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소나타 17번(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작품번호 31-2) 라단조, "템페스트"
Piano Sonata No. 17(Op. 31-2) d minor, "Tempest"
- 템페스트 소나타 전 악장
1. 개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로 작품번호 31로 묶인 세 소나타 가운데 두 번째 작품이다. 작품 번호 31의 세 작품은 베토벤만의 독창적인 음악적 수법들이 본격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음악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작품들이다. 이 17번 소나타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와 관련이 있다고 해서 ''템페스트(Der Sturm)"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2. 작곡 배경
작품 번호 31의 세 소나타가 작곡되었던 1801~1802년은 베토벤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1] 언젠가부터 시작된 청력 이상은 백방으로 치료를 시도해 보았지만 차도가 없이 계속 악화되기만 했고, 모처럼 진지하게 사귀었던 자신의 제자 줄리에타 귀차르디와의 연애도 신분 차이와 나이 차이, 그리고 여자쪽 집안의 반대 등 각종 악재에 부딪쳐서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런 일련의 좌절로 인해 베토벤은 한때 자살할 생각으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기도 했지만 다행히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음악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Op. 31의 세 소나타는 베토벤이 창작의욕을 되찾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 17번 소나타는 베토벤이 요양을 위해 하일리겐슈타트에 있을 때 씌어졌으며 작품 번호 상으로 두 번째에 위치하지만 세 소나타 가운데 가장 먼저 완성되었다. 16, 17번 소나타는 아직 완전히 고통을 떨쳐버리지 못한 상황에서 쓴 작품이라 그런지 비극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반면 마지막으로 완성된 18번 소나타는 나름 삶의 희망을 찾은 후에 작곡된 덕분인지 4개의 악장 중에 느린 악장이 없을 정도로 전반적으로 밝고 경쾌한 분위기로 넘쳐 있다. 이 17번 소나타는 요양지에서 완성된 다른 두 개의 소나타와 함께 1803년에 출판되었으며 다른 유명 소나타와 달리 특별한 피헌정자가 없다.
한편 이 작품에는 '템페스트'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데 이 별명은 베토벤 본인이 붙인 것이 아니라 베토벤의 사후 그의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가 전해준 일화에 의한 것이다. 쉰들러의 주장에 의하면, 언젠가 베토벤에게 이 작품이 매우 인상적이라고 찬사를 보내면서 "이 소나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힌트를 주세요." 라고 말했는데, 베토벤은 이에 대해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읽어보게나." 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베토벤 항목에 나와 있듯이 이 쉰들러라는 사람은 이래저래 신뢰하기 힘든 인물이기 때문에 이 주장의 진위도 의심을 받고 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쉰들러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이 작품과 희곡 템페스트 사이에 특별한 관련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베토벤이 생전에 셰익스피어를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며[2] , 그것도 귓병이 악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고전과 철학에 본격 몰두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굳이 관련성을 찾자면 간접적으로나마 영감을 주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베토벤의 유품 중에 템페스트가 있었을 정도로 이 희곡에 애착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이 템페스트라는 별명은 곡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이 별명은 별 불만 없이 통용되고 있다.
3. 곡의 구성
3악장 구성이며 3개의 악장이 모두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주 조성은 d단조이고 연주시간은 대략 22~24분 정도 된다. 작품 31의 세 소나타는 기존에 없었던 독창적인 수법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17번 소나타에서도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음악적 실험들이 등장하고 있다.
3.1. 1악장 Largo – Allegro
1악장은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d단조의 조성을 갖고 있다. 처음에 짧은 라르고의 분산화음에 이어 빠른 알레그로의 주제가 등장하며 장 3도 위의 음정으로 이 패턴이 한 번 더 반복된 후에 본격적인 제시부가 시작된다. 악장 내내 한 손으로 선율을 진행하고 다른 한 손은 8분음표나 16분음표의 빠른 베이스를 진행하는 형태가 지속되는데 양 손이 이 역할을 자주 교체하고 있다.
[image]
- 1악장 첫 부분
한가지 더 특이한 것은 일반적인 소나타 양식이 제시부 - 발전부 - 재현부 와 같은 순서로 전개되는데 반해 이 1악장은 제시부가 끝나고 재현부가 먼저 등장한 후에 재현부의 중간에 발전부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발전부는 비교적 긴 라르고 서두와 함께 시작된 후 자연스럽게 재현부의 선율과 이어진다.[3] 비록 1악장이 3악장에 비해 인지도가 많이 밀리는 신세이긴 하지만 음악적인 측면에서 1악장의 이와 같은 수법들은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데, 이런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발상들이 중기 이후 베토벤(및 베토벤의 후배들)의 작품에 본격적으로 응용되기 때문이다.
3.2. 2악장 Adagio
2악장은 B♭장조로 진행되며 딱히 발전부가 없이 제시부와 재현부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일종의 변칙 소나타 양식으로 되어 있다. 2악장의 첫부분은 1악장의 느린 부분(레치타티브)를 연상케 한다.
[image]
- 2악장 첫 부분
[image]
- 2악장 제 2 주제
3.3. 3악장 Allegretto
3악장은 주 조성인 d단조로 복귀하고 있으며 소나타형식의 악장이다.
[image]
- 3악장의 첫 부분.
[image]
- 3악장의 2 주제(4번째 마디부터 시작)
4. 평가
작품 31의 세 소나타는 초기를 마감하고 중기로 접어드는 과도기에 작곡된 작품들로, 그간 자신의 음악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시도했던 음악적 실험과 탐색이 집약되어 있다. 베토벤은 이 세 소나타를 작곡한 이후 2년 가량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지 않다가 [4] 기념비적인 역작을 발표하면서 소위 영웅시대(Heroic age)로 불리는 원숙기로 본격적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 작품 31의 세 소나타는 베토벤의 영웅시대를 예고하는 일종의 프리퀄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세 작품은 단순히 과도기의 작품이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작품성과 가치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베토벤이 힘든 시기를 어렵게 넘기면서 작곡한 작품답게 슬픔과 동시에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엿보이고 있으며, 특히 이 17번 소나타의 경우 강렬하면서도 비애감이 넘치는 3악장 덕분에 대중적으로도 상당히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5. 매체에 인용된 템페스트 소나타
- 일본 애니메이션 절원의 템페스트의 OST로 쓰였다.(오케스트라 버전)
- 영화 토탈리콜의 2012년 리메이크작에 나온다.
- 영화 책 읽어주는 여자(La lectrice)(1994)에 나온다.
- 영화 하녀에서 이정재가 이 곡을 연주했다.
- 비와이의 정규앨범 The Movie Star의 4번 트랙 '본토'라는 곡에서 3악장이 샘플링되었다.
- 레진코믹스의 작품 '은사'에서 주인공 민희와 은현이 연주했으며, 광고음악으로 3악장이 사용되었다. https://youtu.be/L5kquSTeJP8
[1] 나중에 조카 칼 판 베토벤의 양육권 문제 때문에 만만찮게 고생을 하게 된다. 베토벤 항목 참조.[2] 베토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를 바탕으로 오페라 작곡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결국 완성되지 못하고 구상단계에서 끝났다.[3] 다만 전문가에 따라 제시부 이후에 등장하는 트레몰로 스타일의 패시지를 재현부가 아니라 발전부로 보기도 한다. 이 관점으로 보면 발전부와 재현부의 순서가 통상적으로 되어 있는 셈이다.[4] 참고로 이 2년 사이에 작품번호 49의 19,20번 두 소나타가 출판됐는데, 이 두 작품은 빈 초기시절(1795~6년)에 작곡된 것으로 베토벤의 친동생 카스파에 의해 뒤늦게 출판된 것이다. 당시 카스파는 형의 작품의 출판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형의 인기가 높아지자 이 두 소나타를 비롯한 베토벤의 초기 작품 다수를 빼돌려서 형 몰래 출판하는 짓을 저질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베토벤이 불같이 화를 낸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음악팬 입장에서는 없어질 뻔한 베토벤의 초기 작품들이 대거 보존되었다는 측면에서 카스파의 돈욕심이 고마울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