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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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Guerre de Vendée'''
'''영어: War in the Vendée'''
1. 개요
1793년부터 1796년까지 프랑스 혁명 정부에 저항해 일어난 농민 봉기이며, 봉기한 농민군과 자코뱅이 주도하는 프랑스 혁명정부[2] 사이에 벌어진 전쟁, 그리고 그 결과 이어진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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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칠한 지역이 방데
농민 봉기의 시발점이자 중심지가 방데였기 때문에 방데 전쟁, 방데 반란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3] 과거 프랑스 혁명에 일방적으로 우호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는 방데 반란이라 불리며, 반혁명, 반동적 반란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으나, 근래에 이르러 프랑스 혁명시기에 저질러진 여러 과오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현재는 방데 전쟁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봉기는 루아르앵페리외르(Loire-Inférieure)[4] , 멘에루아르(Maine-et-Loire), 되세브르(Deux-Sévres), 방데(Vendée)[5] 이렇게 프랑스 서부에 존재하는 4개 주(Départements)에 걸쳐 일어났다.
자코뱅이 주도하던 프랑스 혁명 정부의 범죄 중 하나다. 자코뱅의 공포정치야 현실을 감안해서 어느정도 필요했다고 우길수는 있으나, 방데 전쟁에서의 학살은 단순히 반란군만이 아니라 민간인과 어린이, 아기 등 자국의 '''비무장 양민'''에 대해, '''공화파 시민'''일지라도 학살하라고 정부에서 대놓고 명령했고 시행되었다.
2. 과정
1793년 2월, 제1차 대프랑스 동맹으로 인한 대외전쟁으로 말미암아 프랑스 혁명정부가 30만 징집령을 선포하자 원래 혁명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 서부의 농민들이 징집령에 저항해 최초로 봉기했다. 3월 11일 징집관이 방데에 나타나자 농민 시위가 전개되었고 농민들이 관리와 병사들을 내쫓는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대부분 지역은 정부군이 쉽게 진압을 했으나 루아르 강 이남 지역에서는 상황이 크게 달랐다. 숄레에서는 마을 청년들이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린치해 살해하는가 하면 마쉬쿨에서 수백 명의 공화파 시민들이 학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7] 사태가 점점 악화지자 혁명정부는 서부 지역에 4만 5천 명 규모의 진압군을 파견했다.
진압군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소요는 순식간에 서부 전역으로 퍼졌다. 행상인 출신 자크 카텔리노(Jacques Cathelineau)가 이끄는 1만 5천여명의 봉기군이 방데의 주요 도시인 숄레를 장악했으며, 여기에 방데의 귀족 출신 왕당파 장교들이 가세했다. 스스로를 "왕실과 가톨릭의 군대"라고 칭한 이들은, 정부군을 몰아내면서 서부 지역 각지에서 봉기한 농민들과 세력을 합치기 시작했다. 혁명정부인 국민공회는 "왕당파의 휘장을 착용한 이들과 손에 무기를 든 모든 반란자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공표하고 진압에 나섰으나 오히려 이들은 19일 샹토네와 22일 샬롱쉬르루아르에서 봉기군에 의해 패퇴하였다.
놀란 혁명정부는 3월 23일부터 공식적으로 봉기에 대해 '방데 및 인근 주의 전쟁(La guerre de vendée et des département circonvoisins)'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방데, 루아르앵페리외르, 멘에루아르, 되세브르의 4개 주를 방데 군사지역(Vendée militaire)으로 지정하였다. 정부군은 4월에 숄레 탈환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봉기군의 기세는 5월에 들어서면서 더욱 거세져 6월까지 방데군은 지역 거점인 투아르, 퐁트네르콩테, 앙제, 소뮈르를 점령하는 등 승전을 거듭했고 방데를 넘어서 루아르 강 이남의 인근 주까지 세력을 크게 넓혔다. 이 시점에서 혁명정부가 통제하고 있던 루아르 지방의 도시는 낭트와 레자블돌론, 딱 2개 뿐이었다. 6월 29일 루아르 지방의 최대 도시인 낭트 공략에 나섰으나 봉기군의 공격을 피해 낭트로 피난 온 공화파 시민들의 결사항전으로 인해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크 카텔리노가 부상으로 사망하면서 세력이 꺾였다. 그러나 진압군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라서 진압군은 7월 샤티옹에서 패배하였고 비에에서 또다시 패하였다.
8월 1일 혁명정부는 반격을 시작하며 장바티스트 카리에(Jean-Baptiste Carrier)에게 일대의 초토화작전을 통한 "평정"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방데인들에 대한 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와 더불어 최전선인 마인츠에서 병력을 대거 빼내 진압에 투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기군의 세력은 아직도 왕성하였다. 루송에서는 1달 여에 걸친 3차례의 충돌 끝에 진압군이 승리하였으나 티포주와 몽테쥐에서 패배해 봉기군에 붙잡힌 포로 중 다수가 봉기군에 의해 참수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최전선에서 갈고닦은 실력의 새 진압군은 기존의 진압군과 차원을 달리했다. 10월 15일에 트렝블레에서, 17일에는 숄레에서 봉기군은 진압군에게 대패하였다. 살아남은 봉기군은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지역의 봉기세력과 합류하고 영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봉기군 2만 5천여 명과 학살을 피해 도망친 주민 10만여 명은 루아르 강을 건너 목적지인 노르망디의 항구도시인 그랑빌을 향해 이동했다. 11월 14일 그랑빌을 포위공격했으나 그랑빌의 정부군은 끝까지 버텼고 오히려 정부군에게 패하면서 갈레른 회군이라 불리는 회군이 시작되었다. 회군 도중에 수천 명이 굶주림과 역병으로 인해 사망하고 이들을 뒤로 한 채 봉기군은 다시 남하하던 중 12월 12일 르망에서 대패했다. 잔존세력은 루아르강 남쪽을 향하여 철수했으나 12월 23일 루아르 강 북쪽의 사브네에서 미처 도강하지 못한 마지막 봉기군이 따라잡혀 전멸당했으며 포로와 민간인 수천 명이 루아르 강 익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대규모 전투세력으로서의 봉기군은 와해되었고 이후 전투는 게릴라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1794년 2월부터 혁명 정부는 방데 보복(Vendée-Vengé)이라는 "평정" 명령의 최종 단계를 집행하였다. '지옥종대(colonnes infernales)'라고 이름붙여진 부대를 방데로 파견하여 파괴와 학살을 가했고 봉기군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체포와 처형을 집행했다. 1794년 1월부터 4월까지 방데에서는 5만 명이 지옥종대에게 살해당했으며 앙주에서는 1만 5천 명이 포로로 잡혀 그 중 절반 이상이 처형되었다. 전투는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나 정부군의 승리는 명확했고 마지막 방데군 지도자 샤레트 드라콩트리(Charette de La Contrie)도 1796년 3월 26일 총살되었다. 이후 혁명정부는 신앙의 자유 보장과 초토화 작전으로 인한 재산 피해를 일부 물어주는 등 방데에 대한 회유책을 제시하였다. 1795년 7월 20일 펭티에브르 요새와 퀴베롱에 상륙했던 왕당파 군대를 격파하고 1796년 7월 30일 혁명정부가 서부 지역의 모든 문제가 종결되었다고 선언하면서 방데 전쟁은 끝을 맺었다.[8]
3. 봉기원인
3.1. 전통적인 역사관: 반혁명
'''Anti-Révolution (Anti-Revolution)'''
당대 혁명 정부는 서부 농민들의 봉기를 "조국과 혁명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비난했으며, 왕당파와 보수적 가톨릭 세력이 주도한 반혁명으로 간주했다.[9] 프랑스 혁명 정부의 목표 중 하나가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강화였기에, 국민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들이 혁명정부를 향해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쥘 미슐레(Jules Michelet)[10] 를 비롯한 당대 역사학자들은 "순진한 서부의 농민들이 귀족과 성직자들의 기만과 음모에 놀아나 구체제 타파를 추구한 혁명에 반대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해석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19세기 말 공화주의 역사가들은 방데 전쟁의 규모를 1793년 3월 발생해 그 해 12월에 끝난 작은 내전으로 축소했는데, 이는 초기 방데의 봉기만을 강조함으로써 1794년 이후 공화국 군대에 의해 벌어진 초토화 작전과 학살 등의 보복행위를 은폐한 것이었다.
"혁명에 거역한 방데"라는 국가기억의 형성은 방데 전쟁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방해했다. 국가기억 속의 방데 전쟁에서 방데 지역의 봉기는 농민들의 무지와 광신, 그리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음모라고 치부되었다. 19세기에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장악한 공화주의자들은 체계화된 공교육 제도를 이용해 방데를 반혁명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했고, 봉건적 질서와 절대 왕정을 혁파한 혁명에 대한 저항은 이해할 수 없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더 나아가 방데인들의 외모와 풍습을 특정화해서 "공화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개한 야만인"이라고 낙인찍었다.
'방데'란 용어는 '''20세기 중반'''까지도 '공화국의 적, 망명귀족, 왕당파, 반란' 등의 용어로 사용되었다. 방데라는 단어가 반혁명과 반란의 이미지를 담게 되면서 자연히 방데는 반혁명주의자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방데 주민들은 반혁명주의자들의 후손으로 낙인찍혔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2000년대 초'''까지 그랑빌 주민들이 "방데인들을 시체로 만들어 그랑빌을 사수했다"고 운운하며 할 정도다. 이 속에는 단순히 지역 사수에 대한 기쁨이 아닌, 반혁명세력을 몰아냈다는 자부심도 담겨 있다. 이런 낙인 속에서도 조르주 클레망소 같은 정치인처럼 주류 사회에서 성공한 방데 사람도 있었지만, 그 역시 공화파 집안이었기 때문에 무의미했다. 오랜 낙인 속에서 방데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학살과 파괴는 무시당했다.
방데 전쟁의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 주민들은 국가적 무관심 속에서도 "방데 전쟁의 발발은 반혁명적인 귀족과 성직자들의 음모가 아닌, 방데 민중들의 자발적 저항에 따른 것이었음"을 기억하고 주장했다. 그러나 19세기 동안 이러한 민간기억들은 이미 권력을 독점한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을 상대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3.2. 새로운 역사해석의 대두: 대항혁명
'''Contre-révolution (Counter-Revolution)'''
20세기 중반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와 전후 사회경제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방데 전쟁에 관련해서도 기존의 주류 역사학계에 대한 해석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1960년대 연구들은 방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연구를 비판하면서, 방데 농민들을 "음모에 놀아난 무지한 반란군"이 아니라 "신흥 부르주아 및 그들과 동일시되었던 혁명정부에 자발적으로 저항한 능동적 행위자"로 간주했다. 이 시기의 연구들은 방데 전쟁의 원인을 단순히 귀족, 성직자들의 음모가 아닌 사회구조적, 지리적, 경제적 요인에서 찾기 위해 노력했다. 구조적 원인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위로부터의 강제적인 통합이 전통적 농촌 세계에 가져온 충격과 이에 대항한 농민들의 자발적 대응 양상을 추적했고 이로써 한세기 넘게 방데 주민들을 억눌러온 번혁명주의자들이란 낙인이 점차 옅어질 수 있었다.
이후 1970~1980년대 연구가 계속되면서 혁명 당시 방데의 특수성이 주목받게 되었다. 당시 방데를 비롯한 서부 지방은 봉건적 의무의 비중이 다른 지역보다 낮아 구체제의 압제로부터 얼마간 자유로웠다. 지역 귀족들은 부재지주의 비중이 타지역보다 낮았고 이에 따라 지역 주민들과 좀 더 친밀할 수 있었다.[11] 또 가톨릭교회가 단순히 종교적 단위로만 기능한 것이 아니라 농촌 공동체 역할을 했고, 이로 인해 사제와 농민 신자들 간에도 결속력이 높았으며, 가톨릭교회의 재산이 공동체의 부로 간주되었다.
상대적으로 영세한 지역이다보니 먹고 살기 위해 귀족과 사제, 평민 이 3계급의 관계가 협력적이고 원만했다. 그렇다보니 구체제의 압제와 수탈은 남의 동네 이야기였고, 혁명 정부에서는 방데의 사정도 모르고 새로운 질서를 강요하면서 반발을 샀다. 이러한 방데 지역의 특수성은 사제들을 반혁명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분위기, 성직자들을 탄압하는 성직자민사법, 수도원의 폐쇄 등에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고 이는 곧 그러한 법을 제정한 혁명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혁명정부가 신설한 조세가 농민들에게 새로운 부담이 되어 혁명에 대한 박탈감까지 생겼으며, 이런 상황에서 귀족과 교회의 몰수된 재산이 혁명정부를 통해 외지의 부르주아들에게 넘어가자, 이를 본 농민들은 공동체의 부가 탐욕스러운 개인들에게 넘어가는 것으로 느꼈다. 결국 1793년 2월 혁명정부가 국민개병제를 실시하여 30만 징집령을 선포한 것에 더해, 징집대상에서 부르주아들인 지방 하급관리들이 제외된 것이 봉기의 불을 당겼다. 실제로 방데의 봉기는 왕실과 가톨릭의 군대를 자처한 점을 제외하면 딱히 특정할만한 정치적 계획이 없이 진행되었는데 학자들은 이에 대해 정치체제를 결정하는 문제보다 공동체의 관습들과 일상에 침입해 들어오는 혁명정부의 조직적 시도에 어떻게 대응하는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에 힘입어 반혁명 대신 대항혁명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반혁명이 구체제의 특권층에 의해 주도되어 구체제의 복귀를 추구하는 움직임을 의미한다면 대항혁명은 혁명정부의 급진적 행정에 대한 민중들의 반발을 의미한다. 이는 혁명에 대한 전면적 거부가 아닌, 정치사회적 변화의 특정 측면에 대한 선택적 거부임을 규정한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학술적 연구와 성과는 19세기 이래 고착화된 공화주의적 역사서술, 즉 국가기억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이로써 방데에서 시작된 프랑스 서부지역의 봉기는 혁명정부가 지역적 특성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추진한 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과 저항을 정부군이 잔혹하게 진압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4. 학살
방데 전쟁의 구체적인 희생자 수가 주요 역사문제로 떠오른 것은 1980년대로, 이미 방데 전쟁으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오랜기간 관심을 못 받은 탓에, 학살의 규모에 대한 추정치는 지금도 상당히 오락가락하고 있다. 추정치는 최소 12만 명에서 최대 60만 명까지 존재하며, 학살인지 제노사이드인지에 대해서도 일부 의견이 갈리지만, 엄청난 사람들이 희생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민간 기록에 따르면 그냥 죽이지 않고 결혼식이라며 남녀를 묶어 수장시키거나, 아이는 말로 짓밟고, 아기는 총검으로 살해했다. 심지어 임산부조차 포도 압착기로 살해했다고 한다. 또한 많은 젊은 남녀들이 진압군에 의해 강물에 빠져 죽었다.이제 방데는 없습니다. 여자들과 그 자녀들이 우리 칼에 죽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사브네의 소택지와 숲에 묻었습니다. 내게 내려진 지시에 따라 나는 말발굽으로 어린이들을 짓이겼으며 부녀자들을 살해했는데, 적어도 이런 조치로 도적의 자식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비난할 포로도 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프랑수아조제프 베스테르만(François-Joseph Westermann), 프랑스군 장군, 정부 공안위원회 보고서[13]
[14]
1794년 12월 1일 방데 전쟁의 주 무대였던 3개 도 대표 9명의 국민공회의원들은 파리에 제출한 집단 선언서에서 "40만 명이 죽었다"며 로베스피에르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는 정말로 피해자들을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이미 실각하고 죽은 로베스피에르에게 죄와 책임을 다 떠넘기는 의도가 강하다. 막상 방데의 반란에 대해서 로베스피에르가 어땠는지는 미묘한데, 직접적으로 강경진압을 찬성하고 학살에 대한 명령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고, 오히려 <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라는 책에 따르면 로베스피에르는 방데 반란을 둘러싼 격론에 참여하지 않았고, 방데에 대한 명령체계가 약탈과 강간 등을 억제했다고 주장한다. 즉 민간인 학살은 진압하러 출병한 군대가 우발적으로, 임의로 저질렀다는 주장이다. 오히려 로베스피에르는 지방에서 벌어지는 학살 사건에 염증을 느껴 관련 책임자들을 소환해서 처벌하려던 상황이었으나 반동을 당해 죽음을 당하고 앞에서 얘기한대로 비난을 뒤집어 쓰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국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군대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고, 로베스피에르가 속한 중앙정부가 그것을 제대로 통제하고 책임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책임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또 정부군 사령관이었던 루이 라자르 오슈(Louis Lazare Hoche)가 1796년 2월 1일 내무장관에게 쓴 편지에서 방데 주민 60만 명[15] 을 절멸시켰다고 쓴 부분이 있다.[16] 다만 희생된 사람들의 비율은 지옥종대가 활동했던 지역이나 정부군과 방데군의 충돌이 잦았던 지역에서 특히 컸고, 다른 지방은 그보다 피해가 적었기 때문에 때문에 1990년대 이후 연구결과들은 대략 15만 명에서 20만 명 정도가 전쟁 과정에서 죽거나 학살당한 것으로 보고 40만이나 60만 명은 루이 사령관이 부풀려 쓴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래도 당시 방대 인구가 80만 명이 안 된 것을 생각하면 15~20만명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수치라고 할 수 있다.[17] 특히 숄레같이 방데군의 중심지였던 곳에서는 인구 손실이 40%에 달했다.
자국 정부의 어두운 역사라 프랑스 좌파를 비롯한 대다수 시민들에게 방데 이야기가 나오면 껄끄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좋게 봐야 혁명이라는 대업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잘못은 분명히 아니고 사과할 일까지는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심한 경우는 여태까지의 전통적인 시각이었던 "무지한 농민들이 귀족과 사제, 영국에 선동되고 지원받고 협조해서 반란을 일으켜서 정당하게 진압하고 죽을 짓을 한 놈들만 처형했을 뿐이다. 무고한 양민에 대한 학살은 거의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반란군이 그랬다. 또한 이 주장은 프랑스 공화국과 혁명을 음해하려는 자들이 퍼트린 거짓말이다."이라는 수준이다.(...)
이런 예를 들어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같은 역사학자는 프랑스 혁명, 특히 이 시기 프랑스의 권력을 차지했던 자코뱅을 공산주의나 파시즘같은 전체주의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준 예로 조제프 바라(Joseph Bara)라는 14살 소년의 이야기가 있다. 바라는 혁명의 열의에 도취되어 방데의 반란을 진압하는 혁명군에 지원했다가[18] 전사했다. 그리고 혁명 정부와 진압군은 이 일을 적절히 왜곡해 프로파간다를 퍼트렸는데, 그것은 바라가 어린애임을 깨달은 반군들은 "국왕 만세!"라고 외치면 살려준다고 했다. 그러나 바라는 "공화국 만세!"라고 외쳤고, 그 즉시 목이 잘려 살해당했다는 것이다.[19] 그렇게 혁명군은 그를 대대적으로 추모하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본받을 것을 권장했으며, 동시에 그를 잔혹하게 죽인 방데인들을 야만인으로 몰아붙여 반란 진압을 핑계로 비무장 민간인까지 학살하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바라의 비극적인 죽음과 이용은 몇세기 전 국가를 위해 떨쳐 일어난 정신적 누나(?)인 잔 다르크[20] 가 생각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지원한 진압군들은 비무장 민간인까지 폭력[21] 을 행사했기에 지원 당시 이런 짓까지 하리란 걸 알든 모르든 결국은 공격적인 애국심에 이용당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가톨릭은 수난을 많이 당했으며,[22] 자코뱅 좌파 에베르파[23] 에 의해서는 교회와 기념물이 파괴되기도 했다. 심지어 잔 다르크 동상과 기념물까지도,[24] 왕정과 가톨릭의 끄나풀의 상징이라며[25] 파괴되고 불태워지는 수난을 당했다. 또 일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혁명 공화국 정부에 충성을 거부하다가[26] 단두대로 처형당하였고, 이들 중 일부가 교황청에 의해 순교자로 인정되어 복자로 시복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시복될 때는 혁명이 일어난지 100년이 넘어서, 프랑스 정부와 교황청이 화해하고 사이가 개선될 때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이미 언급되었듯이 방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던 곳이다. 이외에 프랑스 혁명 당시 가톨릭이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서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파리의 성모, 성심수녀회 등 참조.
프랑스 역사 교과서에서도 학살을 별로 얘기하지 않는 모양이다. # 다만 이 책은 혁명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인 시각이기 때문에 과장이 있을 수 있고 프랑스는 역사를 국정교과서로 배우지 않기 때문에 학교의 지역과 정치 성향에 따라 채택하는 교과서 내용이 제각각일 수 있다. 어차피 방데 지역에서는 학살 사건을 다룬 교과서를 채택할 가능성이 높고 싣지 않은 교과서로 수업해도 따로 얘기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알제리 전쟁 당시의 (진압을 가장한) 학살에 묻히는 감이 있지만 터키의 EU 가입을 시도하자 프랑스가 (과거 오스만 시절의)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따지며 거부하는데 이걸 함께 터키는 방데 전쟁을 들먹이며 역정을 낸다.
이로부터 100년도 지난 지금도 프랑스 정부가 방데의 민간인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 후손들에게 사과하는 일은 복잡한 문제다. 프랑스 제5공화국이 혁명정부 그 자체를 계승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민주주의 공화정부라는 입장에서 혁명정부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프랑스 공화국의 정통성과 국가관에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부정적인 영향과 인식이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이러한 과오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프랑스 대혁명으로 성립된 현재 프랑스 공화국 헌정질서의 근간에 전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중도보수나 우파는 민주주의 공화정을 지지하는 입장이고, 심지어 친정부 좌파 성향일수록 '단지 폭도를 진압한 것 뿐인데 왜 이러냐며' 반발할 수도 있기 때문에[27] 왕정복고주의자 같은 극우 수준이면 모를까, 자연스럽게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가톨릭, 국민연합이 이 사건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공식사과할 것과 진상규명에 대한 법안 제출을 요구하고 있으나, 계속 묵살만 당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방데 지역 정치인들과 일부 학자들에 의해 이 일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상술한 이유와 제노사이드라는 용어 자체가 그 기준이 복잡하고 엄격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제노사이드 명칭이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당시 중앙이 군대에 대한 통제가 가능할 정도의 중앙통제체제가 아니었다는 점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학살지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래에서 알 수 있듯이 당장 로베스피에르의 입장도 매우 미묘하다.
- 근대식 학살이라기엔 전근대의 왕권정부의 학살과 유사하다는 것
방데 전쟁 같은 학살사례는 한국 전근대에서도 나타나는데 왕씨 몰살 등이 해당된다. 카리에가 주도한 낭트 수장과 상당히 유사하다. 둘 다 특정세력을 배 안에 쳐넣어서 수장시키는 학살방식을 사용했다. 이 예시같은 경우 공화파가 전근대 왕당파와 똑같다고 까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제노사이드가 아니라는 의견 일부에서는 오히려 제노사이드를 주장하는 측보다 희생자 숫자를 더 높게 잡기도 한다.한편 오랜 시간이 지났고 피해자 등 직접적인 관계자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해도, 방데 주민들의 혁명 정부에 대한 반감과 끔찍한 기억은 일부 계승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 후 방데 지역은 승전 기념을 거부하고 대신 학살당한 양민들을 위한 추모식을 거행했으며,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맞아 프랑스 전국이 들떠 있을 때 방데 지역과 관련해서 혁명을 축하하지 않는다는 시가 나오기도 했다.(#)[29]
1993년 프랑스를 방문한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방데에서 학살을 저지른 프랑스 혁명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 집권 사회당 정부에서는 불쾌해하며 연설을 방해하기 위해 압력을 넣었으나 조국 소련에 살던 시절에는 소련을 까고 추방되어 미국에 살던 시절에는 미국을 까던 사람답게 별로 거리낌 없이 비판했다.
자크 시라크 정부 때 청소년, 국립교육연구부장관을 지낸 뤽 페리라는 철학자는 2015년 방송에 나와서 "프랑스 혁명 당시 방데에서 학살이 있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5. 사과할 필요가 없다?
방데 전쟁에 벌어진 대학살극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현재까지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근대 유럽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학살이었던 만큼 이에 대한 사과 요구는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 혁명의 평가와 가치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많은 세력들이 이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반성은 자칫 프랑스 혁명으로 기반이 만들어진 프랑스 공화국과 지금가지 이어져온 공화국 헌법의 정체성 근간까지 부정하는 처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정부를 옹호하면서 방데 전쟁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극좌파들도 많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측은 일단 200년 넘게 지난 일이라 피해를 호소할 피해자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또 현재 프랑스 제5 공화국은 1795년 방데 학살을 벌인 프랑스 혁명정부와 직접적으로 법통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또 프랑스 공화정을 무조건 옹호하는 자들은 "농민군이 '''왕실과 가톨릭의 군대를 자처'''하며 공화정부에 선제공격을 가했"으므로, 공화정부를 일방적인 가해자로 모는 시각은 무조건 모더니즘을 까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지나친 언더도그마, 혹은 문화상대주의의 과잉 적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방데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쟁'''으로 규정하며,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교전권을 가진 대등한 두 집단이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고 보는 쪽이 합리적이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살육은 농민군 쪽에서 먼저 시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논리면, 혁명은 기존 수백년동안 유지되어 온 프랑스 왕국을 전복한 불법적인 폭동이고 방데 봉기는 그것을 진압하기 위한 방어권 행사라는 논리를 전개할 수도 있다.
또한 농민군은 단순히 국내 세력이 아니라, 단지 파리에서만 물러났을 뿐 여전히 강대한 왕당파와 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공화정부 입장에서는 과민반응을 보일만한 여지도 있고 옹호한다.
또한 비전투원까지 사살한 것은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비윤리적인 학살이 맞지만, 18세기에 일어난 사건을 오롯이 현대적인 윤리관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비전투원의 학살과 잔혹행위는 어느 시대든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죄악시되어 왔던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또한 천부인권, 자연권, 저항권을 천명하고 이를 중시하며, 자신들의 존립 근거로 여겼던 공화정부가 같은 국민을 무자비하게 대한 것은 자기모순이기도 하다.
6. 한국에서의 인식
한국에서는 일단 프랑스 혁명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져온 긍정적인 사건이라고만 대부분 인식하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해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일단 저연령층이 보는 세계사 학습만화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긍정적인 상황만을 거의 언급하며 중고등학생들이 보는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자코뱅의 공포정치로 인한 처형들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사실 알제리 전쟁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각은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외국 서적들이 한국에 들어오고 인터넷이 발달되며 외국 자료들이 한국에 유입되어, 방데 학살이 한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으로 들어온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외국 서적 자체가 프랑스 혁명을 좋게 말하고 방데에서의 일을 가볍고 정당하고 필요악 정도의 진압으로 여기거나 혁명의 혼란 중에 일어난 충돌 사건들 중 하나 정도로 보면서, 사실상 흑역사는 생략하는 프랑스 좌파 성향의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1980년대에 나온 La Vie Privée des Hommes라는 역사 그림책 시리즈[30] 에서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직접 따로 말하지 않고 마지막권인 '프랑스의 역사' 부분에서만 언급하는데, 방데에서의 농민 반란을 프랑스 혁명 부분에 제일 큰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귀족과 사제들에게 선동당한 농민들이 반혁명 반란을 일으켰다"고 언급했다. 물론 "정부군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원정을 하여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학살했다"고 언급하며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 싶지만, 방데의 주민들이 일방적으로 먼저 일을 저지른 것으로 오해할 수 있게 서술해놨다.(그림도 그냥 지나가는 정부군을 족칠 준비를 하고 매복하는 방데 반란군만 묘사했다)
참고로 이 책은 대항해시대 편에서는 흑인 노예 사냥을 "저주스러운 거래"라고 언급하고 미국의 서부개척 편에서는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야만인이 아니라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살고 있었는데 백인들이 그들의 땅을 빼앗았다"고 진보적인 면을 보이면서도, 정작 프랑스의 역사편에서는 프랑스 식민지 개척 부분을 꽤 자랑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여기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랑스 좌파도 의외로 국가주의적인 성격이 있다. 인터넷에서의 정보도 전문적으로 옮긴 것은 없고 간단히 서술된 탓에 그다지 잘 알려진 것도 아니고 가볍게 이야기될 뿐이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간략하게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나무위키에서 보다 더 자세하게 저술되었을 뿐.
프랑스 혁명에 대한 수정주의를 처음 제기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프랑스 혁명 관련 저작은 2000년대에 절판되었고 토크빌의 연구결과를 이어받아 집대성한 프랑수아 퓌레의 저작은 1990년대에 절판되었다. 둘 다 매물이 극히 적어 중고책으로도 못 구하고 대형 시립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 아니면 구해볼 방법 자체가 없다.
일부 보수 성향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혁명 세력이 4.3 사건, 5.18 민주화운동의 봉기 세력, 투쟁적인 운동을 하는 세력과 똑같다고 빗댄다. 반면에 일부 진보 성향 사람들은 대국적인 혁명 과정에서 수구 세력이 반동을 일으켜 진압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가벼운 사건이나 필요악 정도로 취급하며 혁명 정부를 옹호하고 방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며 프랑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반동주의자로 몰아간다.
사실 방데 전쟁에서의 학살 상황은 오히려 4.3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5.18 민주화운동 상황에 벌어진 학살에 더 가깝고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자유주의자[31] 와 부르주아들이 패권을 차지하고 성장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냥 둘 다 잔혹한 자국민 탄압이다. 한국 근현대사에 벌어진 학살에 대한 이념 논쟁과는 반대로 좌우 입장이 바뀐 경우이기에 흥미와 성찰을 줄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진보 계열에서 방데에서 벌어진 사건을 봉기 목적과 주체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5.18 민주화운동의 상황과 연관시켜서 보는 측면도 있다[32] .(#) 또한 징병제에 대한 비판의 예로 이 사례를 언급하기도 한다.(#)
5.18 민주화운동/왜곡 문서에선 프랑스 대혁명과 프랑스 대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은 성격이 다르고 오히려 방데전쟁을 4.3 사건과 유사하다며 방데의 학살 부정세력을 한국의 학살 부정세력과 동급으로 취급한다. 부흥 카페에서는 방데의 대학살을 4.3 사건과 같은 선상에서 보며 국민회의와 1공화국의 행위가 같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대학 내에서도 언급하는 교수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며,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온 교수들이나 근대사 관련 강의 때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는 정도에 그친다.
7. 기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독일에게 승리해서 전국적으로 축하 행사를 벌였는데 방데 지방은 축하 행사를 거절하고 방데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을 위한 추모 행사를 거행했다.
방데의 사례는 단순히 프랑스만의 사례가 아니라 19세기 근대적 국민국가의 성장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국민 만들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국민국가가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공동체로 부각되면 이와 상충하는 다양한 사회집단들은 망각되도록 강제되는데, 방데 전쟁은 그것이 극단적으로 터져나온 예인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93년>이 방데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 제목은 방데전쟁이 격화되었던 1793년을 의미하며, 대혁명과 전쟁의 물결 속에 묻혀버린 기본적인 인간성과 인간의 권리가 진정한 혁명의 본질이었음을 알리는 내용을 갖고 있다.
한편 방데 지방은 이 사건 이후 프랑스 혁명정부, 그리고 이를 무너뜨리고 황제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까지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부르봉 왕실에 대한 지지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 되었다. 때문에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해 프랑스의 권력을 잠시 장악했을 때에도 이 지역은 나폴레옹을 거부하여 나폴레옹은 방데에 진압군을 파견해야했고 부르봉 왕조 복고 후인 1830년에 7월 혁명이 일어나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루이 필리프 1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이 지역은 샤를 10세를 지지하면서 1832년 5월 부르봉 왕조를 다시 복구하려는 봉기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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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버지인 카리브해 출신의 혼혈 흑인인 토마알렉상드르 뒤마(Thomas-Alexandre Dumas)가 이 전쟁에서 공화국군 장군으로 활동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노예에서 해방된 신분인 자유 흑인에 대한 공적인 차별대우를 하지는 않았고, 당시에는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유색인종들도 군인으로 써먹었는데 그 사례 중 하나이다. 프랑스가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 나라는 아니었으며, 사적으로는 흑인(노예/자유인을 안 가리고)이라고 멸시하고 드러나지 않게 차별하는 일이 꽤 있었다. 특히 유색인종을 백인처럼 동등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로베스피에르와 달리 나폴레옹은 유색인종을 차별했고, 아이티에서 반란이 일어날 때 흑인들끼리도 자유민과 노예가 복잡하게 서로 이해 관계가 얽혀 심지어 각자의 편을 드는 백인군들과도 국적을 가리지 않고 손을 잡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서로 싸우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이 아이티에서의 반란을 진압을 명령하는 과정에서 흑인이면 전부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진짜로 학살을 벌이자 결국 흑인들이 신분에 상관없이 뭉쳐서 프랑스에 저항해서 독립했다.
방데 전쟁에서 희생당한 양민들을 기리기 위해 '''방데 시네세니'''라는 방데 지역에서 지역 주민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여는 오페라를 포함한 지역 행사가 있다. 위에서 언급된 5.18 광주민주화운동와 연관시켜 보는 시각도 이 문화행사에 대한 참고로 언급된 것이다. 이 행사는 프랑스 대통령도 관람하였다고 한다.(#) 처음엔 규모가 작았으나 이후 방데 전쟁을 포함한 지역 역사를 재연하고 공연하는 테마파크 퓌 뒤 퓌로 발전해서 프랑스는 물론 전세계의 관광객을 불러모으고 있다.([월드 리포트] 숨 막히는 지상 최대 공연 ‘역사 속으로’)
[1] 책상 옆에 제노사이드로 인정받은 홀로코스트, 르완다 학살, 킬링필드, 아르메니아 학살을 적어놓아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림에 그려진 희생자들이 결혼식 복장을 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진압군이 강물에 젊은 남녀를 빠트려 죽이고 이를 수중 결혼식이라 불렀기 때문이다.[2] 제1공화정, 국민공회 시절.[3] 이 때에도 방데 주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은 참여하지 않았다.[4] 1957년 루아르아틀랑티크(Loire-Atlantique)로 이름을 변경.[5] 낭트 남쪽에 있다.[6] 성심(聖心)은 '거룩한 사랑의 마음'이라는 뜻으로,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을 지칭한다. '예수 성심'은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성체성사, 수난과 죽음으로 드러난 예수의 사랑의 마음을 가리킨다. '성모 성심'은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이바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일컫는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예수 성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톨릭대사전 참조) 라틴어로는 Cor Sanctissimum, 영어로는 Sacred Heart라고 한다. 간혹 이 깃발 위에다 '''Dieu et le Roi(하느님과 왕을 위해)'''라는 문구를 적기도 했다. 이 상징은 오늘날 방데 주의 깃발과 문장에도 반영되었다.[7] 이는 프랑스 혁명정부군의 방데 주민들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8] 나폴레옹이 방데 부흥정책을 제시하고 교황청과 화해한 1801년을 방데 전쟁이 끝난 해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1815년, 1831 ~ 1832년까지 한동안 종종 작은 봉기들이 일어나곤 했다.[9] 지금도 방데 전쟁에서의 학살의 영향으로 방데를 비롯한 프랑스 서부 일대는 보수성과 가톨릭 신앙이 강한 지역이다. 다만 2015년 지방선거 때는 이민자, 난민 문제와 파리 테러의 영향으로 우경화가 드러나는 결과가 예상되면서도 1차 투표와 2차 투표에서 극우인 국민전선이 이 지역에선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특히 1차 투표에선 국민전선이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쳤다) (1차 투표결과 / 2차 투표결과)[10] 우습게도 잔 다르크를 찬양하는 글을 썼다.[11] 프랑스의 지방행정이 개판이 되기 시작한 것은 루이 14세때 대대로 지방을 관리해오던 귀족들, 특히 뼈대 역할을 하던 대귀족들이 중앙으로 가버리면서이다. 오랜 세월동안 적절한 통치방식을 정립해온 이들이 없어진만큼 당연히 선을 넘는 이들이 생겼다.[12] "평정" 명령에 따라 마을에 불을 지르고 방데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있는 정부군을 묘사한 그림이다. 아기를 산 채로 우물에 집어던지려고 하고 있다.[13]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편지 내용이 진짜인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실 말투에서 보면, 은근히 명령을 내린 혁명 정부에 불만을 드러내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베스테르만의 이름이 얼핏 독일어처럼 보이는데 알자스-로렌 출신이라 그렇다. 이후 줄을 잘못 선 탓인지 1794년 조르주 당통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14] 그러나 사실 베스테르만보다 더 확실하고 규모가 큰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던 것은, 루이 마리 튀로(Louis Marie Turreau,1756~1816)이다. 튀로는 줄을 잘 섰는지 주지사까지 하고 감옥에 1년 가량 잠깐 갇혀 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고 출소했다. 이것도 원래는 정부에서 그냥 사면해주려고 한 것인데, 본인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부한 것이다. 양심에 찔려서였을지는 알 수 없다. 이후 주미프랑스 대사까지 임명되며 승승장구하며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살아서 천수를 누렸다. 그는 나폴레옹 정권이 무너지고 왕정 복고가 되었는데 기소를 당하기는커녕 루이 18세에게 훈장을 받았고 에투알 개선문에 튀로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당연히 이에 대해 항의의 목소리도 있지만 먹혀들지 않고 있다. 물론 튀로 본인은 진압을 그다지 원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가능하면 진압에 빠지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명령을 받고는 정말 충실히 이행했다.[15] 당시 프랑스 인구가 2천만이라 저 숫자는 총 인구의 3%다.(...)[16] 원래 전쟁범죄를 자각하고 저지를수록 자신들이 죽인 희생자 수를 가능하면 최대한 줄여 기록하고, 피해자 측은 희생자 수가 적어도 가해자 측보다는 많다고 말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이 경우는 오히려 가해자 측이 숨기지 않은 경우로, 이는 사령관이 기록을 중시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를 전장에서 성취한 전과(戰果)로 여겼다는 뜻일 수도 있다.(...)[17] 프랑스 좌파에서 유난히 강조하고 추모하는 파리 코뮌 때 학살당한 사람의 수는 대략 3만명으로 추정된다.[18] 나이는 어렸기에 북 치는 역할 수준이었지만, 이것 역시 난전 중에 적군의 표적이 될 수 있기에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19] 다만 이것 외에도 방데 주민이 말을 훔치는 것을 막다가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20] 현대의 역사연구로는 당시 봉건주의인 중세시대여서 지금처럼 국가와 민족이 명백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같은 프랑스인인 부르고뉴인과도 전투를 벌였고 가톨릭 성녀의 이미지가 강한 잔 다르크가 과연 프랑스에 대한 애국의 상징으로 보는 일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다만 잔 다르크 스스로가 프랑스인과 영국인을 구별해서 얘기한 것을 보면, 잔 다르크 스스로는 영국군을 바다를 건너 온 침략자, 부르고뉴인을 그와 손잡은 매국노 정도로 인지했으며 (당연히 그 시대에는 있지도 않았던 사상이고 본인 스스로는 인식하지 않은 사상이지만)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가지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부르고뉴인과 결국에는 전투를 벌이기는 했지만 사실 부르고뉴와 협조 노선을 가지고 있던 샤를 7세보다 오히려 먼저 부르고뉴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협력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종교적인 성녀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지적의 경우도, 나라와 민족을 침략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마침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그렇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 항목에서도 여러번 언급되지만 정작 바라보다 선배격인데도 이 당시에는 가톨릭와 왕당파의 끄나풀로 몰려서 흔적이 파괴되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이 바라보다 좀 더 지나서야 전국적인 영웅으로 추앙받았다.(...)[21] 잔 다르크는 적군인 영국군에게조차도 자비를 베풀었거나 민간인에 대한 약탈을 금지했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프랑스 영지로 침략해온 영국군을 물리치고 영국군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일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영국 본토 및 당시엔 영국령으로 분류되던 노르망디, 가스코뉴 등의 프랑스 내 영국령에 쳐들어가자는 주장을 한 적은 없다. 사실 보헤미아의 후스파 농민 반란군을 정벌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는 흑역사도 있지만, 그게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어차피 그 편지 얼마 뒤에 적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직접 진압하러 가지도 못했다.[22] 물론 기득권 성직자들이 왕권과 귀족과 결탁해서 세금을 내지도 않고 대지주를 겸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기도 했으나, 민중의 편에서 혁명정부를 인정하고 혁명에 협조한 성직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도 곧 탄압받았다.[23]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은 딱히 찬성을 하지 않고 막기는 했다.[24] 이 때는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성녀로 인정받아 시성된 건 아니었지만, 잔 다르크가 구해낸 곳인 오를레앙 지역과 잔 다르크의 고향인 로렌 지역의 교회에서는 자신들의 수호성인 개념으로 인정받아 왔다.[25] 하지만 잔 다르크가 어떤 출신 성분이고 누구에게 배신당하고 희생당했는지 고려해본다면, 웃기는 얘기고 멍청하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그 막장스러운 북한조차도 이순신 장군 같은 민족 구국의 영웅을 "왕조에 충성했다"고 평가절하는 하더라도, 그 자체까지 깎아내리지는 않았다.[26] 이것은 당시 교황이 프랑스 혁명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삽질을 벌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27] 프랑스처럼 민주주의 공화국 혁명으로 세워진 미국 역시 극우파들은 아메리카 원주민 탄압 문제 등을 교과서에 실은 걸 두고 '미국의 정통성'을 깎아내린다면서 시위를 한 적이 있다. 1994년 미국 표준 역사교과서 파동 사건도 이런 측면과 관련 있었다. 해당 역사교과서 파동 당시에는 정당 막론하고 상하원이 표준 역사교과서 반대결의안을 의결했다.[28] 오랜 세월이 흘러 많이 잊혀지기는 했지만, 이런 그림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현대의 일부 방데 주민에게도 혁명 당시의 공화국군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 있다.[29] 진짜로 1989년 당시에 쓰여진 시인지는 객관적으로 알기 힘들다.[30] 한국에서는 동아출판사에서 세계생활사라는 이름으로 들여옴.[31] 이 당시에는 사회주의란 개념이 거의 없었을 때고 자유주의자가 진보적이었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지만.[32] 애초에 방데 전쟁은 왕정복귀(?)와 혁명 정부의 부조리함에 들고 일어났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 복귀와 헌법과 법을 짓밟은 12.12 군사반란과 하나회의 쿠데타에 비판하며 들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