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의원
Représentants du peuple en 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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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혁명 시기의 제도. 1792년에서 1795년에 걸쳐 국민공회가 지방에 의원을 파견하고 전권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실행했다. '''Commissaires''' en mission이라고도 한다. 국민위병과 함께 혁명기의 독특한 군사 제도.
2. 특징
파견의원제도는 두 가지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났다.
우선 지방 행정의 혼란이다. 파리는 급격한 공화파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프랑스의 지방은 이러한 움직임에 완전히 따르지 않았고 때로는 왕당파 세력이 장악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중앙의 국민공회에서는 지방의 통제를 잡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지방에 파견된 파견의원은 지방행정의 전권을 행사하고, 임의로 혁명재판을 열 수 있었다.
다음은 프랑스 군의 움직임이다. 군부 역시 때때로 반혁명적인 움직임을 보였으므로, 국민공회는 이에 대항하여 군의 장군과 장교들을 감시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견의원은 장군, 장교, 병사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군의 재건을 위해서 물자를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파견의원은 지휘관에 대해서 해임이나 처형 등의 처분을 내릴 수 있었다.
3. 실상
혁명 기조와 전권을 위임받은 파견의원들은 거의 무제한한 권력을 행사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 질서를 바로잡고 군대를 억제하며 재건하는 데에 효과가 있기도 했지만 동시에 월권과 권한 남용, 파견의원들 간의 다툼과 의원의 개인적인 착복이 나타나는 부작용도 있었다. 무엇보다 혁명적 광기와 편견, 혁명적 상황의 극단주의, 그리고 해당 구역 안에서는 거의 무제한적인 권력으로 인하여 학살과 파괴를 극심하게 저질렀다. 방데의 왕당파 봉기 진압, 리옹 공성전, 툴루즈 학살 등 공포정치 시절의 화끈한 피바람의 대부분은 사실 파리 내에서가 아니라 분리주의와 반동 세력 진압 한답시고 파견 된 이 파견의원들 아래 저질러졌다.
공산권의 정치장교와 아주 유사한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사실 역사적 관계로 보면 정치장교를 비롯한 후대 모든 정권의 군부 복속 정책의 시조라 봐야 한다.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 들은 대선배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면밀하게 공부했으며 그 과정에서 '파견의원' 제도를 따왔을 것이다.
공화력 3년에 결국 폐지되었다.
하지만 결국 파견의원 제도의 폐지로 의회는 군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렸고, 이는 로베스피에르가 염려했던 대로 군사 엘리트에 의한 정권 탈취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그 나폴레옹 키워준 것이 로베스피에르의 친동생과, 나폴레옹과 함께 툴롱에 있었던 파견의원 살라세티라는 것이 함정이다. 로베스피에르와 파견의원 시스템이 없었다면 나폴레옹은 실전에서 군대 지휘하기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