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누스 1세 마그누스 / Constantinus I Magnus'''[1]


'''로마 43대 황제
Constantinus 大帝 | 콘스탄티누스 대제
'''
[image]
[2][3]
'''제호'''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Magna)
''''''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누스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출생지'''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 나이수스[4]
'''생몰 년도'''
272년 2월 27일 ~ 337년 5월 22일 (65세)
'''재위 기간'''
306년 7월 25일[5][6] ~ 337년 5월 22일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4두정치의 혼란
2.3. 제국 재통합
2.3.1. 서기 312년, 막센티우스와의 내전
2.3.1.1. 준비
2.3.1.2. 알프스 산맥을 넘어 진격한 토리노 전투
2.3.1.3. 베로나 공성전
2.3.1.4. 막센티우스의 반응
2.3.1.5. 312년 10월 로마 근교
2.3.2. 313년 막시미누스와 리키니우스 내전
2.3.3.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내전
2.3.3.1. 1차 내전
2.3.3.2. 마르디아 전투
2.3.3.3. 제국 통일
2.3.3.4. 평화 협상
2.4. 단독 황제로서의 통치와 사망
3. 체제 개혁
3.1. 행정 체계 개혁
3.2. 군제 개혁
3.3. 기독교 공인
3.4. 전반적인 법률
3.5.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 건설
4. 잔혹한 가족사
5. 평가
6. 기타: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심
7. 출처(참고문헌)
8. 둘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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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such and so grave a wickedness oppresses humanity, and when the state is in danger of utter destruction from a sort of pestilential disease and needs much life-saving medical care, what relief does the Divinity envisage, what escape from horrors? And that is surely to be considered divine, which alone really exists, and holds power continuously through all time; it is surely not mere bombast to use solemn words to acknowledge the benefit received from the Supreme.'''

'''He examined my service and approved it as fit for his own purposes; and I, beginning from that sea beside the Britons and the parts where it is appointed by a superior constraint that the sun should set, have repelled and scattered the horrors that held everything in subjection, so that on the one hand the human race, taught by my obedient service, might restore the religion of the most dread Law, while at the same time the most blessed faith might grow under the guidance of the Supreme.'''[7]

그러한 불경스러운 태도가 인류에게 만연하고 국가는 파멸의 위협을 맞았으니, 하느님께서는 어떤 대책을 강구하셨겠는가? ······ 나 자신이 바로 하느님께서 택하신 도구였다. ······ 그리하여, 해가 자연의 법칙에 순종하여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는 먼 브리타니아의 바다에서부터 시작하여 해가 지는 동방에 이르기까지 나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당시 만연한 온갖 형태의 악을 내쫓고 없앴다. 그것은 바로 인류가 나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하느님의 성스러운 법에 제대로 순종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ㅡ 콘스탄티누스 대제, 에우세비우스[9]

의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Vita Constantini)>에서 인용

'''Dedicatur Constantinopolis (paene) omnium urbium nuditate.'''[10]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완성되자 다른 도시들은 (거의) 모두 벌거벗은 상태가 되었다.[12]

ㅡ 성 예로니무스


1. 개요


로마의 43대 황제. 로마 제국 역사상,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역할을 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기독교 공인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13]로 인해 후세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황제.[14] 하지만 그것 외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체제를 재정비하여 제국의 수명을 1,000년 이상 연장시킨 업적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이 서방과 동방의 통일된 형태로서 장기간 존속하지 못한 것은 내외부적인 문제가 겹친 결과일 뿐이고, 당대 로마인들은 콘스탄티누스 이후 1, 2세대 정도는 세계가 온전히 재건된 것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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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밑에 써 있는 글씨는 그리스어 ὁ Αγίος Κωνσταντίνος, 영어로 옮기면 'The Saint Constantine'(성 콘스탄티누스)이다.
대제의 칭호를 얻은 황제[15] 중 하나며, 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합성론 교회들) 및 경교에서 성인으로 시성(성 콘스탄티노스 대제, Μέγας Κωνσταντίνος)하기도 한 황제다.
사두정치의 혼란으로 내전에 빠졌던 제국을 평정했고, 옛 비잔티움 자리에 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더 유명해진 로마 노바를 건설했다.[16] 또한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이어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의 대립으로 기독교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니케아 공의회를 열었고 공의회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세계에서 대제와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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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에 만든 흉상
272년(또는 273년) 2월 27일 로마 제국의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현재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나이수스 (Naissus)에서 장군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그의 첫째 부인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17]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친이었던 헬레나의 출신은 불분명하며,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적대적인 측의 자료에선 창녀였다고 폄하하지만, 정치적인 반대편에서 활용한 적도 없기에 이 설은 콘스탄티누스가 단독 황제가 된 이래로 나온 헬레나도 귀족 집 딸 자손이었다는 얘기와 맞먹는 낭설이다. 때문에 헬레나가 선술집 딸이었다는 전승이 현재로서는 가장 설득력이 높다. 로마 시대에는 술집 종업원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았으며 매춘부를 겸하는 경우가 일상이었던 관계로 술집 딸이니 매춘부라는 과장이 가해진 것이 아닐까 한다.
292년 4두정치의 수립으로 부제가 된 부친이 정략적 이유로 인해 헬레나를 버리고 제국 서방 구역의 정제인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하자, 콘스탄티누스는 일종의 인질로서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휘하로 들어가 복무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동안 디오클레티아누스 밑에서 고급 장교까지 승진했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상당한 활약을 했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퇴위 후 새로운 부제 후보가 들먹여지자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동반 은퇴 이후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가 정제의 위치에 오르자 부제가 된 건, 갈레리우스의 부하 장교인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서)와 갈레리우스의 외조카인 막시미누스 다이아(동)였다. 당시에 갈레리우스는 나중에 술친구[18] 리키니우스를 포함하여 세 명을 정, 부제위로 꽂아넣을 정도로 막강했다. 어쨌든, 콘스탄티우스 1세의 장성한 아들이긴 했으나 이혼당한 처의 아들이란 이유 탓에 다소 묘한 위치였음에도 당시부터 본인의 능력으로 은근히 주목을 모으던 콘스탄티누스에게 갈레리우스가 상당한 경계심을 보였고[19],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아나톨리아 지역을 갈레리우스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콘스탄티누스는 갈레리우스 밑에서 군생활을 해야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를 몹시 괴롭혔다는 일화들은 신빙성이 그다지 높지 않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를 콘스탄티우스 1세에게 보내는 걸 대단히 꺼릴 수밖에 없었던 개연성은 대단히 높다. 굳이 말하면, 중국 중세사에서 석륵이 석호를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던 이유와 비슷했다. 콘스탄티누스 자체가 워낙 뛰어난 맹장이었고 가뜩이나 벌써부터 슬슬 게김성이 강해지는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고려해볼 때,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를 잃고 싶지 않을 이유는 콘스탄티누스의 뛰어난 군재에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명목상으론 선임 정제인 콘스탄티우스 1세의 아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갈레리우스가 언제까지나 거부할 순 없었고,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갈리아에 있는 아버지 휘하로 돌아가 복무할 수 있었다.[21] 1년 뒤 부친이 그 브리타니아 원정 중 오늘날의 요크에서 병사하자, 부제가 정제로 승급해야 하는 순번을 거스른 채 군인들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고[23]이 때 남아 있던 유일한 정제인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를 부제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정제로는 인정하지 않고, 부제로는 인정하면서 갈리아-브리타니아(갈리아 군관구, Praefecture of Gallia)의 지배권을 맡겼다.[24]
콘스탄티누스 1세의 영역이 된 이 지역은 지역적으론 넓어보이나 경제력에선 떨어지고, 동시에 다수의 이민족들이 노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1차 4두정치 때도 이 지역을 담당한 건 서방 부제였고, 콘스탄티누스 1세도 우선 4두정치 안에 들어가는 공인받은 황제가 되어야 하므로 정제에서 부제로 강등되는 것을 일단 받아들였다.

2.2. 4두정치의 혼란


라인 강 방어선 지역을 담당하게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06년부터 316년까지 10년 동안 이 지역의 안정화에 힘쓰며 게르만족의 침입을 방어했다. 이때 그의 수도는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현 독일 서부의 트리어)이었다. 재위 당시 이민족들에게 상당히 잔혹하게 굴어 포로로 잡은 이민족들을 죄다 원형경기장에 던져넣어 산 채로 사자밥으로 만들기도 했고, 필요하다면 학살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로마사에선 쉽사리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경관[25] 비슷한 모양도 연출했다.
하지만 내정은 잘해 속주민의 생활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향락과 방종에 여간하면 빠지지 않았다. 한편 다른 지역은 4두정치가 그 한계를 드러내며 혼란에 빠져 있었다.
발단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였다. 오랫동안 정제(20년 정도)였던 황제의 적자인 자신은 제위에 오르지 못했는데 잠깐 정제였던 황제의 서자인 콘스탄티누스 1세가 황제 중 하나가 되자 불만을 품은 막센티우스는 306년 10월, 마찬가지로 4두정의 수립 이후 소외된 데 불만을 품은 로마 원로원과 시민(SPQR) 및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병단의 지지를 받으며 봉기, 그의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까지 이를 지원하고자 황제로 복귀하면서 로마 제국의 황제가 6명이 되는 상황이 초래된다.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정제 및 부제위를 장군, 총독들끼리만 주거니 받거니 하니까. 시민들에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문서에 써 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탈리아를 본국의 위치에서 격하시켜 일반 속주와 동등하게 했고, 면제되던 세금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로마 시는 예외라 계속 면세의 특권이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정부(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시에서마저도 특권을 폐지해 세금을 걷으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프라이토리아니의 로마 시내 주둔기지를 정리하는 작업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로 계속 차근차근 시행되고 있었다.
서방 정제였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26]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막센티우스를 지원하고자 제위로 복귀한 막시미아누스에게 참패, 라벤나에 웅거했다가(307.2월) 꾀에 속아 스스로 나와서 로마로 압송되었다가 자결을 강요당하는 형태로 처형되었다(307. 9). 이 때문에 4두정치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졌다. 당시 동방 정제이자 사실상 최선임 황제로서 주도 및 중재하는 입장에 있었던 갈레리우스까지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으나 막시미아누스-막센티우스 부자는 이 또한 격퇴했다.[27]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08년 동방 정제인 갈레리우스는 은퇴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등 여러 전현직 황제를 카르눈툼 군단기지로 초청,[28] 회담을 가진 후 서방 정제로 갈레리우스의 친구였던 리키니우스를 올리게 된다. 또한 막센티우스를 공적으로 선포했다. 정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죽였다는 팩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어 불만을 품은 막센티우스는 아버지 막시미아누스와 심한 다툼을 벌이게 되었고, 막시미아누스는 근위대가 도열해 있을 때 아들의 자줏빛 망토를 힘으로 벗겨 퇴위를 시도했지만 근위대는 막센티우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때문에 막시미아누스는 심하게 눈치를 보는 상황에 몰렸고, 디오클레티아누스처럼 일리리아에서 조용히 살려고 했지만 그것도 갈레리우스한테 거부당하자, 트리어로 달아나서 자신의 딸인 파우스타와 콘스탄티누스 1세를 결혼시킨 후 콘스탄티누스 1세를 아우구스투스로 선포하여 아들에게 빅엿을 먹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때 부제에서 정제로 승격된 셈이지만, 당시에 콘스탄티누스가 이를 대대적으로 선포한 바는 없으며,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후 로마 원로원에게서 정제로 선포받는 절차를 공식으로 또 거친 것을 볼 땐 그렇게 이 조치에 무게를 두진 않았던 것 같지만, 이탈리아에서 황제를 자처하던 막센티우스의 입지를 지극히 흔들어놓기엔 충분했다. 막시미아누스는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의 궁정에서 대단히 존경 받으며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게 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콘스탄티누스 1세가 라인강을 침범한 이민족을 처리하기 위해 진격한 사이 쿠데타를 시도했다.(310년) 그러나 이를 눈치챈 콘스탄티누스 1세의 역공으로 마실리아(마르세유)에서, 자결을 강요받고 사망한다.[29] 자세히 보면 공교롭게도 이 가족은 불쌍한 게 부(막시미아누스, 처형), 자(막센티우스,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전사), 녀(파우스타, 후계구도와 궁정음모로 처형)가 '''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죽는다.'''
이후 311년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가 병사하자 막시미누스 2세 다이아가 동방 정제로 취임하고, 그 시점에서 리키니우스는 슬금슬금 동방으로 넘어가고 있었다.[30] 그로써 콘스탄티누스 1세 ↔ 막센티우스 (서) /// (동) 리키니우스 ↔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명백해졌고, 누가 누구와 동맹을 맺어 2:2 구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가 남았는데, 막센티우스의 선전포고를 받자[31] 리키니우스막센티우스의 동맹으로 1:2 협공이 이루어질 것을 두려워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리키니우스가 원래 서방 정제위로 커리어를 시작했던 것에 착안해서, '''원래 응당 당신의 것이어야 할 땅을[33] 막센티우스가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막센티우스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으므로 동맹을 맺자'''고 리키니우스에게 타진했고 리키니우스도 OK했다. 그러면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동생[34] 콘스탄티아[35]와 리키니우스의 정략결혼을 제의했고 리키니우스도 수락함으로써 약혼이 되었으며, 양측이 한숨 돌린 313년에 실제 결혼을 했다. 그럼 자연히 나머지 둘이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나머지 둘도 동맹해서 2:2의 구도가 완성됐다.

2.3. 제국 재통합


311년 ~ 312년 초에 바로 위의 외교적 준비를 포함한 사전작업을 마치고 나서, 312년 여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우선 히스파니아 속주[36]를 손에 넣은 다음,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의 투린(토리노) 전투, 베로나 전투에서 막센티우스 군을 연파한 후 아퀼레이아, 라벤나를 접수하고 이탈리아 깊숙히 내려갔다. 거기서 그해 10월 28일[37] 유명한 '''밀비우스 다리 전투'''[38]에서 막센티우스를 전사[39]시키고 제국 서부를 평정했다. 이 전투는 프라이토리아니마지막 불꽃을 산화한 전투이기도 한데, 기록에 따르면 막센티우스가 전사하고 다른 아군들이 전부 도주하는 상황에서도 프라이토리아니는 위치를 사수하며 최후까지 저항하였다고 한다. 전투력의 쇠퇴와는 무관하게 마지막까지 근위대라는 자부심은 있었던 것이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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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앞두고 십자가 꿈을 꾸는 중세의 기록화.[41]
이렇게 되어 콘스탄티누스 1세는 서방을 통일해서 한숨을 돌렸고, 로마 시 입성 후[42] 2달 반 동안 머물면서 전후처리를 했다. 그간 했던 일은, 기존의 성당 25곳에 후한 보조금을 줬던 것, 신축 성당에 대한 지원, 당시 로마 주교(현 교황의 전신) 멜키아데에게 라테라노 궁전을 기증하는 일[43] 등이 있었다. 해는 넘어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 양측은 종전의 약혼을 이행하여 결혼식을 치루었고, 공식적으로 제국을 양분해 통치하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결과가 기독교의 공인으로 유명한 종교 관용 칙령, 즉 '''밀라노 칙령'''[44](313)이었다. 그러던 중 막시미누스 다이아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 리키니우스의 발칸 반도를 침공해왔다는 급보가 들어왔고, 리키니우스는 몇 달간에 걸쳐 그와 싸워 4월 30일 트라키아의 치랄룸(아드리아노플 근교) 전투에서 크게 이긴 후, 8월에 다이아가 타르수스에서 자살함으로써 동방을 병탄했다.
그러나 이 제국 분할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암살 시도를 겪었는데, 그 암살자를 잡아서 문초해 보니까, 그 배후는 리키니우스의 부하로서 그에게 부제감으로 지목받던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45] 또한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의 접경지대인 아에모나(현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동상과 초상화를 파괴하도록 했다. 양측의 전쟁은 314년 10월 8일 키발라이 전투[46]로 시작해 316년 말~317년 초 마르디아 전투[47]를 거쳐, 317년 3월 1일[48] 세르디카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상당히 유리한 조건의 조약을 맺는 것으로 끝나게 되었는데, 그 조건은
  1. 트라키아를 제외한 유럽 속주 전역의[49] 할양,
  2. 얼마 전 316년 말에 세웠던 리키니우스의 부제 발레리우스 발렌스를 폐위 후 죽이고, 각자의 아들을 동서 양쪽의 부제로 세울 것[51],
  3. 같은 정제끼리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중 선임황제[52]임을 인정할 것의 3개로, 즉 살려는 드릴게로 요약된다.
한편, 그 사이 315년에 로마 시[53]에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54]이 완공되었다. 그런데 거기에 쓰인 부조 장식은 사실 하드리아누스 등등 예전 로마 황제에게 헌정했던 기념물의 장식을 떼어다 재활용한 것이라고 한다.[55] 여기에 쓰여진 글귀는 이렇다고 한다.

폭군과 그의 무리를 상대로 한 정의로운 전쟁에서 위대한 정신으로 승리를 거둔 신성으로 가득한[56]

황제 플라비우스 콘스탄티누스에게 바치다.

ㅡ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4 ~ 317년 내내 싸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316년 2월에 파우스타에게서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가 태어났고, 317년 8월 7일에 또 파우스타와의 사이에서 차남 콘스탄티우스 2세가 태어났는데, 그렇다면 315년 봄과 316년 가을에 하늘을 보고 별을 딴 것이 되므로 그렇게 볼 수 있다. 이후 양측은 7년여 동안 평화를 유지하며 이민족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이때 콘스탄티누스 1세의 큰아들인 크리스푸스가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 사이, 320년에, 리키니우스는 주교들의 종교회의를 전부 금지했고 주교와 사제를 다수 유배보냈으며, 자신의 부하들 중 기독교의 신이 아닌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전부 쫓아냈다고 하는데, 이는 막시미누스 다이아 파 숙청과도 맞물려, 기독교인을 포함해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콘스탄티누스 1세 측으로 대거 이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콘스탄티누스 1세 측은 317년 세르디카 조약으로 획득한 테살로니카에서, 항구의 바닥을 깊게 파는 준설 공사까지 하면서 함선을 많이 건조했다.
하지만 일시적인 평화였고, 양측 모두 때와 명분을 기다리던 중 좋은 건수가 생겼는데, 국경 안으로 들어온 사르마티아인을 격퇴하던 중에 콘스탄티누스 1세 본인과 예하부대가 리키니우스령이었던 트라키아로 통지 없이 진입했던 것이다. 이게 확대되어 324년 양측은 다시 맞붙는다. 7월 3일 벌어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57]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승리로 끝났고, 리키니우스 자신은 근처의 비잔티움에서 웅거하면서, 우세했던 해군력을 통해 소아시아 지역으로 콘스탄티누스군이 건너오는 걸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58]다르다넬스(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크리스푸스에게 해군이 격파당하면서[59] 실패하고 진출을 허용하게 된다. 이후 9월 18일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의 크리소폴리스에서[60] 콘스탄티누스군이 또 이기고 근처의 니코메디아에서 마침내 리키니우스의 항복을 받았다.[61] 리키니우스는 강제로 은퇴당했다가 1년여만에 고트족과 밀약을 맺었다는 이유로 처형된다. 진실은 저 너머에...리키니우스가 정략결혼이었을지언정 10년 이상 여동생과 결혼한 상태로 있었고 그 사이에 아이도 낳았기에 망정이지[63], 그렇지 않고 그냥 남이었으면 위의 녹색 외부 링크들을 보듯 '''10년에 걸쳐서, 이름붙어 역사에 남은 전투만 최소 5번인데''', 1년 후도 아니고 바로 죽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2.3.1. 서기 312년, 막센티우스와의 내전


막센티우스가 마침내 콘스탄티누스의 모든 조각상을 부쉈다.
콘스탄티누스는 모욕을 받고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시도 했지만, 서방 제국 전역 통치권자라고 스스로 선포한 막센티우스가 갈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라에티아 방면에 대기시키자 망설이지 않고 콘스탄티누스도 전쟁을 개시했다.

2.3.1.1. 준비

막시미아누스의 명성을 존경하던 정예병이 그 아들 막센티우스에게 돌아섰고, 전쟁 준비를 미리 계획했던 막센티우스가 예전 규모로 근위대를 늘렸기에 8만 명의 대규모 부대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병력과 아프리카에서 징집한 4만 명의 무어인과 카르타고인, 그리고 시칠리아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할당된 군사를 공급받아 총병력 17만 명에 기병 1만 8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보병 9만 명과 기병 8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막센티우스와는 달리 야만족의 침공에 대비해야 했던 처지였기에 라인강에 수비대를 남겨놔야 했고 그래서 전군의 삼분의 일 정도를 동원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다만 병력의 질이 크게 차이가 났는데, 로마의 목욕탕과 극장 및 향락에 젖어 있던 이탈리아 병사들과는 달리 콘스탄티누스의 군단들은 야만족에 맞서서 변경 지대를 지켜 왔기 때문에 힘든 복무 과정으로 정예화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2.3.1.2. 알프스 산맥을 넘어 진격한 토리노 전투

한니발에게 당했던 로마는 곳곳에 인공적인 요새를 축성해 모든 통로를 방어하고 있어 이탈리아로 접근하는 것이 쉽진 않았지만 산악 지대의 농민들이 협조적이었고, 계속해서 발전되어온 방대한 도로들이 군대를 전진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피에몬트 평원까지 진격하는 상황에서, 막센티우스는 정보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도시 수사를 포위 공격하지 않고 단숨에 사다리를 내걸어 돌파했다.
소식을 들은 막센티우스의 장군이 40마일 떨어진 곳, 토리노 평원에서 대규모 군단을 집결시켰다. 막센티우스는 동방의 나라에서 수입해온 중기병대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밀집 종대형, 쐐기 모양으로 정렬시킨 후 대기했다.
그러나 상황을 파악한 콘스탄티누스는 병력을 대규모 정렬 대형으로 분리하여 전개한 후, 진격했고 대승했다. 패배한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토리노로 도망쳤고, 대승한 콘스탄티누스는 황궁에 입성, 알프스 산맥과 포 강 사이에 있는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들의 통치권을 얻었다.

2.3.1.3. 베로나 공성전

그대로 진격할 수 있었지만 만일의 경우에 퇴로가 차단될 경우를 생각하여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의 또다른 부대를 향해 방향을 돌렸다. 목표는 베로나에 본부를 두고 있던 장군 루리키우스 폼페이아누스 였다. 자신으로 목표가 바뀌었다는 걸 깨달은 그는 즉시 대규모 기병대를 파견했으나, 브레시아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완파당했다. 곧장 베로나를 포위한 콘스탄티누스는 공성전을 전개했다.
도시 베로나는 서쪽의 좁은 반도형 지역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고, 아디제 강의 급류에 둘러싸여 있어, 얼마든지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는 수비력이 좋은 도시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도시 위쪽에 완만한 흐름의 아디제 강의 지점을 찾아낸 뒤 도강을 감행했다. 다만 여기선 콘스탄티누스도 상당한 고전을 했다. 폼페이아누스는 인병출격을 자주 활용하여 상당한 타격을 주었고, 결국 포위망을 돌파하여 베로나로부터 벗어나 원군을 구해온 다음 역포위를 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군에게 도전해왔다. 콘스탄티누스는 여기에서 재빨리 부대를 반분한다. 절반은 성을 포위하게 내버려두고 나머지 절반과 함께 빠르게 진군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폼페이아누스측의 수가 자신보다 많은 걸 알았기에 2전열을 줄이고 1전열을 늘려 적어도 처음의 맞상대에서는 병력이 대등했다. 날이 저물 무렵부터 밤새도록 백병전이 벌어졌고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선두에 서서 닥치는 대로 적병을 격살했으며, 콘스탄티누스가 함께한 최정예 돌격대가 적 대열을 깨 들어가서 폼페이아누스를 격살한다. 이 참상을 본 베로나는 그 즉시 항복했다.

2.3.1.4. 막센티우스의 반응

이 시기 막센티우스의 태만함에 대해 부각하는 기독교측 사료는 다 믿기는 어렵다. 고대 로마의 생활양식에 따라 잠깐 여가를 즐기는 것에 대해서도 대단히 여유가 없어졌고 이런 억울한 사례로는 갈리에누스도 있는데, 막센티우스도 그런 모함에 걸려들었을 개연성은 매우 크다. 막센티우스는 여전히 콘스탄티누스보다 많은 동원가능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어 제3의 군대가 노련한 장교들의 손에 의해 편성되었다.
다만 회전에 대해선 다소 미적거렸음이 있었다는 지적은 믿을만하다. 군생활 경력 대부분을 거의 야전에서 보냈고 당대 로마제국 최고의 지휘관들(디오클레티아누스, 갈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아래에서 경험을 쌓은 바 있는 콘스탄티누스와는 달리, 막센티우스에겐 이렇다할 군 지휘 경력이 없었다.

2.3.1.5. 312년 10월 로마 근교

막센티우스는 식량 부족에 대비해 풍부한 군수 물자까지 확보해둔 상황이었고, 반면에 콘스탄티누스는 군수품의 부족으로 시간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간 내로 해결하기 위해선 로마를 불태우거나 파괴에 가까운 상황까지 몰아붙여야 했다.
그러나 막센티우스는 로마에서 9마일 떨어진 삭사루브라 근방 평원에 진형을 갖추고 있었기에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테베레 강변까지 포함하는 배수진을 쳤고, 위험한 위치에 자신을 배치함으로써 사기를 끌어올렸다.
첫 공격은 막센티우스의 기병대를 향해 콘스탄티누스가 이끄는 선봉부대의 공격으로 시작됐다. 막센티우스의 기병대는 중기병이었고, 콘스탄티누스는 정예 경기병으로 이루어진 기동력이 충만한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중기병은 순식간에 격파됐다. 좌우익을 무너뜨리자 측면의 막센티우스의 보병대가 무방비 상대로 노출됐고, 그대로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그 이후 막센티우스의 전열이 완벽히 붕괴됐고, 그 단계에서 승패가 명확해지자 막센티우스군은 군기를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라이토리아니만큼은 끝까지 자리에 남아 명예를 지켰고, 이들은 그 자리를 죽음을 내걸고 사수했지만 다수가 사망하였으며 전투 능력을 상실한 나머지는 콘스탄티누스에게 항복했다.[64]
혼란이 확대되어 가는 와중 막센티우스 군의 수천이 테베레 강의 깊은 급류로 뛰어들었다. 황제 막센티우스도 밀비우스 다리를 건너려고 시도했으나 다리 위로 몰려든 수많은 병사들에게 밀려나 강물로 떨어져버렸다.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던 그는 갑옷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강 아래로 떠오르지 못한채 익사했다.

2.3.2. 313년 막시미누스와 리키니우스 내전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여동생인 콘스탄티아를 결혼시키기로 약속한 것인데 이 둘의 회담은 각자의 또 다른 전쟁 덕에 흐지부지해졌다. 콘스탄티누스는 프랑크족의 침입 때문에 라인 강으로 불려 갔고, 리키니우스는 막시미누스 2세 다이아의 공세로 즉시 전장으로 가야 했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비밀 동맹의 대상이었던 막센티우스의 죽음에도 개의치 않고 내전을 감행하기로 한다. 한겨울에 시리아에서 출발한 그의 군대는 비티니아의 변경 지대로 향했고, 곧 혹독한 날씨를 맞닥뜨린다. 수많은 말과 병사들이 눈에 파묻혀 죽었고, 줄기차게 내리는 눈비로 도로마저 끊긴다. 막시미누스는 강행군에 방해되는 보급품들을 후방에 남겨 놓을 수밖에 없었으나 이러한 작전 덕에 리키니우스가 공격 의도를 알아채기도 전 대규모 군대를 트라키아 보스포루스 해협에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그의 군대는 11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비잔티움의 항복을 받아 냈다.
이어 리키니우스가 29km 떨어진 지점에 진영을 설치한다.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리키니우스는 협상으로 시간을 끌며 서로의 귀족을 배신케 하려고 노력한다. 결국, 협상이 깨지고 전면전을 준비하게 된다.
막시미누스는 7만 명의 정예병을 지휘하고 있었으나, 리키니우스는 3만 명뿐이었다. 그러나 전면전에서 승리한 건 리키니우스였다. 막시미누스는 엄청난 도주 속도로 하루 만에 257km 떨어진 니코메디아로 도망쳤다. 아시아의 부가 여전히 상당했기에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다시 재기할 수 있을 만한 병력을 모았을 것이나 이 전투 후 3~4개월 뒤에 타르수스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에겐 두 자녀가 남아있었는데 8세가량의 아들과 7세가량의 딸로, 자비를 베푸는 게 당시 관습이었지만, 리키니우스는 둘 다 사형시켰다.

2.3.3.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내전


로마는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양분하여, 서방과 동방을 나눠 지배하게 되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동맹 관계였던 둘은 겉으론 괜찮아 보였지만 막시미누스가 사망한 지 1년도 채 못 가서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게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여동생 아나스타시아를 명문가 출신인 바시아누스와 결혼시키고 그를 부황제로 등용하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정한 통치 체제에 따르자면, 이탈리아와 아프리카까지 그의 관할 구역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규칙은 오랫동안 이행되지 않았고 그러한 와중에 리키니우스가 바시아누스에게 서신을 보내어 얻어낼 수 없다면 군사적으로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를 부추긴다. 다만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음모를 간파한 콘스탄티누스가 바시아누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그를 부황제의 자리에서 박탈한다. 그는 리키니우스의 영토로 도주했는데 리키니우스는 그의 신병 인도를 거부한다.
그 와중에 콘스탄티누스는 암살 시도를 겪었는데, 그 암살자를 잡아서 문초해보니까, 그 배후는 리키니우스의 부하로서 그에게 부제감으로 지목받던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65] 또한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의 접경지대인 아에모나(현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의 동상과 초상화를 파괴하도록 했다.

2.3.3.1. 1차 내전

최초의 전투는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으로부터 약 80km 위쪽에 있던 키발라이 부근 (오늘날 크로아티아)에서 벌어졌다.(314. 10. 8) 갑작스러운 전투로 서방 병력은 2만 명이었고, 동방 병력은 3만 5천에 불과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콘스탄티누스는 가파른 언덕과 늪지대 사이에 있는 폭 800m의 좁은 길목에 포진한 후 그 위치에서 첫 번째 공격을 받고 격퇴한다.
이후 확실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적을 추격하여 평원으로 나간다. 다시 군대를 정비한 양측 군대가 집결상태로 서로 대치했고 곧 화살을 퍼붓는다. 화살이 바닥나자 창검이 동원된 백병전이 이어졌다. 동틀 무렵부터 저녁까지 승패가 보이지 않는 전투가 계속된 끝에 콘스탄티누스가 이끄는 우익이 돌격을 감행한다. 리키니우스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퇴각을 다시 명령해 전군이 궤멸당하는것은 피하게 된다. 다시 진을 친 리키니우스는 하룻밤조차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진지와 군수 물자를 모두 버리고 휘하 기병대를 이끌며 신속하게 더 후방으로 도주하게 된다. 덕분에 아내와 아들을 빼앗기지 않은 그는 사바강의 다리를 파괴한 후 다키아와 트라키아로 돌아가 새 군대를 모집했다.

2.3.3.2. 마르디아 전투

두 번째 전투는 316년 말~317년 초 마르디아 평원 (오늘날 불가리아)에서 벌어졌다.
콘스탄티누스는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가 전투가 한창일 때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둔다. 리키니우스의 군대는 이중 전선을 펴고 진지를 사수하다가 밤이 되어 전투가 끝나자 마케도니아의 산악 지대로 퇴각했다. 두 차례 전투에서 정예병을 모두 잃은 리키니우스는 화평을 청한다. 리키니우스의 부황제인 발렌스가 찾아갔으나 콘스탄티누스는 분노하고 노예인 그가 부황제에서 박탈되는 것이 강화 조건의 첫 번째여야 할 것이라고 말해 발렌스는 재위 며칠 만에 부황제에서 퇴출당하고 곧장 숙청된다.
이후 317년 3월 1일 콘스탄티누스와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됐다. 그 조건은
  • 트라키아를 제외한 유럽(발칸 반도) 전역의 할양[66],
  • 얼마 전 316년 말에 세웠던 리키니우스의 부제 발레리우스 발렌스를 폐위 후 죽이고, 각자의 아들을 동서 양쪽의 부제로 세울 것[68],
  • 같은 정제끼리지만, 콘스탄티누스가 그 중 선임황제임을 인정할 것.
즉, 살려주는 대신 그의 팔다리를 뽑는거나 마찬가지인 조건을 내세운 것이다. 비록 대략 7~8년간 양측간에서 큰 충돌은 없는 일시적인 평화 타임이였지만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를 매우 경계하면서 호시탐탐 집어 삼킬 때를 기다렸고 리키니우스는 힘을 모아서 설욕의 기회를 노렸다.

2.3.3.3. 제국 통일

양측 모두 때와 명분을 기다리던 중 좋은 건수가 생겼는데, 국경 안으로 들어온 사르마티아인을 격퇴하던 중에 콘스탄티누스 본인과 예하부대가 리키니우스령이었던 트라키아로 통지 없이 진입했다. 이게 확대되어 324년 양측은 다시 맞붙는다.
7월 3일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대군을 이끌고 대항했으나[69] 패배하여 비잔티움으로 퇴각한다. 자신은 근처의 비잔티움에서 웅거하면서, 우세했던 해군력을 이용해 소아시아로 넘어오지 못하게 다르다넬스(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해전을 벌였지만[70]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크리스푸스의 분전으로 또 패배하고 만다. 그래서 소아시아로 넘어오는 것을 허용하고, 9월 18일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의 크리소폴리스에서[71] 다시 한 번 대패하고 나서 근처의 니코메디아로 도주한 뒤 항복한다. 본래 리키니우스가 원래는 더 싸워보려고 했지만, 아내이자 콘스탄티누스의 이복동생인 콘스탄티아가 이제 그만 싸우고 항복해야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해서 그 말대로 항복했다고 한다.

2.3.3.4. 평화 협상

어쨌든 이러한 장기간의 내전 끝에 콘스탄티누스는 4두정치의 (어떻게 보면 예정된)실패로 인해 초래된 장기간의 내전을 끝마치고 324년, 제국 유일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경쟁자였던 리키니우스의 사후처리가 매우 냉혹했는데 항복할 때는 정략결혼이었을지언정 인척이기도 해서 정에 호소해서 신변보장을 받았지만, 테살로니카에서 유폐생활 중 325년에 고트족과 내통한다는 명목으로 처형했다.

2.4. 단독 황제로서의 통치와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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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요크[72]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석상. 밑에 써 있는 글씨는 'CONSTANTINE BY THIS SIGN CONQUER', 즉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에 봤다는 글귀의 영어 번역이다.
로마 제국 전역을 통틀어 유일무이한 황제의 직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는, 이후 13년 동안 로마 제국의 체제를 시대에 맞게 개혁하면서 통치한다.
그의 통치 기간에 주목해야할 사건들은 아리우스파를 공식적으로 부정하여 이후 기독교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꿔놓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서기 325년)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파에 우호적이었다.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다수였기에 콘스탄티누스는 일단 그들의 결정 사항을 인정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말년으로 갈수록 아리우스파에 더 기울었다.[73] 로마 제국에서는 이단으로 지목된 아리우스파가 더 우대되고 정통으로 인정받은 아타나시우스파가 억압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콘스탄티누스는 심지어 아타나시우스를 유배보내기도 했다.[74] 이러한 상황은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 시절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공의회 직후인 326년에는 황실 내부의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큰아들이자 내전 승리의 일등공신인 크리스푸스가 무자비한 고문 끝에 처형당하게 된 것. 공식적인 크리스푸스의 처형 사유는 콘스탄티누스의 후처인 파우스타와의 불륜 관계. 크리스푸스 사후 몇 개월 뒤에 파우스타 역시 뜨거운 욕탕에서 처형당했다. 그리고 그 둘은 'Damnatio memoriae' 즉 기록말살형을 받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1. 콘스탄티누스는 이 사건 이후로도 11년을 더 살다 갔는데, 그 동안 둘 중 어느 한쪽의 기록말살형도 취소하지 않았다는 점과,
2. 콘스탄티누스 사후 파우스타의 소생 3형제가 즉위한 후에도, (이복형 크리스푸스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 세 아들 중 아무도 친어머니 파우스타의 기록말살형을 취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극적인 잔혹한 가족사에 대해서 여러가지 엇갈린 견해가 많다. 설마 제국을 운영하는데 부제가 절실히 필요한데 죽였겠냐는 주장과 콘스탄티누스가 장성하고 군공이 큰 맏아들을 정적으로 여겨 일찌감치 정치적으로 필요성이 떨어진 후처인 파우스타와 엮여서 오명을 씌우고 숙청했다거나. 어느쪽이든 은밀히 뜬금없이 쓱싹 제거한 음침한 느낌이 매우 짙으니 의혹 또한 오늘날까지 추론을 하게 됐다.
한편 콘스탄티누스는 이런저런 가정사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스케일이 크고 아름다운 웅장한 대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새로운 로마(Roma Nova, 영어로는 어순이 바뀌어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어순인 New Rome)[75]'라는 이름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미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시를 새로운 수도로 삼겠다 공언한 바 있었고,[76] 6년간의 공사 끝에 330년 완성시켜서 5월 11일에 공식 완성 선포와 함께 봉헌했다. 덕분에 상당히 '''날림 공사'''가 이루어져 건물들이 꽤 자주 무너졌다고 한다. 원래부터 지진이 잦은 지역이므로 건물을 더 튼튼하게 지어도 모자랄 판국에…[77] 실제로 아틸라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로 접근했을 때 마침 '''지진에 성벽이 무너져서''' 동로마 고관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어 주는 일도 있었다. 이것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초였다.
새로운 수도라고 해서 기반 시설을 다 만든 게 아니라 필요건축물들만 만들었고 대신 제국 각지의 유명건축물들에게서 석재와 예술품을 가져와 장식했다. 고대 이집트파라오가 전왕조 파라오의 신전 조각상 묘지의 부장품을 훔쳐서 사용한 것처럼.[78] 현재 알려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영역은 테오도시우스 2세가 삼중 성벽을 쌓으면서 넓어진 것으로 원래는 조금 더 좁았는데,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직접 창을 가지고 땅에 그은 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었다고 전한다.
이후 331년 사르마티아족과 고트족 사이의 분쟁에 개입해 재차 고트 전쟁이 벌어졌으며, 초기엔 모에시아 속주 일대가 약탈당하고 전투에서 패하기도 했지만 다시 이를 역전해 고트족을 격파하고, 원정대를 크림 반도로 파견해 케르소네수스인들의 협력을 받아 고트족의 본토라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 일대까지 공세를 가한 후 332년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사르마티아족 역시 마찬가지로 굴복시키고 334년 이들을 속주 일대에 사민했다.
콘스탄티누스는 336년 재위 30주년 기념 축전을 열었으나 10달 후인 337년 5월에 사망했다. 죽기 딱 하루 전인 5월 21일, 에우세비우스[79]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기독교인들의 전례를 따른 것으로 죽기 직전까지 세례를 받는 것을 미루어서 현세의 원죄와 본죄를 모두 씻고 죽자마자 천국에 곧바로 가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망할 때 그는 제국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통치하게 했는데, 4두정치의 장점인 업무의 분담은 유지하면서 결점인 제국이 분할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피해 보려고 했던 것 같다. 허나 그가 계획했던 사후대책은 그가 죽자마자 일부 지역의 통치권을 인정받았던 그의 조카들이 그의 세 아들들에게 피살되고 뒤이어 세 아들들까지 서로 내전을 벌이면서 상당히 차질을 빚는다.
그의 사후 제국 황제의 직위는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상속된다.

3. 체제 개혁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정책의 뒤를 이어 콘스탄티누스 1세 역시 개혁정책을 지속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개혁은 기본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기조를 이어갔다고 평가된다.

3.1. 행정 체계 개혁


우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이후에도 아직 지역에 따라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민간행정과 군사행정 간의 분리를 확실히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이후에도 지역에 따라서는 문관인 프라이팩투스나 프로콘술이 군대를 이끄는 경우가 많았으나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더 철저히 분리하였다. 또한 이전까지는 불분명했던 각 관료들의 위계질서도 정리하였다.
즉, 민정 관료 체제는 '''황제 ← 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 ← 비카리우스 ← 프라이토르'''[80]란 형태로 일종의 질서가 형성된 것이다. 이중 로마의 프라이펙투스는 다른 지역의 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보다 좀 더 높은 위상을 지녔다.
이러한 일은 군정 관료들에게도 일어나는데, '''황제 ← 둑스 ← 프로콘술 ← 프라이펙투스'''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던 원수정시기 군정 체계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프로콘술과 프라이펙투스가 민정 관료쪽으로 넘어가게 되자 둑스가 군단을 담당하고, 그 위에 코메스라는 체제가 나타나면서 코메스 둑스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시기에 드디어 로마 제국 말기의 주인공들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관직인 마기스테르(군사령관)란 관직이 코메스 둑스 위에 나타나게 된다. 즉,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 제국의 군정 체계는 '''황제 ← 마기스테르 ← 코메스 ← 둑스'''의 체제가 되게 된다. 이시기에는 마기스테르가 보병부대 담당(Peditum) 및 기병부대(Equitum) 담당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것이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일원화되는 것은 테오도시우스 1세 시기에 들어서였다.
또한 옛 로마 시대부터 내려오던 가부장의 처벌권을 크게 제한하였고, 노예에 대한 십자가형을 전면 금지하였다. 십자가형은 그전부터 유명무실화되고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가 된 건 이 조치가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노예한테도 못하는 걸 자유민이나 상류층한테 맘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
321년에는 3월 7일이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그 날부터 모든 일요일을 '경건한 태양의 날'이라는 이름의 휴일로 법제화했다고 한다. 기독교 얘기는 안 꺼냈지만 기독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고 하며, 기독교의 국교화와 맞물려 서양 기독교권에서는 일요일이 휴일이 되었고,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서양 문화가 전세계로 파급되면서 세계에서 표준적이고 보편적인 휴일이 되었다.[81]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층 의원에 대한 공직 임명 제한을 완전 철폐했으며, 이에 따라 계급 고려 없이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할 수 있게 되어 행정 체계에 큰 진보가 왔다. 또한 원로원 의원 수를 대폭 늘려 이 시기에 원로원 의원의 수효는 2,500명에 달하게 되었으며, 그전까지 주욱 하강세였던 원로원의 권위와 명망은 실권은 다 잃었어도 간신히 반등세에 돌아서게 되었다.

3.2. 군제 개혁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군제 개혁 이후에도 로마 제국에는 아직 과거의 군단체제 수준에 달하는 규모를 지닌 군단이 지역에 따라 존재했다. 그리고 이것이 4두정의 혼란을 증폭시킨 원인 중 하나다.
콘스탄티누스는 카라칼라 개혁으로 공식적으로는 하나로 통합되었던 레기온을 나누어 중앙 상비군인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와 국경 주둔병인 리미타네이(limitanei)를 창설하는데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부터 이어졌던 군제 상황을 공식화한 동시에 보다 짜임새 있게 개편한 것이었다. 또한 과거의 군단 체제를 유지하던 나머지 군대 또한 죄다 코미타텐세스/리미타네이 체제로 바꾼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전통이 내려오는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는 폐지했다. 로마 레기오가 후기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사라졌거나 혹은 리미타네이만 로마 레기오의 후예라는 잘못된 편견은 그냥 틀린 소리지만[82], 이렇게 해산된 사실이 명확하기 때문에 적어도 근위대에 한해서는 그 말이 맞다.

콘스탄티누스는 스콜라이 팔라티나이와 팔라티나이 코미타텐세스를 만들어서 프라이토리아니의 역할을 대체한다. 전자는 황제 호위를 맡았고 후자는 야전 기동군인 코미타텐세스 부대들 중 최정예 부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렇게 확립된 군제는, 나중 서로마 제국 멸망 때까지 그리고 동로마 제국에서는 적어도마우리키우스가 훗날 테마제의 선구가 되는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체제를 선보일 때까지는 큰 변화 없이 이어진다.
즉 이후의 로마 제국 군제는 팔라티나이/코미타텐세스/리미타네이의 형태가 된다. 여기에 야만족 부족 전사집단을 한꺼번에 그대로 로마군으로 기용하는 포이데라티가 이 시기에 나타나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단, 콘스탄티누스가 창설했던 팔라티나이 코미타텐세스들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때 발렌스 황제와 함께 궤멸되면서 사실상 붕괴했다.
포이데라티의 등장과 이러한 군제개혁의 결과, 이 시기 로마는 기록에 따라서는 60만 이상 되는 거대한 상비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제국에게 지나친 부담이였기에 이후 군 규모는 차츰 축소되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애초에 처음부터 이런 대규모 상비군은 실제보다 과장된 장부상의 것이였고, 실 규모는 이의 2/3 수준이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3.3. 기독교 공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사회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 공인과 니케아 공의회라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의 기존 사회체제와 이념을 신봉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와는 달리 콘스탄티누스는 그것으로는 로마 제국을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없다 생각했고, 그 결과 새로운 사회 질서, 즉 기독교를 택해 이를 공인하고 기독교의 분열을 정리하는 공의회를 열었다. 그러면서도 바로 국교화, 혹은 전통적인 로마 다신교 및 다른 종교를 차별, 탄압, 무시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고, 기독교식 세례도 일부러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받았으며, 종교에 관련된 공식적인 표현을 상당히 정제해서 씀으로써 사회 통합을 최대한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3.4. 전반적인 법률


리키니우스와의 강화 조약 후 일련의 제국 법령집을 정기적으로 발간했다. 공법 체계보다는 사법 체계에 관한 것이 많았고, 개괄적인 것을 떠나 그중 두 가지 큰 법령을 소개하자면,
첫 번째는 당시 가혹한 세금 부담으로 지급 능력이 없는 빈곤계층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를 살해했는데 [83] 사례를 자주 접한 콘스탄티누스는 칙령을 내려 빈곤 때문에 교육을 할 수 없는 아이들을 행정관에게 데려와 입증해주면 즉각적으로 구제 기금을 지급하도록 했다고 한다. 다만 즉흥적인 구제 방법이었기에 결과적으론 실패에 가까웠다.
두 번째로 강간법에 관한 것이었다. 강간에 대해서 특이할 정도로 가혹한 법령을 내세운 황제였는데, 단순히 강간죄를 저지른 것뿐만 아니라 25세 미만의 미혼 여성을 가출 설득 유괴 하는 경우까지도 그 공범, 종범에게도 모두 같은 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해 사형했다.
사형 방법은 내용 여하에 따라 다른데, 단순강간이면 그나마 참수형으로 끝났으나 죄질이 나쁜 강간범. 소위 유아강간범이나 친족강간범. 강도강간 같은 악질이면 단순 사형을 시키지 않고 산 채로 태우는 화형이나 원형경기장의 맹수에게 먹이로 던져줬다고 한다. 설사 합의에 따른 유괴였다고 해도[84] 당사자는 당연히 사형이고, 애인을 보호하려고 했다면 대상자였던 여성도 사형에 처했다. 또한, 고발에 대한 의무가 강제되었기 때문에 만약 아버지가 딸이 가여워 가해자와 결혼을 시켰다 할지라도, 이 둘의 사형은 피할 수 없었고, 추가로 부모에겐 재산몰수형이 더해졌다. 그 종범이 노예일 경우는 더욱 심한 사형방법이 선고됐는데, 죄질에 따라서는 끓는 납을 천천히 목에 부어 고문시키고 최종적으로 사형시키기까지 할 수 있었다. 혼란기 제국내 강간범죄가 워낙 심각해서 사회 문제가 될 지경이 되자 내린 조치로 보인다.
콘스탄티누스의 독창적인 법은 아니고 원래는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법률을 변형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 내의 모든 창녀를 공창으로 등록 시킨 뒤, '혼인관계나 창녀와의 관계 이외의 모든 성관계는 합의를 했던 말던 모두 강간이다! ' 라고 규정한 법을 선포했다. 물론 강간으로 유죄가 내려지면 당연히 사형. 다만 현실에 적용하면 사형당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다 당장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부터 워낙 문란하게 놀다가 간통죄로 잡혀갔기 때문에 법률은 발효가 됐지만 조사결과 진짜 강간으로 확인됐을 때가 아니면 법을 집행하지 않았다.[85]

3.5.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 건설


또한 이미 쇠락해 가는 도시로 수도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로마[86]를 버리고 새로운 수도로 비잔티움을 택해 개발, 노바 로마를 창건하게 된다. 다만 이 도시는 당대부터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더욱 자주 불렸으며, 도시 구조는 로마 시의 그것을 복제해서 만들었다고 선전했다. 대표적으로 7개의 언덕이라든가.
한편 또다른 얘기를 하자면, 동서로 긴 지중해 특성상 동서 분할통치는 충분히 자연스럽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작했지만, 그저 사두정치 시기의 실험적인 시도로 끝나지 않았다. 발렌티니아누스도 그의 자의로 동방을 동생 발렌스에게 맡겼고, 발렌스가 전사한 이후에도 서방의 그라티아누스는 동방을 자신이 꿀꺽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고 테오도시우스에게 맡겼다. 동로마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니라 종전의 니코메디아세르디카, 시르미움, 트로이, 테살로니카 등의 후보 도시로 천도하였다면? 물론 다른 곳으로 수도를 세워 봐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목록에 나오는 것처럼 엄청난 존속기간과 화려한 전적이 나오기는 불가능에 가깝워 세계사가 엄청나게 바뀌었을 것이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 건설을 위해 제국 전역이 치러야 했던 고역은 그리 만만한 건 아니었다.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건설이 없었다면 제국이 반드시 망했을 거란 생각은 대단히 무리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라고 뇌가 없어서 니코메디아를 행정수도로 선정한 건 아니었다.

4. 잔혹한 가족사


로마 제국의 지배자로 출세하기 위해 307년 조강지처인 미네르비나와 이혼하고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와 재혼했다.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도 똑같은 행동을 했었는데, 역시 조강지처이자 콘스탄티누스의 친모인 헬레나와 이혼하고 292년 막시미아누스의 장녀 테오도라와 재혼했다. 이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어머니와 함께 쫓겨나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로마 제국의 지배자기 되기 위한 경쟁 과정에서 장인 막시미아누스와 처남 막센티우스를 죽였다. 여동생이 여러 차례 화해를 시도했지만 매제 리키니우스를 끝내 반역죄로 살해했다.
장남 크리스푸스가 아내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모진 고문을 가한 후 죽였다. 장남 플라비우스 크리스푸스(Flavius Crispus)는 콘스탄티누스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미네르비나에게서 난 아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와 재혼하기 위해 미네르비나를 버렸다. 크리스푸스는 317년 부제에 임명되어 갈리아를 통치했다. 그는 교양과 덕성을 겸비하여 신민들로부터 대중적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318년, 320년, 323년의 야만족 토벌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324년 아버지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와의 2차 내전이 벌어지자 아버지를 도와 합류했고 해군의 지휘를 맡아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거의 두 배가 넘는 리키니우스의 해군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어 아버지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지배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승리를 통해 젊은 황태자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고, 로마 시민들의 존경과 애정이 쏟아졌다.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집권 20주년 경축 행사가 성대하게 열리는 와중에 크리스푸스는 황제의 명령으로 갑자기 체포되었다. 크리스푸스는 로마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게 비밀리에 이스트리아 폴라 요새로 압송되었다. 크리스푸스는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계모인 황후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패륜 혐의로 밤낮으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크리스푸스는 잔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했으나 끝내 29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아내이자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파우스타 역시 간통 혐의로 뜨거운 욕탕에 가두어 살해당했으며,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가 실제로 간통을 했는지는 아니면 두 사람은 콘스탄티누스의 정치 숙청에 제물이 됐는지 여전히 미지의 영역에 있다.

5. 평가


'''서구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 또 학계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황제다.''' 최초로 대제(라틴어 마그(막)누스 Magnus, 그리스어 메가스 Μέγας) 칭호를 받은 황제기도 하며, 이는 기독교를 양지로 이끈 것도 이유지만 그 전에 확립한 이런저런 획기적인 업적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제시한 기독교 제국으로의 길이 이후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원수정기의 황제들을 능가하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체제 개편 작업을 완성했고, 사회 다방면에서 개혁을 주도했으며, 비잔티움으로의 행정수도 이전을 단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제국의 역사를 천 년이나 연장시켰다. 종교 관용정책을 등에 업고 대제가 된 것만은 아니며, 설령 그렇지 않았어도 그가 제국에 끼친 거대한 영향을 고려하면 대제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영어 위키백과에도 리다이렉트가 아니라 표제어 자체에 'the Great'가 붙은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부터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제국사 1480년을 통틀어 그뿐이다.
일단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후대 동로마 제국의 기틀[87]을 다진 황제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 후 막장으로 치닫던 사두정치를 끝낸 것은 물론이오, 로마를 다시 내부적으로 안정을 꾀해서 성공했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다. 어느 나라든 간에 내정이 혼란스러울 때면 안정시키고 다시 재기할 가능성만으로 갖춘 것만으로도 대단한 평가를 받는다.[88] 로마 제국에서 점점 중요성이 떨어져가던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 제국을 제껴버리고 동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요충지의 도시 비잔티움을 새로 수도로 정하고 발전시킨 점도 주목할 만하다. 국내 도서관 중에서 장서수가 국립중앙도서관국회도서관 다음의 3위고, 학술 서양서에 한정해서는 앞의 두 곳을 앞선다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사이트에서 제목에 'Constantine'을 두고 찾은 결과가 단행본으로만 55개다. 콘스탄티누(노)스는 11명이지만, 책 제목에 쓸 정도로 지명도가 높은 인물은 이 1세와 콘스탄티노스 7세, 콘스탄티노스 11세 뿐인데, 7세는 로마노스 1세에게 오랫동안 눌려 지내서 황제로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제국 (중앙)행정론', '테마(지방행정)론', 제국 주변의 이민족에 대한 논의 등 저술로서 유명한 것이고, 11세는 그야말로 마지막이라 유명한 것이라서 절대다수는 1세에 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황제로서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로마사 연구자 크리스 스카레의 말처럼 재능 있는 군사령관이면서도 정치인으로서 갖춰야 될 유능한 선동가적 능력, 그리고 때론 비양심적이면서도 단호한 결단력을 갖추고 있으며, 행정가로도 적극적이고 장기적 관점에서 결단을 내리던 황제였다. 즉, 상황에 따른 뛰어난 정치적 능력과 적극적이면서 현재와 미래를 두루 판단해 내린 행정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그 이상의 군사적 능력이 두루 있던 황제였다. 물론 콘스탄티누스는 고대 서양의 뛰어난 전략가들로 평가받는 알렉산드로스 3세, 한니발이나 스키피오처럼 천재적인 군사적 기질이나 후대인의 귀감이 될 만한 전략 전술을 쌓아 올리진 못했다. 그보다는 본인의 천재적인 지휘술과 최정예 병사들의 무지막지한 파괴력으로 파고들어 승부를 보는 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게르만족을 처리할 때도 필요 이상으로 잔혹한 조치를 취했는데, 예컨데 부족장들을 잡아다 맹수들조차 살육에 지칠 정도로 격투장에 내던졌다거나, 강가에 산더미처럼 쌓인 적의 시신을 그대로 놔둬서 주변 게르만 부족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의 여러 부족장한테 큰 경외를 받은 바 있다. 또, 군사적인 스타일 자체가 지휘술로 전장의 승패를 결정짓는 타입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특별한 전술 없이 말도 안 되는 열세를 역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비슷한 스타일의 카이사르가 전술적인 부분에서 파르살루스 전투 하나로 불후의 명성을 쌓았듯이 콘스탄티누스도 이런 전투가 하나 정도는 존재한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콘스탄티누스가 단순한 맹장이었으면 나올 수 없는 뛰어난 전술적 감각이 담겨 있었다. 아무튼 이런 종류의 맹장을 많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동시대의 로마인들은 콘스탄티누스를 몹시 불가사의하게 여겼다고 한다.[89]
결론적으로 이 황제의 진가는 쉽사리 따라할 수 없는 굳건한 조직력, 제국의 복잡한 행정을 여간하면 혼자서 감당한 책임감[90], 한 번 마음먹은 건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뚝심, 당장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면 그 후에는 흔들리지 않는 결단력 등에 있다. 이런 건 통치자로서 기본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기본이 다 되어 있는 통치자가 드문 것 또한 인류 역사의 현실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작한 제국 개편을 끝까지 뚝심 있고 일관되게 밀어붙여 끝장을 보는 것도 콘스탄티누스가 아닌 다른 누구든 할 수 있었을 거라고 결코 장담할 수 없다. 설령 군사와 정치, 종교 분야에서 콘스탄티누스보다 뛰어난 인물이 적지 않더라도, 저 분야들을 그럭저럭 문제없이 다 커버할 수 있었던 인물은 분명히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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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의 고향인 니시에서는 콘스탄티누스를 엄청 밀어주고 있으며 니시의 공항 이름도 니시 콘스탄티누스 대제 공항(Аеродром Константин Велики Ниш)이다. 또한 2013년에는 밀라노 칙령 1700주년 행사도 열었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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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기념 행사를 위해 그의 석상이 그래픽으로 복원된 적이 있다. [92]

6. 기타: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심


콘스탄티누스는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공경 받으며, 가톨릭에서도 역시 바티칸성 베드로 대성당을 비롯하여 여러 성당에 콘스탄티누스 동상이나 기마상을 세워 놓는 등 상당히 괜찮은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신앙심에 대해서 의문의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으며, 이러한 의견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어느정도의 호의는 있었으되 어디까지나 메인은 냉혹한 정치적 계산이지 황제의 신앙심이 아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시절 주화에 사용된 sol invictus(무적의 태양) 표상도 그러한 의견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며,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당시에 보여준 황제의 태도는 그리스도론 논쟁 자체를 혐오하고 종교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에서는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심에 대해서는 꽤 긍정적으로 본다.

주화는 특별히 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 시대의 주화는, 선전 효과가 매우 크고 백성의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주화는 통치자의 교체를 비롯한 정치적 변화를 알리는 뛰어난 수단이었다. 따라서 고대 후기의 주화 주조는 특별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개종의 신뢰성에 관해 제기된 질문과 관련하여, 막센티우스에게 승리를 거둔 뒤 곧바로 주화에 그리스도 결합 문자가 나타나는 반면, 콘스탄티누스가 신봉한 명백한 표지인, 4분령의 제신이 사라졌는지는, 주화에서 살펴볼 수 있다. 지방에서 주조된 주화에 이따금 이교의 상징이 나타나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황제가 발행한 주화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그런 이유에서 '무적의 태양'sol invictus과 같은 표상은 주화에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무적의 태양은 로마 제신이라는 고유성이 없었다. 무적의 태양은 모든 이가 자신이 바라는 종교적 내용으로 채울 수 있는 지극히 높은 천상 존재의 대명사였다. 이교의 주화 주조소들은 이러한 주제를 기꺼이 사용했다. 태양sol의 광휘는 황제의 마음에 들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황제에게 태양의 광휘가 소중하다면, 황제는 그것을 정의의 태양인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었다. 태양의 광휘는 이교인 특사들에 의해서도 해명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진정 그리스도를 신봉할지라도 '정의의 태양'sol iustitiae에 대한 신봉이 이교를 단연코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교인은 태양의 상징을 자신들만의 고유한 내용으로 채울 수 있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광휘를 덧붙였다면 태양신을 탈그리스도교화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93]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I》[94]

,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41-42쪽

우선 주화의 경우, '무적의 태양' 표상이 나타나지만 이건 로마 제신이라는 고유성이 없다.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개종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이루어진 것 같지 않다. 개종은 늦어도 312년이나 바로 그 전날에 일어났다. 황제는 314년에 열린 아를 교회회의에 모인 주교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 하느님의 영원하고 상상할 수 없는 거룩한 경건은 인류를 결코 더 이상 암흑 속에 있지 않게 하고 많은 사람의 추악한 악의가 이와 같이 만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경건은 반짝이는 빛으로 구원의 길을 다시 새롭게 비추고 정의의 규범으로 개종하도록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을 허용합니다. 저는 많은 본보기에서 이를 알았으며, 스스로 체험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제 안에는 정의가 없는 사물들이 있었고, 저는 은밀하게 숙고하는 것을 지극히 높은 권능께서 알지 못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어떻게 끝내겠습니까? 악이 넘친다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 높은 곳에 거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꼐서 제가 얻지 못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천상의 은총으로 당신의 종인 저에게 주신 것은 확실히 표현할 수도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95]

이는 개종 고백처럼 생각되며 실제로 그런 것 같다. 황제가 이 글을 썼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가 아니면 누가 자신의 과거를 이처럼 예리하게 판단할 수 있는가? 당연하지만, 편지만으로는 개종이 얼마나 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황제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상像이 교회의 교의적·윤리적 요구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추론할 수 없다. 글귀를 보면 고백은 철학적으로 윤색되어 있다. 개종은 콘스탄티누스에게 더 고상한 행실에 관한 체험,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책임에 대한 자의식, 백성의 운명을 보상과 벌로 해석하는 것을 담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은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일부를 이룬다고 느낀 그리스도인의 하느님께 대한 고백으로 이해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콘스탄티누스의 개인적·종교적 태도에 관한 평가는, 개별적으로 서로 일치하지 않고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연구에서는 놀랍게도 긍정적이다. 즉, 콘스탄티누스를 그리스도인으로 본다. 그는 정치적 합목적성에 바탕을 둔 고려뿐 아니라 내적 확신에서도 자신의 시대에 그리스도교 국가로 실현되는 발전을 원했고 촉진시켰다.[96]

그런 이유에서 콘스탄티누스 개종의 진정성을 의심할 까닭이 없다면, 콘스탄티누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에게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이 중요한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의 개종이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97]

콘스탄티누스가 개인적 확신에서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 같다. 콘스탄티누스는 그가 늘 생각해오던 '최고의 신'summus deus, 참된 무적의 태양, 밝게 빛나는 신성을 이제 그리스도인의 하느님과 동일시한다. 입법과, 특히 312년 이후 곧바로 시작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한 교회 건축물을 세울 때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힌 황제의 종교정책에서 제의가 강조된 것은[98] 개종의 종교적 특성을 드러낸다. 한편 콘스탄티누스가 죽기 직전까지 세례지원자였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다. 그는 평생 한 번도 어떤 성찬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이 어느 정도였는지, 곧 그가 자신의 신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으로 바꾼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교가 그를 내적으로 사로잡은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회개라는 성경의 의미에서 개종했느냐는 의문은 로마 종교성의 견지에서는 제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콘스탄티누스의 전환'에 대한 평가에 매우 중요하다. 교회가 비판 없이 황제의 정책에 얽매였다는 비난은 그의 개종 문제와 얽혀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보인 호의의 표시, 영향력과 권력의 제의提議를 교회가 포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교들이 콘스탄티누스를 정치가인 동시에 교회를 걱정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했다면, 이를 포기할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은, 새로운 전제에서 발전해 나가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올바르게 평가하자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같은 책, 44-46쪽

전근대 정치인들이 정치를 위해 종교를 이용하기만 했을 뿐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으리라는 현대인들의 편견과 달리, 콘스탄티누스 개인의 신앙심을 의심할 이유는 딱히 없다.

324년, 곧바로 황제는 논쟁을 시작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와 사제 아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이에 관여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절친한 친구 코르도바의 주교 오시우스를 통해 알렉산드리아로 보낸 편지가 남아있으며, 친저임이 확실하다.[99]

승리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알렉산더와 아리우스에게. 이 일에 관한 본인의 의도는 두 가지입니다. 이 때문에 본인은 직무를 맡았습니다. 이를 위해 본인은 제 행위의 협력자이며 만물의 하느님이신 구원자를 증인으로 모십니다. 첫째로 본인은 모든 백성의 종교적 지향이 일치되기 바랍니다. 둘째로 어느 정도 심한 상처를 입은 모두에게 공동인 지구의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고 결합하기 바랍니다. 본인은 이를 주시했고 한편으로 인식의 비밀스런 빛에서 저울질해 보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무장한 팔의 힘으로 성취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하여 이 경우 본인은, 하느님의 모든 종 가운데 제 기도에 따라 공동의 단결을 이룰 수 있다면, 국가 제도도 모든 이의 경건한 신념을 통해 적절하게 변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군사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과 교육을 통해 장려되어야 하는 것을 정확히 구분했다. 제국의 일치에 관한 정치적 측면은 신앙에서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중략)

전능하신 하느님, 제 귀가, 더 심하게는 제 마음이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까! 본인이 아프리카에 남긴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논쟁이 여러분 사이에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지역이 다른 지역들을 치유해 주기를 바랐건만 오히려 여러분의 지역에 더 큰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논쟁의 발단과 대상을 살핀즉, 구실은 시시하고 그리 엄청난 불화를 일으킬 만한 일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 점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잘못 생각했다.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아들 예수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문제였다. 황제는 일치를 위해 논쟁을 의식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왜곡하고자 했나? 일치만 된다면 교의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나? 이로써 사람들은 이미 인용된 비난을 계속한다: "진리 대신에 정치". 하지만 그리스도교적으로 돌려 말해 단결이 문제라면, 사랑의 계명이 계속 영향을 미친다. 결국 일치concordia는 로마의 사상에 근거를 둔 목표였으니, 다른 모든 것은 이 목표에 굴복해야 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알렉산드리아 논쟁의 발생과 배경에 관해 무엇을 알았으며, 적어도 무엇을 안다고 둘러대었는가?

본인이 들어 알고 있듯이, 이 문제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대 알렉산더는, 그들 가운데 각자가 [구약성경] 율법서에 쓰인 구절에 관해, 오히려 쓸데없는 질문에 관해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대의 사제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그대 아리우스는, 그대가 처음부터 알 수 없거나 침묵으로 무시해야 하는 것을 경솔하게 답변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 가운데 불화가 일어나고 공동체가 부인되며, 거룩한 백성이 둘로 분열되고 한 몸이라는 일치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는 같은 방식으로 다른 이를 용서하고 여러분의 동료 일꾼이 정당하게 조언하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논쟁은 쓸데없고 논쟁의 발단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지 성경 구절, 아마도 신적 지혜가 말하는 잠언 8장 22절의 해석을 두고 싸웠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당신의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 길의 처음으로 나를 지으셨다." 콘스탄티누스는 논쟁을 철학적 토론의 영역으로 떠넘겼다. 곧, 개별 문제에서는 당연히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의 토대에서는 그렇지 않으며, 신학 전문가들의 다툼에 백성을 끌어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하느님과 그분의 섭리에 관해서는 신앙 안에서 파악된 이해만 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와 다른 이들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에 관해 각기 통찰력을 동원하여 생각해 낸 것은, 그들이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 없다면, 사상의 비밀을 지키면서 그들 정신 안에 머물러야 한다.[100]

-같은 책, 91-93쪽

또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론 논쟁에 부정적이였던 것은 맞으나, 의견 일치를 이룰 수 없는 경우엔 신학 전문가들 논쟁으로 백성을 분열시키지 마라는 쪽에 가깝지, 종교 자체를 냉소적으로 본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당장 오늘날에만 하더라도, 학문적 최전선에서 열심히 구르는 신학자들이나 가능한 논쟁에 일반 평신도를 끌어들이는 것에는 충분히 비판 의견이 나올 수 있으며, 그 비판자가 종교에 진지하지 않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7. 출처(참고문헌)


영어 위키백과
<비잔티움 연대기> 1. 창건과 혼란(The early centuries)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로마제국 최후의 백년 / 피터 히더 저
로마 멸망사 / 에이드리언 골즈워디 저
콘스탄티누스 1세 [Constantinus I] (두산백과)
《교회사 I》 / 에른스트 다스만

8. 둘러 보기





[1] '마그누스'는 ''''위대한''''이라는 뜻이다. 번역하면 '''콘스탄티누스 1세 대제.'''[2] 그의 얼굴을 조각한 대표적인 상. 포로 로마노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내진에 놓여 있던 거상의 파편으로 현재 로마 카피톨리니 미술관 콘세르바토리 궁전 뜰에 놓여 있다. 인간적인 개성보다 황제로서의 권위를 강조해 조각했다. 현존한 파편을 토대로 원래의 크기를 추정한 결과, 12m 높이의 좌상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3] 사진의 흉상은 공화정이나 오현제 시절의 흉상에 비해서는 조잡하고 기괴해 보이지만, 동방의 전제군주제(도미나투스)를 받아들인 영향으로, 보통 사람들을 초월한 모습을 담고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매우 크기가 크다 보니, 얼굴을 강조하려고 비율보다 크게 제작한 것이다. 눈도 아래서 올려봤을 경우를 생각해 보다 크게 제작했기에, 얼굴상만 남아 있는 저 석상이 섬뜩해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미술학계의 추정에 따르면 저 조각은 원래는 정면으로, 그것도 12m 높이의 거대한 상을 올려다 보는 것만을 고려하고, 조각의 뒷부분이 소실되었기에 비례적으로 안 맞아 보이는 것뿐이라고 한다. 결국 머리가 조금 크고 과장된 것 외엔 그냥 정상적인 조각상이라는 것이다.[4]세르비아 니시(Ниш)[5] 단 이때는 부제였다. 그러나 이미 4두정치의 균열이 생기고 있었으므로 정제니 부제니 하는 것들이 다 애매한 데다가 별 필요없는 구분이었다. 어차피 가장 강한 자가 승자고 정제, 나아가 단독(통일)황제가 되는 거니까.[6] 그러나 막센티우스를 꺾고 서방을 온전히 점유한 312년에 가면 정제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312년부터 ' 'Undisputed' Augustus in the West'라는 표현을 써서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7] 출처:http://archive.eclass.uth.gr/eclass/modules/document/file.php/SEAD260/%CE%95%CF%85%CF%83%CE%AD%CE%B2%CE%B9%CE%BF%CF%82%2C%20Life%20of%20Constantine%20%28trans.%20Averil%20Cameron%20-%20Stuart%20Hall%29.pdf,124~125페이지[8] 이 사람도 아리우스파이다.[9] Eusebius (of Caesarea). '유세비우스'라고도 발음된다. 동시대의 다른 기독교 주교인 Eusebius of Nicomedia[8], Pope Eusebius를 포함한 다른 여러 동명이인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유명하기 때문인지, 당당히 메인 표제어를 차지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와의 관련성 때문인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참고로 저 카이사리아는 카파도키아(현 터키)의 카이세리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속주(현 이스라엘)의 카이사리아(로마시대에는 뒤에 해안도시라는 의미의 '마리티마'를 붙여서 다른 카이사리아들과 구분했다. 지금은 서로 다른 나라에 속해 공식명칭이 각 국가별 언어로의 음차로 인해 달라졌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이름으로 갈아치운 경우도 많으므로 아무래도 상관없다.)다.[10] 라틴어 원문. 검색 결과 '거의(paene)'가 들어있기도 하고 안 들어있기도 하다.[11] 영어로 dedicated, 보면 알다시피 저 라틴어 어휘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12] 저 한국어 문장은 <비잔티움 연대기> 1 권의 셋째 장 서문에 써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완성되었다는 것은 의역이고, 실제로는 (완성되고 나서 에게) '봉헌'[11]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런데 봉헌은 결국 '이 도시가 완성되었다'고 신에게 알리는 절차인 만큼, 그게 그거라고 해도 무방하다.[13] 뒤에도 계속 나오지만, 당시에는 행정수도 건설이었다.[14] 어느 나라의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이름이 최소 한 번은 무조건 나온다고 보면 된다.[15] 콘스탄티누스, 테오도시우스, 유스티니아누스, 마누일[16] 학자들 중 일부는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의 시초를 이때로 잡기도 한다...만 이 시대까지도 로마 시의 중요성과 상징성은 콘스탄티누스 아니라 누가 와도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조차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와 동급으로 격상시켜 특별시장(Praefectus Urbi)을 두거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을 로마 원로원과 동격으로 두었을 뿐이다. 실제로 콘스탄티누스가 세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행정수도였을 뿐이다. 또한 사두정치 시절이나 리키니우스와의 동서 분할통치 시절 콘스탄티누스의 지위는 '''서방'''의 부제 또는 정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존재 때문에 동방을 연상하기가 쉬운데, 그는 서방에서 시작해서 동방을 병탄 및 흡수했다.[17] 가톨릭과 정교회의 성인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혔던 바로 그 성십자가를 발굴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예루살렘에 보관해 놓았다가 호스로 2세의 페르시아에 털렸으나, 이라클리오스(=헤라클리우스)가 다시 찾아왔다.[18] <비잔티움 연대기>에 의거.[19] 그 경계심은 결국 콘스탄티누스가 4두정치의 내재적 모순을 힘으로 해결했음은 물론, 그것을 넘어 동방 천도와 기독교 공인 등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옮기는 치세를 보냈던 것을 볼 때, '''매우 옳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20] 켈트계 스코틀랜드 원주민[21] <비잔티움 연대기>에서는 아예 갈레리우스의 동방 정제 치소였던 니코메디아에서 탈출해서 아버지가 있는 갈리아(현 프랑스)의 불로뉴(Boulogne)로 도망쳤다고 한다. 불로뉴가 어딘고 하니, '''칼레''' 근처의 해변 도시이다. 즉 브리튼 섬(영국)이 바다 너머로 보이는 갈리아(프랑스) 북쪽 끝이다. 즉 유럽을 '''남동쪽에서 북서쪽까지 통째로''' 횡단한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자꾸 넘어오는 픽트족[20]과 한바탕 하러 바다 건너 원정준비를 하고 있었던 중이었다.[22] 브리타니아 원정 중이었으므로 전시였기에, 실력이 있다면 그걸 드러내기는 평시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다. 더구나 내전이라면 정치적 부담이 있지만, 대외전쟁이면 부담이 전혀 없다.[23] 아버지와 같이 있었던 1년간[22], 휘하 군인들에게 모범을 보여 천천히 군심을 모으다가,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져 타계가 가시권에 보이자, 여차하면 추대해달라고 미리 뒷공작을 했을 확률이 높다. 콘스탄티누스가 무슨 억울한 조선 왕족 A도 아니고,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추대를 한다는 것이 혈통적 요소가 약하고 군사적 실력주의 문화가 강한 로마에서는 어려웠으니까. 왜냐하면 콘스탄티누스는 매우 이런 권모술수에 능했기 때문인데, 나중에 리키니우스의 항복을 받을 때도, 일단 신변보장을 약속하고선 통수쳐서 고트족과 내통한다는 구실을 붙여 처형했다.[24] 그런데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동시대의 '락탄티우스'라는 기독교계 학자의 기록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가 갈레리우스에게 보고할 때, 정제 추대 사실도 모자라서 '''정제의 복장을 입고 월계관까지 풀세팅한 자신의 초상화'''를 같이 보냈다고 하며, 갈레리우스는 그렇게 받은 초상화를 냅다 불 속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측근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그제서야 분노를 진정시키고 부제 지위와 갈리아-브리타니아의 영토를 인정했다고 한다.[25] 쉽게 말해, 적군의 시체로 쌓은 전승기념비다.[26] 막시미아누스의 퇴임 이후 서방 부제로 임명되었다가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의 병사로 정제로 승격[27] 갈레리우스가 당시 로마 전토의 최강자였기에 병력 vs 병력으로 붙은 것은 아니었고, 회유해서 전향하게끔 했다.[28] 저 회동 자체가, 4두정치를 지키려는 의도였겠지만, '''오히려 스스로 4두정치를 파괴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정제를 부제에서 올려야지, 웬 듣보잡을 자기 친구라고 해서 바로 정제로 올렸기 때문이다.[29] <비잔티움 연대기>에 따르면, 정략결혼이었건 어쨌건 간에 장인을 죽인 죄책감이 그의 기독교로의 귀의를 설명하는 한 요인이라고 한다.[30] 서방에는 경쟁자가 콘스탄티누스 1세, 막센티우스 둘인데 동방에는 경쟁자가 다이아 하나인 점 때문인 점도 있고, 더구나 있었던 위치도 일리리아로 동방과 가까웠던 데다가, 원래 서방 정제의 영역인 이탈리아는 막센티우스가 꽉 쥐고 있었다.[31] 저 자는 20년간 서방정제였던 우리 아버지이자 자기 장인을 죽인 놈이다.[32] 바르바리 해적 참조.[33] 서방 정제의 영역은 이탈리아+북아프리카다. 로마 서부, 훗날 서로마 제국이 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당연히 로마 시가 있는 이탈리아였기에 정제가 여길 영유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는 본국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본국이었으므로 상류층이나 관료가 많아 식량 등의 수요가 늘 공급을 초과해 있었는데, 식량 안보는 또 북아프리카가 기막히게 보완해 주었다. 또한 남이탈리아의 장화 끝 부분 - 시칠리아 - 카르타고는 정말 지척이었므로 북아프리카와 적대하고 있는 이탈리아는 매우 불안정했다. 나중 중세 때 북아프리카를 이슬람이 차지하고 나서는 중세 ~ 근세 내내[32]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는 이슬람 세력의 침략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여하튼 이탈리아+북아프리카는 세트라는 점.[34] 테오도라의 딸[35] 아리우스파를 믿었다. 저 위의 전기문을 쓴 에우세비우스도 사실은 콘스탄티아와 먼저 교류하다가, 그녀를 통해 콘스탄티누스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이었다.[36] 본디는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승격할 때 받았던 속주였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우스 1세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그 속주는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에게 넘겨줘야 했다. 막센티우스가 세베루스를 죽이면서 그 속주를 도매금으로 집어삼켰던 만큼, 콘스탄티누스 1세로선 불법 카이사르 따위가 차지하던 거긴 원래 내 꺼였다는 명분도 있었다.[37] 공교롭게도 막센티우스가 로마 시에서 추대받은 지 정확히 만으로 6년이 되는 날이었다.[38]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를 본 일화가 유명하다. 이 일화에 따르면 전투를 치르기 전 어느날 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막사에서 꿈을 꾸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이 표시로 너는 승리할 것이다(In hoc signo vinces)'라는 글자를 보게 된다. 꿈에서 깬 황제는 이 꿈에서 본 십자가 모양의 군기를 만들어 앞장세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 전승이 기록된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을 쓴 에우세비우스는 황제 본인으로부터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맹세까지 받았다고 증언했다. 후에 17세기 계몽 시기에 이르러 이 일화의 사실성에 대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39] 따지자면 퇴각하다가 테베레 강(로마 시의 젖줄인 그 강이 맞는다.)에 빠져 익사했는데, 강물과 다리 자체가 전장이었으므로 사고사라기보다는 전사로 보는 것이 더 맞다. 바다나 강에서 선박끼리 해전을 치르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사고사가 아니라 전사로 보는 것과 같다.[40] 한편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시에 입성하여 막센티우스의 어린 두 아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는 기번,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의 서술은 그냥 틀린 얘기다. 막센티우스의 큰 아들은 밀비우스 다리 전투 훨씬 전(309년)에 죽었고, 둘째 아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측이 죽였는지가 확실치 않다. 다만 막센티우스는 죽은 뒤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의 로마 입성 행진에서 시신이 창에 꿰였고 또 그게 경고의 의미로 북아프리카로 보내지는 등 험한 꼴을 당한 건 사실이다.[41] 그래서 콘스탄티누스가 카롤루스풍으로 그려져 있다. 의외로 제관과 복식 등의 고증은 봐 줄 만한 수준.[42] 그런데 이때 입성하면서, 유피테르 신에 대해서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거부했다고 한다. 수백 년간 유지되어 왔었던 관습인데 그걸 거부했던 것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보인다.[43]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이날 11월 9일라테라노 대성당의 봉헌 축일로 기리고 있다. 이는 국교화의 발단이 되며, 지금도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명목상으로 높은 위상을 가지는 근거가 된다.[44] 통념과 달리, 발표는 동방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디아에서 했다. 20년 넘게 제국 전역의 선임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이 니코메디아였기 때문이다. 발표는 6월 13일로 2월 3일에 비해서 꽤나 늦게 했는데, 그 사이 벌어진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리키니우스의 내전 때문으로 보인다.[45] <비잔티움 연대기> 의거, 뒤에 전투 후 제거하는 발레리우스 발렌스로 추정된다.[46] 오늘날의 크로아티아라고 하니 발칸 반도의 거의 북서부 끝이다.[47] 트라키아 소속, 오늘날의 불가리아 땅이라고 하니 북트라키아. 발칸 반도의 북동부[48] 전투는 진작에 다 끝났는데, 날짜를 일부러 아버지가 부제로 지명되어 24년 전(293년) 황제 커리어를 시작했던 이 날로 잡았다고 한다.[49]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즉 그리스 지역도 포함된다. 후대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들인 콘스탄스콘스탄티우스 2세도 마찬가지의 구도가 되었었다. 하지만 콘스탄스는 쿠데타로 이내 죽었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는 좀 더 오래 살다가 자연사했다.[50] 제1처 소생의 크리스푸스, 제2처 파우스타 소생의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 크리스푸스는 조약 후 바로 이민족과의 전쟁에 종군했고, 연이어 리키니우스와의 마지막 내전에서 해군을 책임졌을 정도로 장성했는데 비해(불확실하지만 아무리 늦어도 305년생),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갓난아기인 작년(316년)생이었다. 그런데도 나란히 지명받은 것은, 정치적 안배의 결과였다. 크리스푸스의 어머니 미네르비나는 첩이라는 의혹도 있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307년에 진작 죽은 반면, 파우스타는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기록도 제대로 안 남고 첩 의혹까지 있는 미네르비나보다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파우스타가 출신배경이 더 좋은 것과 통한다.[51] 그런데 여기서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은 2명[50], 리키니우스의 아들은 1명으로 불평등했고, 리키니우스의 아들도 콘스탄티아의 소생이라 사실은 위에서 보듯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카였다. 남남에 능력있을지 모르는 발레리우스 발렌스를 아예 자기 혈육이기도 한 미성년자로 대체한 것. 하지만 리키니우스를 평정하자, 이용가치가 없어진 이 불쌍한 조카는 나중에 크리스푸스를 죽일 때 엮여서 같이 죽는다.[52] 마치 예전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같이.[53] 정확히는 콜로세움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54] 위에 나온 하나님의 계시와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장면이 새겨져 있다.[55] 여기에 대해서 에드워드 기번은 예술의 쇠퇴를 말해주는 우울한 증거이자 비천한 허영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표라고 깠고, 시오노 나나미는 패치워크 개선문이라고 깠다.[56] instinctu divinitatis. <비잔티움 연대기>에 의하면, 종래의 로마 다신교일신교를 아우를 수 있도록 일부러 '신성' 정도로 모호하게 썼다고 한다.[57] 대규모의 물량전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군이 13만 명, 리키니우스 군이 16만 5천 명, 양측 합쳐 거의 '''30만 명'''이 싸웠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고트족에게 발렌스 황제가 패사한 전투와는 다르다.[58] 이 계획 자체는 완벽했다. 그 증거로 원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세르디카, 니코메디아 등을 새 수도로 삼으려고 했으나, '''이 전투로 새 수도 후보를 비잔티움으로 바꾸게 된다.'''[59] 콘스탄티누스 군은 갤리선 200척+수송선 '''2000척''', 리키니우스 군은 갤리선 350척. 그런데 전장이 수적 우위를 살리기 어려운 곳이었다고 한다.[60] 칼케돈의 바로 옆, 비잔티움(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바로 건너.[61] 리키니우스가 원래는 더 싸워보려고 했지만, (동방 제국이 좀 넓은가?) 아내이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동생인 콘스탄티아가 이제 그만 싸우고 항복해야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해서 그 말대로 항복했다고 한다.[62] Augustus, AVG는 그 약자, 당시에는 라틴어에 U가 없었고 그 자리에 전부 V를 썼다.[63] 그래서 콘스탄티아가 구명 간청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남편과 아들이 다 죽게 되자 오빠 콘스탄티누스는 그저 정략결혼의 수단으로 이용했다가 인생이 꼬인 여동생을 동정하여 궁정에 데려와 같이 살았고, 또한 'Constantia Soror Constantini AVG[62](콘스탄티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누이)'라는 글귀를 새긴 '''주화를 새겨 줌으로써''' 마음을 달래려 노력했다고 한다.[64] 놀랍게도, 이들의 분전에 감동한 콘스탄티누스가 이들 모두를 살려주기로 결단을 내리게 된다![65] <비잔티움 연대기> 의거, 뒤에 전투 후 제거하는 발레리우스 발렌스로 추정된다.[66] 우리가 알고 있는 동서로마 분할 시점의 동로마의 판도에서, 트라키아만 빼고, 그리스를 포함한 나머지 유럽 전체가 빠져서 서쪽의 땅이라고 보면 된다. 후대의 콘스탄티누스의 아들들인 콘스탄스콘스탄티우스 2세도 마찬가지의 구도가 되었었다. 하지만 콘스탄스는 쿠데타로 이내 죽었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는 좀 더 오래 살다가 자연사했다.[67] 제1처 소생의 크리스푸스, 제2처 파우스타 소생의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 자세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문서 참조.[68] 그런데 여기서도 콘스탄티누스의 아들은 2명[67], 리키니우스의 아들은 1명으로 불평등했고, 리키니우스의 아들도 콘스탄티아의 소생이라 사실은 콘스탄티누스의 조카였다. 능력있을지 모르는 발레리우스 발렌스를 아예 자기 혈육이기도 한 미성년자로 대체한 것. 하지만 리키니우스를 평정하자, 이용가치가 없어진 이 불쌍한 조카는 나중에 크리스푸스를 죽일 때 엮여서 같이 죽는다.[69] 대규모의 물량전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군이 13만 명과 리키니우스 군이 16만 5천명, 양측 합쳐 거의 '''30만명'''이 싸웠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고트족에게 발렌스 황제가 패사한 전투와는 다르다.[70] 콘스탄티누스 군은 갤리선 200척+수송선 '''2000척'''이었고, 리키니우스 군은 갤리선 350척. 그러나 전장이 수적 우위를 살리기 어려운 곳이었다고 한다.[71] 칼케돈의 바로 옆,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의 바로 건너.[72] 위에서 보듯 아버지의 타계로 콘스탄티누스가 황제 커리어를 시작한 곳이다.[73] 위에 나온 나중에 자신에 대한 전기문을 쓸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와의 친교 때문으로 보인다.[74] 뜻인즉, 황제인 자신이 엄연히 있는데, 공의회에서의 승리를 가지고 주제넘게 너무 위세부리지 말라는 것.[75] '새로운 로마'는 공식 명칭이고 그보다는 애칭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영어로는 콘스탄티노플이 훨씬 유명하다.[76] 다만 처음 새 수도로 고려하던 곳은 그의 고향 나이수스와 가까운 세르디카(Serdica, 오늘날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였고, 또 동방 정제의 수도이자 제국 동부의 대도시였던 니코메디아 또한 고려 대상이었다.[77] 실제로 이곳과 주변지역(마르마라 해, 칼케돈, 다르다넬스 해협, 갈리폴리, 트라키아, 비티니아 등)에는 지진이 많이 일어났었다.[78] 다만, 후세에는 크게 평가받을지는 몰라도 당시 제국 재정상 이유로는 상당한 낭비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바라던 조건으로는 기존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4분 통치 시절 상당히 규모를 키워놓은 니코메디아도 여러 모로 부합했었다. 콘스탄티누스 본인 또한 비잔티움의 로마 노바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 니코메디아에서 정무를 보고 건설을 지휘하였으며 사망한 곳 또한 로마 노바가 아닌 니코메디아의 저택이었다.[79] 위에 나온 사후 전기문을 쓴 에우세비우스 맞다. 아리우스파였다.[80] 다만, 비카리우스 밑의 관리들이 프로빙키아(속주)들을 통치하는데 이 프로빙키아의 수장들의 명칭은 각 지역마다 제각기였다. 프라이토르도 그 중 하나다. 주의.[81] 이슬람교의 금요일, 유대교의 토요일이 있긴 한데, 세계 표준 등에 있어서는 서구권에 비해 영향력이 거의 없다.[82] 의외로 상당히 반복되는 오류다. 전기 로마사에만 정통하고 후기는 잘 모르는 서구 학자들 또한 자주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83] 자신조차 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견뎌 내기 힘든 삶에서 해방해 줄 수 있다면 해방해 주는 것이 부모의 애정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84] 이를테면 부잣집 딸내미를 꼬신 평민 남자의 경우, 강간범이 아닌 애인이라고 봐야 하지만...[85] 대신 적용된 게 간통죄였으나, 상대가 기혼자가 아니라면 적용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간통죄는 아무리 아우구스투스라도 죽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법정최고형은 유배형이었다.[86] 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즉위 이후 사실상 수도의 지위를 상실하였으며 이후 이탈리아 일대의 제국의 행정 중심지는 메디올라눔 또는 라벤나였다.[87]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인두세와 토지에 바탕을 둔 세제 개혁과 초기 형태의 관료제는 이후 동로마 제국은 물론 압바스 왕조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물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세제 개혁, 체제 개혁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에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한 업적이다. 기독교 공인보다 일반인에게 비칠 쇼맨십이나 상징성이 덜해보이는 것, 겨우 그뿐인 것이다.[88] 당장 한국사의 고구려의 소수림왕을 생각해보면 백제와 후연에게 두들겨 맞아 산골짜기 나라로 전락했는데 내정을 안정시키고 재기할 가능성을 마련해 놓았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운 내정을 훌륭히 안정시킨 후에 여러 개혁에 성공한 왕은 그만큼 리더쉽과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89] 로마사를 보면 유명한 장군들이 일기토 등으로 일신의 무용을 뽐내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 중 제일 지명도가 높은 카이사르를 예로 들면, 그에 대한 여러 저술에서 전쟁/전투에 관한 것은 병참, 보급, 공성, 전투대형, 전술 등이 대부분이다. 여러분이 기억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럴 것이다. 그 다음 지명도 되는 스키피오, 폼페이우스, 마리우스, 술라도 마찬가지다. 후대까지 포함하면 동로마 시기 이라클리오스가 비슷한 능력자라고 여겨진다. 이쪽은 아예 직접 일기토까지 한 기록이 있으며 아다나에서 적의 포위에 걸리자 직접 돌격하여 진삼국무쌍을 펼쳐 안전하게 군대를 퇴각시킨 기록까지 있다.[90] 누군가는 지독한 권력욕으로도 폄하하지만. 마치 진시황과 명 홍무제가 하루에 서류 몇십kg 분량을 보고 결재했다는 것처럼.[91] 보면 알겠지만 시 당국이나 기념사업회 정도의 행사가 아니라, '''대통령'''이 직접 위원장을 맡은 '''특별위원회'''까지 만들어서 치른 '''세르비아 정부의 국가적인 공식행사였다.''' 비잔티움 제국을 여러 번 침략하고 파괴해 생명력을 갉아먹었던 중세의 세르비아 제국을 생각하면 아이러니컬한 이야기.[92] https://www.b-f-k.de/webpub01/cnt/schaichpic8.htm [93] (책 속 주석) DÖRRIES, ''Konstantin''(30쪽) 42.190: Abb. 8,1f; BLEICKEN 38-43.[94] 원제: ''Kirchengeschichte I: Ausbreitung, Leben und Lehre der Kirche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95] (책 속 주석) 옵타투스 『도나투스파 열교』(부록) 5; 번역: KRAFT, ''Religiöse Entwicklung'' 183f; 편지의 일관된 특성과 개찬 가능성에 관해서는 KRAFT, ''Religiöse Entwicklung'' 185-91; GIRARDET, ''Reichskonzil'' (46쪽) 168. Abn, 21; RITTER, Alte Kirche 123 참조.[96] (책 속 주석)DÖRRIES, KRAFT, LIETZMANN, VOGT 등의 주장이다. 참조: ALAND 239. BLEICKEN (64-6)은 이러한 견해를 내세우는 데 주저한다.[97] (책 속 주석) 문제점에 관해서는 P. STOCKMEIER, ''Glaube und Kultur'' (Düsseldorf 1983) 60-105.236-53, 특히 252f 참조.[98] (책 속 주석) R.M. GRANT, ''Chrsten als Bürger im Römischen Reich'' (Göttingen 1981) 169-73; H. BRANDENBURG, ''Römische frühchristliche Basiliken des 4. Jhs.'' = Heyne Stilkunde 14 (München 1979).[99] (책 속 주석)KRAFT, ''Religiöse Entwicklung'' (37쪽) 217.[100] (책 속 주석) 에우세비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2,64-72; 번역: KRAFT, Religiöse Entwicklung (37쪽) 2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