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티게른
'''Fritigern'''
(?~?)
4세기 후반에 활약한 고트족의 지도자.
고트족의 족장 중 한 사람이었으며, 알라리크와 함께 로마 제국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다준 장본인이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의 영웅으로, 로마인들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치욕스러운 참패를 안겨준 인물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이름의 뜻은 고트어로 '평화(frit)를 바라는(gern)'이라는 뜻이다.
그의 개인적인 면과 생애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367~369년 사이, 프리티게른은 테르빙기 고트족(훗날의 서고트족)의 왕이었던 아타나릭과 로마에 대한 친선 문제를 두고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1] 이후 376년, 동쪽에서 사나운 기마민족인 훈족이 침략해오는 바람에 프리티게른은 다른 고트족들처럼 삶의 터전이었던 도나우 강 이북의 땅을 떠나 동로마 제국의 변경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프리티게른은 또다른 고트족 족장이었던 알라비부스 등과 함께 동로마 측에 자신의 족속들이 로마의 영토에 정착하게 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동로마의 황제였던 발렌스는 고트족들이 무기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며, 또한 로마군에 입대하여 변방을 수비한다는 조건 하에 오늘날의 불가리아 지역에 해당하는 모이시아 남부에 정착하도록 허가하였다. 그에 따라 75,000 명에 달하는 고트족들이 이주해왔다.[2]
그러나 고트족들에 대한 지원을 담당하였던 모이시아 총독인 루피키누스와 트라키아 총독인 막시무스 등은 매우 부패한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고트족을 위해 발렌스 황제가 보낸 식량과 재물을 착복하였을 뿐 아니라, 고트족들의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노예로 팔아치우는 등 가혹한 통치로 고트족들의 원한을 샀다.
프리티게른은 여러 고트족 족장들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회합을 가졌는데, 이에 위협을 느낀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 등은 연회를 가장하여 고트족의 지도자들을 몰살시키려다가 실패하였다. 이에 분노한 프리티게론은 고트족의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5천 남짓한 군사로 1만에 달하는 루피키누스의 로마군을 마르키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이후 고트족과 동로마의 전쟁은 2년 동안 이어졌다. 당시 동로마 측은 고트족의 군세를 원만히 제압하지 못하였으나, 고트족 또한 세력이 하나로 결집되지 못하여 동로마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후 378년, 프리티게른은 발렌스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동로마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를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라고 부른다. 동로마군은 발렌스의 성급한 지휘로 인하여 강행군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숫적으로 우세한 고트족과 싸워야했다. 그에 반하여 프리티게른은 동로마군의 상태를 훤히 꿰뚫고는 치밀한 작전을 준비했다. 그는 들판에 불을 질러서 한여름의 무더위와 오랜 행군으로 지친 로마군의 체력을 고갈시켰으며, 필요할 때에는 화친 협정을 통해 시간을 끌면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는 지략을 선보였다.
고트족과 맞붙은 동로마군의 좌익은 고트족의 후방을 공격하였으나, 이미 지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 와중에 고트족의 기병대가 우회하여 로마군의 좌익을 덮쳐서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이를 시작으로 동로마군의 전열은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밤새도록 계속된 전투에서 15,000~30,000 명 가량의 군사 중 약 3분의 2가 궤멸당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인 발렌스와 주요 지휘관인 트라야누스, 세바스티아누스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이후로 프리티게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는 그리 오래지 않아서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병사했을수도 있지만, 발렌스 황제가 사망한 후에 동로마 측에서 다시 반격을 시작했던 당시에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죽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봄직 하다.
어찌 되었든간에 프리티게른이 지휘하는 고트족 군대가 발렌스 황제를 죽이고 동로마의 군대를 궤멸시킨 사건은 적지않은 파장을 불러왔다. 동로마는 비록 고트족을 상대로 반격에 성공하여 우위를 점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전력을 몸으로 체감한 후에는 이들을 회유하여 용병으로 활용하는 일이 더 많아졌으며, 이는 서로마도 마찬가지였다.[3]
(?~?)
1. 개요
4세기 후반에 활약한 고트족의 지도자.
고트족의 족장 중 한 사람이었으며, 알라리크와 함께 로마 제국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다준 장본인이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의 영웅으로, 로마인들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치욕스러운 참패를 안겨준 인물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이름의 뜻은 고트어로 '평화(frit)를 바라는(gern)'이라는 뜻이다.
2. 생애
그의 개인적인 면과 생애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367~369년 사이, 프리티게른은 테르빙기 고트족(훗날의 서고트족)의 왕이었던 아타나릭과 로마에 대한 친선 문제를 두고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1] 이후 376년, 동쪽에서 사나운 기마민족인 훈족이 침략해오는 바람에 프리티게른은 다른 고트족들처럼 삶의 터전이었던 도나우 강 이북의 땅을 떠나 동로마 제국의 변경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프리티게른은 또다른 고트족 족장이었던 알라비부스 등과 함께 동로마 측에 자신의 족속들이 로마의 영토에 정착하게 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동로마의 황제였던 발렌스는 고트족들이 무기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며, 또한 로마군에 입대하여 변방을 수비한다는 조건 하에 오늘날의 불가리아 지역에 해당하는 모이시아 남부에 정착하도록 허가하였다. 그에 따라 75,000 명에 달하는 고트족들이 이주해왔다.[2]
그러나 고트족들에 대한 지원을 담당하였던 모이시아 총독인 루피키누스와 트라키아 총독인 막시무스 등은 매우 부패한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고트족을 위해 발렌스 황제가 보낸 식량과 재물을 착복하였을 뿐 아니라, 고트족들의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노예로 팔아치우는 등 가혹한 통치로 고트족들의 원한을 샀다.
프리티게른은 여러 고트족 족장들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회합을 가졌는데, 이에 위협을 느낀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 등은 연회를 가장하여 고트족의 지도자들을 몰살시키려다가 실패하였다. 이에 분노한 프리티게론은 고트족의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5천 남짓한 군사로 1만에 달하는 루피키누스의 로마군을 마르키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이후 고트족과 동로마의 전쟁은 2년 동안 이어졌다. 당시 동로마 측은 고트족의 군세를 원만히 제압하지 못하였으나, 고트족 또한 세력이 하나로 결집되지 못하여 동로마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후 378년, 프리티게른은 발렌스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동로마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를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라고 부른다. 동로마군은 발렌스의 성급한 지휘로 인하여 강행군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숫적으로 우세한 고트족과 싸워야했다. 그에 반하여 프리티게른은 동로마군의 상태를 훤히 꿰뚫고는 치밀한 작전을 준비했다. 그는 들판에 불을 질러서 한여름의 무더위와 오랜 행군으로 지친 로마군의 체력을 고갈시켰으며, 필요할 때에는 화친 협정을 통해 시간을 끌면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는 지략을 선보였다.
고트족과 맞붙은 동로마군의 좌익은 고트족의 후방을 공격하였으나, 이미 지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 와중에 고트족의 기병대가 우회하여 로마군의 좌익을 덮쳐서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이를 시작으로 동로마군의 전열은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밤새도록 계속된 전투에서 15,000~30,000 명 가량의 군사 중 약 3분의 2가 궤멸당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인 발렌스와 주요 지휘관인 트라야누스, 세바스티아누스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이후로 프리티게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는 그리 오래지 않아서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병사했을수도 있지만, 발렌스 황제가 사망한 후에 동로마 측에서 다시 반격을 시작했던 당시에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죽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봄직 하다.
어찌 되었든간에 프리티게른이 지휘하는 고트족 군대가 발렌스 황제를 죽이고 동로마의 군대를 궤멸시킨 사건은 적지않은 파장을 불러왔다. 동로마는 비록 고트족을 상대로 반격에 성공하여 우위를 점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전력을 몸으로 체감한 후에는 이들을 회유하여 용병으로 활용하는 일이 더 많아졌으며, 이는 서로마도 마찬가지였다.[3]
[1] 아타나릭은 이후로도 기독교도들을 박해한 야만족으로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2] 다만 무기를 버리고 오겠다는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고트족의 전사들은 무기없이 로마의 땅으로 들어간다면, 위급시에 가족들을 지킬 수 없게 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로마의 관리와 군인들에게 뇌물을 바쳐서 몰래 무기를 숨겨서 들어왔다. 사정이 괜찮은 이들은 양탄자와 아마포, 소와 노예 등을 뇌물로 주기도 했고, 심지어는 아름다운 처녀들이나 소년들에게 매춘을 시키기까지 했다.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기를 숨겨왔던 고트족의 노력은, 로마인들의 착취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에 빛을 발하였다.[3] 서고트의 전사들은 훗날 서로마의 갈리아 지방을 침공해온 악명높은 훈족의 왕 아틸라와도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몇 세대 전만 하더라도 이들이 훈족의 침공을 피하여 로마 국경까지 쫓겨 내려왔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