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위병

 


1. 개요
2. 운용
3. 선거
4. 연혁
4.1. 창설
4.2. 혁명기
4.3. 제정 시대
4.4. 왕정 복고
4.5. 보불전쟁
5. 부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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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Garde nationale, National Guard
國民衛兵
프랑스 혁명 시기에 조직된 프랑스민병대 혹은 예비군. 정규군과는 별도의 조직으로 정규군과는 병렬적으로 존재했으며, 육군만 존재했다. 이후 21세기에 테러 문제 증가 등의 사유로 다시 부활하였다. 상단의 로고도 현세대 국민위병의 로고다.
명칭은 라파예트 장군이 1789년 부르주아층이 주축이 된 민병대를 재개편하며 탄생했다. 이후 1824년 뉴욕주의 연방군 민병대가 이 이름을 따서 National Guard라는 명칭으로 개칭함에 따라 한동안 한국어 위키백과에선 주방위군 대신 국민위병이라는 번역명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상당히 독특한 특징을 몇 가지 지니고 있는 편이다. 대공포 정치시기에 각 지방에서 질서(치안)유지를 위해 파리와 각 지방에서 결성된 것이 그 시초로 초창기에는 혁명파에서 상당한 지도자였던 라파예트 백작이 국민위병의 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법률상 선거권을 가진(상응하는 자산을 가진) 18세 이상의 시민은 국민 위병에 참가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법과 질서의 유지와 지역 방위를 목적으로 했다.

2. 운용


국민위병은 지방자치 단체 단위로 편성되었다. 구(區) 단위로 한 개의 대대가 편성되었다고 보면 된다.
소속되어 있는 시민들은 개개인의 집에 자신의 무기와 제복을 보관하다, 소집 명령이 내려지면 무장과 복장을 갖추고 소집되었다. 본래는 치안유지 조직으로 설립된 것인 만큼 치안 유지를 위하여 정기적으로 거리 순찰, 관공서 경계 근무 등의 업무를 맡기도 했는데, 숫자는 많은데 평시에 주어지는 일은 적어서 1인당 1년에 서너 번 정도만 근무 시간이 주어졌다. 생활 수준이 조건에 어느정도 상응하는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국민위병에 소속되는 것이 의무로 여겨져으며, 이 의무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면 구금 처벌을 받게 될 수 있었다.
정규군과 병렬된 조직인 탓에, 선거에서 국민위병은 정규군과 거리감을 느꼈고 심지어 직업군인을 혐오하는 성향이 있기도 했다. 때문에 자신들의 대장일지라도 직업군인 출신이라면 경시하는 경향이 다소 나타나던 것으로 보였다.
지자체 단위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각 지자체의 계층 특성이 그대로 국민위병의 대대에 반영되는 특징이 있었다. 무기는 소속 시민들이 직접 구입하고 보관과 정비도 담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부유층이 많은 도시 구획에서 모인 부대는 장비도 우수하고 통제도 원활했으나, 하층민이 많은 부대는 장비도 형편없고 통제도 어려웠다.
이러한 차별적 요소 때문에 파리 코뮌 시기에도 국민위병은 통제가 어려웠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반면에 통제가 어려운 부대일 수록 사기는 왕성했다고 한다. 당연히 통제가 안되는 부대가 사기만 왕성하니 제멋대로 닥돌하는 성향이 강해서 악평을 사는 편이었다.
급여는 소집 기간 중에만 지급되었다고 한다.

3. 선거


국민위병의 장교는 1년에 1번 독립적인 선거에서 선출되었다. 선거 제도는 일종의 다단계 간접선거였다. 같은 연대에 소속된 시민 위병들의 하사관장교를 뽑고, 선출된 연대의 하사관과 장교들이 대대의 장교를 뽑았고, 이렇게 선출된 대대 장교들이 지방자치단체 단위의 상위의 지휘관을 뽑았다.
이 때문에 국민 위병은 군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적인 성격이 매우 강한 조직이 되었다. 상층부의 정치성향에 따라서 극단적인 혁명파와 왕당파를 오가면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선거 장교제는 나폴레옹 시대에는 일시적으로 억제되었으나 한 차례 위병조직이 폐지되고 부활하면서 복원되었다.

4. 연혁



4.1.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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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을 전후하여 프랑스 혁명 이후 파리의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습격에 참가했던 민병대는 국민위병으로 개편되었다. 1791년 10월 14일 국민위병 결성을 위한 법률이 발표되었고, 1792년 7월 15일 라파예트가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파리시의 60구의 지역 마을, 마을 아래의 자치 단체마다 자치의 군대로서 국민위병이 결성되었다. 편재상으로 파리의 국민위병은 각 구 당 800명, 총 48000명. 인두세 6루블 이상의 시민이 징집되었다.
프랑스의 다른 도시들도 이를 모방하여 국민위병을 결성했다. 지방의 83주는 '~연맹'을 자칭하였고, 1790년에는 마르세유 연맹과 헤이 브레스트 연맹을 중심으로 파리에 모여 '연맹 축제'를 열면서 1만명의 연맹병이 모여 전국적인 중앙 연락 조직을 만들게 된다.

4.2. 혁명기


국민위병은 결성 당초에는 중산층이 모인 만큼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중도층 성향의 집단이었으며 루이 16세의 경호를 담당했다. 하지만 1792년 8월 10일 봉기에서 국민위병은 자코뱅 파가 각 지방에서 파리로 끌어올린 연맹병(fédérés)[1]상퀼로트 하층민들이 중심이 된 봉기 세력에게 무력하게 해체되었다.
라파예트는 망명. 1792년, 앙투안 조지프 산테르가 국민 위병을 장악하고 이끌게 되었다. 1792년 9월 21, 왕정이 폐지된 이후 국민위병은 과격한 혁명 성향을 가지게 되어 파리 시민의 뜻을 대표한다는 명분으로 의회를 압박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국민위병은 일종의 예비군으로서의 역할도 했는데, 혁명정부는 몇 차례 국민위병을 통해 군대를 징병하였다.
테르미도르의 반동(1794년 7월 27일) 이후 새로운 정부에서는 왕당파가 국민위병을 장악했다. 국민위병은 방데미에르(1795 년 10월 5일)의 왕당파 반란 때 총재 정부를 무너뜨리려 시도했으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패배하고 무장해제되었다.

4.3. 제정 시대


나폴레옹은 국민위병의 치안유지 능력에 불신을 가져, 무장을 해제하고 보다 군대에 가까운 조직인 파리시 방위대(Garde municipale de Paris)를 만들었다. 또한 국민위병의 장교 선출제도를 폐지하였다.
국민위병은 일종의 예비군으로 남겨졌고, 1809년과 1814년에 나폴레옹의 지휘 아래 프랑스 방위를 위해 동원되었다.

4.4. 왕정 복고


루이 18세는 국민위병을 복귀시켰다. 국민위병을 구성하는 중산층들은 왕정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 10세는 1827년 국민위병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무장 해제를 게을리하여 1830년 7월 혁명에서 국민위병들은 총을 들고 일어서 혁명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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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832년,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에서 발생한 6월 혁명에서는 정부의 편을 들어 시위대를 진압했다.[2]

4.5. 보불전쟁


루이 필리프 시기인 1831년에 국민위병은 새롭게 다시 설립되었다. 1848년 2월 혁명에서 국민위병은 공화주의자 측에 가담했다.
나폴레옹 3세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 국민위병의 임무를 종속적인 것으로 국한했으며 프로이센의 란트베어(Landwehr)처럼 유사시 동원할 수 있는 예비군으로 조직하자는 제안을 거부하였다.[3] 1870년 보불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항복한 이후 국민위병은 파리를 지키기 위해 대대적으로 소집되었다. 사실 이때 프랑스에 파리 방어에 동원 가능한 육군 병력이라고는 국민위병 밖에 없었다. 정규 프랑스 육군들은 나폴레옹 3세가 죄다 끌고 나갔다가 전사하거나 포로[4]로 잡히거나 지방 요새에 짱박혀 잉여가 되어버렸다. 프랑스 해군에서 해군 육전대를 편성해 파리 방어에 보태야 했을 정도다.
1871년 파리 코뮌의 봉기가 일어난 동안 국민위병 중앙위원회가 파리 코뮌의 중추를 담당했다. 파리의 국민위병은 대대적으로 확대되어, 파리 주둔 중 가담한 병력 등 무기를 다룰 수 있는 모든 파리 시민이 국민위병으로 모여 파리 코뮌의 군사력이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군에게 파리 코뮌이 격파된 이후, 국민위병은 축소되고 억제되었다. 결국 1872년 3월 14일 최종적으로 해산되었다.

5. 부활


2016년, 파리를 위시로 테러 위협의 증가로 인해 부활하였다.
[1] 연맹 축제로 올라온 다음 잔존하고 있던 병력.[2] 이를 주 배경으로 하는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는 장 발장이 바리케이드에 합류할때 정규군의 복장을 탈취하여 신분을 속이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소설 원작에서는 장 발장이 위장이 아니라 실제 이 국민위병 신분으로 자신의 제복과 무기를 가지고 합류한다.[3] 핑계는 예산등이었지만 실제로는 국민위병이 혁명때처럼 들고일어날까봐서 였다.[4] 종전 후 파리 코뮌 진압을 위한 병력 확보 차원에서 프랑스가 급히 송환받은 포로만 400,000명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