, 성향에 따라 너무 극명하고 극단적으로 갈리는 데 비하면, 레이건은 물론 정치인으로서의 평가는 갈리긴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호감도와 인기는 전반적으로 높은 편이다. 워낙 대외적으로 원숙하고 위트있는 이미지를 구축했기에,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정치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레이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호감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영국은 상원 선거를 따로 치르지 않고, 하원의 권한이 막강하다 보니 마가렛 대처가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고 업무를 수행했던 데 반해, 당시 레이건 정권은 상원은 공화당이 장악했긴 했지만[51] 하원은 민주당이 우세였기에[52] 정책 수행에 견제를 받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마가렛 대처보다는 온건했다. 실제로 레이건은 당시 민주당 출신 팁 오닐 하원의장과 수시로 전화 통화 및 대화를 하였고 야당인 민주당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대화하는 자세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재치있는 언변과 훌륭한 연설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정책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능숙한 대화와 소통의 자세를 보였다. 또한 챌린저호 폭발사고 당시에 당일에 챌린저호 폭발사고로 충격을 받은 미국 국민들에게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감동적인 명연설을 하여 큰 지지를 받기도 했다.
또한 한국 입장에서는 레이건은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에 압력을 행사하여 군사력 투입을 막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측면이 매우 크다. 이점에서 오히려 인권 외교를 내세우면서도 5.18 민주화운동에서 전두환 등 신군부를 억제하지 못해 참극을 초래했던 지미 카터보다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아무튼 레이건의 평가가 보다 긍정적인 것은 전임자인 지미 카터가 자신의 편협한 사상에 기초한 독설을 미국 국민들에게 퍼부어서 질리게 만들었던 것도 있고 역시 카터가 임명한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유임시켜 고금리정책을 집행해서 실업률이 초기에 상승하긴 했지만, 부실기업들의 구조조정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국가경제의 경쟁력을 높였기 때문이었다.

9. 기타


  • 레이건의 집권 시기였던 대한민국은 당시 4공 끄트머리 최절정(→ 5공 직전), 6공 막 극초창기였던 무렵이다. 대통령으로는 전노[53] 콤비 시대. 마지막으로 북쪽은 아시다시피...
  • 당선 당시 만 69세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고령이자 이혼 경력이 있던 최초이자 당시에는 유일했던 대통령이었다.[54] 사실 지금도 할리우드에서는 이혼이 많지만 당시 할리우드 배우들은 이혼이 더 많았는데, 전 부인 제인 와이먼처럼 4~5번 이상 이혼하고 혼자 늙는 것이 평균 수준일 정도였다.[55] 2차대전 이전 할리우드에서 유명했던 배우들 중 2번 이상 이혼 안 한 배우들이 드물 수준이라 레이건처럼 단 한 번 이혼한 것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 등 공산권 여배우들도 이혼이 많았고 한국과 일본 연예계가 그나마 이혼이 적은 편이었다.
  • 상술되었듯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 이미지 좋기로는 순위권에 드는 인기남이지만, 되려 그 때문에 이미지 메이킹에만 치중해서 자신의 정치적 실책을 가리려 하는 교활한 정치인 이미지도 있다. 의외로 진보 측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이미지가 있는 편인데, 레이건 최대의 실책 중 하나인 이란-콘트라 사건이 훗날 보수 세력의 발목을 잡는 원흉이 되었기 때문.
  • 나이 탓에 임기 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피부암, 대장 용종 등을 제거하기 위해 심심찮게 수술대를 오르내리며 부시 부통령이 몇 시간 단위로 권한대행을 반복했다. 1기 임기부터 보청기를 끼고 다녔는데 그 보청기가 초대박을 터뜨렸다고. 이후 알츠하이머 진단은 1994년에 받았지만 아들 로널드 레이건 주니어의 주장처럼 퇴임 이전부터 점점 인지능력 저하의 징조가 보였다는 증언도 있다.
  • 1984년, 앨범 Thriller로 국제적인 슈퍼스타가 된 마이클 잭슨백악관으로 초대해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는 앞서 기술한 흑인들에게 받는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 최초의 흑인 슈퍼스타를 직접 대면함으로써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오려고 한 의도이다.
  • 레이건이 임상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서 알츠하이머의 대표적인 예로 소개된다. 2011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딸이 타임지에 기고한 수기엔 그의 말년의 생활상이 상세하게 묘사되어있다. 주위 사람들이 대통령임을 알아보고 인사를 해도 딸에게 '저 사람이 어떻게 날 아냐?'라고 물어봤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차남 로널드 주니어는 자신의 부친이 재임기간에 알츠하이머 조짐이 보였다는 회고록을 출판했고 그로 인해 다른 남매들에게 사실 왜곡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 레이건 이후에 당선된 모든 대통령들은 키가 180cm를 넘었다. 이와 반대로 대한민국 대통령 중 180cm 이상이였던 사람은 최규하(182cm)가 유일하다.
  • 2011년에는 두 번째 결혼 전에 잠깐 데이트했던 배우 파이퍼 로리(Piper Laurie)가 회고록을 썼는데, 레이건은 잠자리에서 별로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로리는 18세였고, 레이건은 39세였으며 둘은 영화에서 부녀사이(!)로 출연하다가 눈이 맞았다고. 40분이 넘게 거칠게만 힘을 쓰는 레이건에게 불평했더니 "너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이쯤했으면 오르가즘을 여러 번 느꼈어야지. 넌 병원에 가봐야 해('There's something wrong with you. You should have had many orgasms by now—after all this time. You've got to see a doctor.')"라고 했다고 한다. 자신감은 넘치셨던 모양. #
  •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이름은 로널드 레이건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호날두의 어머니가 레이건의 팬이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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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전에 젤리빈 애호가로 유명했다. 백악관 회의 때 각료들에게 돌리거나 외국 정상들에게도 미국 대통령 문장이나 백악관 로고가 붙은 젤리빈을 선물할 정도였으며, 레이건 사후 유족들은 그의 빈소에도 젤리빈 한통을 놓아 고인을 기렸다.
  • 일리노이 출신의 백인답게 시카고 컵스의 팬이었다고 하지만 그가 살아있던 시기에는 단 한번도 컵스가 우승하지 못해 재임 기간 중에는 남의 팀을 백악관으로 초대해야 했다. 시카고 컵스는 그가 태어나기 3년 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이후 단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고(...)[56] 그가 죽고 난 후 12년이 지나고 나서야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껴안았다. 근데 레이건은 단순한 팬을 넘어서 라디오 아나운서 시절에 시카고 컵스의 전속 중계 아나운서를 했었다.
  • 레이건 부부는 점술가의 조언을 국정에 반영했던 걸로도 유명하다. 영부인 낸시 레이건은 조앤 퀴글리라는 점술가와 친했는데, 로날드 레이건 암살미수사건 이후 퀴글리의 말에 자꾸 의존하다가 아예 퀴클리가 비선실세로서 국정에 관여한 것이다. 모든 국정 중대사들을 퀴글리에게 먼저 물어본 뒤, 그녀가 행성의 운행을 분석하는 점을 쳐서 안전하다고 판명난 것만 실행했다는데, 오죽하면 퀴글리 본인도 점술가가 국정을 이렇게나 휘두를 수 있었던건 로마 시대 이래 처음 아니었을까라고 자기 자서전에다 썼을 정도였다. 1988년, 레이건의 백악관 비서실장이 사퇴함과 동시에 드러났다.
  • 명색이 한때 할리우드 배우답게, 할리우드 배우들과 회담을 가진 적이 있다! 존 웨인, 제임스 스튜어트, 딘 마틴, 프랭크 시나트라와 함께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저 넷 모두 공화당원이라는 것. 그리고 레이건은 '나는 존 웨인 같은 배우와도 영화를 찍은 적이 있기 때문에 지미 카터와의 TV토론이 그다지 쫄리지 않았다'와 같은 명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한데, 실제로 영화계를 떠나서 공화당 정치인이 된 뒤 존 웨인을 거의 동등한, 아니 더 높은 위치에서 회담하게 되었다.[57] 전체적으로 연예계에 보수주의자들이 많았던 1930년대 이전 출생 세대 연예계[58]에서는 인기가 많지만 그 이후 출생 세대 연예계에서는 주도적으로 비판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10. 대중 문화에서의 모습


백 투 더 퓨처 시리즈 1편에서 1950년대로 간 마티가 브라운 박사를 만났을 때, 박사는 마티에게 네가 사는 시대의 대통령은 누구냐고 묻는다. 마티가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자 '''"로널드 레이건? 그 영화배우? 그러면 부통령은 누구야, 제리 루이스? 그러면 영부인은 제인 와이먼이겠군!"'''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후에 마티가 카메라로 녹음된 방송을 티비로 보여주자 브라운 박사는 "왜 대통령이 영화배우여야 됐는지 알겠구나. 텔레비전에서 호감으로 보여야 할테니 말이다."라고 감탄한다. 당시 영화 제작진들은 '괜히 이 장면을 넣었다가 큰 일 나는 거 아닌가...'하고 벌벌 떨었지만, 정작 레이건 대통령은 이 대사가 나오는 부분을 계속 돌려봤을 정도로 아주 좋아했었다고 한다. 배우 이름을 외울 수 있었던 것은 레이건이 출연한 영화 몬타나의 여걸이 힐 밸리에서 막 상영 중이였기 때문이다.

레이건의 태도를 비꼬는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스킷 '레이건: 흑막'이 있다. 대통령이 겉으로는 헐헐거리는 인자한 나이든 인물로 연기하지만 사실은 뒤에서 모든 스캔들을 배후조종하는 흑막이라는 내용으로 당시에 제법 큰 반향을 일으켰다. 레이건이 "자네가 물러나줘야겠네"라며 희생양으로 삼는 대상은 도널드 리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이란-콘트라 사건 당시 레이건 측근들로부터 '당신이 백악관 관리를 못한 총체적인 책임을 지고 물러나서 대통령을 지키라'는 압박을 받고 사임한 일을 비꼬는 대목이다. 사임 직후 폭로에 가까운 회고록을 출판하는데, 이 책에서 낸시 레이건이 점술가에게 국정을 자문했다는 것을 처음 공개하였고, 자신은 영부인과 그 측근들이 벌이는 농단을 막으려고 애썼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이 사람 성은 Regan으로 레이건과 비슷하다.
SCP 재단에선 취급이 좋질 않다. 암살 미수 사건 등 그의 정치 여정을 소재로 한 만화시리즈(SCP-095)가 SCP로 등록되어있지 않나, 심지어 자기 연설을 완전히 고인드립 수준으로 능욕한 고어 괴영상(SCP-1981)이 나오질 않나... 덤으로 세계도 한 번 멸망시킬뻔 했다.(SCP-1984)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무명 배우가 아니라 그럭저럭 유명한 배우로 성공하지만 미국 내전 통에 의문사당한다.
데이터 이스트사에서 개발한 드래곤닌자라는 격투게임에서는 악의 닌자단에 의해 납치당한 레이건 대통령을 구출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막상 구출된 레이건 대통령은 포상이랍시고 겨우 햄버거 1개만 준다.
스티븐 킹11/22/63(11.22.63)에서는 케네디 암살 미수 사건[59] 이후 망해가는 미국에서 휴버트 험프리 다음으로 취임한다. 취임시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이 더 큰 스케일로 벌어지고 '''이란에 군사적 개입'''을 하는 바람에[60] 인질 전원이 참수되는 것으로 마무리. 다만 호메이니 치하 이란은 사형은 자주 해도 참수는 안했으니 실제로 인질들이 처형됐다면 참수보단 자기들 전매특허인 기중기 교수형이나 총살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에서 알란 릭맨이 레이건으로 나오는데 상당히 인간적인 미를 선보인다. 주인공 세실 게인즈 부부를 만찬에 초대하기도 하였고 백악관 내 흑인과 백인 직원의 임금, 승진 기회를 평등하게 했다. 세실이 은퇴하자 역대 대통령을 대표해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세실이 은퇴 후 주미 남아공 대사관에서의 항의 시위[61]에 참가한 것을 보면 그가 남아공의 경제제재를 반대한 것이 주인공의 신념을 흔든 계기 중 하나로 보인다. 비록 미국 내의 인종차별은 아니지만 작중에서 인종 차별에 반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 유일한 대통령으로 아이젠하워 이래 세실이 갖고 있던 '대통령이 우리를 위해 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흔든 것으로 보인다.[62]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선 영화판과 소설판 모두 등장한다. 영화판에선 레이건이 백악관 정원에서 일하는 인부에게 벽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말했는데, 하필 주인공이 그걸 녹음해버리고, 주인공에게 녹음된 걸 전해받고 들은 고르바초프가 베를린 장벽에 대한 말인줄 알고 "레이건 놈이 벽을 무너뜨리지 말라면 우리는 무너뜨려야지!"라며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라고 지시해버린다.
테디 루스벨트 전기로 유명한 에드 모리스의 레이건 전기가 꽤 유명하다. 가상의 사람들을 통한 레이건의 이미지 구현으로 논란이 심했는데 의외로 객관적이라는게 중평.
마블 코믹스데드풀에서 악령으로 부활한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한명으로 나오며, 데드풀이 배를 가르자 젤리빈이 쏟아져 나왔다.
DC 코믹스 배트맨 가족의 죽음에서 조커가 레이건 때문에 돈이 없다는 듯이 그를 깟다.
앨런 무어의 그래픽노블 왓치맨에도 역시 레이건이 배우 출신 대통령이였던 것을 개그소재로 삼는 장면이 나온다. 마지막 부분에서 로어셰크의 메모장이 배달되기 전, 삼류 일간지 신문사 편집자들이 기사에 넣을 소재가 떨어졌다고 고민하다 한 사람이 로버트 레드포드가 대선 후보로 나올거라는 얘기를 하자 하는 말, "뭐? 말도 안돼, 누가 카우보이를 백악관에 놓길 원한단 말이야?" 비록 배우는 바뀌었지만 서부 영화 출신 배우라는 점, 공화당원이라는 점[63], 리처드 닉슨 퇴임 이후에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점, 이니셜이 RR인 점 등 누가 봐도 레이건을 패러디했다.
2006년에 나온 공포영화 "The tripper" 에서는 80년대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복지예산 감축으로 몇몇 정신병원이 돈을 아끼려 몇몇 정신병자들을 퇴원시켰는데 그중엔 싸이코패스 환자도 있었고, 이 환자가 자기가 어떻게 퇴원되었는지를 알게 된 뒤 레이건 대통령을 존경하다 못해 신인것 처럼 찬양하며 아예 레이건 대통령 가면을 쓰고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 희생자 대부분은 히피고 공화당 지지자도 죽인다.
의외로 홍콩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최가박당 3편 막판에 주인공 킹콩 일행에게 임무를 맡기러 홍콩까지 찾아온다.

펑크 록 밴드 라몬즈의 노래 중에 Bonzo goes to Bitburg라는 것이 있다. 이는 1985년 레이건이 독일 비트부르크의 국립묘지를 방문하여 헌화한 "비트부르크 논란"에 관한 곡인데, 문제는 이 국립묘지에 무장친위대 전사자들이 묻혀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한국으로 치면 현역 대통령이 야스쿠니를 방문한 격. 보컬 조이 라몬 부터가 유대계 미국인이어서 더욱 분노가 컸다. 정치적인 곡을 거의 발표하지 않은 라몬즈의 유일한 정치적인 곡. 참고로 노래 제목은 레이건 대통령의 1951년 출연작 Bedtime for Bonzo의 후속작 Bonzo goes to collage를 패러디 한 것이다. 이 영화들은 본조라는 침팬지가 인간들과 함께 살면서 겪는 해프닝을 다룬 코메디물인데, 쉽게 말해 라몬즈는 레이건을 원숭이 취급을 했다(...). 게다가 더 웃긴 지점은 정작 노래 제목의 기원이 된 후속작에는 출연진이 싹 다 교체되는 바람에 레이건이 아예 안 나온다(...).

2012년, FPS 게임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2 인트로에서 그의 연설 장면이 잠시 나온다.[64]

그리고 블랙 옵스 시리즈의 2020년 신작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콜드 워에서 직접 등장한다. 위 영상 1분 53초부터, 블랙 옵스 1편의 존 F. 케네디처럼 주인공들에게 임무를 주는 역할인 듯하다.
아메리칸 대드에서는 시간여행을 한 주인공 스탠이 마틴 스콜세지에게 대마초를 끊으라고 설득해서 택시 드라이버가 개봉되지 않아 버렸고 그로 인해 존 힝클리 주니어도 주디 포스터를 보지 못해 사랑에 빠지지도, 로널드 레이건을 암살시도 하지 않는 세계관이 형성되어 재선에 실패해버린다. 그 후 미국은 1년후 소련의 속국이 되어버리고 2000년대까지 소련은 건재하고 미국은 완전히 소련땅이 되어버려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이 암살시도를 하여 원상태로 돌아온다. 여담으로 스탠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중 하나다.
원더우먼 1984에서 시간상으로 1984년만큼 등장하였는데, 살찐 레이건 느낌이 강하다. 맥스웰 로드에게 털리는 역할로 나온다.
소련이 먼저 달착륙에 성공한 대체역사물 미드인 포올맨카인드(For All Mankind)에서도 등장한다. 여기선 에드워드 케네디 대통령을 위협하는 보수세력의 대선주자로 등장하며,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가자'는 캐치프레이즈로 미국의 중장년층에게 인기를 끈다.[65] 그리고 결국 시즌 2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에 대통령이 되었으며, 소련과의 경쟁을 더욱 강화하려고 한다.

[26] 포드는 전직 대통령 체면이 있는지라 대통령 권한을 일부 자신에게 분할해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고 당연하게도 레이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27] 트럼프 본인은 이걸 인정하지 않는다. 분명 자기가 떠올렸는데 나중에야 레이건도 옛날에 그 문구를 썼다는걸 알았다고... 믿거나 말거나.[28] 허리를 다쳐 몸져누웠는데 개 사료를 주지 못한다고 해서 동물학대 혐의를 적용해서 체포한다든가 빚을 져놓고 그 이튿날 갚지 않았다고 사기죄로 체포한다든가 하는 괴상한 혐의로 체포한다.[29] 기록에 따르면 대화가 대략 이렇게 오갔다. "핵무기 50% 감축 어때요?" "아니 그거 그냥 100% 해버리죠?" "오 좋아요!"[30] 에릭 홉스봄은 "양대 강국이 서로를 핵전쟁으로 절멸시킬 의도도 이유도 없음을 서로에게 납득시킨 이 순간, 냉전은 사실상 끝이 났었다."라고 단언했다. "다만 사람들이 그 사실(냉전의 종식)을 받아들인 것은 역시나 소련 멸망 이후였다."라는 추가설명과 함께.[31] 미국이 그런 기술을 갖게된다면 소련의 핵무기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은 한쪽이 선공을 하면 반대쪽이 반격을 하며 상호파괴가 확신된다는 점에서 전쟁억제력이 있는데, 만약 한쪽이 반격을 못하게 된다면? 전쟁억제력은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우리가 오늘날 은하 반대편으로 워프 포탈을 만들 가능성만큼 그 기술에 닿지 못하였다. 물론 고르바초프는 이 사실을 몰랐다.[32] 특히 더이상 필요가 없게 된 급속전략타격자산들을 중심으로 육군이 많이 잘려나갔다. 해군은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낮았던 프로젝트 몇 개 날아간 것 빼고는 타격이 없었다.[33] 물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고질적인 불경기와 카터 시기 일어난 1979년의 제2차 석유파동이다. 볼커가 정말로 배짱이 있다고 평가되는 부분은, 제2차 석유파동에 따른 엄청난 고물가+경기침체의 상황에서 '''더욱 더 심한 경기침체를 감수하고''' 물가안정에 올인하였고, 결국 인플레를 잡았다는 데 있다.[34]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실질 금리는 7% 정도였다. 그래도 엄청난 거지만.[35] 참고로 이때 베네수엘라와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도 엄청 피를 봤다. 안 그래도 원자재 값이 한창 떨어지는 바람에 재정에 여유가 없어진 상태에서 고금리까지 겹치니 도저히 버틸수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 이후의 신자유주의 정책까지 펼쳐지면서 결국 21세기 들어 중남미 정권이 대거 좌파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이러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파산 자체야 당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대다수가 기초 체력이 나빠서 나자빠진 점도 있지만 그 이후의 처방과정이...[36] 실제로 소외계층에 대한 주택지원 등 일부 복지예산이 삭감되어 나가기도 했다.[37] 다만 미국인들의 인식 자체가 자유는 무한하지만, 책임도 무한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노숙자가 되더라도 본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으로 생각하여 신경쓰지 않는 측면도 있다. 그나마 노숙자와 빈곤층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개선된 게 대침체 이후이고, 정부와 사회가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중산층들도 줄줄이 파산해서 길거리에서 카트 끌고 다니는 시대가 된 대봉쇄 때부터다.[38] 특히 방한 한 달 전 발생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취소 혹은 연기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으나 예정대로 방문했다.[39] KBS, MBC 자료 참고.[40] 비슷하게 조지 W. 부시는 레이건처럼 완벽하지 않으면서도 친근하고 털털한 이미지를 내세웠다. 그래선지 허버트 부시의 업적이 큼에도 불구하고 단임에 인기가 그저 그런 반면 조지 부시는 업적 하나 꼽기가 난감한데도 사람은 좋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재선에 성공했다.[41]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루즈벨트의 노변정담식 라디오 연설에서 그 아이디어를 가져왔다.[42] 대통령 임기 이전인 1976년 뉴욕 타임스의 러셀 베이커는 그에게 '''위대한 소통가'''라는 수식어를 붙인 바 있다.[43] 원래는 참모들이 존 F. 케네디의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처럼 독일어로 번역해서 원고를 준비했다. 그런데 레이건이 "난 미국 대통령인데 왜 독일어를 해야 하냐"고 해서 다시 영어로 되돌렸다고는 후문. 그래도 당시 연설 영상을 보면, 베를린 시민들은 잘만 알아듣고 환호를 보냈다. 거기에 독일어가 들어간 케네디의 연설 후에도 베를린 장벽은 20년이 넘게 건재했지만, 영어만 쓴 레이건의 연설로부터 불과 2년 후 베를린 장벽이 정말 무너졌다.[44] 치매의 전조 증상 중 하나가 낮에 꾸벅꾸벅 조는 것이고 이를 근거로 레이건이 대통령 재직 중에도 치매를 이미 앓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제법 있으나 레이건의 주치의는 부정하였다.[45] 이 사람은 평생 공화당 지지자였다. 오히려 이 당시의 레이건은 민주당 지지자였었다.[46] 장래가 불투명하게 보였다는 말을 재치를 담아 전한 것. 매우 예리한 시선이 담긴 말일 수도 있는 게, 레이건은 용모와 훤칠한 체격을 다 갖춘 덕분에 인지도는 갖췄으되 배우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47년 미국노동총연맹 산하 영화배우협회 회장에 선출된 후부터 정치적 역량을 길러나가며 본격 성공가도를 밟기 시작한 것. 다만 배우협회장에 선출된 시기가 제인과 사이가 멀어지던 시점이었고, 낸시와 재혼 후 정치에 입문해 상전벽해 수준으로 위상이 달라졌기 때문에, 낸시가 옆에 있어준 덕분에 로널드가 저렇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호사가들도 있었다고 한다.[47] 레이건은 1차 토론에서 평소와 다르게 심하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여 국민들을 불안하게 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괜히 사회자가 대놓고 나이 문제를 건드린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 상황을 조크 한방으로 반전시켰다는게 대단할 뿐.[48] 먼데일은 이 순간 자신이 선거에서 졌다는 걸 예감하고 토론 끝나고 자기 부인에게 가서 "여보, 아무래도 선거 끝난거 같아"라고 했다고 전해진다.[49]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존 웨인은 할리우드 내 유명 보수주의자이다. 레이건의 드립 실력이 어디까지 갔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예시.[50]드립에 수석 의사가 "지금 이 순간은 저희들 모두가 공화당원입니다, 대통령님."이라고 받아쳐줬다고 한다.[51] 이후 1986년 중간 선거에서는 뒤집혔다.[52] 미국 하원은 1954년부터 1994년까지 민주당이 40년간 계속 다수당을 지켜 왔다. 1900년대 중반부터 민주당이 점점 진보화되면서 공화당 텃밭이던 북부로 진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반대로 보수화되면서 민주당 텃밭이었던 남부로 진출하기 시작했지만, 이 과정이 민주당보다는 조금 늦었기 때문에 서로의 텃밭이 뒤바뀌는 이 기간 동안은 민주당이 새로운 텃밭이 되어 가던 북부+기존에 남아있던 남부 기반(일명 딕시크랫)을 바탕 삼아 하원만큼은 굳건히 지켜 왔다.[53] 전두환노태우. 사실상 레이건 기준으로 임기 말 절정.[54] 이 기록은 도널드 트럼프 집권하면 깨졌다.[55] 특히나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경우 7회 이혼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56] 시카고 컵스2016년 월드 시리즈 진출 이전까지 마지막으로 나갔던 1945년 월드 시리즈 당시에 레이건은 군인이었다. 고로 살아 가면서 민간인 신분으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응원팀이 월드 시리즈에 올라가는 모습을 못 보고 죽은 셈. [57] 다만 존 웨인이 살아있던 당시 레이건은 대통령에 당선되지는 못했다. 존 웨인 사망 후인 1980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저 사진에 존 웨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저때는 아직 레이건이 대통령이 아니었다.[58] 지금 대부분 노령으로 사망했다.[59] 그러니까 리 하비 오즈월드댈러스에서 저격했던 사건을 주인공이 타임슬립해서 막았던 사건.[60] 다만 이때의 레이건을 변명하자면 군 병력 증원없이 돈만 퍼부었던 베트남이 케네디 2기 정권 시절에 망했고(...) 하노이에 핵을 투하한 터라 핵을 동원한 위협은 소용이 없어서 군사개입을 했었다.[61] 흑인 인권 운동을 벌이던 아들이 주동했다.[62] 물론 더 부정적으로 나온 건 역시 닉슨이다. 인종차별도 입장을 드러내지 않은 것 뿐이고, 레이건이 단행한 흑인 백인 직원의 동일 대우는 닉슨이 60년 대선에 출마하며 세실과 동료들에게 약속한 것이지만 자기가 대통령이 되고는 실행 안 했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다. 다만 그 닉슨도 완전히 악당이 아닌 인간적인 시선을 유지하여 묘사하였다.[63] 레드포드는 2012년 버락 오바마 지지 선언을 하며 민주당 쪽으로 전향했다.[64] 이 게임의 메인 악역 라울 메넨데즈가 미국을 증오하게 된 원인이 이란-콘트라 사건 때문이다. 레이건이 이 사건의 장본인이기 때문에 연설 장면이 삽입된 듯 하다.[65] 이걸 보고 케네디 대통령은 "대체 언제가 좋았다는 거냐? 대공황? 베트남 전쟁? 짐 크로우?"라면서 비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