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푸스 아라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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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Marcus Julius Philippus Augustus)
'''생몰 년도'''
204년 ~ 249년 9월
'''재위 기간'''
244년 2월 ~ 249년 9월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2. 찬탈
2.3. 샤푸르 1세와 강화를 체결하다
2.4. 로마 건국 천년제
2.5. 최후
3. 여담


1. 개요


로마 제국 제29대 황제. 시리아 베두인족 출신으로, 로마가 제정으로 넘아간 이후로 처음으로 로마 황제가 된 아랍인이다. 필리푸스 뒤에 붙는 아라부스라는 호칭은 그의 출신이 아랍이었기 때문에 붙었다.[1] 242년 티메시테우스가 사위인 고르디아누스 3세를 대동해 벌인 페르시아 원정에 참가했다가 243년 티메시테우스가 죽자 후임 근위대장에 임명된 후 병사들을 선동해 장인 티메시테우스의 죽음 후 낙담한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암살하고 샤푸르 1세와 매우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고 전쟁을 끝냈다. 그후 로마 건국 천년제를 치뤘지만 얼마 안 가 반란에 휘말려 자살했고 사후에 기록 말살형에 처해진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필리푸스는 서기 204년 무렵 시리아 트라코나티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는 트라코나티 지역의 시민인 율리우스 마리누스의 아들이었다. 그의 선조는 시리아 베두인 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의 집안은 로마가 제정으로 넘어간 후 20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선 완전히 로마화하여 지역 사회에서 명망높은 가문이었다. 그가 아주 보잘 것 없는 신분이라는 기록이 몇 개 있지만, 현대 역사학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필리푸스는 234년 로마 총독의 딸 마르시아 오타실리아 세베라와 결혼했는데, 그가 비천한 신분이었다면 이 결혼이 성사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2.2. 찬탈


필리푸스는 군무에 오른 이래 출세를 거듭하다가 고르디아누스 3세 치하에서 중요한 직무를 맡은 형 프리스커스 덕분에 승승장구했고 243년 고르디아누스 3세의 장인 티메시테우스가 돌연사하자 그 뒤를 이어 근위대장이 되었다. 필리푸스는 고르디아누스가 장인이 갑작스럽게 죽은 후 낙담한 나머지 아무것도 못하는 틈을 타 병사들을 선동하여 244년 2월 11일에 고르디아누스를 암살하고 황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배경에서 제국의 고위직까지 올랐는데, 이 사실은 과감하면서도 유능한 지도자였음을 입증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과감함은 제위를 노리는 쪽으로 발휘되었고, 그의 능력은 관대한 황제를 보필하는 것이 아니라 축출하는 쪽으로 집중되었다."


2.3. 샤푸르 1세와 강화를 체결하다


필리푸스는 자신이 황제로 인정받으려면 로마로 돌아가서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필리푸스는 로마군이 점령한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돌려주고 아르메니아가 페르시아의 영향권 내에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또한 그는 50만 데나리우스 금화를 페르시아에게 배상금 명목으로 바치는 데 동의했다. 그는 이 배상금 지불을 위해 동방 속주에 막대한 세금을 물었고, 이로 인해 민심은 요동쳤고 병사들은 다 이겨가던 전쟁을 중단시킨 데다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

2.4. 로마 건국 천년제


필리푸스는 형 프리스커스를 동방 총독으로 남기고 처남 세베리아누스를 모이시아와 마케도니아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후 244년 늦여름 로마에 도착했고 원로원으로부터 황제 즉위를 승인받았다. 필리푸스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고 아내 오타실리아 세베라를 황후로 지명했으며 아버지 마리누스를 신격화했다. 필리푸스는 로마와 동 떨어진 아라비아 출신인 데다 찬탈을 통해 황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의 입지가 불안정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원로원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자신의 고향에 자신과 가족의 모습을 담은 동상들을 세웠다. 또한 그는 군대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막대한 보너스를 군대에 하사했다. 이 때문에 재정이 휘청거리자, 그는 각 속주에 막대한 세금을 물렸고 다뉴브 강 이북의 게르만족에게 보내던 공납금 지급을 중단했다.
245년, 필리푸스는 카르피족이 다뉴브 강을 건너 모이시아를 약탈하고 발칸반도를 위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이끌고 발칸 반도로 진입했다. 그는 필리포폴리스에 본부를 세운 후 다뉴브 강을 가로질러 카르피족을 밀어내 다키아로 돌려보냈다. 한편 동방에서는 페르시아가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면서 다시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이렇듯 외적의 침입이 심상치 않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로마로 돌아와서 248년 4월 21일 로마 건국 천년제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기념 동전이 대량으로 발행되었고 온갖 연극과 행사가 개최되었다. 당대 역사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검투사 천 명이 콜로세움에서 관객들을 위해 희생되었고 표범, 하마, 사자, 코뿔소 등 수백마리의 동물이 죽었다고 한다.

2.5. 최후


248년 말, 고트족과 콰디족은 다뉴브 강을 건너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략했고 마르시아노폴리스를 포위했다. 또한 동방에서는 필리푸스가 부과한 막대한 세금에 반발한 시민들이 마르쿠스 호타피아누스의 지휘에 따라 폭동을 일으켰다. 필리푸스는 일단 발칸 반도 문제부터 수습하기로 하고 다뉴브 방면군 사령관 데키우스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데키우스는 임무를 완수했지만 필리푸스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249년 봄 반란을 일으켜 로마로 진군했다. 이때 이집트에서 폭동이 일어나 로마-이집트 간 밀 공급에 차질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밀 공급량이 줄어들지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필리푸스는 249년 여름 어려운 상황에서도 군대를 가까스로 모아 데키우스의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결국 그는 그해 9월 부하들에게 버림받고 절망에 빠진 채 자살했다. 원로원은 데키우스의 즉위를 승인하고 필리푸스를 기록 말살형에 처하기로 결의했다.

3. 여담


후임 황제인 발레리아누스가 샤푸르 1세에 의해 노획당했고 샤푸르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 황제가 말을 타는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디딤돌이 되어주는 형태의 부조를 많이 새겼다. 그런데 아라부스 역시 '''호구스런 강화를 맺은 업적'''(?)으로 발레리아누스랑 같이 무릎을 꿇고 디딤돌이 된 모습으로 부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치세 중에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중지되었고, 4세기의 기독교 역사학자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필리푸스는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콘스탄티누스 1세보다 앞선 '''최초의 기독교도 로마황제'''가 된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이 기록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일부 학자들은 유세비우스가 필리푸스를 기독교 신자로 간주한 것은 필리푸스가 다른 로마 황제들과는 달리 기독교도들에게 관대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1] 전임 황제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역시 트라키아를 정복한 자(Thracius)가 아닌 트라키아 사람(Thrax)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