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제타이로이
πεζέταιροι
Pezhetairoi/Pezhetairos
1. 개요
페제타이로이[1] 는 마케도니아 왕국과 디아도코이 왕국들의 팔랑크스보병 부대로, 이들 부대의 중추에 해당하는 부대였다. 가로 16명 세로 16명으로한 부대에 총 256명으로 구성[2] 되어 있었다.
2. 장비
그들은 뿔 모양의 투구[3] 와 흰 린넨 갑옷을 장비했으며 팔랑크스의 상징인 호플론을 최대한 줄여 지름 1m 이었던 것을 한 팔에 걸 수 있게 지름 60cm로 줄이고 거기에 긴 가죽끈을 달아 목에 메고 한 팔로 방패를 들 수 있게 만들었다[4] . 그리고 사리사라는 4~5m짜리 장창과 팔카타나 크시포스(ξίφος)로 무장하고 있었다. 필리포스 2세 부터 알렉산드로스 3세 까지는 위에서 말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디아도코이 시대에는 팔랑크스 대 팔랑크스로 싸우는 경우가 많아 방패 크기도 커지고, 창도 5~6m 정도까지 길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3. 역사
필리포스 2세때 군제개혁으로 모습을 드러낸 페제타이로이는 완전한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였다. 이들은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에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펼친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의 모루 역할을 완벽히 해내며 화려한 데뷔전을 펼친다. 이후 그들의 진정한 활약은 알렉산더 대왕의 아케메네스 왕조 정벌에서 나타난다.
알렉산드로스 3세를 만나기 이전, 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 군대는 주로 전차와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전술을 펼쳤고, 보병대는 창, 검, 도끼, 화살같은 무기로 무장해 전방의 기병이나 전차를 지원하는 동시에 적 보병이 무너지면 돌격하여 전투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원거리서 활로 공격 한 뒤에 도끼나 창, 검으로 근접전을 시도하다 보니 페르시아군 보병대는 방호구에 그렇게 많이 투자하지 않았고[5] 그 결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투구, 방패, 정강이보호대로 중무장한 그리스 동맹군의 호플리테스에게 근접전에서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기 일쑤였다.
그렇다보니 후기 페르시아 제국군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동맹의 호플리테스에게 호되게 당한 교훈을 바탕으로 그리스의 호플리테스 마냥 2~3m 가량의 장창과 그리스식 호플론을 든 카르다카(Kardaka)라 불리는 중장보병 집단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아나바시스에서 나온 것 처럼 그리스서 호플리테스를 용병으로 불러와 카르다카랑 같이 전방에 배치해 운용하기도 했다.
다만 4~5m 짜리 장창으로 무장하고 있는 마케도니아군의 팔랑기테스 앞에서는 호플리테스고 카르다카고 결과는 끔살밖에 없었다. 마케도니아 팔랑기테스가 무장한 사리사는 창의 무게와 보병이 앞으로 달려나가[6] 찌르는 무기인데 창 자체의 무게와 보병이 앞으로 달러나가면서 나오는 순간적인 힘이 더해져 무지막지한 위력을 보였고, 기껏해야 3m 길이의 창을 가진 카르다카나 호플리테스는 4m 이상의 사리사를 든 팔랑기테스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케도니아군은 이렇게 팔랑기테스 부대가 "모루"로써 적보병을 분쇄하고 헤타이로이가 팔랑기테스에 압도당하는 적 부대를 후방에서 두들기는 "망치"의 역할로 적들을 분쇄해 나갔고, 마케도니아군은 그라니코스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히다스페스 전투 같은 큰 규모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후 인도•중앙아시아를 정벌하는 동안 마케도니아 페제타이로이엔 페르시아인들이 많이 입대하게 된다. 이렇게 완전히 헬레니즘 군대의 중장보병으로 자리잡은 페제타이로이는 형태가 조금씩 바뀌면서 디아도코이들에게도 애용되었으나, 로마 공화국의 정벌에 디아도코이들이 몰락[7] 하면서 함께 자취를 감춘다.
4. 장단점
이들의 방진은 '''"사과를 던졌을 때 사과가 땅에 떨어져지지 않으면 잘 짠 방진이다."''' 라는 말이 있을 만큼 빽빽했는데, 이는 전열의 지속시간을 압도적으로 늘려 망치와 모루 전술 구사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호플리테스들과 똑같이 측면공격에 매우 취약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8] 전장이 평지가 아니라 울퉁불퉁할때는 기동 중 전열에 금이 가기도 했다. 물론 이런 한계도 있었지만, 마케도니아인들도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은지라 중장보병보다는 경무장이지만 다른 경보병에 비해 중무장을 갖춘 히파스피스트나 토라키테스 같은 엄호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생각보다 유연한 움직임을 갖춘 전열이기도 했다[9] . 장비가 호플리테스의 그것에 비해 매우 작고 가벼운 편인지라 서로를 보호해야 하기에 똘똘 뭉쳐다녀야 했던 호플리테스보다는 기동력이 매우 빨랐다. 게다가 큰 방패 때문에 체력 소모가 엄청났던 호플리테스에 비해 가벼운 장비를 갖춘 팔랑기테스는 전투 지속시간이 길었기에 기계처럼 계속 적을 찌르고 무너뜨릴 수 있었다. 이런 모습은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3세까지 유지했지만 팔랑크스 대 팔랑크스로 싸워야 했던 디아도코이 시대 쯤 되면 팔랑크스의 유동성이 전보다 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즉, 평지에서는 고대 세계의 최고의 강자 중 하나였으나 그 외의 전장에서는 위태로웠으며 보조병과[10] 가 꼭 측면을 받쳐줘야 했던것이다. 이 페제타이로이의 약점은 피드나 전투나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다만 여기서 염두에 둘 것은 위의 두 전투는 "로마의 군단병이 우수하고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라는 2차원적인 해석은 애매하다. 피드나 전투나 키노스케팔라이 전투는 지형 자체가 마케도니아 측에 매우 불리하기도 했지만 당시 마케도니아 병력의 수준이나 숙련도가 많이 떨어져 있었던 상태였다. 지형도 팔랑크스에 불리한 지형인데 병사들 수준까지 떨어지는 악운이 겹쳐 나타난 현상이라 볼 수 있다.[11]
또한 이러한 시각은 로마 군단병과 파르티아&사산조 페르시아의 카타프락토이들에게도 적용 시킬 수 있다. 카르헤 전투 같이 중장보병 집단이 기병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역으로 군단병들이 돌격해오는 중장기병이 타고 있는 말의 복부를 칼로 찌르거나 필룸으로 던져 기수를 죽이는 등 기병대를 저지시키기도 한 사례도 있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어느 병과가 우수하냐 열등하느냐가 아니라 전투 내에 있는 수많은 변수에 따라 전투에서 아군이 박살나거나 적군이 박살나거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그리스어로 "보병 전우들" 이라는 뜻으로 "발, 걷는다"는 뜻의 "πεζ"와 "전우, 친구"를 의미하는 "έταιροι"의 합성어.[2] 이를 신타그마(σύνταγμα)라고 부른다. 256명의 보병 말고도 신타그마타르크라고 불리는 지휘관, 나팔수, 기수, 부대 전령이 포함되있었으며, 경우에 따라 독전관이 있기도 했다.[3] 프리기아식 헬멧을 말 하는 것으로, 트라키아 지방의 전통 모자의 모양을 본따 만들었다. 물론 프리기아식 헬멧 뿐만 아니라 아티카식 헬멧이나 칼키디키식 헬멧, 필로스식 헬멧 등 다양한 모양의 헬멧을 썼다.[4] 팔랑기테스는 그렇게 했지만 히파스피스트(Ὑπασπιστής )같은 병과는 기존의 호플리테스 처럼 지름 1m 정도의 방패와 3m 짜리 창으로 무장했다.[5] 갑옷 정도는 있었지만, 투구나 정강이보호대가 없었으며, 방패도 버드나무로 짜서 만든 방패가 전부였다.[6] 이 방식을 오티스모스(Οθισμός )라 부른다. 마케도니아군의 팔랑기테스는 그리스 호플리테스가 쓰던 방식처럼 적을 밀어 붙이는 전술을 썼는데, 물론 방패로 밀어붙인다는 것이 아니라 긴 창으로 창의 사정거리 내에 든 적을 쓰러트리며 밀어붙인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7] 셀레우코스 제국은 B.C.63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의 직할속주가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B.C.30년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멸망했다.[8] 이건 틀린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호플리테스와는 다르게 마케도니아 팔랑기테스는 지름 60cm 정도의 작은 방패를 갖춰 미늘갑옷처럼 호플론을 겹쳐 아군을 서로 보호해야 했기에 기동력이 느렸던 호플리테스 보다 방향 전환이나 기동력 부분에서 우수했다.[9] 나팔소리와 깃발 신호에 따라 병사들은 신속하게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10] 위에서 말한 히파스피스트나 토라키타이 같은 병력들[11] 물론 위의 두 전투는 마케도니아 측의 사상자가 많았기에 논란이 있겠지만 앞에서도 말했던 조건들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