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네이아 전투
Battle of Chaeronea
기원전 338년과 기원전 86년, 현 그리스 보에티아 주 카이로네이아 시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 기원전 338년의 전투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가 아테네와 테베가 주축이 된 그리스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리스의 지배권을 손에 넣은 전투이며, 기원전 86년의 전투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 장군이었던 술라가 제1차 미트라다테스 전쟁 중 미트라다테스 왕의 군대를 격파한 전투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쇠퇴해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결과로 많은 국력을 소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 결과 맹주가 되었던 스파르타가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에게 패하여 패권을 잃는 등 주도권을 쥐기 위한 분쟁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가 이렇게 혼란에 빠져있던 동안,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본래 소국이었던 마케도니아는 청소년기를 테베에서 인질로 보냈던 필리포스 2세가 귀국하여 혼란을 수습하고, 군제 개혁으로 뛰어난 상비군을 편성하여 확장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제3차 신성전쟁에 개입하여 포키스인들의 항복을 받아내어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커진다. 이에 따라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의 권력이 커지게 되었고, 아테네와 테베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어 마케도니아에게 반기를 든다.
어떠한 과정을 통해 필리포스 2세와 그리스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치르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기원전 338년 여름이 되자 필리포스 2세가 지휘하는 마케도니아군이 남하를 시작하여 카이로네이아 인근 도로를 점거한 그리스 연합군을 공격하는 것으로 이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루스(Diodorus)는 마케도니아군은 보병 약 3만에 기병 2천명이라고 기술하였으며, 이는 현대 역사가들 대다수가 인정하고 있다. 필리포스 2세 본인은 기병대와 함께 우익을 지휘하였고, 당시 18세였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좌익의 지휘를 맡았다. 물론 필리포스 2세는 자신이 신뢰하는 장군들을 알렉산드로스에게 붙여 보좌하게 했다.
그리스 연합군의 정확한 숫자는 불분명한데, 현대 역사가들의 추정 병력이 3만 5천으로 마케도니아군의 규모와 거의 비슷했을 것으로 본다. 아테네가 좌익을 맡고, 테베인들이 우익을 맡았으며, 다른 도시국가들은 중앙에 섰다.
[image]
폴리아이누스(Polyaenus)의 기록을 이용하여 학자들이 재구성한 전투는 다음과 같다.[1]
양군 사이에 전체적인 교전이 몇 번 벌어졌는데, 필리포스 2세가 이 때 중앙을 축으로 하여 군을 회전기동시켰다. 마케도니아군 우익은 후퇴를 하고, 좌익은 전진을 하는식이었다. 전열 전체가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는 것. 이 때 전진하던 마케도니아군의 좌익이 테베군의 우익을 공격하여 그리스군의 진형에 틈새를 만들어놓았다. 한편 아테네군이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케도니아군의 우익을 추격하기 시작하면서 아테네군의 대형이 흐트러진다. 이 기회를 이용해 후퇴하는 척하던 마케도니아군 우익이 아테네군을 공격해 패주시키고, 마케도니아군 좌익이 테베군의 측면인 오른쪽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특히나 공격에 노출된 아테네군의 오른쪽은 무기를 든 손 방향이기에 측면공격에 취약한 부위였다. 그리스군은 패주하고 전투는 종결되었다.
디오도루스는 아테네군 1천명이 전사하고 2천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테베군도 비슷한 규모의 피해를 입었다고 기술했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의 대패로 인해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더 이상 마케도니아와 필리포스 2세를 막을 힘이 없었다. 공성전을 우려하여 아테네와 코린트는 성벽을 구축하는 데 안간힘을 썼지만, 필리포스 2세는 도시를 공성할 의도도, 그리스를 정복할 의도도 없었다. 그는 원정을 떠났을 때 안정된 그리스가 후방에서 있어주기를 바랬기에 더 이상의 전투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연합군의 주축이었던 테베와 아테네에겐 제재가 가해졌다. 테베의 반 마케도니아 정치가들은 추방되고 친 마케도니아 정치가들이 돌아왔으며, 군 병력을 주둔시켰다. 또한 사로잡힌 포로들은 돈을 내고서야 석방되었으며 전사자들의 유해도 돈을 내야만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보에티아 동맹을 해체하지는 않았다. 반면 아테네에 대한 제재는 테베에 비하면 관대한 편이었다. 제2차 아테네 동맹이 해체되었지만, 사모스 식민지는 그대로 아테네에게 남았으며 포로들은 보석금 없이 석방되었다. 이는 아테네의 해군력을 이용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필리포스 2세는 전략 요충지를 차지한 코린트와 할키스를 방문하여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으로, 군 병력을 주둔시켜 통로를 확보한 후 스파르타로 발길을 돌렸다. 스파르타는 연합군에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으나, 다른 도시국가들이 약해진 상황을 이용해 세력을 넓힐 우려가 있었기에 싹을 자르기로 한 것. 스파르타 지도자들이 논의에 참석을 거부하자, 필리포스 2세는 라코니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군을 주둔시켜 다른 도시국가들에게 본보기로 삼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처 기원전 337년에 코린트 동맹이 결성되고 필리포스 2세가 의장이 되면서 그리스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모든 도시국가들에게는 자치와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된 셈이었므로, 이에 불만을 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즉위한 직후 테베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고 도시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후방이 안정되자 필리포스 2세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그리스를 떠나 북쪽으로 향하지만, 암살당하고 그 원정은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어받게 된다. '''그렇게 세계의 역사에 영원히 남을 전설이 시작되었다.'''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다루는 책과 다큐멘터리 등에서는 알렉산더가 기병을 이끌어 승리에 기여한 것처럼 묘사하지만, 정작 알렉산더가 기병을 지휘했는지 보병을 지휘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기병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단서도 없다. 오히려 플루타르코스 같은 경우는 알렉산더가 제일 처음으로 병사를 지휘해서 테베군을 붕괴시키기는 했지만, 보병끼리 창과 창을 맞서서 싸워 이뤄낸 성과라고 기록한 바 있다.
히스토리에에서는 배경묘사가 그리스의 비잔티움 해전[2] 과 필리포스의 스키타이 원정도중[3] 다친것으로 인해 그리스의 주전파가 득세 전투를 벌인것으로 나온다. 평화파인 포키온은 장군에서 낙점당했으며[4] 필리포스는 만약 포키온이 그리스의 군세를 이끌었다면 서늘했다며 감상은 내밷는다. 위의 여러 관점들을 적당히 섞고 타협해서 알렉산더가 기병대를 이끌고 선봉에 섰으며 작품 내에서 묘사되는 초인적인 감각으로 그리스의 방진을 돌파한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끌던 기병대는 알렉산더를 쫓아가지 못해 그리스 방진을 돌파한 건 알렉산더 혼자였으며, 혼자서 방진 후위를 공격하며 교란을 펼쳤으나 전체적인 전황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 외의 전황은 상단 폴리아이누스의 기록처럼 묘사되며, 추가적으로 아테네 방진이 무너지면서 생긴 틈으로 기병대가 테베군 후방으로 침투하면서 전후방에서 보병과 기병의 협공에 테베군이 전멸한다.
1. 개요
기원전 338년과 기원전 86년, 현 그리스 보에티아 주 카이로네이아 시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 기원전 338년의 전투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가 아테네와 테베가 주축이 된 그리스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리스의 지배권을 손에 넣은 전투이며, 기원전 86년의 전투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 장군이었던 술라가 제1차 미트라다테스 전쟁 중 미트라다테스 왕의 군대를 격파한 전투다.
2. 기원전 338년의 전투
2.1. 배경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쇠퇴해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결과로 많은 국력을 소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 결과 맹주가 되었던 스파르타가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에게 패하여 패권을 잃는 등 주도권을 쥐기 위한 분쟁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가 이렇게 혼란에 빠져있던 동안,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본래 소국이었던 마케도니아는 청소년기를 테베에서 인질로 보냈던 필리포스 2세가 귀국하여 혼란을 수습하고, 군제 개혁으로 뛰어난 상비군을 편성하여 확장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제3차 신성전쟁에 개입하여 포키스인들의 항복을 받아내어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커진다. 이에 따라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의 권력이 커지게 되었고, 아테네와 테베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어 마케도니아에게 반기를 든다.
어떠한 과정을 통해 필리포스 2세와 그리스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치르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기원전 338년 여름이 되자 필리포스 2세가 지휘하는 마케도니아군이 남하를 시작하여 카이로네이아 인근 도로를 점거한 그리스 연합군을 공격하는 것으로 이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2.2. 양군의 규모와 진형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루스(Diodorus)는 마케도니아군은 보병 약 3만에 기병 2천명이라고 기술하였으며, 이는 현대 역사가들 대다수가 인정하고 있다. 필리포스 2세 본인은 기병대와 함께 우익을 지휘하였고, 당시 18세였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좌익의 지휘를 맡았다. 물론 필리포스 2세는 자신이 신뢰하는 장군들을 알렉산드로스에게 붙여 보좌하게 했다.
그리스 연합군의 정확한 숫자는 불분명한데, 현대 역사가들의 추정 병력이 3만 5천으로 마케도니아군의 규모와 거의 비슷했을 것으로 본다. 아테네가 좌익을 맡고, 테베인들이 우익을 맡았으며, 다른 도시국가들은 중앙에 섰다.
2.3. 전투의 진행
[image]
폴리아이누스(Polyaenus)의 기록을 이용하여 학자들이 재구성한 전투는 다음과 같다.[1]
양군 사이에 전체적인 교전이 몇 번 벌어졌는데, 필리포스 2세가 이 때 중앙을 축으로 하여 군을 회전기동시켰다. 마케도니아군 우익은 후퇴를 하고, 좌익은 전진을 하는식이었다. 전열 전체가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는 것. 이 때 전진하던 마케도니아군의 좌익이 테베군의 우익을 공격하여 그리스군의 진형에 틈새를 만들어놓았다. 한편 아테네군이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케도니아군의 우익을 추격하기 시작하면서 아테네군의 대형이 흐트러진다. 이 기회를 이용해 후퇴하는 척하던 마케도니아군 우익이 아테네군을 공격해 패주시키고, 마케도니아군 좌익이 테베군의 측면인 오른쪽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특히나 공격에 노출된 아테네군의 오른쪽은 무기를 든 손 방향이기에 측면공격에 취약한 부위였다. 그리스군은 패주하고 전투는 종결되었다.
디오도루스는 아테네군 1천명이 전사하고 2천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테베군도 비슷한 규모의 피해를 입었다고 기술했다.
2.4. 전투 이후
카이로네이아 전투의 대패로 인해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더 이상 마케도니아와 필리포스 2세를 막을 힘이 없었다. 공성전을 우려하여 아테네와 코린트는 성벽을 구축하는 데 안간힘을 썼지만, 필리포스 2세는 도시를 공성할 의도도, 그리스를 정복할 의도도 없었다. 그는 원정을 떠났을 때 안정된 그리스가 후방에서 있어주기를 바랬기에 더 이상의 전투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연합군의 주축이었던 테베와 아테네에겐 제재가 가해졌다. 테베의 반 마케도니아 정치가들은 추방되고 친 마케도니아 정치가들이 돌아왔으며, 군 병력을 주둔시켰다. 또한 사로잡힌 포로들은 돈을 내고서야 석방되었으며 전사자들의 유해도 돈을 내야만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보에티아 동맹을 해체하지는 않았다. 반면 아테네에 대한 제재는 테베에 비하면 관대한 편이었다. 제2차 아테네 동맹이 해체되었지만, 사모스 식민지는 그대로 아테네에게 남았으며 포로들은 보석금 없이 석방되었다. 이는 아테네의 해군력을 이용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필리포스 2세는 전략 요충지를 차지한 코린트와 할키스를 방문하여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으로, 군 병력을 주둔시켜 통로를 확보한 후 스파르타로 발길을 돌렸다. 스파르타는 연합군에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으나, 다른 도시국가들이 약해진 상황을 이용해 세력을 넓힐 우려가 있었기에 싹을 자르기로 한 것. 스파르타 지도자들이 논의에 참석을 거부하자, 필리포스 2세는 라코니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군을 주둔시켜 다른 도시국가들에게 본보기로 삼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처 기원전 337년에 코린트 동맹이 결성되고 필리포스 2세가 의장이 되면서 그리스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모든 도시국가들에게는 자치와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된 셈이었므로, 이에 불만을 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즉위한 직후 테베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고 도시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후방이 안정되자 필리포스 2세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그리스를 떠나 북쪽으로 향하지만, 암살당하고 그 원정은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어받게 된다. '''그렇게 세계의 역사에 영원히 남을 전설이 시작되었다.'''
2.5. 창작물에서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다루는 책과 다큐멘터리 등에서는 알렉산더가 기병을 이끌어 승리에 기여한 것처럼 묘사하지만, 정작 알렉산더가 기병을 지휘했는지 보병을 지휘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기병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단서도 없다. 오히려 플루타르코스 같은 경우는 알렉산더가 제일 처음으로 병사를 지휘해서 테베군을 붕괴시키기는 했지만, 보병끼리 창과 창을 맞서서 싸워 이뤄낸 성과라고 기록한 바 있다.
히스토리에에서는 배경묘사가 그리스의 비잔티움 해전[2] 과 필리포스의 스키타이 원정도중[3] 다친것으로 인해 그리스의 주전파가 득세 전투를 벌인것으로 나온다. 평화파인 포키온은 장군에서 낙점당했으며[4] 필리포스는 만약 포키온이 그리스의 군세를 이끌었다면 서늘했다며 감상은 내밷는다. 위의 여러 관점들을 적당히 섞고 타협해서 알렉산더가 기병대를 이끌고 선봉에 섰으며 작품 내에서 묘사되는 초인적인 감각으로 그리스의 방진을 돌파한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끌던 기병대는 알렉산더를 쫓아가지 못해 그리스 방진을 돌파한 건 알렉산더 혼자였으며, 혼자서 방진 후위를 공격하며 교란을 펼쳤으나 전체적인 전황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 외의 전황은 상단 폴리아이누스의 기록처럼 묘사되며, 추가적으로 아테네 방진이 무너지면서 생긴 틈으로 기병대가 테베군 후방으로 침투하면서 전후방에서 보병과 기병의 협공에 테베군이 전멸한다.
[1] 폴리아이누스는 기원후 2세기경에 로마에서 활동한 마케도니아 학자로 전략론(Stratagems in War)으로 유명하다.[2] 마케도니아가 비잔티움과 페린토스를 공략했지만 육지전에서는 페르시아의 개입과 포키온의 지휘의 해전으로 패배함에 물러간다.[3] 원정은 성공했으나 페라로 귀환도중 방심으로 인해 스키타이의 잔존병 트리발로인들에게 타격을 입는다.[4] 주전파인 데모스테네스의 연설로 아테네의 분위기는 마케도니아와 싸워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으며 히스토리에에서는 에우메네스가 포키온에게 여러 공물을 바치는 척하며(포키온은 청백리로 알려진 대로 어떠한 선물을 받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