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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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유럽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끼치는 대도시이며, 영국의 런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와 함께 유럽의 금융과 경제를 담당하는 중요한 거점 도시이다.
특히 파리는 금융업이 발달해 있다. 유럽 최대의 금융 중심지인 런던이 유럽연합을 탈퇴하는 자체 투표에서 찬성한 브렉시트 이후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파리가 런던을 뒤이어 유럽 금융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는 기대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런던이 오랜 기간 쌓아온 내공이 있어 런던에서 파리로 쉽게 유럽의 금융 중심지가 교체될 가능성은 적다. 프랑스는 세계 예술, 낭만의 수도라고도 불리는데, 특히 수도인 파리는 각국의 예술가들에게 있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모이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며, 유명한 관광지가 매우 많은 유럽 대표 관광지 중 한 곳이다.
이칭은 빛의 도시(La Ville Lumière).
Paris의 s는 묵음이고 실제 프랑스어 발음은 빠히나 빠리[3] 에 가깝지만(좀 더 정확하게는 한국어식 연한 ㅎ이 아닌 거센 ㅎ소리의 빠히[4] ), 된소리를 쓰지 않는다는 외래어 표기법 규정에 따라 한글 표기시 '파리'로 쓴다.
2019년부터 코뮌과 데파르트망의 성격을 가진 특별 집합체인 빌드파리(Ville de Paris)가 되었다. 코뮌이었다가 2019년에 데파르트망이 된 것은 아니고 이전에는 데파르트망 겸 코뮌이었다.
1.1. 기후
영국 런던처럼 전형적인 서유럽의 기후를 보여준다. 여름에는 쾌적하나 겨울에는 런던처럼 안개가 짙게 끼고 음울한 풍경을 보여준다. 연 평균 기온은 12.4°C로 북위 37° 34'에 걸친 서울과 비슷하나 연교차는 북위 48° 51'이라는 높은 위도와 난류의 시너지 효과로 15.6°C에 불과하다.[5] 1월의 평균 기온은 4.9°C, 최난월 7월 평균 기온은 20.5°C로 연교차가 작아서 겨울은 부산보다 따뜻하고 항저우시와 비슷하며 여름은 모스크바, 대관령과 비슷한 시원한 날씨로 살기 좋은 기후에 속한다. 연평균 강수량은 637.4mm이지만 계절 상관없이 비가 고르게 오며, 1월 평균습도가 83%에 달한다.
연평균 일조량은 1,660시간이다. 7월 일조시간은 212.2시간으로 1년중 가장 높으며, 반대로 1월 일조시간은 62.5시간에 불과하여 런던(61.5시간)과 큰 차이 없다.
6월 하지 즈음하여 전국적으로 음악 축제(Fête de la Musique)가 열리는데 이때는 밤 10시에도 환하다.
2. 파리의 기원과 역사
그 이름의 유래는 고대 파리 지역에 살았던 갈리아의 일족 파리시(Parisii)에서 나왔다.[6] 당시 파리시족은 센 강의 하중도인 시테 섬에 살고 있었는데, 고대 로마가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 파리시 족이 살던 곳에 도시를 세운 것이 오늘날 파리의 기원이 되었다. 로마 제국 당시에는 루테시아[7] 라고 불렸는데 정식 명칭은 "파리시의 루테시아(Lutetia Parisiorum)"였다.
로마 제국 당시의 루테시아는 센 강의 시테 섬에서 센 강의 좌안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오늘날 파리 제5구역에는 루테시아 시절에 세워진 원형극장의 유적이 남아있기도 하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이민족들의 침입 때문에 결국 센 강의 좌안 지역은 포기하고 시테 섬을 요새화하게 되어 그 후 상당기간은 시테 섬을 중심으로 한 요새도시로 남게 되었다. 그 때부터 루테시아라는 이름 대신 오늘날의 파리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5세기 말, 클로비스 1세는 파리를 점령했고 508년, 파리는 메로빙거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 시절엔 아헨이 수도가 되었다. 885년에서 886년까지 파리에 바이킹 족이 쳐들어왔는데 이때 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독일어로는 카를 3세)는 막대한 조공을 지불하고 바이킹과 강화를 맺어서 무마했다. 이에 반발한 파리 시민들은 프랑크 왕국의 왕 대신 파리 백작을 더 따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센강의 우안 쪽으로 파리가 확장되었다.
989년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프랑스 국왕으로 추대되어 카페 왕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파리는 프랑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필리프 2세 때에는 파리를 둘러싸는 성벽이 완성되어 파리는 강력한 요새 도시가 되었다. 11세기에 파리 대주교좌 부속 학교로 시작한 파리 대학이 발전하여 스콜라 신학의 중심지로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독특하게 센 강 좌안은 대학을 비롯한 학교들이 발전했고,[8] 센 강 우안은 시장이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파리의 대체적인 구조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백년전쟁 당시에는 오를레앙파와 브르고뉴파의 치열한 혈전으로 파리는 상당한 혼란에 빠져야 했다. 그 후에 잉글랜드 왕과 동맹을 맺은 브르고뉴 측이 파리를 점령했고, 잔 다르크는 이를 탈환하려다가 붙잡혀서 마녀재판을 받은 후 화형당했다.[9]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군이 파리를 다시 탈환하여 파리는 다시 프랑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왕들은 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루아르 계곡에 세운 성을 더 좋아해서 파리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다.
위그노 전쟁 당시에 파리는 가톨릭 세력의 중심지였고 이로 인해 1572년에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위그노 전쟁 이후 등극한 앙리 4세는 파리를 프랑스 왕국의 명실상부한 수도로 부활시켰고 이후 파리에는 튈리르 궁, 루브르 궁, 폐병원 등의 대규모 건물들이 잇달아 세워졌다.
그러나 루이 14세 때 사실상의 행정수도나 다름없는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하면서 파리는 수도의 위상을 잃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 전까지 베르사유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11]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으로 루이 16세 일가가 튈리르 궁으로 끌려오면서 파리는 다시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 왕가에 내건 조건 중 하나(3번 조건)가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환도'''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 중요 사건들이 파리에서 일어났으며 파리에서 혁명이 과격해진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파리는 정치적으론 잇달아 일어난 혁명과 파리 코뮌 등으로 혼란스럽긴 했지만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산업화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1837년에 파리와 생 제르망 안 레이 사이에 철도가 놓인 것을 시작으로 이후 파리에서 각처로 철도 노선들이 이어지게 되었다.
파리를 근대 도시로 탈바꿈한 인물은 나폴레옹 3세 당시 센 현의 지사였던 조르주 오스만 남작으로, 중세 이래 이어져 온 좁은 골목을 넓은 도로로 바꾸고,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었으며 도심부를 재개발하고 사회기반시설들을 갖추는 파리 개조 작업을 진행했다. 오늘날 파리의 모습은 조르주 오스만에 의해 갖춰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패전하면서 파리는 다시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제2제정이 붕괴하고 제3공화정이 탄생했지만 파리는 프로이센군의 포위로 70여 일이 넘게 고립된 끝에 제3공화정의 보수파 정권은 프로이센에게 항복하게 된다. 파리의 노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정권에 저항하여 파리 코뮌을 결성하여 봉기하였지만 결국 베르사유 정부군에게 진압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와해되었다. 이때 코뮈니스트들의 의도적인 방화로 튀를리 궁전, 서청, 정부, 법원 건물 등 수많은 역사적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9세기 말에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전까지 파리는 큰 발전을 이룩했다. 여러 차례의 엑스포가 개최되었는데 1889 파리 엑스포를 기념하여 에펠 탑이 건설되었고, 1900 파리 엑스포에는 파리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침공으로 파리는 함락 일보직전까지 놓였고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해 파리는 간신히 함락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 파리에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몰려들어서 예술도시로 세계적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그 당시 파리로 건너온 예술가들은 에콜 드 파리(파리 파)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파리는 개전 1개월 만에 별 저항없이 독일군에 점령되고 말았다. 상젤리제를 행진하는 독일군을 본 시민들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겪었던 수모를 또 겪게 되어서 참담했다고 한다.(자료화면 중에는 울면서 독일군에게 손을 흔드는 파리 시민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 있다) 파리 시민들 중에는 독일에 협력한 사람도 있었는가 하면, 레지스탕스 활동에 뛰어들어 독일에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1944년 8월 15일에 파리는 연합군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파리가 함락당하기 직전,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에 주둔한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보병대장[12] 에게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콩코드 광장 등 파리의 유명한 문화유산들에 폭탄들이 설치되어 콜티츠가 히틀러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면 파리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겠지만 콜티츠는 '''''나는 아돌프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어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며 히틀러 명령을 거부하고 항복하는 길을 택했다. 이 때, 콜티츠는 명령을 따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자신의 아내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콜티츠의 말을 들은 아내는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당시 히틀러는 9번이나 전화를 하여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Brennt Paris? /Is Paris Burning?)"라고 질문했는데 이 말은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6년작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Paris Brule-t-il?' 로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영화제목이 되었다.[13] 명령을 무시하고 항복한 콜티츠와 부하들은 파리 한복판을 끌려가면서 파리 시민들에게 야유 및 욕설, 침까지 맞는 비참한 신세를 겪지만 '''레지스탕스와 경찰들이 적어도 그들을 지키면서 안전을 보장했다.''' 레지스탕스 지도자 앙리 롤 탕기에게 항복 조건으로 자신과 1만 7천 명 파리 주둔 독일군 목숨을 보장했기 때문. 물론 롤 탕기는 나중에 회고하길, "파리를 지켜준 그의 마음에 고마워하며 설령 그런 조건이 없었다해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콜티츠 중장은 종전 뒤에 전범 재판을 받아 2년 정도 복역했지만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지 않은 공을 높게 인정받아 가석방되었고 파리 시를 무사하게 놔둔 것에 대한 감사장과 명예시민증까지 받았다. 콜티츠는 1956년에 파리를 조용히 방문했는데 바로 나치 독일군 지휘본부가 있었던 바로 그 ‘호텔 르 뫼리스’를 잠깐 들러갔다고 한다. 당시 호텔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직원의 말에 의하면, 콜티츠는 아주 단정한 자세로, 하지만 세월의 경과에 조금은 놀란 듯한 눈치로 호텔을 둘러봤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호텔 매니저가 콜티츠에게 샴페인을 권했지만, 콜티츠는 사양한 채 몇 분을 둘러보다 호텔을 떠났다.
콜티츠가 1966년 숨을 거두자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 지도자와 프랑스 전현직 장군들과 외교관까지 콜티츠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명복을 빌었고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파리를 놔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2014년 7월 6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Extreme Surprise에서 이 부분을 다루었다.
헌데 콜티츠에 대한 비난이 있다. 전쟁 와중에 학살 및 전쟁범죄에 관여한 인물이건만 파리 시를 히틀러 명령을 씹고 놔뒀다는 이유로 칭송할 건 없다는 것. 하지만 워낙에 이 공로가 커서(?) 그의 죄가 덮어지고 말았다.
전후에 파리는 교외로 확장되어 원래부터 많은 인구를 가졌지만 계속 인구가 증가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1968년의 68운동은 파리에서 전 세계로 확산되기도 했다. 오늘날 파리는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세계적인 문화, 예술, 패션의 도시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3. 인구
4. 파리의 행정구역
파리는 20개의 구와 주변 위성도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흔히 "파리"라고 부르는 지역은 외곽순환고속도로 안쪽의 20개 구(아홍디스멍)를 말한다. 우편번호가 750(00)이면 파리 시내이다. 1구는 75001, 10구는 75010 등 시내 인구는 217만여 명, 외곽까지 합하면 1184만 명에 달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행정개편에서 파리는 센 현의 현청소재지로 제1코뮌에 해당했고 시의 영역은 오늘날처럼 크지는 않아 파리 지하철 2호선, 6호선의 안쪽이 당시의 시 영역에 해당했다. 지금의 형태가 된 것은 1860년 시 영역 확대시행(시 옆에 있는 공원 두 개를 파리시로 편입) 때였다. 이후 1968년에 센 현을 폐지해 파리시는 현과 동격의 자치단체로 규정되었다가 1978년에 프랑스를 각각 레지옹(지역권)으로 나누면서 파리는 일 드 프랑스 레지옹의 수도로 속하게 되었다. 한국식으로 비유하자면 '서울특별시'이기보다는 '경기도 서울시'와 같은 식이다. 20개 구는 파리를 달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며 배치되어있다. 대체적으로 센 강 서안(강 남쪽 지역)이 조용하고 안전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고, 최중심부와 북동쪽은 막장을 달린다고 평가받는다.
베를린(1920년), 도쿄(1932년), 서울(1963년), 런던(1965년) 등이 20세기 들어서 수도 행정구역의 대규모 확장을 단행한 반면에 파리는 19세기에 획정된 시 경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를 서울에 비유하자면 사대문 안과 성저십리(그것도 구한말이 아닌 조선초기 기준) 지역 정도만 '경기도 서울시'이고(내부순환로 안쪽만 서울시로 잡아놓았다고 보면 된다) 그 주변을 서울시에 편입되지 않은 채 그대로 대도시로 발전한 경기도 양주시[14] , 광주시[15] , 과천시[16] , 시흥시[17] , 고양시[18] , 김포시[19] 등등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20] 이토록 행정구역 확장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좌파 성향의 코뮌들과 우파 성향의 코뮌들 간의 갈등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출처: 브리태니커 대백과) 아무튼 이러한 도시행정체계 때문인지 브리태니커 대백과에 따르면 광역행정 상의 문제가 만만치 않다고.
그래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 파리시의 외곽도시들을 편입하여 큰 도시를 형성하는 '그랑파리(grand paris)' 계획을 발표했고, 현재 외곽도시에서는 이 계획의 일환으로 지하철 15호선 등이 건설 중이며, 도시들은 정비사업 및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에 있다. 하지만 파리 대확장 계획에 대한 반발[21] 이 만만치 않아서 가까운 미래에 단행될지 미지수.
2020년 7월 11일, 파리 1~4구가 파리 중앙구(프랑스어로는 Paris Centre)라는 이름으로 행정상 통합되었다. 굳이 행정상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구청장이나 구청사 등의 행정적인 부분들만 통합되었고, 명칭상으로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4.1. 구별 개요
4.2. 주요 명소
- 개선문(L'Arc de Triomphe de l'Étoile)
- 노트르담 대성당(La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 루브르 박물관(Le Musée du Louvre)
- 몽쥬약국(La Pharmacie Monge)
- 물랭 루즈(Le Moulin rouge)
- 샹젤리제 거리(L'Avenue des Champs-Élysées)
- 에펠탑(La Tour Eiffel)
- 그랑 팔레(Le Grand Palais)
- 쁘띠 팔레(Le Petit Palais)
- 엘리제 궁전(Le Palais de l'Élysée)
- 오르세 미술관(Le Musée d'Orsay)
- 오페라 가르니에(L'Opéra Garnier, ou Le Palais Garnier)
- 팡테옹
- 상트르 퐁피두(Le Centre Pompidou, ou CNAC)
- 앵발리드 군사박물관(Les Invalides)[30]
-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
- 소르본 대학(L'Université Paris-Sorbonne)
- 샤이요 궁전(Le Palais de Chaillot)
- 뤽상부르 궁전(프랑스 상원 의사당)(Le Palais du Luxembourg)
- 뤽상부르 공원(Le Jardin du Luxembourg)
- 바스티유 광장
- 생마르텡 운하
- 알렉상드르 3세 다리
- 보자르 다리
- 퐁뇌프(Pont neuf) 다리[31]
- 비라켐(Bir Hakeim) 다리[32]
- 몽마르트[35]
- 페르 라셰즈 묘지
- 부르봉 궁전(프랑스 국민의회 의사당)(Le palais Bourbon)
- 뷔뜨 쇼몽 공원
- 방센 숲
- 루이비통 박물관
- 오랑제리 미술관
- 로댕 미술관
- 피카소 미술관
- 튈르리 정원
- 샹드마르스 공원
- 콩코드 광장
- 트로카데로
- 파리 시청(Hôtel de Ville)
- 파스퇴르 연구소
- 콩시에주리
- 생샤펠 성당
- 몽파르나스 타워
- 카타콤#s-1.2[36]
- 파르크 데 프랭스
- 생 니콜라 뒤 샤르도네 성당(Église Saint Nicolas du Chardonnet)
베르사유 궁전은 파리 외곽, 베르사유시 (Versailles Ville) 에 있다. 파리에서 RER 을 타고 갈 수 있다.
이 중 많은 관광지가 파리 뮤지엄패스로 입장 가능하다. 심지어 뮤지엄패스만 있으면 줄을 안 서고 입장할 수 있는 관광지들도 있다.5. 교통
6. 전시장
7. 기타
- 프랑스어의 r[37] 발음은 한글로 표현이 되지 않으나 파리 현지인들은 ' 빠 ㆅㅣ'와 비슷하게 발음[38] 하고, 영어로는 '패리스'라고 한다. 헌데 미국에서 속물들은 '패리'라고 발음한다고 하는 유머가 있다. MTV에 보면 그러한 사람이 나올 때마다 "'파리'도 아니고 '패리'래"하는 농담이 흔히 나온다. 사실 영어 사용자가 ㅍ와 ㅃ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빠리'도 아니고 '빼리'라고 해도 같은 말이다. 웃음의 포인트는 프랑스어 특유의 마지막 자음의 묵음처리와 a의 발음이다. 그리고 '파리'의 발음과 표기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종종 농담거리가 된다. 외래어 표기법상 맞는 표기는 '파리'인데, 종종 외래어 표기법보다 발음 재현을 중시하여 '빠리'라고 표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파리 아니죠. 빠리 맞습니다' 라는 식의 농담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이에 대해 '그런 식으로 치면 빠리도 아니고 빠히잖아!' 라고 받아치는 사람도 있는 식. 진지 빨자면 어차피 한글로는 어떻게 쓰든 다 틀렸다. 한글 외국어 표기법을 존중한다면 '파리', 영어 발음을 따른다면 '패리스', 원어 발음을 존중한다면 '빠히'로 발음하는 것이 그나마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단어에 r이 들어간 '몽마흐뜨', '노트흐담' 등도 마찬가지.
- 관광객이라면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 주로 조심할 곳은 지하철, 카페 테라스, 맥도날드.[39] 또한 집시 차림의 유색인종 미성년자 강도단에 의한 피해가 심하다. 이들은 주로 대낮에 활동하며 주범을 잡아도 미성년자에 주거지가 불분명한 떠돌이인 데다, 이미 훔쳐낸 귀중품은 다른 운반책이 가지고 날라버리기 때문에 신고를 해도 해결도 안 될뿐더러 물건을 되찾을 확률도 낮다.[40] 아시아권 및 한국 관광객들은 현지에서 관광객 티를 매우 많이 내는 편인데다 강도들이 노리는 거의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어서 피해 사례가 많다. 특히 한국인들은 고가의 DSLR 카메라, 100만원 상당의 스마트폰, 다량의 현찰과 여러 장의 신용카드를 갖고 다니는 국민적(?) 특성 때문에 표적이 되기 쉽다. 한국인들은 유럽 여행시 특정 국가나 도시에 대한 치안 운운하며 갈까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파리는 그들보다 실제 치안이 안 좋은 부분이 있음에도 주저없이 들르는게 아이러니하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일종의 선입견도 있어서 잘만 여행하고 오는 경우도 많지만 뭐든 내가 걸리면 100%가 되는거니 조심해서 나쁠건 없다.
- 파리인을 지칭하는 파리지앵이라는 말이 제법 자주 쓰인다. 비슷하게 자주 쓰이는 뉴요커가 세련된 직장인 느낌 비슷하다면 파리지앵은 선진적인 예술인, 문화인쯤을 나타내는 듯하다. 한편, 지방에서 파리지앵이라고 하면 왕재수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한다고. 오죽하면 파리지앵은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라고.. 사실 한국에서도 시골 사람들이 대도시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점이 있을듯.
- 서유럽의 유명 도시 중 위생 상황이 개판인 것으로 악명 높다고 한다.(...) 쓰레기나 개똥이 많은 탓도 있고, 도시 자체가 박물관을 겸하는 특성상 도로조차 제대로 갈아엎지 못해서 꼭 오물 문제가 아니더라도 꽤 지저분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기사 그래도 쓰레기통[41] 을 설치하고 쥐 잡기 운동을 전개하는 등 위생 개선을 위한 노력은 어느 정도 하고 있다. 그리고 파리 메트로는 유럽의 메트로 중 최악이다.
- 몽마르트르 언덕이 두 개가 있기 때문에 말을 잘못하면 엉뚱한 몽마르트르로 갈 수 있으니 조심. 야경 본다고 절대 밤에 가지 마라. 신변을 보장하지 못한다. 18-19구는 오후 6시 이후엔 파리에 익숙하지 않은 관광객이라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해가 길든 짧든 시간대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위험 할 수 있는 곳이다. 파렴치한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도보로 몽마르트르를 올라가는 것보다 몽마르트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추천한다. 도보로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올라갈 수 있는 야트막한 곳이라고 도보로 올라가다가 이들을 만나면... 참고로 이들은 한국어도 능숙하게 한다. 굳이 도보로 올라가겠다면 공원으로 올라가는 쉬운 길 말고 그 옆에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이 그나마 덜 위험하다. 다만 이쪽은 공원으로 손쉽게 올라가는 것과 비교되지 않게 힘들고 올라가는 동안 찌린내에 코가 고문당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쪽도 팔찌단과 같은 이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위의 코르티츠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파리에는 온갖 아름다운 건물들과 문화 유산이 가득하다. 따라서 파리의 건물들은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건물 내부 리모델링은 자유롭지만 외부 리모델링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심지어는 이제는 아예 쓰지 않는 굴뚝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고 있다. 이는 파리의 모습을 후손에게까지 온전히 남겨두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니 영화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에서 이 파리 시내를 부수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 이런 특징 때문에 파리지앵들은 도시를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박물관의 전시품처럼 다룬다는 비웃음을 받는 경우도 있으니 참고하자. 즉, 사람이 사는 도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습이 바뀌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곧 도시의 발전이자 변화인데 '지금 이 순간의' 형태에 극단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포기해버렸다는 것. 이런 입장에서 보는 사람들은 파리는 사실상 현대도시라기보다는 벨 에포크 시대의 도시처럼 보인다고 말하기도 한다.
- 파리뿐만 아니라 유럽의 대도시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경향이 강하다. 단적으로 체코의 프라하 같은 경우는 공산정권 시절을 거치며 실제로도 발전이 정체된 점을 감안해도 구 시가지 경관에 대한 집착이 파리보다 훨씬 더 심하다. 더구나 유럽은 다른 문화권의 대도시와 달리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편이고 현재 기준으로도 멀쩡하게 리모델링만 해서 쓸 수 있는 건물들이 태반인데다 어지간한 전쟁이나 화재, 자연재해로 인해 도시 전체가 리셋되지 않는 이상[42] 딱히 일부러 갈아엎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어쨌든 시간에 따라서 도시경관이 지나치게 변하는 아시아, 북미권 대도시와는 달리 좀 낙후된 느낌이 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반대로 보면 옛 것을 보존하며 그 개성을 지킨다고 볼 수 있다. 그냥 유럽에서 '도시'를 이해하는 방식이 타 문화권과는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서울과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상반되는 도시라고 볼 수 있다.
- 도시의 유명세만큼 사람들은 몰리고 도시와 건물은 확장되어야 하는데, 위의 이유들과 함께 지반의 특성상 옛 건물들을 유지 중이다. 파리라는 도시 자체의 지반이 그다지 단단한 땅이 되지 못하다고 한다. 늪지 위에 지어진 도시라 건물을 새로 높게 올리고 싶어도 골치가 아픈지라, 인구는 늘어나고 집은 한정되어 있고, 집값은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가고[43] , 오늘도 유학생들은 폭 1m가 안 되는 나선계단을 기어올라 6층 옛 하녀방에서 새우잠을 잔다.
- 상기된 이유로 파리의 마천루와 초현대식 건물들은 부도심인 라데팡스에 몰려있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웬만한 쇼핑몰 또한 거기에 다 있다.
- 프랑스 저작권법은 '파노라마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므로[44] 루브르 유리피라미드, 퐁피두 센터처럼 저작권자가 생존해 있거나 사망 후 70년을 채우지 못한 건축물과 공공전시물의 촬영 및 상업적 이용은 엄격히 제한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에펠탑 역시 낮에 찍은 사진만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야경은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하다. 에펠탑을 밤에 찍으면 안 되는 이유
- 프랑스에 동성애자들이 많다는 사실이 유명하거니와 특히 파리에서는 마레 지역에 세련된 동성애자들이 많이 모여든다. 지하철에서 동성인 사람이 내게 윙크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착각이 아닐 수 있다.
- 혁명기념일마다 파리에서 한국 광복절 행사 이상으로 큰 축제를 벌인다. 개선문 쪽에서 온갖 전투기와 군 수송기들이 곡예 비행을 벌이며 팡테온에서는 군악대 연주 공연이나 프랑스군 전투 차량 체험 행사도 벌인다.(2014년 기준) 밤에는 에펠탑 아래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며 거의 마지막에 가서는 불꽃놀이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밤에 하는 행사는 당연지사 방송으로 나간다. 더욱이 2014년은 1차 세계대전 100주년이라 더더욱 크게 연 것으로 보인다.
- 한국의 수도권 집중 문제 못지 않게 프랑스 역시 파리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 사회 기능이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서울 집중보단 훨씬 덜 한 편이다. 단순 인구만 봐도 파리 권역은 프랑스 인구의 1/6이 거주하지만 한국의 수도권은 인구 절반이 거주한다. 파리나 리옹이나 마르세유나 정말 지방 시골 도시가 아닌 이상은 생활하는 환경이나 접하는게 비슷하다. 하지만 서유럽에서는 사실 프랑스만큼 수도에 많은 기능과 인구가 집중된 국가가 별로 없다.[45]
- 매년 여름 7, 8월경, 파리해변 이라는 뜻의 파리플라쥬 Paris plage라는 볼거리가 생긴다. 센 강을 중심으로 인공 해변을 만든다. 지방도시에서 백사장 모래를 가져와 미쳐 바캉스를 가지 못한 현지인과 관광객들에게 해변 느낌을 선사하고, 반대로 파리의 예술품들을 지방 도시에 보내 볼거리를 제공한다.
-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교수發 오해 중 하나가 프랑스인은 자국 문화 자부심이 높아서 영어를 사용하면 무시하고 지나간다?인데 사실은 그 프랑스인이 그냥 영어를 모르는 거다. 애초에 이원복 교수 본인부터가 만화에서 저 편견이 오해라고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영어 못 하는 한국인한테 외국인이 접근한 것과 같다. 현재는 한국처럼 영어 교육이 많이 나아진 상태. 평균적 수준으로 보면 한국 사람 영어 보다는 나은편이지만 역시 나이든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영어도 못한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워낙에 관광객이 많아선지 대중교통 기사나 파리 시내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간단한 영어는 하는 편이다.[46] 하지만 정말로 간단한 관광영어 수준이니 큰 기대는 말자. 표지판이나 음성안내 등도 관광객이 미친 듯이 몰려드는 현실에도 불구, 배째라 수준으로 부실하다.[47] 그래도 길 가다 젊은 사람에게 어설픈 불어로 길을 물어보면 영어로 답해주거나, 가게에서 어버버어버버 하고 있는 당신을 어여삐 여겨 주인에게 "아저씨, 얘가 이것 좀 사고 싶대요." 정도로 거들어주는 경우는 흔하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의 영어 학습자가 증가함에 따라 자신의 영어실력을 뽐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늘어서 어설픈 불어로 질문하면 거만한 표정과 함께 어설픈 영어로 답해주는 경우 역시 증가하고 있다.
- 19세기 때부터 망명을 온 사람들이 많은 도시로 유명했다. 정치가, 사상가, 작가, 심지어 구 왕족 등등 신분에 따라 다양했는데 카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 호치민 등등 매우 많다. 1979년에는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터키, 이라크 등을 떠돈 끝에 몇 개월 정도 파리에 머물다가 이란에서 혁명이 터지자 귀국한 바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1971년 건축가 김중업이 서울의 도시계획 및 건축에 관한 정부시책을 비판한 일 때문에 당국으로 부터 찍혀 추방된 적이 있었는대 주한프랑스대사관을 설계한 공으로 프랑스로 부터 받은 훈장으로 인해 파리로 망명할 수 있었다. 1979년 홍세화 씨가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자 파리로 망명하여 20여 년간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가 지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그의 생애와 파리에서의 생활을 담은 책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사유로 망명을 떠난 이예다는 그의 난민심사 기간에 파리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 위와 같은 이유로 파리는 '테러의 도시'란 오명도 따라다닌다. 종교나 사상이 다른 망명객들끼리 총알과 폭탄 주고받는 일이 1970~80년대에도 빈번했다. 2015년 11월 13일, 무장괴한들에 의한 테러로 백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2015년 11월 파리 테러 문서 참고. 이로 인해 프랑스 수도권에 황색경보, 그 외 지역에 남색경보가 발령됐다. 그래서 프랑스에는 대테러 임무를 전담하는 장관급 부서를 별도로 편성한다.[48]
- 2017년 7월에 LA와 삼자합의가 이루어지면서 파리가 2024년 올림픽 개최도시로 선정되어, 1924년에 치러진 대회에 이어 무려 100년 만에 하계올림픽을 다시 열게 되었다. 정상적으로 개최된다면 영국의 런던의 뒤를 이어서 파리는 올림픽을 3번 치르는 2번째 도시가 된다. 원래 2012년 올림픽을 두고 영국의 런던과 경쟁을 했으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결정적인 실언으로 인해 결국 런던이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다.
- 난민촌을 중심으로 슬럼화가 진행된다는 의견이 있다. #관련 유튜브 영상
- 이민자들을 중심으로한 범죄조직들이 설치고 있으며 프랑스 마피아인 밀리유가 유명하다.
- 2018년 12월, 마크롱 정부 퇴진을 요구하는 노란 조끼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 파리 시내에서는 노상방뇨로 거리에 오물이 많아 지저분하니 조심하는게 좋다.[49][50]
- 전술한 파리에 대한 환상과 그에 대비되는 현실 때문에 파리 신드롬이란 말도 생겨났다. 물론 더 정확하게는 파리 역시 그냥 사람들이 사는 대도시일 뿐인데 자기 지역에 대한 불만이 다른 지역에 대한 일종의 환상으로 투영된거라고 보는게 맞겠지만. 결국 어느 지역이던 각각의 장단점은 있기 마련.
[1] 오래전부터 센 데파르트망 지사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행정구역 개편 이후에는 파리 (데파르트망) 지사로 바뀌었고 일드프랑스 레지옹이 생긴 뒤 (다른 주요 데파르트망 지사 처럼) 일드프랑스 레지옹 지사도 겸하고 있다. 빌드파리는 데파르트망 겸 코뮌이지만 시장은 코뮌의 행정만 겸하고 있기 때문에 데파르트망으로서의 파리 행정은 파리 지사가 담당한다.[2] 서울면적의 1/6배.[3] http://frdic.naver.com/fkEntry.nhn?entryNO=50133[4] 구개수 마찰음으로, 한국어 ㅎ과는 괴리가 있는 발음이다. 이를 반영해 빠히라고 쓰거나 드물게 빻히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5] 다만 최저기온 극값은 서울보다도 낮다. 1879년 12월 10일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한파가 닥쳐 -23.9°C 의 최저기온을 기록했다. 서울의 최저기온 극값은 1927년 12월 31일의 -23.1°C[6] 역시 여기서 유래하여 이탈리아어로는 파리를 파리지(Parigi)라고 부른다.[7] 현대 프랑스어로는 Lutèce(뤼떼쓰)라고 한다. 원소 이름 루테튬은 여기서 유래했다.[8] 대표적인 대학 지역으로 꺄르띠에 라땅이 있다[9] 기실 말하자면 잔 다르크를 처형한 건 잉글랜드군이 아니라 파리 시민들이었다. 그러한 탓에 오늘날 파리에는 커다란 잔 다르크 동상이 세워졌다. 파리 시민들의 잔 다르크에 대한 속죄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10] 그림에서 강가 왼쪽 하단에 있는 자그마한 격자모양의 성채가 루브르 궁이고, 그 아래쪽으로 회랑처럼 길게 난 건물이 튈르리 궁이다.[11] 이는 파리 시민들의 불만거리였고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12] 미군 기준 중장급 ,Dietrich von Choltitz,1894~1966[13] 코만도스2의 마지막 미션 제목도 'Is Paris Burning?'다.[14] 현 양주시+의정부시+동두천시+남양주시+구리시+도봉구+노원구+중랑구+광진구[15] 현 광주시+하남시+성남시+강남구+송파구+강동구[16] 현 과천시+안양시+군포시+동작구+서초구[17] 현 영등포구+구로구+관악구+금천구+광명시[18] 현 고양시+마포구+서대문구+은평구[19] 현 김포시+부천시+양천구+강서구[20] 프랑스의 행정구역 체계에 대해 언급하자면, 레지옹(région)은 광역자치단체로서 한국의 도에 해당되고, 데파르트망(départements)은 한국의 특정시에 해당된다. 아롱디스망(arrondissements), 캉통(canton)은 일반시 내지는 읍/면/구, 코뮌(commune)은 프랑스 내의 최소 행정 단위로 보통 시를 의미한다. 파리, 리옹 같은 구(아롱디스망)가 있는 도시를 제외하고는 최소 행정 단위는 시이다. 대한민국처럼 동이나 읍, 면이 없다. 파리에도 동이 없다. 파리의 최소 행정 단위는 구(아롱디스망)이고 다른 지역의 시와 비슷한 지위를 지니고 있다. 설명은 이렇게 했지만 단순히 대한민국의 행정구역과 비교하기 어렵다. 파리만 하더라도 하나의 Département 이면서 하나의 Commune이다. 그리고 파리나 리옹이나 마르세유 같은 대도시에 있는 arrondissement은 다른 도시와 비슷한 위치이다. [21] 파리 추가 확장 후 조직 개편을 염려하는 일드프랑스 레지옹 정부 소속 공무원들의 반발(한국으로 치자면, 도의 일부를 특별시나 광역시에 할양하는 것을 원치 않는 도청의 속내에 비유될 수 있음)과 파리 추가 확장을 원치 않는 파리시내 주민들의 반발 등.[22] 각 구별 이름은 1859년 황제 칙령으로 제정되었으나 실생활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23] 파리에서는 상업지구와 주거지구 간의 구분이 거의 없다. 라파예트 같은 백화점 건물이나 샹젤리제 거리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건물이 아랫층은 상가이고 윗층은 아파트인 주상복합 건물로 지어져 있다.[24] 사실 정말 명품 샵이 밀집한 구역은 Rue du Faubourg Saint-Honoré이다. 그냥 긴 골목길처럼 생겼으나 포진해있는 샵의 면면을 보면 샹젤리제와 비교를 불허한다.[25]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면 상업의 거리로 명품을 제외한 프랑스에 들어와 있는 대부분의 메이커를 이 거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거리를 지나는 사람은 많지만 장사는 잘 안되는 편인지 최근에는 많은 상가들이 문을 닫고 있다.[26] 파리에서 치안이 제일 안 좋다는 18구는 의외로 4위.[27] 참고로 조심할 점이, Clichy라는 이름이 붙는 지역은 메트로 역 기준으로 파리에 총 3군데 있는데(애초에 Clichy가 코뮌 이름이다) 세 군데 다 각각 중요성이 있어서 여행을 온다면 숙소가 어디 쪽인지 꼭 확인해야 한다. 대략 북쪽부터 Mairie de Clichy, Porte de Clichy, Place de Clichy 순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마리는 그렇다 치고 포르트 드 클리시는 지선과 RER C선 , 플라스 드 클리시는 2호선과 13호선의 환승역인데, 두 역은 도보로 거의 20분 가까이 떨어져 있고 그 사이가 17구에서도 치안이 별로 안 좋은 곳 중 하나라 그냥 메트로 타고 돌아가는 게 훨씬 낫다.[28] 위의 이미지 중에 북쪽에 18구 구획과 면한 국립경기장(스타드 드 프랑스 Stade de France)이 위치한 생 드니(St.Denis)는 경기장 주변만 빼고 그 밖으로는 파리 10구보다도 수도권에서 제일 치안이 안 좋기로 악명 높은 동네다.[29] 한국인들만 잘 모른다. 다른 나라 관광객들은 대부분 들르는 관광지.[30] 나폴레옹 묘도 이곳에 있다. 에펠탑으로 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한다. 가면 중세시대 무기들부터 2차 대전과 현대까지의 무기와 군사장비들을 볼 수 있다.[31] 센 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이름은 역설적이게도 새 다리란 뜻.[32] 인셉션의 로케지로 유명하다.[33] 한국에서 몽마르트 성당이라고 알고 있는 곳이다.[34] 거리미술가와 버스커들이 집합하는 장소. 한국의 대학로의 사실상 모델 같은 곳. 영화 《몽마르트 파파》의 장소이기도 하다.[35] 파리 18구 일대[36] 13개의 마경 중 하나[37] 구개수음의 일종인 유성 구개수 마찰음. 유럽 밖에서는 보통 g(가령 타타르어에서는 ğ, 알류트어에서는 ĝ라고 쓴다.)라고 쓰며 아이티 프랑스어에서는 r을 그냥 g 비슷하게 발음한다. 유럽의 언어들 중 이 발음이 있는 언어에선 보통 r로 이 발음을 표기하는데 덴마크어, 독일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그리고 독일어처럼 상당히 많은 언어(단, 지역에 따라 다르다)에서 이 발음이 발견된다.[38] 그래서 파리에 거주하는 한국 교포들은 파리가 아니라 빠히라고 불러달라는 이들도 있다.[39] 특히 18 구역 내에 위치한 맥도널드 매장에서는 소매치기 등을 막기 위한 경비원까지 세워놓고 있다. 절대 주머니에 귀중품 또는 핸드폰을 넣지 않도록 하자. 청바지 주머니도 훅 털어간다.[40] 범행수법은 여자아이들이 먼저 피해자를 낚는다. 관광객들에게 미소로 여자아이들이 접근해서 앙케이트에 참여해 달라거나 길을 안내해준다고 한 뒤, 관광객이 호감을 보이거나 경청하면 주변에 흩어져있던 집시들이 그 관광객 주변을 에워싼다. 단체로 표적을 정신없게 만든 뒤 지갑이나 스마트폰을 훔쳐가는데, 시선교란을 맡는 여자아이들과 금품을 훔쳐서 달아나는 남자아이들이 4인~10인 1조로 행동한다고 한다.[41] 다만 링에다 봉지 걸어놓은 허접한 쓰레기통이다. 9.11 테러이후 테러 문제 때문에 철제 쓰레기통을 죄다 철거하고 속 내용물을 볼 수 있도록 비닐 봉지로 대체했다.[42] 단적으로 유럽에서 몇 안 되는 현대식 도시들인 프랑크푸르트, 로테르담, 바르샤바는 모두 2차대전 당시 송두리째 박살난 곳들이다. 하지만 이 조차도 도시경관을 현대식으로 만든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고 대부분의 도시구역을 빠르면 2차대전 종전후 늦어도 냉전 종료 후에 전쟁 전 모습으로 복원하는 편이다.[43] 파리 월세는 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싸다. 그 덕분에 유럽에선 런던과 함께 주택 임대료가 가장 비싼 도시로 손꼽힌다. 그러나 매매가격은 서울과 큰 차이가 없다.[44] 프랑스 지적재산권법 122조 5항에 근거한다.(링크)[45] 표준어같이 중앙집권적 행태가 서유럽에서 제일 강하다.[46] 그러나 이마저도 파리를 벗어나 일드프랑스 같은 교외지역으로 나가면... 결과가 좋을는지 장담할 수 없다.[47] 특히 불어 지명을 영어 독음으로 읽으면 아예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길을 물어보려면 어설픈 영어보다는 지도나 정류장명이 나온 사진을 들이미는 게 낫다. 그럼 적어도 "위."나 "농.", 둘 중 한 대답은 들을 수 있으니.[48] 출처: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 편 (이원복 저).[49] 일단 노숙자를 생각하겠지만 범인은 노숙자뿐만이 아니다. 교육받은 사람들이나 잘 갖춰입은 샐러리맨 혹은 노신사들은 설마 그러지 않겠지만, 화장실이 사실상 유료인 파리 특성상 낮에는 잘 안 보이는 곳에서, 밤에는 아무데서나 노상방뇨하는 사람들은 정말 흔하다.[50] 길거리나 역 근처에 유료화장실이 있긴 한데 그 조차도 찾기가 쉽지 않다.(심지어 쇼핑몰 화장실인데 유료인 곳 조차 있을 정도) 그래서 결국엔 지천에 깔린 카페 화장실을 이용해야하는데 그냥 쓰려면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고, 아예 공짜로는 못 쓴다고 대놓고 말하는 가게도 수두룩. 유료 화장실이 1~2유로인데 이게 유료 맞나 싶을만큼 끔찍하게 더럽고 관리가 안 된다는 걸 감안하면 그냥 돈 조금 더 주고 커피 한 잔 시킨 후 화장실 쓰는 게 낫다보니 결국 사실상 유료 화장실. 참고로 이건 관광객 뿐만이 아니라 애초 파리지앵이 사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