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미누스 트라쿠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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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정 최대의 혼란기로 뽑히는 군인 황제 시대의 첫 황제.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트락스(Gaius Iulius Verus Maximinus Thrax: ?~238). 재위 기간은 235년부터 238년까지이며, 일개 사병 출신으로 황제가 된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그 악명 높은 군인 황제 시대를 열게 된 첫 타자. 후술하겠지만, 보조병으로 입대해 진급해서 로마시민권을 따고, 그것도 최전방 전투대대장도 근위대장도 아닌 '''신병교육대장'''이었던 사람이 황제가 되었다. 군단장이었다면 그전에 원로원 의석을 얻었을테지만, 군단장은 커녕 전투대대장도 해보지 못했고, 제정 로마에서는 최상류층인 원로원 의원의 자제들이 입대해서 기초군사교육을 마친 후 소위 계급을 달고 임관해서 제일 먼저 받는 보직이[1] 전방 선임 전투대대장이었다. 그전까지의 황제들이 아무리 어려도 형식적으로는 원로원의 의결을 거쳐 즉위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또 그동안 즉위한 황제들이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 황제를 왜 그렇게 원로원이 갈궈댔는지 알 수 있다. 애초에 트락스라는 말 자체가 "트라키아를 정복한 자"라는 칭호가 아니라 '''트라키아 야만족 나부랭이'''라는 '''비하'''의 뜻이 담긴 말이다.
이름대로 트라키아 출신이다. 속주민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서 산야에서 목동으로 구른 흙수저였다. 그러다가 야망있는 또래 속주민들이 그렇듯이 출세를 위해, 또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출신보다는 능력이 중시되는 로마군에 '''보조병으로 입대'''했다.[2][3] 그러니까 막시미누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로마 시민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발칸 반도 출신의 속주민,[4] 또는 어쩌면 그 당시 로마인들이 말하는 '문명화된 야만족'이었을지도 모른다.시민권도 얻고 출세도 하기 위해 입대한 그는 비록 헬라어는 알지도 못하고 라틴어조차도 지독하게 서툴렀지만, 젊은 시절부터 키가 8피트 6인치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5] 로 체격도 매우 좋고 힘도 좋고 털털하고 친근한 성격에 호쾌한 청년이라 마침 자기 부대를 시찰하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눈에 띄어 황제 직속 경호대원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그는 무려 말과 달리기 시합을 해서 이기고, 엄지손가락이 어찌나 굵은지 귀부인의 팔찌를 반지로 써도 될 정도였으며, 마차 한 대쯤은 가볍게 맨손으로 끌었고, 말의 아가리을 주먹으로 치면 말의 이빨이 우수수 털려나왔다고 한다. 과장이 많이 섞이긴 했지만 그야말로 엄청난 괴력과 강건한 신체를 지녔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그 뒤로 전투력과 통솔력을 인정받아서 전방 군단에서 백인대장으로 굴렀지만 희대의 기행꾼 성도착자 황제 엘라가발루스에게 소환되어 "네가 그렇게 힘이 쩔어준다던데, 너 내 앞에서 여자 수십명하고 밤새도록 하렘플레이 가능?" 이라는 성희롱을 듣고는 그대로 군대를 그만두고 귀농해버렸다. 그러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에 다시 군에 복귀하여 최전방인 라인 강 방어선의 신병교육대장으로 발령받았다. 전설적인 전투력과 경력과 인기와 인맥을 갖췄는데도 크게 진급하지 못하고 신병교육대장에 그친 것은 결국 그의 다른 능력은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어쨌든 백발이 성성한 노년에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늙어서도 혈기왕성하게 도전해오는 20대 신병들을 아무리 많이 참교육시키고도 절대로 지치지 않는 무한체력을 갖춘 동시에, 부하들에겐 성격 털털하고 출신 안 따지는 좋은 아버지 혹은 형님 같은 사람이었으므로 그에게 교육받은 후 자대배치 받고 복무중이었던 라인강 방어선의 군단병들도 그를 매우 좋아했고, 그 때문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죽자마자 라인강 방어선의 군단병들이 이 힘 하나는 장사인 말년 교관 아저씨를 황제로 추대하는 바람에 덜컥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2.2. 황제
하지만 이러한 배경[6] 때문에 원로원과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황제 등극 과정에서 완벽하게 무시당한 원로원은 야만족 출신일지도 모르는 교관 출신의 이 황제를 교양 하나 없는 '''반 야만족'''이라고 깠다. 물론 변방 야만족 출신인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로마군에는 역대로 코르불로나 폼페이아누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등 변방 출신 명장들이 많았다. 오히려 실력으로 승부하는 군대의 특성상 변방 출신들이 많았고, 능력이 뛰어나고 원로원을 무시하지만 않으면 변방 출신 황제들도 원로원의 지지를 많이 받기도 했다. 문제는 트락스가 그리스어는 커녕 라틴어도 교양있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아직 정치 엘리트가 즉 군사 엘리트이기도 했던 로마 제국의 원로원에는, 당시에는 그런 전통이 빛이 바래긴 했지만, 아직 군단장과 군사령관을 역임한 전직 고위 장성들이 즐비하게 앉아있었고, 군 경력이 별로 필요 없는 명문 출신 원로원 의원들조차도 전부 최소 대대장으로 의무복무를 마친 자들이었다. 말도 똑바로 못하는 말년 상사급이 단지 병졸들 사이에서의 인기투표로 로마군 최고사령관이 되어서 명령을 내리는 것을 원로원 의원들이 납득을 할 수 있었을 리가 만무하다.
그래서 황제는 이런 원로원을 철저히 무시하고 자기 할 일 - 국경 방어, 즉 야만족 격퇴 - 를 빙자한 최전방의 패싸움 - 에만 열을 올렸다. 원로원과의 관계가 어찌 되었건 전방의 군단병들은 자신의 무력 하나는 신뢰하고 있었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어쨌든 패싸움이었으니까. 그리고 게르만족들은 로마인들이 문명화시키기도 어려웠고 숲과 늪이 즐비한 지형 때문에 회전으로 무찌르기도 어려웠으며 다만 눈에 보이는 압도적인 '힘'에 굴복하기 때문에 체구가 작은 로마인들을 깔보는 성향이 강했으므로, 참 아이러니하게도 게르만족을 두들겨 패서 굴복시키는 역할에는 스키피오 같은 전술의 천재나 스틸리코같은 실질 강건한 장군보다는 이런 지치지 않는 거구의 천하장사가 더 잘 맞았다는 것이다. [7]
다만 이렇게 최전방에서 야만족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국과 후방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승리에 취한 황제는 원로원에 보내는 보고서에도 무슨 중2병 일진의 일기장같이 천박한 폭력과 자기 자랑만 잔뜩 늘어놓았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야만족과의 패싸움은 소모적이며 비용이 깨지니 텅 빈 국고를 세금을 올려 메꿀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3년을 지내다가 결국 북아프리카에서 농장주들이 높은 전시 세금에 반발하여 세리를 죽이고 북아프리카 속주 총독인 79세의 고르디아누스 1세를 황제로 내세우자 원로원이 이에 흥분하여[8] 현직 황제인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공적)'''으로 선포해 버린다. 하지만 원로원의 예상과 달리 북아프리카 속주 바로 옆인 누미디아 속주 총독 카펠리아누스는 이런 원로원의 공문을 과감히 무시해버렸다. 그는 막시미누스 트락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고르디아누스 부자와 북아프리카 속주를 토벌하겠다고 발표했고, 북아프리카 유목민을 방어하는 병력을 제외한 군단병들을 이끌고 카르타고로 쳐들어갔다.[9] 치안 경비병에 가까운 1개 군단을 싸그리 모아서 방어하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는 그대로 패배해서 전사했고, 소식을 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자결했다.
2.3. 암살
동시에 야만족 방어를 위해 전선에 나가 있던 막시미누스는 화가 나서 로마로 진군한다. 궁지에 몰린 원로원은 빼도 박도 못하게 돼서 자기들 중에 경력과 실적이 좋은 엘리트 둘을 뽑아 공동 황제로 세웠다. 그들이 바로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다. 그리고 고르디아누스의 (외)손자인 고르디아누스 3세를 차기 황제로 지목했다.
이래저래 내전이 시작되었지만, 막시미누스 본인의 예상과 달리 뜻대로 일이 안 풀리게 되었다. 그는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가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장기전을 치뤄야만 했다. 오랫동안 전투에서 잔뼈가 굵은 황제가 이끌고 있는 야만족과의 전투 경력이 풍부한 정예군임에도 불구하고, 반역을 저지른 원로원을 토벌하러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본국 이탈리아에서 시민들의 저항을 맞아 장기전에 처하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 중 일부가 어이없게도 자신들의 상관인 황제를 살해해 버렸다. 어떻게 보면 병사들의 인기로 황제가 되었고, 병사들의 인기가 사라지자 폐위되어 버린 케이스. 이때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도 살해되었다.
여담으로, 이렇게 어이없게 막시미누스라는 거대한 공적이 사라져버리자,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는 공동 통치로 정권을 유지해 나가긴 커녕 서로를 의심하고, 동료들인 원로원마저 두 황제파로 나뉘어 다투는 사이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그리고 군인황제 시대에서 그나마 안정적이고 평화적으로 고르디아누스 3세가 뒤를 잇게 되었다. 고르디아누스 3세도 비슷한 사정이었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비슷하게, 실무자의 도움을 받아 몇 년간 잘 통치하다가, 실무자가 죽고 나서 혼란에 빠졌다가 야심가였던 신임 근위대장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살해당한다.
3. 평가
역사가 브렌트 쇼가 평가했듯이, 이전 군인 출신 황제인 트라야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달리 5세기 로마 황제들과 많이 비슷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막시미누스는 5세기 황제 중 동향 출신의 로마 황제들인 리키니우스, 갈레리우스 등과 많이 비슷해보여도 쇼를 비롯한 학자들의 평가처럼 말 그대로 직업군인 출신 중 제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즉위 당시부터 정통성 부분에서 자신의 실력이 어느 한 쪽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치 경력이 일천해도 그가 황제로서 인정받거나, 최소한 제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지지가 필요했는데, 불행히 막시미누스는 순수 군인 출신 황제 중 원로원과의 관계가 가장 험악했고, 관계 개선의 노력도 크게 신경쓰지 않은데다 즉위 과정에서도 민중들에게 평판이 상당히 좋았던 전임자와 그의 가족, 친구 등을 모조리 학살해버렸다.
따라서 학자들의 일관된 평가처럼 그의 군사적 재능은 굉장히 중요했는데,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게르만족과 도나우 강 일대의 야만족들을 상대로는 뛰어난 장군이었다고 하더라도[10] , "황제이기 이전에 원로원 의원이었던" 세베루스 황제의 경호병인 걸 제외하면 원로원과 아무런 연줄도 없는 데다가 황제 이전의 지위도 겨우 신병교육대장에 불과했다. 즉, 로마군의 군단 하나를 이끄는 군단장도 역임하지 못하고 황제가 된건데 그는 지중해식의 공성전에는 전략, 전술적으로 별로였던 것으로 보이고 모든 군경력 역시 특정 민족들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 집중된 모습이었다. 물론 두 전투 방식은 차이점이 있고, 전투방식도 달랐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약점은 신병교육대장 출신으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암살 뒤 옹립된 막시미누스에겐 분명 치명적 약점이었다. 어찌되었든 이것도 능력은 능력인 만큼 그가 공성전을 벌이면서 장기전에 이르게 해서, 병사들의 불만을 일으켰고 몰락했다.
로마 황제들 중 자의, 타의에 상관없이 즉위한 이들에게 군사적 재능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아그리파로 대표되는 공화정 시대의 장군들 또는 티베리우스, 트라야누스 같은 로마 황제들처럼 탁월한 천재성을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로마 황제는 임페라토르이고, 어느 정도 이상의 군사적 재능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순수 군인 출신 황제였고 이를 커버해줄 어떤 특장점도 없었기 때문에 압도적인 군사적 재능은 필수적 요소였다.[11] 그래서 이런 이유 때문에 일각에서는 막시미누스 본인이 가진 재능이 부족한 탓에 그가 결국 몰락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막시미누스 트락스 본인이 한때 모시고 다녔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크게 대비되는 부분인데, 그의 상관이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경우에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트라야누스와 비교해 뛰어난 군사적 재능까진 아니어도, 정치력과 군사적 능력이 상당히 뛰어난 황제였다. 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원로원과 사이가 나빴어도 군인 이전에 아테네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변호사이자 원로원 의원이었고, 주변 친구들 역시 원로원 의원들, 법학자, 철학자 등이 많았다.
그래서 막시미누스 입장에서는 어쩌면 제국이 혼란기만 아니었고, 자신을 등용하여 지휘관급으로 만들어준 세베루스 왕조가 유지되었다면, 전선에서 신병들을 토닥이면서 행복하게 살다가 로마 군단장을 거쳐 노년에 원로원 의석을 얻어 수도 로마에서 노후를 보장받고 살았을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같은 3세기 황제 중 데키우스처럼 군단장을 거쳐 원로원 의석을 얻은 상태에서 황제가 되었더라면 군인 황제 시대의 전개가 매우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트락스 몰락의 결정적인 원인은 원로원이 트락스를 매우 싫어했고, 이런 원로원의 태도에 대해 트락스 역시 군대에만 모든 것을 쏟으면서 탄압 등으로 맞대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원로원 외의 다른 상류층이나 로마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았냐고 물으면 이것도 최악이었다. 로마 민중들은 그의 지나친 세금 수탈과 강압적 통치 스타일 탓에 적이 됐고, 상류층들 역시 트락스의 지나친 군비 탓에 그들의 재산이 뺏긴 상태였고 트락스는 그들이 자신에게 유화적이지 않다고 해서 강경하게 대응했다. 따라서 로마 민중과 상류층 모두 그를 미워했는데, 군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린 트락스는 이런 단점들 탓에 군사적으로 실패하자 결국 몰락했고,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그 뒤에 등극할 갈리에누스처럼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혼란스러운 군인 황제 시대를 연 인물이자, 최초의 사병출신 황제로서 그 뒤로 등장한 사병출신 군인 황제들의 모델이 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1] 주홍띠를 두른-원로원 계급의 상징.[2] 그러니까 시민권이 없었다는 말이다. 카라칼라 황제가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 전까지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보조병으로 입대해서 만기전역하거나 또는 지휘관으로 진급해서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다.[3] 다만 카라칼라 칙령이 반포된 시점에서는 이미 막시미누스는 로마 시민권을 받은 상태다. 카라칼라 칙령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다.[4] 트라키아 문서 참조.[5] 2미터 60센티미터.[6] 트라키아 속주민 출신 + 태생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않은 자 + 일개 사병 출신 + 즉위 자체도 찬탈형식.[7] 트락스 황제 치세에 게르만족을 말 그대로 박살낸 라인 강 전선은 이후에도 그 기능을 오랜 기간 유지했다.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시기에 침입해 온 게르만족이 공격한 지역 대부분이 도나우 강 방어선이라는 것이 그 증거다...라고 하지만 라인 강 전선으로도 잘만 쳐들어 왔다. 3세기에 가장 많이 피해를 받은 지역 중 하나가 북부 갈리아다. 갈리에누스 황제 시절에 결정적인 승리 이후 라인 강 하류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시기를 맡게 된다.[8] 고르디아누스 1세는 당대 최고 명문가이자 공화정 시대부터 400년 넘게 원로원 의석을 지킨 가문 출신이다. 혈통으로도 본인은 2명, 아들은 3명의 황제의 후손이었다. 또한 로마 최고 부자이기도 했다.[9] 내란이라고 볼 수도 있고, 반란 토벌이라고 볼 수도 있다.[10] 로마군에게 담뱃불 붙여주던 공화정 및 원수정 초기의 게르만족이 아니고 리더쉽 있는 족장이 이끄는 체계잡힌 집단인 걸 고려해야 한다.[11] 가장 가까운 시대의 실패한 황제 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 카라칼라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주장을 앞세워 즉위한 엘라가발루스만 봐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