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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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대 니콜라오 1세

'''제106대 하드리아노 2세'''

제107대 요한 8세
  • 생몰년: 792년 ~ 872년 12월 14일
  • 재위기간: 867년 12월 14일 ~ 872년 12월 14일
니콜라오 1세의 사망 한 달 후인 867년 12월 14일에 이미 두차례나 유력한 교황 후보였으나 교황좌를 두 번 다 고사했던 [1] 하드리아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선출 당시[2] 그는 이미 75살의 고령이었고 온화한 성품이었기에 전임 교황과는 달리 유화적인 자세로 교회 현안을 풀어나가고자 했다.
869년 로타르 2세가 사망[3]하자 그의 영지를 두고 동서 프랑크 간에 분쟁이 발생했으며 이 갈등을 조율하고자 했으나 잘 해결되지 못했고, 이듬해인 870년에 메르센 조약이 맺어 졌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현재의 국경이 어느 정도 틀이 잡히게 되었다.
한편 동방 교회와는 일시적으로 화해하여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포티오스를 단죄하는데 의견 합치를 보기도 했으나 불가리아 선교 문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포티오스가 단죄된 후 이냐시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돌아오지만 이냐시오스 역시 불가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관구 관할이라는 입장이었기에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드리아노 2세는 온화한 성품으로 전임 교황 니콜라오 1세와 달리 문제를 화합적으로 해결하려 하였으나 결국 확실한 마무리가 부족했고, 그런 상태로 취임한지 정확히[4] 5년 만인 872년에 사망하였다. 이런 마무리 부족과 프랑크 왕국의 분열이라는 외적 상황은 로마를 토착 귀족들의 손에 내어주게 되었다. 이후 한동안 교황권은 토착 귀족들에 의해 좌우되면서 여러 교황이 갈리고 암살되는 혼란기를 맞게 된다.

[1] 콜론나 가문 출신으로는 3번째 교황이다. 앞선 두 명의 교황은 스테파노 4세, 세르지오 2세였다. [2] 사제가 되기 전에 세속에서 스테파니아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딸이 있었다. 교황이 된 후로도 아내와 딸과 함께 라테라노 궁전에 기거했다. 하지만 교황이 된 다음해인 868년에 마차를 타고 이동 중이던 모녀가 암살되고 만다.[3] 로타르 2세는 사망 당시 적자가 없었고, 서자 위그만 있었다. 위그는 자신이 계승자라고 주장했지만 베르됭 조약 당시 형 피핀 1세의 적자 피핀 2세 조차 쌩갔던 삼촌들이라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4] 취임 날짜와 사망한 날짜가 12월 14일로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