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키우스
1. 개요
로마 제국 제30대 황제. 풀네임은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이다. 서구권 로마사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논쟁이 많은 황제 중 한명으로도 유명하다. 이유는 로마 역대 황제 중 최초로 제국 내 크리스트교인들을 조직적으로 박해했기 때문. 이런 이유 때문에 전통적인 라틴저자들에게 데키우스는 상당히 휼륭하게 평가받고 있다. 반면, 당대 크리스트교인들과 후대의 크리스트교 저자들에게는 “지긋지긋한 짐승”이라고 비난받고 있다.
데키우스는 군인황제시대를 개막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이 말하는 ‘촌뜨기’ 출신이다. 그러나 막시미누스와 달리 원로원 의원을 오랫동안 역임하면서 군사, 행정, 정치 분야를 모두 섭렵했으며, 로마의 전통과 정신을 많이 계승하려고 했다.
그는 245년부터 다뉴브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가 249년 봄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등극했고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무찌르고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았다. 이후 250년 1월부터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를 전개했으나 251년 6월 트라키아를 침공한 고트족에 맞서 싸우다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데키우스는 200년 무렵, 도나우 강 방어선에 인접한 판노니아 시르미움 근처 부달리아(오늘날의 세르비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군 입대 후 벼락 출세한 막시미누스,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달리 승진코스를 밞은 뒤 지휘관을 거쳐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됐다고 한다. 이후 232년에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235년부터 238년까지 모이시아 총독, 히스파니아 총독을 맡았다.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처럼 이탈리아와는 거리가 먼 일리리쿰 출신이었지만 막시미누스, 필리푸스 아라부스와는 달리 군사, 행정 쪽에서도 두각을 드러냈고 인품도 괜찮았다. 또 자신의 경력과 능력만으로 원로원 의원이 된 뒤 보여준 모습들도 좋았고, 이탈리아 귀족 가문 출신인 아내 헤렌디아 에트루르칼라와 결혼하면서 처가와 로마의 전통을 확고히 지지했다. 따라서 도나우 속주 출신의 ‘촌뜨기’였음에도 원로원과의 관계는 돈독할 수 밖에 없었다,
2.2. 황제 즉위
245년경, 데키우스는 필리푸스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다뉴브 방면군 사령관에 부임했다. 데키우스는 248년에 모이시아와 판노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반란을 진압한 후, 그가 이끄는 군대는 그를 황제로 추대했는데,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조시무스에 따르면 데키우스는 병사들이 저신을 추대한 뒤 건낸 보랏빛 망토을 걸친 상태에서 한동안 주저하다가 숙고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데키우스는 무너져 내려가는 국가의 재건과 부활을 기치로 내걸고 249년 봄 로마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때 데키우스의 옹립과 다뉴브 일대에서의 반 필리푸스 아라부스 운동에 대해 현대 로마사 연구자들은 데키우스가 적임자였다고 해도 로마 내 발칸 반도 분리주의 움직임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249년 9월(또는 10월), 필리푸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격돌한 데키우스는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의 상업중심지로 알려진 베로에아에서 정면으로 맞붙어 승리를 거뒀다. 이때 데키우스에게 전투에서 패한 필리푸스는 부하들의 배신에 절망에 빠져 249년 9월 살해당했다. 이후 이 소식은 로마에 전해졌는데,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근위대는 필리푸스의 아들을 근위대 병영에서 살해했고 원로원은 데키우스를 황제로 인정한 뒤 트라야누스의 칭호를 그에게 바쳤다.
베로에아 전투 승리 후,데키우스는 곧바로 로마로 이동해 여러 달 동안 자신의 권력을 다지고 황제로서 해야 할 일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면서 그는 원로원이 선사한 트라야누스라는 칭호를 가문의 이름으로 채택했고, 로마 재건을 위해 수 많은 공공 건축물을 보수하고 신축 건축물을 입안해 건설했다. 동시에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서의 직위를 인정받은 뒤 이미 사라져버린 감찰관을 부활시키기로 결심했다. 감찰관은 과거에 로마의 존속에 크게 기여했지만, 역대 황제들이 그 직위를 가로채면서 기능이 서서히 왜곡되더니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데키우스는 감찰관을 부활시켜야만 공공의 용기, 고대의 원칙과 풍습, 추상같은 법률의 권위를 회복시킬 수 있다며 원로원들에게 감찰관을 부활시킬 것을 건의했다. 그는 원로원에게 감찰관 선출을 맡겼고,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발레리아누스를 선출했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황제의 크나큰 신임에 감사를 표시하면서도 자신이 무능해 시대의 부패상을 고칠 수 없으며, 감찰관은 황제의 위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신하의 신분으로 그런 엄청난 직무와 권한을 맡을 수 없다며 거부의 뜻을 밝혔다.
2.3. 기독교 박해
250년 1월, 데키우스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후 데키우스는 칙령에 따라 제물을 신들에게 바치는 걸 거부한 기독교 신자들을 '무신론자'(...)로 간주하고 대대적으로 박해했다. 다만 이 칙령이 기독교 신자들을 겨냥하여 발표되었다고 볼 근거는 부족하다. 데키우스는 로마 제국이 날로 쇠약해지고 내란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은 사회 기강이 문란해지고 종교적 신념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여겼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신들에 대한 종교적 열기를 되살리고 제국에 대한 로마인의 충성심을 끌어올려 제국의 통합을 이뤄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황제의 칙령을 거부하고 희생 제물을 바치지 않았고, 데키우스는 이런 그들을 사회 질서를 해치는 범죄자로 취급해 탄압했다. 교황 파비아노, 안티오키아의 주교 바빌라 등 유명 인사가 순교했고,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치프리아노)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은둔했으며, 많은 신자들이 배교했다."제국의 모든 주민들은 특정일까지 '제국의 안전을 위해' 지역 사회의 제사장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 주민들은 제물을 바친 후 그들이 명령에 따랐다는 사실을 기록한 증명서를 발급받을 것이다. 이 증명서는 모든 신에 대한 주민의 충성심과 희생제물과 음료, 그리고 희생제를 감독하는 관리의 이름을 증언할 것이다."
다만 데키우스는 유대인들이 전통적인 종교 관습을 따르는 걸 허용하는 정책을 공식화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지침을 따라 유대인들에게 로마 신들에 대한 희생 제물 헌납을 강요하지 않았다.
2.4. 전사
250년, 고트족은 다뉴브 강을 건너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공했다.[1] 그들은 마르키아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 뒤 니코폴리스를 포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데키우스는 급히 트라키아로 진군해 니코폴리스를 포위한 고트족에 접근했다. 이에 고트족은 포위를 풀고 하에무스 산맥으로 물러났다. 데키우스는 급히 그들을 추격했으나 고트족의 왕 크니바가 돌연 군대를 돌려 맹렬한 기세로 기습했다. 데키우스의 로마군은 이 기습에 당황해 격파되었고 데키우스는 후방으로 물러난 후 군대를 수습했다. 이렇게 로마군을 격파한 고트족은 필리포폴리스를 포위했고, 필리포폴리스 수비군 사령관 프리스쿠스는 고트족에게 항복한 뒤 크니바 왕과 동맹을 맺고 데키우스에 대항했다.
하지만 데키우스는 전의를 잃지 않고 군대를 다시 모집한 후 고트족과 합류하려고 진군하고 있던 카르피족과 게르만족의 행군을 차단하고 산꼭대기의 통로를 신임하는 장교들에게 맡긴 후 국경 요새들을 강화하는 한편 고트족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이후 데키우스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운영해 고트족을 몰아붙였고, 고트족은 점차 괴멸될 위기에 빠진다.
이에 고트족의 왕 크니바는 전리품과 포로들을 모두 내주는 조건으로 안전한 퇴각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승리를 확신한 데키우스는 침략자들을 응징하여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겠다고 결심했고 어떠한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고트족은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251년 6월 모이시아의 아브리투스에서 로마군과 격돌했다.
고트족은 3개 대열로 이뤄져 있었는데, 제3열의 전면은 습지대의 엄호를 받고 있었다. 이윽고 벌어진 교전 초기에 공동 황제로서 아버지와 함께 제국을 통치했던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에 병사들이 동요하자, 데키우스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데키우스는 아들의 죽음에도 흔들림 없이 군대를 지휘했고, 결국 고트족의 제1열과 제2열이 괴멸되었다. 이에 로마군은 제3열마저 섬멸하려 진군했다. 그런데 그들은 에트루스쿠스의 죽음에 분노해 이성을 상실했는지 제3열 전면에 있는 늪지대로 돌진해 버렸다. 병사들은 늪에 빠져 밑으로 가라앉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병사는 미끄러졌다. 그런 불편한 상황에서는 장창을 휘두를 수도 없었다. 반면 고트족은 그런 습지에서 싸우는 게 익숙했다. 그들은 키가 컷고 창이 길었으며, 멀리서도 적군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었다."한 병사의 죽음은 공화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결국 로마군은 늪지대에서 허우적대다가 고트족에게 괴멸되었다. 이때 데키우스도 늪지대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전사했고 시신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이로써 데키우스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외적에게 전사한 황제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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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년 로마의 산 로렌초 부근에서 발견된 루도비시 대석관. 서기 250년에서 26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로마 대석관이다. 중앙에서 로마군을 지휘하는 인물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한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인 것으로 추정되며, 이 대석관을 제작한 목적은 남편과 아들을 잃어 비탄에 빠진 데키우스의 미망인을 위로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로마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3. 평가
데키우스는 동향 출신의 전임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사산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암살하고 즉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받고 있는[2]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많이 비교되고, 평가받는다. 따라서 이런 비교 부분에서의 평가에 따르면 데키우스의 평가는 그가 현대까지 논쟁의 대상이 된 조직적 기독교 박해와 달리 상당히 괜찮다고 당대 로마인들부터 현대까지 평가받고 있다. 그 이유는 데키우스 역시 막시미누스, 필리푸스 아라부스처럼 군인 출신임에도 군사경험, 군사적 재능이 두 전임자보다 상당히 괜찮았고 인격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로마인들이 말하는 ‘촌뜨기’ 출신 군인황제임에도 군단장을 거쳐 원로원 의원을 오랫동안 역임했고 이 과정에서 군사, 행정, 정치 분야를 모두 섭렵하고 그 성과도 평균 이상으로 좋았던 사람이었다.데키우스는 제국을 통치한 지 2년 만에 다뉴브 강을 건너 이민족을 쫓는 동안 아브리투스에서 배반을 당해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 지나치게 과감한 공격을 하다가 전사했지만 데키우스는 ‘군사 한 명 잃은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꿋꿋한 모습을 보였다고 사람들은 전한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재개했고, 격렬히 싸우다가 마찬가지로 전사했다.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관하여>, 29
아울러 데키우스는 현대까지도 “뛰어난 발칸 출신의 로마황제”의 1번타자이자 그 시작이라고 불린다. 즉,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대선배이자 직속 선배라는 이야기인데, 이는 그가 두 전임자와의 상대평가 측면에서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3세기 황제 중 괜찮았다고 평가받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일각에서는 그가 유능했다고 해도 같은 발칸 출신의 후임자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콘스탄티누스 1세와 비교해보면 군사적 역량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부족하지 않느냐는 말이 있다. 즉,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떠도는 소문처럼 제위를 노리고 음모를 꾸며 데키우스의 군사적 무능을 보여주고 데키우스 부자를 동시에 없애기 위해 고트족과 비밀 제휴한 것이 진짜 사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할 경우, 이를 감안해도 무작정 대단하다고 떠받들 수 없다는 이야기다[3] .
그러나 이런 주장과 별개로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로 대표되는 로마시대 저자들의 평가는 “짧지만 명예로운 제위를 마감하는 영광스러운 최후”로 불려졌고, 후임자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아이밀리우스 아이밀리아누스가 모두 병사들에게 살해되면서 빠르게 몰락한 탓에 데키우스와 그의 장남의 전사는 이들에 비해 로마황제다웠다고 평가를 받았다. 반면 이런 황제로서의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서구권 로마사 역사가들 사이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논쟁이 많은 황제 중 한명이다. 바로 로마 황제 중 최초로 국가에서 조직적으로 기독교도를 박해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당대 기독교도였던 로마인, 또는 기독교 공인 이후의 로마인들과 역사가들에게 “전통을 강조한게 지나쳤다”, “지긋지긋한 짐승”같은 말을 들을 정도로 비난받고 있다.
특히 이런 여론은 당대 팔레스타인과 레반트, 이집트 일대에서 더 격렬했다고 하는데, 4세기 팔레스타인 카이사레아에서 활동한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는 전임자 필리푸스가 기독교도였다고 주장하면서 데키우스의 조직적인 기독교 박해가 정치적 목적으로 자행되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3세기 군인황제 시대 황제 중 상상 이상으로 괜찮았던 황제였다는 라틴저자들의 평가처럼 대대적인 제국 내 기독교 박해가 단점이어도 이 부분 외에는 국가행정, 군사 측면에서 황제로서 괜찮았다고 평가받는 만큼 그가 무작정 좋은 황제, 또는 나쁜 황제로 평가하는 것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1] 시비는 로마가 먼저 걸었다. 전임황제 필립 아라부스가 카르피족을 족치고나서 고르디아누스3세 시기에 맺었던 로마가 고트족에게 연공금을 지불하는 조약을 깨버렸다.[2] 고대 전승기록에서는 고르디아누스 3세가 암살됐다고 하지만, 교전국 페르시아 측의 기록이나 비문에서는 고르디아누스 3세가 기병대를 이끌고 싸우다가 격전 중 전사했다고 나온다.[3] 이는 오늘날에는 근거없는 낭설로 치부되고 있다. 왜냐하면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데키우스 유족들에게 한 행동, 데키우스 차남을 양자삼아 공동황제로 두고 한 행동 및 그의 태도 등을 봤을 때, 또 갈루스의 인간됨을 보았을때 그가 조국과 데키우스 부자를 고트족에게 팔 이유도 없고, 당시 로마 상황상 지나치게 무모한 방법으로 제위를 찬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