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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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최초로 20세기에 태어난 미국 대통령이며[2] 임기 도중 암살되었다.
보유 기록이 상당히 많은 대통령인데, 본격적인 TV 정치 시대의 개막을 알린 대통령이자 미국에서 선거를 거쳐서 취임한 최연소 대통령,[3]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4] 또한 몇 안 되는 WASP가 아닌 대통령이다.[5]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암살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현재까지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등과 함께 민주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중 한명이기도 하다. 짧다면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가 내세웠던 자유, 인권, 글로벌 시민의식 등의 이념이나 소신이 당대에 참신하게 와닿았고, 그것을 실현하겠다는 자가 속된 말로 핸섬한데다 말도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막 꽃을 피우려던 찰나에 암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사망하고 말았으니 대중들에겐 각인이 될 수 밖에 없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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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의 부친 조지프 P. 케네디.
매사추세츠 주 브룩라인(Brookline)에서 당시 보스턴의 부유한 사업가인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6] (1888년 ~ 1969년)의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케네디 가문은 19세기 후반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서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톨릭 신자 집안이었는데, 그의 아버지인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는 미국에서 주식 투자, 영화 사업, 기업 M&A 등으로 엄청난 부호가 되었고, 이후 정계 진출을 시도하여 영국 주재 대사가 된 나름 입지전적스런 인물이었다.[7]
그리고 이렇게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다진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는 자신의 야망이었던 '우리 집안에서 대통령 하나쯤은 나와야지'라는 방침에 따라 자신의 9명 자녀들을 전폭적인 지원 속에 어릴 적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게 하였다.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의 이런 태도는 "인간 성공의 척도는 돈이 아니고, 그가 만드는 가문(가정)의 종류이다."란 말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그에겐 돈을 떠나 어떤 가문의 전통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고 돈이 안 중요하다는 건 아니라, 일례로 케네디의 자녀들은 보스턴 시내 어디 상점이든 외상으로 물건 구입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 집안을 모르는 시민들이 없었기 때문. 물론 케네디가의 비서가 잔금을 늘 치렀다고 한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존 F. 케네디 뿐만 아니라 형제였던 로버트 F. 케네디, 에드워드 케네디 등도 훗날 같이 정계에 입문하였다. 사실 집안에서 가장 기대를 한 인물은 차남 존이 아니라 장남 조 케네디였는데, 운동과 공부 다 만능이던 조 케네디에 비해 잭 케네디(존 피츠제럴드 "잭" 케네디)는 어려서부터 좀 왜소하고 잔병 치레도 많이 했으며 공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 보딩스쿨인 초트 고등학교에서도 성적이 중하위권으로 다소 좋지 않았다.[8] 허나 정계 유력 인사이자 하버드 출신인 아버지의 후광에 역시 명문가였던 친척들의 신원 보증을 얻어 프린스턴을 그만두고 하버드에 입학했다. 사실 이때 본인은 프린스턴 대학교에 간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차갑게 "형이 두려워서 그러는 거냐?"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허나 그렇게 조지프 케네디가 신임하던 장남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 주니어는 제 2차 세계대전 도중이던 1944년 군용기 사고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자세한 내용은 아프로디테 계획 참조.
한편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고 학창 시절 유럽 여러 나라들을 탐방하였던 존은 외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대필 의혹으로 논란이 된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1940)를 출간하여 정치 서적으로는 이례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이 뮌헨 협정 등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에 대해 펼쳤던 유화정책을 비판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교수들은 이 논문이 굉장히 장황하고 내용이 반복된다고 하면서도 그 깊이는 인정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아버지인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는 당시 주영 미국대사로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을 적극 지지했고, 막 경제 대공황을 지나 온 미국이 또 다시 커다란 소용돌이인 유럽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9] 케네디는 주영 대사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대학생의 신분으로 구할 수 없는 미국과 영국의 외교 문서들을 탐독하고, 전속 속기사와 타이피스트를 고용하여 3개월만에 학위 논문을 써냈다.[10] 당시 케네디의 논문은 문장력 등과는 별개로 깊은 통찰력을 인정받았는데 케네디 가문 정도 되면 논문 내용도 사실 본인 머리에서 나온게 아니지 않을까 싶지만 훗날 보여준 외교 역량을 생각해보면 이 때부터 싹수가 있었던 듯하다.
2.2. 2차대전 참전
원래 부신피질 호르몬 분비 이상인 에디슨병을 앓고 있었고, 대학 시절 미식축구를 하다 등에 큰 상처를 입어 늘 진통제를 달고 살았는데, 이 등의 부상은 제 2차 세계대전 때 입은 부상으로 더 악화되었다. 이 때 입은 등의 부상은 평생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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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군에 복무, 대위로 전역했다. 원랜 에디슨병, 성병 등의 부상으로 군대에 갈 수 없는 신체 조건이었지만[11] 세계대전에 참가해야 향후 정치 활동에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해 입대했고, 아버지를 설득해 후방이 아닌 전선에 배치받았다. 그리고 실제로 참전용사라는 경력은 케네디가 젊은 나이에 하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부각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사족으로 항간에 나오는 노르웨이 출신의 나치주의자와의 만남 때문에 군으로 쫓겨났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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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 시절, 어뢰정 PT-109의 정장(艇長)으로 근무했는데, 작전 중에 전원 자느라고 어둠 속에서 미처 일본 구축함 아마기리[12] 함을 발견하지 못해 '''구축함에 들이받히고 PT-109는 격침되었다.''' 아마기리측에서도 PT-109의 발견이 늦었고, 어설프게 피하는 것보다는 똑바로 들이받는 게 안전하다는 판단으로 충각전술을 사용.
이후 케네디는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은 승조원들을 이끌고 6km를 헤엄쳐 인근에 위치한 무인도에 상륙하여 일주일 정도 버틴 후에 구출이 되었다고 한다. [13] 물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케네디는, 구사일생 끝에 살아온 전쟁 영웅이 되어있었다. 케네디가 조난되었을 때 100여년 정도 되는 플레이페어로 암호를 보냈는데, 일본군은 이를 해독도 못했다가 정설.
다만, 애초에 들이받히지 않고 구축함을 격파하는 게 어뢰정의 진짜 임무 아니냐는 비판도 있으며, 이 사건은 군인으로서 케네디가 무능했다는 걸 드러낸다는 주장도 있다.[14] 어뢰정의 빠른 가속력을 생각할 때, 구축함을 못 피한 건 확률적으로 어려운 일이긴 하다. 때문에 이미 아버지 대에 거물이 된 케네디 가문빨로 인해 징계감인 사건이 훈장 수여로 뒤바뀐거 아니냐는 의심어린 눈빛도 있다.
물론 격침까지 몰고 간 책임을 묻는 사람들도 그의 사후 대처[15] 가 훌륭했다는 것은 인정하기에, 훈장 수여도 이 점이 감안된 것이라는 말도 있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1960년대에 'PT-109' 라는 제목으로 영화도 만들어졌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각자의 시점과 이해 관계에 따라 증언과 해석이 판이하게 다르며, 후대에 첨언되거나 뒤섞인 내용도 많다보니 결국 판단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하여튼 존은 제대 후 사망한 형을 대신해 아버지의 꿈도 안고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2.3. 정계 활동과 대선 승리
대선 당시 광고(1960년). 풀버전(컬러).
광고 초반에 자세히 보면 당시 러닝메이트이자 부통령 후보였던 린든 B. 존슨도 보인다.
1946년, 보스턴 시장 선거 출마로 인해 자리가 빈 메사추세츠 제11지역구에 출마, 73%의 득표율로 당선되며 하원의원으로서 정치를 시작했다. 교육/노동 위원회와 재향군인 권익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대외적으로는 트루먼 독트린을 지지했다. 이 시절부터 이민법 완화, 공공주택 건설, 노조 권한 축소 저지에 힘 썼다. 3선 후 1952년에는 무려 3선 현직 상원의원인 헨리 캐벗 로지를 7만여 표 차이로 간신히 누르고 메사추세츠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며 중진급으로 성장했다. 그 다음 해인 1953년에는 《타임 헤럴드》의 사진기자 재클린 부비에와 결혼하였다.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당신을 위한 케, 네, 디!
세상을 알기엔 충분히 원숙하면서도, 무엇이든 해내기에 충분히 젊은 사람!
그는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유일하게 자유무역 확대에 찬성하는 상원이었으며[16] , 선거인단 폐지 반대 및 노동 개혁 운동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민권법 제정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해외 원조도 적극 지지했다. 이런 활동들을 바탕으로 1956년 대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 지명 연설을 맡았고, 대선 후보였던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뜻대로 당 대회에서 선출하게 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2위로 낙선, 대신 인지도는 높였다. 그러나 현직 아이젠하워의 인기가 좋았던 만큼 이 실패는 도리어 약이 되었다. 1957년《용기 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로 퓰리처상을 받았다.[17] 1958년에는 상원의원에 재선되었다.
그리고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경선에서 거물 정치인이던 린든 B. 존슨을 꺾고 후보로 출마, 뉴 프런티어(New Frontier)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을 누르며 마침내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유권자 전체 득표는 0.2~0.6%, 10~40만표의 신승이었지만, 선거인단에서는 303:219로 닉슨을 여유있게 따돌렸다.[18] 이때 대선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오하이오는 물론 캘리포니아(닉슨의 고향)가 닉슨에게 넘어갔으며, 15명의 남부 선거인단이 가톨릭 교도나 다른 이유를 핑계 삼아 투표 사기(즉 반란표)를 쳐버렸음에도 이 정도였다.[19] 이는 50개 주를 다 방문하겠다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무리한 계획을 고수하다가 지친 닉슨의 컨디션 + 서투른 메이크업(...) 탓도 있었다.
당시 TV 토론에서 케네디가 이겨서 케네디가 당선되는 데 결정적 효과를 거두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지만, 여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우선 토론을 라디오로 들은 시민들과 언론인들은 닉슨이 케네디보다 토론을 잘했다고 여겼다.[20] 라디오로 토론을 청취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49%의 청취자들이 닉슨이 승리했고 응답한 반면, 케네디의 경우에는 21%에 불과했다고 한다.
해당 여론조사 기관은 텔레비전으로 시청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도 시행했는데, 여기서도 케네디 30% 닉슨 29%로 나와, 케네디가 거의 우위를 나타내지 못했다. 때문에 텔레비전으로 시청한 사람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당시 토론을 시청한 미국인들 사이에서 닉슨이 승리했다는 여론이 분명히 우세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 다만 여론조사가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도 일단 TV 토론에선 케네디가 우세를 가져갔다. 어찌됐든 케네디는 당시 점점 멀어지던 남부 민주당의 뒤통수에도 불구하고 대선에서 승리한다.
한편 조지프 케네디는 아들인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꿈을 이루는 듯 싶었으나, 아들의 취임 11개월 만에 뇌경색으로 반신불수 상태가 되었고, 2년 후 존에 이어 몇 년 후 역시 대선에 출마한 로버트마저 피살당한 이듬해인 1969년 향년 81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자신의 거동이 불편해진 것과 더불어, 자신의 꿈을 이루어주거나 이루어줄 아들을 셋이나 먼저 떠나보냈다는 점에서 불우한 말년을 보냈던 셈. 거기에 넷째 아들 에드워드 케네디마저 조지프 케네디의 사망 직전에 여비서의 사망 사건(차파퀴딕 스캔들)[21] 에 연루되면서 대권 가도에서 멀어진다.
2.4. 재임기
취임사에서 케네디는 우방국들에 변하지 않을 우정을 약속하며, 식민지 통치 등에서 갓 벗어나 자유 진영에 편입된 신생국들이 독재 등 더 가혹한 환경에 놓여 망가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원조와 빈곤 문제 퇴치를 언급하며,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그 일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나 그들의 지지표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는 당위론을 내세웠다. 다만 세계인들이 미국에 바라는만큼 세계인들 스스로도 함께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자고 역설한다. 소련에 대해서도 역지사지하자며 대화를 제안한다.[22]
특히 중남미 우방 외교에 신경써 중남미 여러 나라와 '진보를 위한 동맹'을 결성하였고, 평화봉사단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취임 두 달만에 CIA 말만 믿고 쿠바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피그만 침공 작전 실행을 승인했다가 거하게 실패하며 외교적으로 큰 부담을 지게 된다. 덕분에 국내에서도 큰 비난에 직면할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사실 이 일은 신임 대통령이던 케네디가 기세등등하던 CIA와 군부 등쌀에 밀려 떠밀리듯 승인해준 것도 있어서[23] 발 빠른 대국민 사과와 함께 비교적 조용히 넘어간다.
그리고 베를린 위기를 통해 미숙한 자신을 테스트하는듯하던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의 위협을 전면전으로 가지 않고도 적절하게 선방하여 서유럽 국가들의 여론을 다시 자기 편으로 되돌리는 데 성공하고[24] , 피그만 침공 여파가 이어진 쿠바 미사일 위기 즈음하여 핵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흐루쇼프 정권과 대결한 결과,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대신에 소련은 미사일·폭격기 등을 쿠바에서 철수하고, 미국 측의 사찰을 인정함으로써 소련과의 극적인 타협을 이루며 대중의 큰 호응을 얻게 된다. 핵 위기의 반성으로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Partial Test Ban Treaty)을 제창하여 이를 성사시켜 후일의 수많은 핵제한/감축 협정의 시금석을 심은 것도 고평가를 받는다.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날리면서 미국을 추월한 소련을 따라잡기 위해 아폴로 계획을 계획한 것도 이 무렵.[25]
내정 면에서는 일종의 도전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뉴프런티어 정신을 내세우며 개혁 법안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정작 [26] 의회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한 법안이 많았다. 군사비도 증가했음에도 상기했듯 되려 군부와의 마찰은 심화되어 쿠데타설이 떠돌기도 하는 등 껄끄러운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으로 촉발된 흑인민권운동에 대해서는 호응하여 정권 기간 중 연방재판소에 최초의 흑인 판사가 취임하고, 흑인 검사를 10명에서 70명으로 늘리고, 오랜 악습이던 투표세를 없애 흑인은 물론 푸어 화이트 계층의 선거 참여율을 높여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이런 행보에 엇나간 보수파의 공격은 더 거세졌고, 일각에선 너무 급격한 변화로 중산층의 여론이 갈라지며 사회 분열을 가중시켰다는 비판도 받는다.
실제로 베트남전의 계기를 어느 정도는 제공했으며, 주변의 매파 때문이라고 해도 냉전을 축소시키려는 행동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단적으로 미사일 격차 논쟁은 케네디가 촉발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복지 등 각종 개혁은 케네디 재임 중 입안됐지만, 그의 재임 중에는 예산 문제로 의회에서 난항을 겪었고, 그가 죽은 후 의회에서 잔뼈가 굵었던 린든 존슨 대통령이 의회를 거듭 설득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통과시켜 그의 공헌도가 더 크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베트남전 관련해선 케네디 자신은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의 전임 '아이젠하워'가 프랑스의 직접 개입 요청을 끝내 거부하고 지원은 장비와 자금 등 물자 지원에 한정한데 반해, 케네디 정부 시절엔 군사고문만 1만명 가까이 파견하는[27] 정책을 결정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건 상황이 달라진 탓도 있었다.[28] 실제로 베트남에 대해서 케네디는 깊숙이 개입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고, 일단 재선을 한 다음에 베트남 철수를 다룰 예정이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와 연관이 있던 로버트 케네디, 로버트 맥나마라, 아서 슐레신저 주니어, 시오도어 소랜센, 마이크 멘스필드 등이 케네디에게 미군 철수의지가 분명히 있었다고 주장했다. 펜타곤 페이퍼 유출로 유명한 대니얼 엘스버그는 1967년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와 인터뷰를 했는데, "지상군 파병은 안 한다는 형의 결심은 확고했다"고 얘기했다 한다.[29]
허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던 2년 사이 남베트남의 군사고문단 숫자는 900명에서 16000명까지 증가했고, 이는 미국이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사례가 된다. 제네바 협정 위반일 수 밖에 없는것이 당시 미군이 파병한 고문단의 활동범위가 단순히 남베트남 뿐만 아니라 라오스 캄보디아, 북베트남 국경지대를 아울렀기 때문이다. 케네디가 고문단 파병형식으로 무마하고자 했던 베트남 전쟁은 1963년 그가 암살되면서 본격화 된다. 케네디의 후임인 린든 존슨 대통령은 케네디와의 차별화를 위해 베트남전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고, 1964년 통킹만 사건 조작이라는 희대의 무리수를 벌였으며, 1965년 부터는 말 그대로 지상병력까지 대규모 단위로 파병하면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져버리고 만다.
2.5. 갑작스러운 암살
1963년 11월 22일 현지 시각으로 오후 12시 30분 쯤, 유세지인 텍사스 주 댈러스 시 다운타운에서 컨버터블로 퍼레이드를 벌이다가, 갑작스런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고 만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이 퍼레이드 중에 살해되는 장면이 TV로 전국에 방송되며 세계 사람들에게 또다른 의미의 충격을 주었다.
3. 선거 이력
4. 평가
케네디는 미국 민주당원들에겐 가장 이상적인 대통령 롤모델 중 한명으로 꼽히기도 하는 인물이다. 뉴 프런티어 정신으로 대표되는 젊고 도전적인 이미지, 베를린 연설 등에서 보여준 대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미국 중산층 가족의 모습[31] , 흐루쇼프와의 정상회담으로 최초로 군축을 시도하고, 달 착륙으로 결실을 맺은 우주 개발을 시작하는 등 베트남 전쟁으로 엉망진창이 되기 직전 미국의 황금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실제 케네디는 부유한 집안과 특이한 아버지, 정치적 비주류에 가까웠지만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된 점 등 여러 에피소드와 기록들이 많기에 현재까지도 미디어에 심심찮게 등장하며, 실제 냉전 시절을 적절히 관리하고 미국내 흑인민권운동을 비롯한 여러 민권운동에 관심을 표명한 점과 그의 재임 중에 큰 실책은 없었다는 점은 장점으로 꼽힌다.
다만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활동하다 암살되었기에 실제 업적에 비해 과대평가되었다는 비판적 시각 역시 존재하며, 케네디 시절을 겪은 핵심 세대들이 이제 완전한 노년기에 접어들었기에 미국에서도 예전만큼 회자되진 않는다고 한다. 허나 반대로 말하면 그런걸 떠나 그가 내세웠고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들이 그만큼 일반 대중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소리도 되고, 그런 리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거라 후대인들의 의식 구조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여전히 미국사에서 빼놓으면 섭섭한 네임드급 대통령이긴 하다.
극적인 인생 때문인지 존 케네디와 그의 정권은 '카멜롯(그 유명한 아서 왕의 근거지)'에 많이 비교되기도 한다. 실제로 35살의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를 비롯해서 백악관 참모진 상당수가 3~40대의 아이비리그 출신 동부 엘리트들이었다. 게다가 32살의 막내동생 에드워드 케네디는 상원의원.[32]
4.1. 한계
재임 기간이 짧아서 그런 점도 있지만 냉정하게 말해 업적 대비 후광이 과한 대통령 아니냐는 평가도 받는다. 젊고 잘생긴 대통령, 진취적인 가치를 부르짖은 타고난 언변과 극적인 죽음, 아름다운 아내 등의 여러 좋은 이미지가 겹쳐 상당히 미화되었다는 것. 미국 내에서도 케네디가 업적과 성취, 정책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을 몇몇 정치학자들이 거론하기도 한다. 때문에 대중적 인지도나 인기 측면에선 수위권에도 드는 양반이 정치학자들의 대통령 업적 평가에선 10위 중후반권까지 떨어지기도 한다.[33] 루스벨트 이후 미국 대통령의 국내외적 권한과 위상이 과거보다 비약적으로 커졌고 덕분인지 20세기 중반 대통령들이 대체로 평가 상위권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케네디의 순위는 엄청 높은 순위라고 할 수는 없다.
4.1.1. 대외 정책
피그만 침공 작전 실패는 당시엔 의외로 유야무야 넘아갔지만 사실 선거가 있었다면 당선 여부와도 연결될만한 병크였고[34] , 당시 까딱했으면 커다란 국제 분쟁으로 확전될 가능성도 높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후 군부와 척을 진 케네디의 이미지 때문인지 젊은 지도자의 시행착오로 인한 사소한 실수 정도로 가볍게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 역시 일이 커진덴 케네디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데 막상 오늘날엔 일이 커지고 나서 케네디가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했다는 측면만 부각되고 있다.
또한 케네디가 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증가하는 선에서 끝내려 했던 베트남 전쟁도 그의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다는 비판도 강하다. 우선 남베트남에 미군사고문단을 파병하며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를 지원하는 행위 자체가 1954년에 맺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사례였다. 어째됐건 아이젠하워시기 1,000명도 안되는 규모의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는 1961년 900명에서 1963년 1만 6,000명으로 급증했다. 단순히 군사고문단의 숫자만 증가한 것이 아니고, 군사고문단 파병과 더불어 케네디는 네이팜 폭탄 사용과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라고 불리는 치명적인 고엽제 살포 또한 허가함으로써 인권이라는 측면에서도 치명적인 선택을 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APC와 같은 장갑차량과 헬리콥터 그리고 각종 장비 및 적잖은 무기를 남베트남에 지원해줬다. 또한 당시 케네디 정부의 국방장관이었던 맥나마라는 응오딘지엠 정권을 도와 이른바 남베트남 농민들을 강제로 소개시키는 전략촌(Stragic Hamlet) 계획을 실행하여 역으로 남베트남 민중이 베트콩을 지지하게 하는 전략적 실책을 저질렀다. 비록 케네디가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참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의지를 떠나서 군사고문단의 급격한 증가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기 전 그 중간단계였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35] 그리고 그의 그러한 지원이 남베트남 정부를 안정시켰다고 보기도 힘들다. 당시 미국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에게 엄청난 양의 물자와 장비를 지원해주었지만, 1963년 1월 사이공 인근에서 벌어진 압박 전투에선 우수한 장비와 화력에도 불구하고 베트콩에게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4.1.2. 대내 정책
그의 좋은 이미지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복지 정책 역시 과중한 예산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의 재임 기간 중엔 의회를 통과하지도 못하고 사장될 뻔 했다. 그러나 후임 린든 존슨 대통령의 정치적 수완으로 극적으로 부활하게 된다. 케네디 본인은 복지 정책을 내놓고 의회 통과를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았지만, 후임자 린든 존슨은 다선 의원 출신답게 의회에서의 오랜 경륜을 살려 의원들 개개인을 직접 설득한 끝에 전임자의 정책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 이러한 복지 정책이 70~80년대 미 정부의 막대한 재정 문제를 초래했다는 시각도 있다.[36]
케네디의 또 다른 대표적 업적이라는 우주개발계획 역시 그가 직접적으로 한 일이라곤 60년대 안으로 인간을 달로 보내겠다고 포부를 밝힌 것이고, 아폴로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그의 재임기에 실제로 추진한 것은 별로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케네디의 이 발언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이고 무모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소련이 먼저 인간을 우주로 보내자 당황한 케네디가 10년 안에 인간을 달로 보내겠다고 일단 질러버린 것에 가깝다는 반응이 많았다. 실제 케네디도 어렵다는거 아는데 일단 해보자는 식이였으니.. 이런 무모한 계획을 정말로 실현시킨 것은 천재 로켓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과 후임 대통령 린든 존슨의 구체적인 실현 의지 덕분이었는데, 당시 존슨 대통령은 막연한 구상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던 달 착륙을 실현시키기 위해 아폴로 계획과 이에 수반된 제미니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행시켰고, 이를 위한 막대한 예산을 지원해줬다.
우주 개발에 있어서 케네디의 역할이 지나칠 정도로 띄워진 것은 NASA의 마케팅빨이 크게 작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아폴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예산이 필요했는데, 이 막대한 예산을 따내기 위해선 여론의 지지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기 때문. 그래서 NASA는 케네디 前 대통령의 유훈이었다는 점을 내세우며 시민들의 향수를 자극, 우주 개발 및 아폴로 계획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NASA는 로켓 발사기지가 위치한 플로리다주의 케이프 케네버럴(Cape Canaveral) 인근 동명의 공군기지 이름도 케이프 케네디 공군기지로 바꾸어 속된 말로 오버하다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37] 이렇게 보면 케네디가 재임기보단 사후 미국의 우주개발계획에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준 측면은 있을듯.
케네디의 중요한 업적으로 내세워지고 있는 인종차별 완화 정책 역시 케네디의 업적 중 하나임은 분명하나,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 이미 아이젠하워 시절 인종차별 완화를 위한 노력들이 많이 있어 왔는데,[38] 전임 정권의 업적까지 가져와 케네디의 업적으로 포장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 물론 더 뒤로 가면 트루먼 시절도 있긴 하다만.
개인사에서 보듯 여성 편력 건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4.2. 옹호
요약하자면 케네디의 업적 자체는 짧은 임기로 인해 한계가 있었지만, 진보적인 생각과 능력 자체는 뛰어난 대통령이었다. 그에 대한 향수와 동경 역시 단순한 이미지만이 아닌 "저런 능력 있는 사람이 조금 더 대통령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에서 나온다고 봐야 옳다. 케네디에 대한 반감도 마찬가지로 저런 아쉬움과 그를 동반한 케네디에 대한 열광의 반작용에서 나오는 부분이 많지, 케네디의 능력 자체에 대한 의심은 적다.
학자들 역시 케네디가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지적은 할지언정 케네디가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진 않으며, 실제로 미 정치학회가 2015년에 평가한 역대 미국 대통령 업적 순위 14위, 2017년 CBS에서 91명의 역사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8위를 기록하는 등 전문가들에게도 최소한 평타 이상은 하는 대통령이었다고 평가받는다.
4.2.1. 대외 정책
쿠바 사태를 일으킨 책임은 별개로 보더라도[39] , 케네디와 미국 행정부가 보여준 외교적 유연성, 노련함은 높히 평가 받아야 한다. 실질적인 해상봉쇄(blockade)를 진행하면서도 검역(quarantine)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는 조심스러운 모습과 동생인 법무장관 RFK를 포함한 다수 매파의 압박에 맞서 외교적인 실마리를 고집해 사태를 해결한 것 모두 케네디의 역량이라고 봐야 한다. 단어 선택 하나가 무슨 큰 의미가 있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서독의 국방장관과 수상을 역임한 헬무트 슈미트는 본인의 회고록 "인간과 권력(Menschen und Machte)"에서 그 부분을 콕 찝어 이야기해 "소련 지도부의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본인이 원하는 것을 이뤄냈다"고 고평가했다. 말 한마디가 정세를 뒤집을 수도 있는 게 바로 외교기 때문.
실제로 상단에도 적혀 있는 피그만 침공을 '''못 막았다'''라는 것이 비판으로 적힌다는 것은 당시 미국 상황을 무시하고 현대적 시각으로 재단한 결과이다. 쿠바 혁명은 케네디는 취임하기 전인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의 일이고,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전쟁 일촉즉발의 상황 + CIA와 국방부에 대처 방안을 요청해 놓은 상태에서 케네디에게 정권을 넘겨줬다. 그 상황에서 국방부는 쿠바와 케네디를 불신했고, 어떻게든 전쟁하려고 여념이 없었다. 국방부가 얼마나 미쳤는지는 노스우즈 작전 문서로 충분하다. 이 상황에서 CIA에서 올라온 것이 피그만 작전이다. 그리고 피그만 작전이 실패하자 국방부는 다시 몽구스 작전을 통해서 전쟁 각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케네디는 전쟁을 모르고 유약하다고 언플을 하면서, 강경 노선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노력했다. 무엇보다 피그만 침공을 주장했던 인사들은 정작 해당 작전이 실패하자 자기는 그런 적 없다고 나서서 케네디만 독박을 쓰게 된다. 노스우즈 작전 보고서가 제복군인들을 모두 통과해서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까지 올라온 것이나, 피그만 침공 이후 강경파들의 말 바꾸기를 본 케네디는 정보 부처와 주요 장성들을 모두 불신하게 된다.
그래서 케네디는 미국 대통령 역사상 처음으로 1962년 여름 대통령 집무실과 각료회의실에 녹음 장치를 설치했으며, 이 사실은 그와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단 둘만이 알고 있었다.[40] 케네디 사후에는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지시로 248시간 분량의 회의 기록, 12시간의 전화 통화 내역이 케네디 도서관으로 옮겨졌으며, 특히 쿠바 미사일 사태 부분인 43시간의 녹음 부분은 1983년, 2001년에 나뉘어 공개됐다. 이 녹취 대화록에서 케네디는 소련과 쿠바에 강경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쿠바 공습과 관련한 직접적인 문제에서는 매우 이성적인 모습이 나타났기에, 케네디의 국무 능력이 단순한 쇼맨십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엔 사태가 해결된 후 자신이 비둘기파였다고 주장한 다수의 사람들이 사실은 매파였다는 것과 당시 군부가 얼마나 전쟁을 주장했는지도 담겨져있다.
우방들에게도 그의 진취적이고 리버럴한 모습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런 부분은 간과되기 쉬운데, 21세기 들어 "소프트 파워"가 강조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의미 있는 부분이다. 위에서 언급한 헬무트 슈미트의 회고록 역시 케네디의 이미지과 그에 대한 독일인들의 열광을 설명하면서 "그가 부탁한다면 독일인들은 우방으로서 더 많은 것을 희생할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베를린 연설 때 미국 대통령을 향한 독일인들의 열광은 전례가 없었을 정도. 케네디 역시 이런 부분을 중시해서 임기 중에 평화봉사단(Peace Corps)를 창설해 미국의 젊은이들이 개도국에 봉사 활동을 떠나는 것을 장려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외교관의 길이나 학자의 길로 들어선 미국인이 상당히 많은데, 한국과 인연이 깊은 인물로는 크리스토퍼 힐 前 주한 미대사, 캐슬린 스티븐스 前 주한 미대사,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교수 등이 있다.
4.2.2. 대내 정책
대표적인 흑인 민권 단체인 NAACP[41] 의 수석 변호사 출신인 서굿 마셜을 연방 판사 자리에 임명하고, 필요에 따라 주 방위군을 연방정부 지시에 놓고 흑인 학생들의 보호를 명령하는 등 흑인 민권 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케네디의 이러한 전향적인 모습과 후임자인 린든 존슨의 정책들을 기반으로 민주당은 이후 흑인 집단의 지지를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게 된다. 이는 당시 민주당 텃밭이던 남부 보수파들에 대놓고 어그로를 끄는 행위였기에[42] 단순히 표 때문에 한 것도 아니었다.
우주개발사업도 공헌도에 갑론을박은 있지만 실제 여론의 관심을 집중시킨 대통령인건 사실이라, NASA의 우주선 발사장은 지금도 케네디 우주센터다. 그 외에도 케네디 이름이 붙은 곳은 제법 있는데, 뉴욕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이나 워싱턴의 케네디 센터 등이 대표적. 그 유명한 하버드 대학에도 행정 전문대학원으로 케네디 스쿨이 있다. 여담으로 이는 물론 대통령의 업적도 있지만, 원체 부호 가문 출신이기 때문에 집안의 기부금 역시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런저런 점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민주당 정치인들은 케네디와의 접점을 부각하려고 노력한다. 1992년 전국적으론 아직 인지도가 적던 빌 클린턴은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하면서 10대 시절 케네디를 만나서 악수하는 사진의 포스터로 도배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케네디를 만나면서부터 대통령의 꿈을 키워왔다"고 썰을 풀었다. 2004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한 존 케리는 선거운동 도중 뜬금없이 이니셜을 JFK로 바꾸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였다. 2008년 오바마 역시 '블랙 케네디'라는 표어를 대놓고 밀었고, 결국 당시 케네디가의 수장이자 민주당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지지를 이끌어 내면서 민주당 대선 후보 자리를 쟁취했다.
5. 선거 이력
6. 가족과 개인사
어릴 적 식탐이 장난 아니어서 식사 전 기도하는 시간에도 뭔가를 몰래 집어먹곤 했다고 한다. 형인 조지프의 음식까지 집어먹어서 조지프가 때리려 했는데, 입에 파이를 가득 물고 잘못했다고 빌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또는 조지프의 파이를 낚아채서 달아났는데, 쫓아가 잡고 나니 얼굴이 파이 소로 범벅이 돼있었다고 한다. 달아나는 와중에도 파이를 입 안에 아귀아귀 쑤셔넣었는데 조준을 잘못했던 것. 어느 쪽이든 존의 꼬라지가 하도 웃겨서 조지프가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당시 신사의 정장에는 당연히 중절모, 실크 해트가 따라오는 것이 상식이었으나, 케네디는 맨머리로 대중 앞에 나섰다.[44] 그 후로 미국 대통령들은 대중에 나설 때 모자를 대부분 쓰지 않게 되었고, 그 풍조는 전 세계로 퍼져서 모자는 지금도 드레스 코드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유난히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당시 케네디의 패션 코드는 전세계에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아마도 정치가가 디자이너를 제치고 패션 아이콘이 된 사례는 에드워드 8세를 빼면 케네디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케네디도 전통을 완전히 단절시킨 건 아니고 실크 해트를 쓴 케네디 사진은 생각보다 꽤 많이 나온다. 이 전통의 종지부를 완전히 찍은 것은 후임인 린든 B. 존슨.
다만 사생활적 면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편이다. 원앙 부부 같은 이미지와 달리 재클린 케네디(1929~1994)[45] 와의 부부 사이는 사실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케네디가 바람둥이였다는 말도 있으며[46] , 그 자신의 건강에 자신감이 없어 그 심리적 반동으로 성을 지나치게 탐닉했으며 아내 몰래 비밀 검열삭제 파티를 열었다는 주장도 있다. 마릴린 먼로와의 썸싱은 유명한 일화. 이 때문에 먼로와 이혼한 먼로의 전 남편인 조 디마지오는 케네디 일가가 마릴린 먼로를 죽게 한 배후 인물이라고 의심해서 평생을 증오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를 상대로 매일 야구방망이를 사용해서 폭행을 일삼은 사람이라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47] 그 밖에도 백악관에서 아내가 외출만 하면 수영장에서 여비서 2명[48] 과 검열삭제를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다만 이런 묘사에 대해 케네디가나 케네디 행정부 당시 전직 관료들이 반발하기도 하는걸 보면 루머나 부풀려진 측면도 어느정도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건강이 상당히 안 좋았다. 에디슨 증후군 등의 이야기는 선거 당시에도 논란이 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상의 문제는 당시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건강 상태를 사실대로 이야기했다면 '''정계 은퇴'''까지도 갈 정도였고, 평생 두 번의 병자성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49] 대학 시절 사고로 척추 수술을 받았고, 엄청난 재활 훈련을 받았지만 그 후유증이 평생 남아 있었던 듯 하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어뢰정의 침몰 후 구사일생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허리 부상이 크게 악화되었다고 한다. 선거 당시에는 하루 종일 유세를 뛰고 나면 등(허리)의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저녁에 한 시간씩 목욕탕에서 뜨거운 탕 안에 앉아 있어야 했다고 그의 전기에 소개되어 있다. 사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백악관 집무실에서도 거의 흔들 의자에 앉아 국정을 보았던 듯 하다. 실제로 21세기 들어 케네디를 다룬 영화에서는 그가 각료들과 오벌 오피스에서 회의를 할 때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대통령 재직 중 크레인에 실려서 비행기를 타는 사진도 사후 공개된 바 있다. 하여튼 이런저런 건강상 문제로 케네디는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해서 체중을 불리려 했고 남성 호르몬도 투여했다고 한다.[50] 스테로이드 복용 때문에 얼굴색이 거무튀튀해졌는데, 대중들에게는 오히려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구리빛 피부로 인식되어 그의 인기에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니 아이러니.
아내 재클린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인 존 F. 케네디 주니어는 1963년 당시 3살의 나이로 아버지 장례식에서 경례하던 모습으로 세계를 울렸으나, 그 역시 커가면서 데릴 해나와의 관계 등으로 여러 루머에 시달려야 했고, 1999년 7월 타고 다니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갑자기 아내와 함께 세상을 떠나면서 한동안 음모론에 시달리기도 했다.
차남인 패트릭 부비어 케네디는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신생아 호흡곤란 증후군으로 아버지가 죽기 수 개월 전 1963년 생후 2일만에 사망했다. 당시에는 미숙아에 관한 의학 지식이 부족하여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나, 대통령의 아들인 그의 죽음은 이후 신생아 호흡곤란 증후군과 각종 미숙아 관련 질환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image]
케네디와 재클린의 아이 중 지금도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은 첫째인 딸 캐롤라인(1957년 생) 뿐이다. 캐롤라인은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숙부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2009년 타계)과 함께 버락 후세인 오바마 후보를 공개 지지하여 그의 당선에 기여했다. 2013년 후반기부터 2017년 1월까진 주일 미국대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런 가족사와는 달리 케네디의 어머니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장수했는데, 1890년에 태어나서 무려 100세를 훌쩍 넘긴 1995년에 사망했다. 막내여동생 진 앤도 92세까지 장수하고 2020년에 사망했다.
다만 케네디 본인을 포함하여 몇몇 가문 일원들의 말년이나 개인사가 영 좋지 않다보니, 일명 케네디가의 저주라는 도시전설급의 이야기도 나올 정도인데,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몇 가지만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첫째 동생 로버트 F. 케네디는 1968년에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인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سرحان سرحان Sirhan Bishara Sirhan (Sirhan Sirhan)}의 총에 맞아 사망.
2. 둘째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도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들로 영영 미국 대통령의 꿈을 이루기 어렵게 되었다. 그나마 형들과는 달리 장수했다는 것을 위안으로라도 삼아야 할까?
3. 아내 재클린은 케네디 암살 이후에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하며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4. 아들 존 F. 케네디 주니어는 1999년 여름에 경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
7. 어록
연설에도 상당히 능해서 유명한 연설이 많다. 연설 외에도 다양한 어록이 존재한다.
케네디의 대통령의 취임 영상. 잘 보면 이 동영상에는 전후 미국 대통령이 5명이나 등장한다.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린든 B. 존슨, 리처드 닉슨, 그리고 케네디 본인. 다만 대통령에 재직한 순서가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닉슨이라서 촬영된 시점 기준으로 따질 경우 이 영상에 등장하는 미국 대통령은 총 3명.[51] 이 5명의 재임 기간은 1945년부터 1973년까지 총 28년에 달한다.[52]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My fellow citizens of the world, ask not what America will do for you, but what together we can do for the Freedom of Man."'''
자, 미국 국민 여러분.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십시오.'''[53]
그리고 세계의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베풀어 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손잡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십시오.'''[54][55]
연설문 풀버전, 한영자막.
동독 한복판에 있는 관계로 '냉전의 최전선'이나 다름없던 서베를린을 방문했을 때의 연설. 동독의 갑작스런 베를린 장벽 구축 후 위기감이 고조되던 당시 빌리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이 동독과 소련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는데, 케네디는 린든 존슨 부통령을 먼저 보낸 이후 자신이 직접 왔다. 그리고 보다시피 케네디는 명연설로 동독과 소련에 맞서 서베를린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날 무려 5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연설이 있었던 시청 주변으로 쏟아져나와 케네디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오죽했으면 자타가 공인하는 달변가인 케네디가 '''연설 도중 터져나오는 환호성에 눌려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었을 정도'''였는데, 미국 대통령이 유럽에서 이런 환대를 받은 건 전무후무한 일.'''"Two thousand years ago, the proudest boast was 'civis romanus sum'. Today, in the world of freedom, the proudest boast is "Ich bin ein Berliner!"... All free men, wherever they may live, are citizens of Berlin, and therefore, as a free man, I take pride in the words "Ich bin ein Berliner!"'''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라틴어: 'Civis romanus sum')'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일 것입니다. (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든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라는 이 말을 자랑스레 여길 겁니다![56]
이 외에도 자유주의, 세계시민, 군축, 도전정신 등으로 알려진 그의 사상이 묻어나는 어록들이 상당히 많다.
"전쟁은 오늘날 군인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명성, 특권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누릴 수 있을 때 끝나게 될 것이다."
"세계에 많은 나라가 있는데 정부끼리는 잘 지내기 어렵더라도 사람들끼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여러분이 미래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미래의 희망이다. 우리가 서로 도움의 손길을 건넬 의지만 있다면 국경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57]
"평화적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이 폭력적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Mankind must put an end to war, or war will put an end to mankind."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우리를 끝내리라.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and do the other things,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 ... Well, space is there, and we're going to climb it, and the moon and the planets are there, and new hopes for knowledge and peace are there. And, therefore, as we set sail we ask God's blessing on the most hazardous and dangerous and greatest adventure on which man has ever embarked. Thank you."'''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10년 안에 달에 가고 다른 일들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쉬워서가 아니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우주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에 오릅니다. 달과 행성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지식과 평화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의 축복을 빌며 항해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는 지금껏 인류가 승선한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위험한, 그리고 가장 위대한 모험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Dante once said that) 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in a period of moral crisis maintain their neutrality.”
"(단테가 언젠가 말하기를)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58]
1963년 6월 American University에서 행한 평화에 관한 연설의 마지막 부분. 바로 전해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은지 약 반 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한 연설이다. 비핵화 또는 핵 감축, 핵실험 금지에 대한 첫 걸음을 뗄 수 있게 된 시초가 된 연설로 평가받는다.[59] 때문에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 D-13(원제: Thirteen Days)의 마지막에 케네디 대통령의 실제 연설이 전문 중 일부가 편집된 상태로[60] 육성으로 삽입되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와 비슷하게 러시아와의 가상의 핵전쟁 위기를 다룬 톰 클랜시의 동명의 소설 원작의 영화 썸 오브 올 피어스에서 마지막에 러시아 대통령이 미 대통령과 합동 연설을 하며 그대로 인용하는 장면이 나온다."our most basic common link is that we all inhabit this small planet. We all breathe the same air. We all cherish our children's future. And we are all mortal.”
"우리들(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연계고리는 이 작은 행성의 주민이며, 모두 똑같은 공기를 마시며, 모두 자손들의 미래를 소중히 여기며, 유한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8. 한국과의 관계
케네디가 1961년 1월 취임한 후, 케네디 행정부 안에선 4.19 혁명의 여파로 1960년 6월 들어선 장면 내각이 '위기 대처 능력이 떨어져 민중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또 이런 노력이 실패해 장면 정부가 무너지면 최악의 군사정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케네디 행정부는 특사와 보좌관을 한국에 보내 경제권과 인사권을 장악하고, 장면 총리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2차대전 직후 일본에서의 GHQ 방식을 연상시키는 사실상의 신탁 통치도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5.16이 일어나면서 무산되었다.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벌어진 후 이를 보고받은 케네디는 "절망적 상황(a hopeless situation)"이라며 좌절감을 드러냈다.#[61]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이는 취임사에서도 보이듯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신생국들이 독재 등 더 가혹한 환경에 놓여 망가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한 그의 가치관과 노선을 정면으로 배격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케네디는 정치적 혼란, 빈곤에 허덕이던 한국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냥 내버려둘까 고민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지만 북한이 또 남침하기라도 하면, 냉전 당시 진영 싸움에서 밀릴까 우려한 케네디는 1963년 조기 대선을 치르겠다는 당시 군사정부의 타협책 등을 반영해서[62]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한국에 계속 원조를 제공한다.[63] 이보다 앞선 1961년 11월, 그러니까 5.16으로부터 불과 반년 만에 케네디는 당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를 백악관에서 접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의 상황이 지긋지긋했는지, 1962년에 동아시아에서 오랜 기간 생활한 소설가 펄 벅을 만난 케네디는 아시아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고는 펄 벅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내 생각에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해야 할 것 같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오. 우리는 빠져 나오고 대신에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통제하게 해야 할 것 같소"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다만 이에 대해 벅이 "그건 마치 우리 미국이 예전처럼 영국 지배로 돌아가라는 소리와 같지 않습니까?"라고 답변하자 그도 농담이라는 투로 물러났다고 한다. 카더라성 일화일 수도 있지만, 피터 콘이 저술한 펄 벅 평전에서도 나온다는걸 보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
9. 기타
미 역사상 최초의 해군 출신 대통령으로, 그 뒤를 이어 취임한 4명(존슨, 닉슨, 포드, 카터)의 대통령이 모두 해군 출신이라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기일이 한국의 제14대 대통령 김영삼과 같다. 차이라면 '현직 도중'과 '전직'이라는 것.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 첫번째 천주교 신자이기도 하다.[64] WASP의 조건 중 하나가 개신교이고, 지금까지도 개신교 신자가 아닌 대통령이 별로 없을 정도인데, 이것 때문에 안 그래도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라 받은 차별에 가톨릭 신자라는 점까지 겹쳐 정적들의 공격을 제법 받았다.
입담에 위트가 있는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당선 후 "난 대통령이 되어야만 했어요. 아이들 받아주는 아파트 구하기가 얼마나 고역이었는지"란 농담을 한 일도 있고, 프랑스에 갔을 때 프랑스 언론들은 대통령인 케네디보다 그의 부인인 재클린에게 더 집중하여 취재를 벌였는데, 이를 본 케네디는 "저를 제대로 소개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저는 재클린 케네디 여사를 프랑스로 모시고 온 남자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선 당시엔 트루먼과 논쟁을 하다 불같은 성격의 트루먼에게 개새끼란 말을 듣기도 했는데(...)[65] 이후 트루먼에게 사과하며 한 말도 나름 유명하다. 자세한 건 해리 S 트루먼 항목 참고.
에이브러햄 링컨과 여러 면에서 연관이 있다고 호사가들 사이에서 거론되기도 한다. 링컨과 케네디의 공통점 항목 참조. 다만, 이 항목에서 보듯이 케네디는 태어날 때부터 비교적 순탄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링컨은 영 그랬지 못했기에, 즉 차이점도 꽤 있기에 그냥 이런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 정도로만 알면 될듯. 그래도 둘 다 네임드 대통령이다 보니 1991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가장 위대한 대통령 조사에선 링컨과 함께 수위권에 오르기도 했다.
20세기 현대(여론조사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대통령 중 평균 지지율이 가장 높은 대통령이기도 했다. 최고 79%, 최하 56%, 평균 71%.[66] 물론 이는 그의 집권기가 상대적으로 짧았던 영향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높은 수준이긴 했다.
케네디 시점으로 당시 한국은 2공, 국가재건최고회의(마지막 코앞) 때였다.[67] 그리고 북쪽은 최용건, 김일성.
케네디는 당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도 인기가 꽤 좋아, 당시 백악관엔 대통령에게 보내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편지가 유난히 많았다고 한다. 케네디 역시 가능한 직접 이들의 편지에 답장을 써 주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를 만난 세계적 유명인사가 2명 있다.
항상 입에 시가를 물고 있을 정도로 상당한 시가 애호가였으며, 쿠바와 교역을 끊는 문서에 서명하기 직전에 H. 우프만사의 시가 1,200개비를 마지막으로 주문했다고 한다. 이것과 관련되어서 나온 이야기 중에 "케네디는 쿠바산 시가만을 사랑했지만 체 게바라는 쿠바까지 사랑했다."라고 비유한 말도 있었다. 케네디가 선호했던 시가는 2002년도에 단종된 H. 우프만사의 머신메이드 시가인 쁘띠 우프만이었다.
닉슨은 재임기 국세청을 동원해 정적들의 약점을 잡고 도감청을 하는 등 온갖 정치공작을 벌였는데, 본인만 욕을 바가지로 먹자 좀 억울했는지 "케네디도 했는데..." 라고 물타기성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일부는 사실이라고 한다. 케네디는 극우단체를 후원하는 부유층들을 압박하려고 국세청에 세무조사를 시행하도록 지시, 극우단체의 돈줄을 끊어버렸다. 또한 철강업체들의 담합을 막기 위해 철강업체들 주요 임원들의 자산에 대한 세무조사로 철강업체들의 담합을 좌절시켰다고 한다. 또한 여러 경로로 정적들에 대한 도감청과 대화의 비밀 녹음도 했다고 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후버의 감시를 몰래 알려준 것도 케네디였다고 한다. 킹 목사가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단 둘이서 백악관 정원을 산책하면서 알려줬다고 한다.
전임 대통령이 대머리[68] 라 묻히는 사실인데, 이 사람도 집안 내력으로 탈모가 좀 있었다.(...) 당장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가 그렇고 존의 형제들 역시 모두 M자 탈모가 좀 심한 편이었다. 존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정계에 입문할 때 즈음부터 가르마를 2:8로 바꾸어 앞머리를 앞으로 내렸다가 올리는 스타일로 바꾸면서 앞머리를 이용해 탈모를 요령껏 가렸다. 꽤 먼 후임인 도널드 트럼프의 헤어스타일과 원리가 유사하다. 다만 트럼프의 경우 탈모가 없음에도 그런 스타일을 고수했다. 어쨌든 이런 요령있는 헤어스타일 덕분에 형 조지프나 동생 로버트, 에드워드보다 M자 탈모가 덜 심해보인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 머리를 올린 사진을 보면 2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존 탈모는 다른 형제들 못지 않았다. 다만 존과 그의 형제들은 M자가 심하긴 했지만 정수리 탈모 증상은 나타나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탈모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10.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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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TV 미니시리즈 <케네디 가(家)>(The Kennedys)에서 그렉 키니어가 케네디 역으로 출연했다. 대체적으로 역사상의 모습을 잘 묘사했지만, 스캔들과 잔병치레에 시달리는 어두운 모습들도 등장한다. 본 드라마는 그동안 케네디 가를 두고 떠돌던 스캔들, 루머의 상당수를 기정 사실로 묘사하였고,[69] 때문에 방영을 전후로 케네디 가와 케네디 행정부 시절의 전직 관료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잠깐 등장한다. 검프는 대학 미식축구 선수로 출전하여 혁혁한 역할을 한 후에 올 아메리칸 팀에 엔트리가 올라가 백악관에 초청되어 케네디를 만난다. 그런데 만찬장에서 닥터페퍼를[70] 15병이나 마셔버리는 바람에 케네디와 악수를 할 때 케네디가 "축하하네. 올 아메리칸 팀에 들어간 소감이 어떤가?"라고 묻자, 검프는 오줌이 마려워서 "쌀 것 같아요(I got to pee)"라고 말해버린다. 케네디는 웃으면서 "이 친구가 오줌이 마려운가 보군."이라고 주위에 말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검프는 "그 젊고 멋진 대통령은 차 안에 있을 때 누군가에게 저격당해 죽었다"고 암살 사실을 언급하며, 그 동생 역시 호텔 부엌에서 총 맞아 죽었다(1968년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을 말한다)며 "역시 형제는 힘든가 봐요"라고 회상한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시나리오에서는 주인공에게 암살 임무를 주며 특유의 연설하는 어투로 명대사를 뽑아내신다. 그런데 블랙 옵스의 세계관에서는 바로 그 주인공이 케네디를 암살했다. #
좀비 모드에서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한다. 오프닝에서부터 포스를 뿜어내더니 좀비 한 마리를 죽일 때마다 명언 한 마디씩 외치는 게 장관이다. 음침해야 하는 좀비 모드가 이 사람 덕분에 유쾌해졌다. 근데 대사들을 다 들어보면 반 이상이 피델 카스트로를 까는 내용이다.(...)
마이클 셰이본의 대체역사소설 유대인 경찰연합에서는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고 '''재클린과 이혼한 뒤 메릴린 먼로와 재혼했다고 언급된다.'''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 시즌 1의 49번째 에피소드 Profile in Silver에서는 케네디가의 후손 한 사람이 과거로 시간여행을 해서 암살을 막았으나, 그 결과로 제3차 세계 대전의 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다시 과거로 가서 자신이 케네디 자리에 있음으로서 암살을 성공시키고, 진짜 케네디는 미래로 보내버리는 결말.[71] 보려면 여기로.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두 명의 조지'에서는 영국령 북미연방[72] 을 독립시키려는 아일랜드계 백인우월주의자 단체의 수장으로 나온다. 초반에 기념물인 두 명의 조지 그림을 훔치고 북미연방의 사업가 정직한 리처드 닉슨을 암살한 범인.
같은 작가의 월드 워 시리즈에서는 얼 워런에게 대선에서 발린다.
영국 대체역사소설 부활의 날에서는 쿠바 위기 당시 강경책으로 핵전쟁을 일으켜서 미국을 말아먹은 대통령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실제 역사대로 온건파였고,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독단적인 핵전쟁 결정 후 막료들이 전멸하자 역사가 왜곡되었다는 비밀이 있다.
심슨 가족에서는 에이브 심슨이 제2차 세계대전 때 PT-109라는 함정에서 케네디와 같이 근무했는데,[73] 케네디가 '''"Ich bin ein Berliner"'''를 말하자 심슨이 케네디를 나치라고 하면서 동료 수병들과 함께 케네디를 구타한다.[74]
스티븐 킹의 11/22/63에서는 주인공 커플의 활약으로 암살을 모면하지만, 이후 인권 운동에서의 미온적 대처와 극우 세력과의 준내전 및 자연재해[75] 로 인해 미국을 말아먹는 초석을 세운 대통령으로 기억된다. 퇴임 후 80년대에 사망했다고. 스티븐 킹은 이 소설 후기에서 자료를 조사해 보니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설이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라는 결론이 났다고 언급하고 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세계관에서는 에덴의 조각을 통해 국민들에게 민주적인 투표를 할 수 있게 하려다가 템플 기사단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암살당했다는 설정이다. 리 하비 오즈월드(미끼 역), 린든 B. 존슨, 심지어는 평범한 시민이었다가 우연히 케네디 암살 장면을 찍은 위의 에이브러햄 자프루더('''진짜 암살범.(!)''' 브라더 후드의 퍼즐에선 "Z"라고 명명됨.) 전부 성전기사단의 일원.
브라이언 싱어의 시리즈 영화 엑스맨 2에서 오프닝 부분 백악관에 잠입한 나이트 크롤러가 백악관의 보디가드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위에 있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공식 초상화가 비춰진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사실을 아는 관객들은 나이트 크롤러가(본인의 의도가 아닌 세뇌당했지만) 대통령의 암살을 기도할 인물이라는 복선을 보여주는 약간의 영화적인 장치. 또한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선 뮤턴트(!)였음이 밝혀졌다. 그를 암살하려는 세력이 있음을 눈치챈 에릭이 동족인 그를 구하려다 실패하고 오히려 암살범 누명을 뒤집어쓰고 펜타곤 비밀감옥에 10년간 갇히게 되었다. 케네디의 능력을 묻는 질문에 각본가는 아마도 자신의 말을 남들이 따르게 하거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능력이었을 거라고 말했다.
이터널시티 세계관에서 흑막이나 다름없는 외계인(게스트)의 존재를 발표하려다가 암살당한 걸로 짤막하게 언급된다.
영화 '버틀러:대통령의 집사'에서는 제임스 마스던이 해당 역할로 출연했다. 몸이 약해서 몰래 거실 바닥에 누워 있다가 버틀러와 대화를 하기도 한다.
보드게임 1960: 대통령 만들기를 통해 역사를 재현해볼 수도 있다. 케네디의 대선 승리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TV 토론회와 각종 이벤트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게임.
게임 배틀스테이션 미드웨이의 미국 캠페인 2번째 미션인 필리핀 방어전에서 주인공인 헨리 워커의 작전 파트너로 등장한다. 당연히 그가 정장으로 근무했던 'PT-109'를 타고 나오며 일본군의 병력 수송선 하나를 격침시키고 해안 방어를 하기 위해 본진으로 귀환한다.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워커의 불평을 들으며 대화를 나눈다. 게임 내내 데미지를 한 대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적 판정을 가진 듯 하다.
리부트 이후로 대체역사물 게임이 된 울펜슈타인 시리즈에서는 그를 레퍼런스한 프롭스트 와이어트 3세라는 캐릭터가 있다. 출생지나 집안 배경을 보면 노린 캐릭터다.
마피아 3에서 존 도노반이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대상을 찾는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High Hopes'라는 케네디를 위한 캠페인 음악을 불렀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는 2시즌에 재클린 케네디와 영국에 방문하는 것으로 2시즌에 잠깐 등장한다. 덱스터에서 연쇄살인마 주인공으로 열연했던 마이클 C. 홀이 해당 역할로 출연했다. 일반적인 매체에서 그려지는 케네디의 체격보다 배우의 체격이 매우 커서 스테로이드제 등으로 몸집을 불린 케네디를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