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찹힐 전투

 



1. 개요
2. 전초전, 올드 발디(늙은 대머리 고지) 5차전 (1953.3.23 ~ 3.26)
3. 전투 경과 (1953.4.16 ~ 7.11)
4. 여담


1. 개요


Battle of Pork Chop Hill
1953년 3월23일부터[1] 7월 11일까지 미군 7사단과 중공 67사단이 경기도 연천군 천덕산 주변의 255m, 300m 고지군을 두고 벌인 고지전.
참고로 전투 전까지만 해도 이 고지는 올드 발디(늙은 대머리)와 마찬가지로 위에서 얼핏 보면 폭찹처럼 생겼다고 해서 대충 붙여진 이름이었지만, 이후 무자비한 포격 속에 피와 육편이 여기저기 낭자할 정도로 격전이 됨으로서 상상하기도 싫은 복선이 되고야 만다.
1952년부터 해당 고지는 폭찹힐과 화살머리고지 사이에 위치한 것 때문에 쟁탈의 대상이 되어왔고, 1953년까지 미 2사단과 여기에 예속된 태국군 21연대의 분투[2]로 그럭저럭 지켜왔고, 미 7사단 31연대와 임무교대할 때 태국군은 '우리 폭찹을 잘 돌봐줘'라는 낙서를 벙커에 남겼다.

2. 전초전, 올드 발디(늙은 대머리 고지) 5차전 (1953.3.23 ~ 3.26)


1953년 3월23일 중공 141사단 423연대가 올드 발디고지를 탈취해 돌출부를 만들어 버렸다. 이에 그곳을 담당한 미 7사단 31연대 배속 콜롬비아 대대도 이틀 넘게 탈환 시도를 하였으나 전체의 20%를 사상당한 채 실패하였고, 이에 고지 포기가 결정됐다.
한편, 중공군은 이 돌출부[3]를 토대로 우선 폭찹힐을 탈취하기 위해 정탐 및 공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3. 전투 경과 (1953.4.16 ~ 7.11)


[image]
출처
4월16일 당시 폭찹힐에는 31연대 E중대가 있었는데, 자정 무렵 대규모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중공 201연대 1개 대대가 이 일대로 몰려왔다. 이로 인해 폭찹힐이 탈취되었다.
4월 17일 새벽 31연대의 K, L 중대가 탈환 시도를 했으나 이미 알박기를 해놓은 중공군의 저항은 격렬했다. 비록 주 참호선까지 올라가긴 했으나 이 과정에서 절반 가량이 사상당했다. 이에 오전 8시경 17연대 G중대가 증원되었으나 중공군은 이들에게도 포화를 퍼부어댔다. 그렇게 오후 3시까지 대치하던 중 G중대를 고지에서 철수시키라는 명령이 잘못[4] 하달돼 탈환 시도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날 저녁 9시 30분, 17연대의 F중대가 탈환 시도를 했으나 이 과정에서 중공군의 포격으로 19명을 잃는다. 그리고 자정 무렵에 17연대 E중대가 고지 측면을 기어올랐다.
18일 새벽 1시에도 17연대 F중대는 계속 두들겨 맞고 있었다. 하지만 측면으로 올라온 E중대가 중공군 진지의 측면을 때리고 반격도 분쇄해 공격 기세를 꺾어놓는다. 그리고 아침 17연대의 A중대가 추가로 올라와 3개(A,E,F) 중대는 일대의 잔적들을 찾아다녔고, 오후가 되어서야 정리가 끝났다.
7월 6일 야음을 틈타 중공군이 다시 몰려왔고, 고지의 A중대가 고전하자 B중대가 증원돼 9번씩 쟁탈전을 벌였다.
7월 11일 고지 쟁탈전이 의외로 장기화가 되고 사상자도 속출하자 미군 수뇌부는 폭찹힐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4. 여담


  • 이 전투에서 미군은 사상자가 총 916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243명이 전사했다.

  • 이 전투는 미국 내에서도 인상깊었는지 59년 MGM에서 K중대를 주인공으로 한 동명의 영화로 출시되었다. 다만 휴전 회담 부분은 픽션이 가미되었다.
[1] 다만 폭찹힐 자체를 두고 벌인 건 4월 16일부터다.[2] 10월에 한번 뺐겼다가 재탈환하고, 또 11월에 중공 39군과 교전해 격퇴했다. 이 과정에서 살상 321명, 전사 추정 190여명, 부상 350 명에 무기를 상당히 획득하여 "작은 호랑이"란 별칭을 얻고 한미 정부의 각종 훈장을 타게 된다.#[3] 하단 사진의 Enemy position.[4] 다만 사단에서 진척 없이 두들겨 맞을 바에야 내려오라고 하고 이에 중대장이 기껏 올라왔는데 포기하냐며 반발한 얘기도 있으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