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로즈 1세

 


사산 왕조 제20대 샤한샤. 재위기간 459 - 484년
1. 개요
2. 집권
3. 대기근
4. 아르메니아와의 분쟁
5. 에프탈과의 싸움


1. 개요


야즈데게르드 2세의 장남이다. 네스토리우스파의 지지자였으며, 칼케돈 공의회를 박해하였다. 호르미즈드 3세를 살해하고 집권한다.

2. 집권


시스탄의 총독으로 활동 중 호르미즈드 3세가 즉위하며 왕위 계승에서 밀린다. 그러나 호르미즈드 3세에게 적대적이던 에프탈과 파르티아 7대 가문[1] 중 하나인 미흐란 가문의 라함의 지원을 받아 제위에 등극한다.

3. 대기근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464년에서 471년에 이르는 7년동안 작물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대기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기후는 건조하였으며,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에서 물이 흘러내려오지 않아 작황이 좋지 않아 수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페로즈는 이러한 현실속에서도 지혜로 대처하고, 그러한 역경에 직면해 엄격한 모습을 보여주어 대기근을 극복하게 된다.

4. 아르메니아와의 분쟁


481년에 카프카스에 독립을 외치는 반란이 일어났다. 페로즈는 아르메니아에 페르시아인 총독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반란은 거세졌으며 한 기독교인이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페르시아인 총독은 이베리아에서 페르시아의 지배력을 되찾기 위해 반란을 진압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 후 페로즈는 군대를 보내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결국 아르메니아의 왕은 살해당했으며, 미흐란 가문은 페르시아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페로즈는 미흐란 가문의 인물을 신임하여 지휘자로 보내는 실수를 범한다. 결국 그는 아르메니아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몇 달뒤 송환된다. 이러한 지위자를 곧바로 바꾸는 정책은, 이 시기동안 아르메니아는 페르시아인들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된다.

5. 에프탈과의 싸움


대기근에서 회복된지 얼마되지 않아, 북부에서 에프탈과 전쟁이 일어났다. 에프탈의 왕에게 모욕당한 것이 발단이었으며, 페로즈는 에프탈의 영토로 침범하여 퇴각하는 그들을 뒤쫓았다. 하지만 페로즈 1세가 에프탈을 언덕으로 몰아붙였을 때, 그들의 반격에 페로즈 1세는 참담한 패배와 함께 항복하게 되고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황태자인 카바드 1세를 인질로 잡히게 되었다.
이후 굴욕을 갚아주기 위해 페로즈 1세는 절치부심하고 복수를 준비한다. 사상적인 통일을 위해 사산 왕조의 역사를 페르시아의 전설상의 왕조인 카야니드 왕조와 연결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구 파르티아 세력에게도 하나였던 시절의 고대 왕들의 후계자라는 이름으로 통합을 노렸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카야니드의 시조 카바드가 조로아스터의 첫 번째 후원자라는 전승에 따라 전폭적으로 교회를 지원하여 종교에 의한 사회 통합을 시도하였다. 황태자의 이름을 카야니드 왕조의 전설상 시조인 카바드로 고친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집권 말기에 5만 내지 10만의 병력을 모으고 동생 발라시를 크테시폰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에프탈 정벌에 나선다. 페로즈 1세는 박트라에 도달하였으며, 에프탈의 왕이 제안한 평화 조약을 거절하였다.
마지막 결전을 앞둔 페르시아군의 분주함을 타, 에프탈의 왕은 소수의 부대를 페로즈로 향하게 해 정찰한다음 본대는 매복을 준비하였다. 결국 작전은 성공하였으며, 매복한 에프탈 군의 기습[2]에 제대로 당한 페르시아군은 대패하고 페로즈 1세는 전사한다. 대군이 궤멸되어 타격을 입은 페르시아는 에프탈이 동부를 약탈하는데도 어찌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프탈의 왕은 페로즈의 시신을 존엄히 대하였으며,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 페르시아에 보냈다. [3] 그 후 사산 왕조에서는 발라시가 집권하였다.

[1] 사산 조의 시대였지만 파르티아 7대 가문은 제국의 동부에서 사실상 독자적인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2] 전승에 따르면 에프탈은 평원에 기다란 도랑을 파두고 갈대와 흙을 살짝 덮어 선봉의 기병을 봉쇄하며 전진 중이던 후위 기병대가 함정에 빠진 선봉 기병대에 부딪혀 전멸했다고 한다. 이후 안개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던 중군 보병까지 매복으로 대패시켰다고 한다.[3] 단,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전승도 있다. 사망에 따른 전승도 도랑에 빠져서 자신의 진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악하다가 죽었다는 설, 도랑에 끼어있다 굶어죽었다는 설, 도랑에서 빠져나왔지만 야생동물 밥이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