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전
1. 개요
산 위와 능선을 따라 조성된 고지를 두고 벌이는 공방전을 뜻한다. 고지(高地)라는 단어에는 그저 '높은 땅'이란 의미밖에는 없지만, 대개 군사 용어로 쓰이며 "적의 고지를 탈환하다.", "고지를 사수하다."라는 말을 거의 누구나 들어본 적 있을 정도로 아주 중요한 전술적 목표를 의미해 왔다.
고대로부터 고지를 선점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전술이었다. 일단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 시야가 더 넓어지는 작전술적인 이점도 있으며, 전술적으로는 화살이나 투창, 돌팔매, 탄환과 같은 투사 무기들이 고지에서 아래로 공격할 때는 속도가 더 붙어서 위력이 훨씬 강해지며, 반대로 이런 투사무기들이 평지에서 고지로 올라올 때는 속도가 줄어들어서 위력이 훨씬 약해진다. 여기에 더해서 근접전이 벌어질 때도 고지에서 아래로 돌격하는 측은 고지에서 뛰어내려오며 가속도를 붙여서 돌격의 피해를 증가시킬 수 있는 반면, 고지로 올라가는 측은 쉽게 지치고 돌격의 충격력도 발휘하기 어렵다.
단, 고지대는 일반 지형에 비해 보급에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보급이 끊기는 순간 고지대는 그대로 사지가 될 수 있었다. 삼국지에 등장한 마속의 사례가 좋은 예.
19세기 이후 화포가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포격에 산술계산이 도입되면서 고지의 중요성은 극대화된다. 즉, 고지 하나를 손에 넣으면 그 위에서 적들의 동향을 감시하다 적들이 오면 위에서 총탄을 퍼부어대거나 포격 요청을 넣을 수 있었고, 이는 상대 측도 마찬가지였기에 이후의 전사(戰史)부턴 고지를 뺏고 뺏기는 게 필수적으로 벌어졌다.
여하튼 방어 측은 이런 중요한 고지가 쉽게 함락당하지 않도록 참호와 기관총좌를 시작으로, 대형 콘크리트 벙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어책을 구축했고, 반면 공격 측은 밑에서부터 공격루트와 숫자가 완전히 노출된 채 얻어맞으며 달려와야 했기에 공세 전 방어 시설들을 뭉개는 공격준비사격을 필수적으로 해야 했다.
또한 지형지물을 어떻게 활용하고 이동할지에 따라 공방의 향방도 갈렸기에 약진 같은 보병단위 전술에서부터 대대, 연대 단위 우회기동까지 수많은 돌파법이 연구되었고 이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고지 하나에서 사상자가 수천 명 이상 나오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언덕 하나에서 발생한 피해가 수천이다.[1]
2. 6.25 전쟁 당시
폭찹힐 전투를 다룬 1959년 영화, 폭찹힐에서의 모습.
산지가 많은 한반도의 특성상 전쟁의 전개도 대부분 고지를 두고 공방이 벌어졌다. 그리고 50년 겨울 중공군의 참전으로 37도선까지 내려간 전선이 다시 38도 이북으로 올라갈 즈음 휴전 협정이 양측에서 조율되었다.
이유인 즉슨 이미 1.4 후퇴와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 및 이에 대응한 반격 등을 거치면서 양측 모두 상대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낼 힘 없이 사상자만 계속 속출하는 소모전 상황이 되었음을 인지했기 때문.[2] 하지만 협정이 진행될 동안 양측이 싸움을 멈추기로 합의한 건 아니었기에 보다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휴전을 맞이하기 위한 대대급 수준의 고지 쟁탈전이 51년 하반기부터 간헐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3]
일단 고지를 확보하면 그 위에서 주변 전황을 두루 둘러볼 수 있을뿐더러, 일대의 적들을 향해 사격 및 포격을 보다 멀리, 더 정확히 가할 수 있게 된다.[4] 더군다나 고지를 보다 많이 확보해 거기에 진지와 기지 등을 지어놓으면 향후 전쟁이 재개될 시 방어 측에선 시간벌이, 공세 측에선 그만큼 시간절약, 기동에 유리했기에 너도 나도 고지 쟁탈전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몇몇 고지는 계속된 쟁탈과 포격, 폭격 속에 곳곳이 화약과 피 냄새 진동하는 민둥산이 되었으며,[5] 가칠봉 전투에선 아예 시체들을 모아 진지를 구축하기도 했다.
3. 베트남 전쟁 당시
여기에서도 고지를 두고 전투가 벌어졌다.
66년 두코 전투, 67년 짜빈박 전투, 68년 케산 전투, 69년 햄버거 힐 전투, 72년 안케패스 전투 모두 고지를 두고 공세를 펼치거나 쟁탈전을 벌였다.
4. 현대
항공정찰이나 무인기, 정밀 타격무기가 발달된 현재에는 예전에 비해 그 중요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래도 엄연히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적에게 고지를 내주고 더 많이 염탐, 공격당하는 게 좋을 리 없기에 보병 단위의 전술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실제 근시기에 벌어진 아프간 전쟁에서도 전투의 상당 부분이 고지전이었고, 지형 대부분이 산악 지대인 한반도 역시 만약 전쟁이 재발한다면 보병, 포병 중심으로 고지전은 필수적으로 벌어지게 된다.
게다가 현재 공군의 레이더부대나 이동식 레이더부대가 전개하는 장소가 특정지역의 가장 높은 고지임을 생각하면 현대전에서 고지의 중요성이 낮아진것 같지도않다. 특히 적의 항공기 침투를 감시하기 위한 저고도 탐지레이더는 주변이 뻥 뚫려있는 고지대에 설치해야된다.
[1] 다만 여기는 그냥 무작정 돌진해서 그런 것이므로 일반화는 금물이다. 고지로 돌격하는 부대도 무작정 공격하는 게 아니라 매복, 부대별 엄호, 개별 사격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며 적의 화력을 분산시키고 최대한 대형을 넓게 벌려 공격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질 수가 없다. 당장 한국전쟁 후기 고지쟁탈전 중에 막판 중국군의 대공세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군이 주도했는데 정작 사상자는 한국군이 중국군/북한군보다 상대적으로 적었다.[2] 그리고 필요 이상의 자극과 확전을 피하기 위한 분위기도 조성되어 1951년 4월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밴플리트 장군의 맹조의 발톱 작전 제안이 취소되기도 했다. 그나마 격전 속에서 북쪽으로 돌출된 전선을 완만하게 만들고 전선을 10~20km 올리려는 제한적인 목적의 대규모 공세는 그와 수뇌부 모두 공감했기 때문에 이를 여름과 가을 사이에 실행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3] 사실 이는 모험을 피하기 위한 찔러보기식 전투로, 병력을 일제히 투입하면 당장은 머릿수=화력에서 앞서지만 이들이 전멸시 그 공백을 메우기가 힘들기 때문.[4] 실제로도 저격능선 전투에서 중공군 저격수가 고지 위에서 미군들을 자꾸 저격해댔고, 이에 고지 이름도 그렇게 지어졌다.[5] 이것의 극단적인 예가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로, 아예 민둥산이 된 것도 모자라 모래폭풍 수준의 먼지까지 일어 소총을 내팽개치고 수류탄만 가득 챙겨 돌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