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
'''Regnum Francorum'''
'''Francia'''

[image]
843년경 베르됭·메르센 조약으로 나뉜 프랑크 왕국 강역
'''481년 ~ 843년'''
'''위치'''
중서부유럽
'''수도'''
투르네 (481년 ~ 508년)
파리 (508년 ~ 768년)
아헨 (768년 ~ 843년)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왕 (481년 ~ 800년)
황제 (800년 ~ 843년)
'''주요 군주'''
클로도베쿠스 1세 (481년 ~ 511년)
다고베르투스 1세 (629년 ~ 634년)
피피누스 3세 (751년 ~ 768년)
카롤루스 대제 (768년 ~ 814년)
'''주요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
'''언어'''
고대 프랑크어,[1] 라틴어
'''종교'''
아리우스파가톨릭
'''종족'''
프랑크족, 로마인
'''주요사건'''
481년 건국
800년 카롤루스 황제 등극
843년 베르됭·메르센 조약으로 서·중·동 분할
'''통화'''
데나리우스
'''성립 이전'''
게르마니아
서로마 제국
수아송 왕국
알레만니
부르군트 왕국
프리시아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
작센
바이에른
'''황제 대관 이후'''
신성 로마 제국
'''분할 이후'''
서프랑크 왕국
프랑스 왕국
중프랑크 왕국
부르군트 왕국
이탈리아 왕국
동프랑크 왕국
독일 왕국
'''오늘날'''
네덜란드
독일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바티칸
벨기에
산마리노
스위스
스페인(일부)
슬로베니아
안도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일부)
크로아티아(일부)
프랑스
1. 개요
2. 역사
2.1. 역대 프랑크 국왕
2.2. 메로비우스 왕조 (481년 - 714년/754년)
2.2.1. 시조
2.2.1.1. 메로비우스의 유래
2.2.1.2. 프랑크 왕국의 건국
2.2.1.3. 가톨릭으로의 개종
2.2.2. 클로비스 1세 이후
2.2.3. 몰락
2.2.4. 시스템과 권력의 배분
2.2.4.1. 사법
2.2.5. 외교와 정책
2.3. 카롤루스 왕조
2.3.1. 시조
2.3.2. 카롤링거 르네상스
2.4. 분열
3.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4. 관련 문서
5. 역사 틀 둘러보기

언어별 명칭
라틴어
Regnum Francorum / Francia
프랑스어
Royaume des Francs
네덜란드어
Frankische Rijk
독일어
Fränkisches Reich
이탈리아어
Regno franco
서플람스어
Frankisch Ryk
영어
Kingdom of the Franks
그리스어
Βασίλειο των Φράγκων
아랍어
إمبراطورية الفرنج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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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세운 나라.[2] 중세 초에 서유럽중부유럽을 거의 통일했던 나라이자 오늘날 프랑스,독일,이탈리아의 기원이 되는 국가이며,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로마의 이름을 자처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이 되었다.
후대 여러 유럽 왕위에 영향을 끼친 살리카법이라는 법전을 편찬하기도 했다.[3]

2. 역사




2.1. 역대 프랑크 국왕




2.2. 메로비우스 왕조 (481년 - 714년/754년)


영: Merovingian dynasty
프: Dynastie mérovingienne
481년 클로비스 1세의 집권이 메로비우스 왕조의 시작점이다. 공식적인 왕조의 소멸은 754년이지만, 카롤루스 마르텔의 집권부터 메로비우스 왕은 실상 권력을 완전히 상실했기에, 왕조의 끝을 714년으로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2.2.1. 시조



2.2.1.1. 메로비우스의 유래

메로비우스 왕조는 프랑크 왕국의 첫 왕조다. 메로비우스라는 이름은 창시자로 알려진 프랑크족 족장 메로베크에서 유래한다. 메로베크(Merovech, 411-458)는 서로마 제국의 군인으로 용병 출신이었다. 메로베크는 서로마 제국군 사령관을 지내기도 했으며 그의 아들인 킬데리크 1세는 서로마 제국에서 용병대장을 지내기도 했다.

2.2.1.2. 프랑크 왕국의 건국

메로비우스 왕조의 건국자는 킬데리크 1세이지만, 힘의 기반을 다져 프랑크 왕국을 있게 한 것은 그의 아들 클로비스 1세다.
481년 킬데리크 1세의 죽음 이후, 클로비스는 프랑크족의 한 일파인 살리 프랑크족의 여러 족장 중에 한 명에 불과했다. 이들 살리 프랑크족은 현 네덜란드의 영토에, 그들의 사촌 부족인 라인 프랑크족은 라인 유역에 정착하고 살고 있었다. 그들의 남서쪽, 파리/수와송 부근에는 서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인 수와송 왕국(Soissons)이 있었고, 제네바/리옹을 끼고 있는 알프스 산맥 부근에는 부르군트 왕국이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남서부/스페인 북부 가론 강 유역에는 서고트 왕국이 버티고 있었으며, 북동쪽으로는 게르만족의 분파들인 알레만니족, 색슨(작센)족, 프리슬란트족과 훗날 이탈리아 반도에 왕국을 건설하게 될 랑고바르드족이 정착하지 못한 채 유랑하고 있었다.
게르만족의 수장에게 있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오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뿐이었기에, 클로비스는 몇 차례 원정을 감행했다. 그는 486년 수와송 왕국(Soissons)을 멸망시켜 프랑스 북부를 통일하고, 수와송의 국왕 시아그리우스를 참살했다. 이로써 클로비스는 어렵지 않게 북부의 솜(Somme)지방과 루아르(Loire) 강 유역 사이의 드넓은 영토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490년 즈음, 당당히 유럽 강자에 올라선 클로비스 1세는 이탈리아 반도의 강자였던 동고트족(Ostrogoth)의 왕 테오도리쿠스와 자신의 딸을 혼인시키고,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와도 유대관계를 다졌다. 또 498년에는 남서유럽의 강자인 서고트 왕국(Wisigoth)을, 505년에는 북동유럽의 알레만니(Alamania) 왕국을 전쟁으로 굴복시켰다.

2.2.1.3. 가톨릭으로의 개종

5세기~6세기까지 게르만 왕국들의 대부분은 기독교로 개종하였지만, 대부분 가톨릭교가 아닌 아리우스가 4세기에 정립한 종파인 아리우스파를 믿었다. 클로비스는 가톨릭교를 받아들여 496년 로마 교황 펠릭스 3세로부터 세례왕관을 받았다. 클로비스 1세는 가톨릭 교회와 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영토를 관리하고 안정시키는 데 힘쓴다. 이것은 1차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프랑크 지도층을 'barbarius', 즉 이방인/미개인 취급하며 경멸하던 로마인들과 로마화된 식민지인들이(colonia)[4] 많았기 때문이다. 이 정책은 왕국을 정서적으로 통합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5] 이를 위해 왕은 자신을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로 자처하고, 가톨릭 귀족 클로틸드 공주를 왕비로 맞이했다. 이는 아리우스파를 고집한 동시대의 부르군트족, 서고트족의 정책과 대조되었다.
클로비스 1세는 511년 11월 27일, 파리에서 서거했다.

2.2.2. 클로비스 1세 이후


511년, 프랑크 왕국은 클로비스 1세의 네 아들(테우데리쿠스 1세, 클로도메리우스 1세, 킬데베르투스 1세, 클로타리우스 1세)에게로 돌아간다. 그들은 수도를 서로에게 인접하게 배치하여 프랑크 왕국의 통일성을 간직했다. 524년 둘째 클로도메리우스 1세의 죽음 이후, 세 형제는 둘째의 어린 아들들을 암살하고 왕국을 삼등분하여 나눠갖었다. 그에 반해, 이복 형인 테우데리쿠스 1세는 아버지 클로비스 1세의 정복 전쟁 시절 크게 공헌한 바가 있었다. 그의 아들 테오도베르투스 1세(Theudebert I) 또한 군사적 재능이 있어 두 숙부를 누르고 분국의 왕위를 계승하는 데 성공했다. 테오도베르투스 1세는 큰 야망이 있어, 로마 제국의 금화가 아닌 독자적인 금화를 주조했다.
558년, 막내 클로타리우스 1세는 다시 한번 프랑크 왕국을 통일했으나, 오래가지 않아 561년에 다시 네 명의 아들 시게베르투스 1세, 킬페리쿠스 1세, 카리베르투스 1세, 곤트라누스 1세에게 나누어주었다. 클로타리우스 2세와 다고베르투스 1세의 치하(614년부터 639년까지)에서 메로비우스 왕조는 전성기를 누렸다.

2.2.3. 몰락


639년 1월 다고베르투스 1세가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들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메로비우스 왕조는 이때 둘로 나뉘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동부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은 시기베르투스 3세가, 왕국의 서부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분국은 클로도베쿠스 2세가 물려받았다.
그후 유력한 귀족들이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설립하려는 왕권에 대항했고, 어린 나이의 왕들을 유린하며 그들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내분을 끝없이 벌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동부 아우스트라시아의 권력은 귀족 집안인 피핀가의 수장인 그리모알드에게로 넘어갔고, 서부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분국은 바틸드 왕비가 통치하는 구도로 변해갔다. 결국 지속적인 어린 왕들의 즉위와 궁재 자리를 둘러싼 대가문, 지방 간의 기나긴 내분으로 왕권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왕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메로비우스 왕조 시기만 해도 프랑크 왕국의 왕권에는 그리스도교 요소만이 아니라 게르만족의 전통적인 요소가 많았다. 메로비우스 왕조의 국왕은 머리를 길게 기르며, 황소를 타고 외출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는 게르만 전통에 따라 신성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귀족 가문들의 내분 속에서 승리한 카롤루스 가문은 사실상 메로비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인 군주가 되었다. 결국 751년, 로마 교황을 등에 업은 피핀 3세가 킬데리크 3세를 삭발시키고 수도원에 유폐시킴으로써 메로비우스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카롤루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2.2.4. 시스템과 권력의 배분


메로비우스 왕조는 클로비스 1세의 계획적인 분할 혹은 전통에 의한 '''분할 정책'''에 의해서 여러 차례 분할과 통합을 겪었다. 여기서 분할 상속의 전통은 일반적으로는 살리카 법전에 의거하는 게르만 족의 전통이라고 하지만, 이는 하나의 학설일 뿐이다. 다른 학설에서는 후기 로마 제국의 전통이나 클로비스 1세의 우려 등등이 있다.
메로비우스 왕조 시대는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였다. 개별적인 지방 간의 차이는 점층적으로 커져 갔고, 그들은 자신들이 아닌 이방인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주교나 여러 관료들의 임명권을 실질적으로 지방의 유력자들이 행하고는 했다. 물론 이는 왕권이 심각하게 약해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왕들은 이들에게 이러한 타협을 통해서 국가 체제를 유지시켰음을 시사한다.

2.2.4.1. 사법

전체적으로, 프랑크 왕국을 포함한 게르만 왕국들은 로마 제국과 유사한 제도를 구축한다. 하지만 사법적 제도는 후기 로마 제국의 그것에 비해 의무성과 권위를 많이 잃는다. 프랑크 왕국, 그리고 초기 중세 시대의 재판은: 가족 간의 복수(페드)와 합의, 정부의 금전적 배상(웨르젤드)과 물증에 기반한 재판, 그리고 신의 처벌(오르달리),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
'''가문의 형성과 복수'''
대부분의 분쟁의 해소는 일차적으로는 개인간의 합의와 복수로 이루어지고, 국가는 이러한 분쟁이 지속될 때 방안을 제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오늘날처럼 적법한 폭력을 국가가 독점적으로 점유하는 사회에서는 게르만 왕국에서처럼 가족 사이에서 합의를 보거나 민간이 분쟁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익숙치 않다. 이러한 사회적 제도는 게르만족이 무조건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라는 오명을 쓰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최근 게르만족 공동 묘지의 발굴은 폭력으로 죽은 사람 수가 14세기보다 적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4세기 로마 제국 후기부터 중앙정부의 영향력은 서서히 줄어들고, 정부가 모든 분쟁을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강력한 중앙정부의 부재는 가족들이 모여 구성원들의 이해를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이러한 가족적 연대(시펜 Sippen)는 점층적으로 규모가 커져 거대한 혈맹을 이루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떠한 개인이 부당한 피해 또는 모욕을 당하면, 그 개인이 속한 가족 전체가 모욕을 당한 것으로 간주해서 가족이 직접 피의자에게 복수를 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수를 프랑크 왕국에선 “페드(불: Faide, 영: Feud)”라고 부른다. 이렇듯, 사립 사법 시스템이 성립된 것은 폭력의 사례가 급작스럽게 많아져서가 아니라, 사법권이 국가에서 공동체로 옮겨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국가의 역할과 금전적 배상'''
물론, 복수는 복수를 낳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가족들 사이의 분쟁은 중재자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국가이다. 5세기 후반부터, 각 게르만 왕국은 법전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이 법전들은 로마 출신 법률가들이 로마 법전을 국가가 모든 개인의 분쟁을 조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당시 상황에 알맞게 고쳐쓴 것이다. 이 새로운 법전의 핵심 철학은 분쟁의 중함과 가족이 분쟁으로 인해 입은 감정적 피해를 측정하는 데 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법의 지표가 개인이 아닌 가족이 입은 감정적 피해라는 것인데, 이것은 가족이 차후 복수를 가하는 것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우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선, 중재자는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피의자의 가족은 웨르젤드(Wergeld)라는 벌금을 피해자의 가족에게 물어야 한다. 이 벌금이 커버하는 범죄 종류는 굉장히 다양해서, 아주 가벼운 경범죄로부터 살인같은 심각한 범죄에게도 제안된다. 좀 더 가벼운 범죄일 경우, 벌금은 공개적으로 수치를 주는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예컨데 개를 훔친 사람은 공개적으로 개의 항문에 입맞춤해야 한다.
'''신의 처벌'''
결과에 승복하지 않거나, 증거가 부족해 옳고 그름을 가를 수 없다면, 왕은 마지막으로 신의 심판(오르달리, ordalie)을 요청할 수도 있다. 이러한 관습은 후일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 칭하는 데 구실을 준다. 신의 심판은 손을 끓는 물에 넣는다거나, 달군 쇠를 손으로 잡는다거나, 결투(듀엘, duel)를 해, 무사히 살아돌아오는 사람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 간주하는 것이다.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처형된다.

2.2.5. 외교와 정책


클로비스 1세의 정책의 핵심은 팽창주의라 볼 수 있다. 481년 즉위 직후부터 갈리아인(골족)을 예속하고, 511년 임종 직전까지 남쪽으론 서고트족의 아키텐(현 보르도/툴루즈까지)), 북쪽으론 발트 해, 동쪽으론 쾰른, 라인 강 부근까지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클로비스의 후계는 테우데리쿠스 1세, 클로타리우스 1세, 킬데베르투스 1세에게로 돌아가는데, 이러한 팽창주의 정책은 클로비스의 죽음 뒤에도 계속된다. 이 후계자들 중 가장 두드러지는 왕은 테우데리쿠스 1세로, 부르군트 지방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해, 클로타리우스와 킬데베르투스의 영토를 합산한 정도의 방대한 영토를 얻게 된다.
여러 프랑크 왕들은 지속적으로 로마의 전통을 흡수한 정부 체제를 국가 전체에 퍼트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과 정치적 움직임은 지방분권적인 귀족들에게는 좋지 못했던 것이었고, 그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왕과 여러 차례 대립하게 된다.

2.3. 카롤루스 왕조


[image]
영: Carolingian dynasty
프: Dynastie carolingienne

2.3.1. 시조


'''피핀 1세'''
카롤루스 가문의 시조에 대해서는 자료가 적어 깊이 알 수 없다. 다만, '''메츠의 아르눌'''(Arnoul de Metz)과 '''란덴의 피핀 1세'''(Pépin Ier de Landen)가 그 시조라고 보고 있다.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테르 2세에 대한 헌신으로, 피핀 1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 아르눌은 메츠의 주교로 임명된다. 이 두 사람은 동맹을 맺고, 아들과 딸을 결혼시키는 것으로 그것을 강화한다. 아르눌은 사후에 성인(saint)로 승격이 되는데, 이것이 피핀 가문의 정통성을 만들어준다.
'''피핀 가문의 퇴보'''
피핀 가문의 2대는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피핀 1세의 아들 '''그리모알드 1세'''는 궁재 직위를 물려받은 후[6] 아들 킬데베르트를 앞세워 쿠데타를 시도하지만, 타 귀족들에게 원성을 사, 아들과 함께 암살당한다. 그리모알드 1세의 아들 '''피핀 2세'''는 쾰른 지방 귀족의 딸 플렉트루드와 결혼을 해 유럽 대륙의 요충지이자 풍요로운 지방인 쾰른을 획득하고, 부친 그리모알드 1세가 살해당한 지 15년 뒤에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를 역임하는 데 성공한다. 687년 '''텔토리 전투'''에서 승리해,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분국의 궁재가 되어, 3개 분국을 모두 한 손에 넣는다. 하나의 개인이 3개 분국의 궁재가 되는 것은 유례없는 사건으로, 피핀 2세는 '프랑크의 지도자'(duc des Francs)란 칭호를 얻는다.
피핀 2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던 프리슬란트(현 네덜란드, 독일 북해 인근 지방)를 점령하는데, 이것이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를 빌미로 일으킨 정복 전쟁이었다. 지금까지 프랑크 왕국은 대체적으로 기독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정교분리가 잘 되어 있었다. 또 처음으로 강압선교가 시행되어, 지금까지 잘 받아주었던 선교자들도 정복국의 앞잡이로 보아, 후일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계기가 된다. 피핀 2세는 몇 차례 정복 전쟁 이후 유례없는 -생전에 궁재로서-[7] 세습을 준비한다. 하지만, 후계자로 지목하였던 두 아들들('''드로곤, 그리모알드 2세''')이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714년 피핀 2세 서거시에 궁재직은 12세의 어린 아들 '''테오드발트'''에게로 돌아간다.
'''카롤루스 마르텔'''
하지만, 피핀 2세는 성인인 서자가 있었으니, 바로 '''카롤루스 마르텔'''이었다. 플렉트루드 왕비는 테오드발트의 어머니로서 섭정을 시작하고, 카롤루스 마르텔을 감금했다. 하지만 궁재가 어려 권력이 약해진 틈을 타, 프리슬란트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의 반란, 아우스트라시아의 귀족들의 불복종이란 3대 난국이 발생했다.
716년 카롤루스 마르텔은 도피했다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717년 네우스트리아 분국 귀족들을 완전히 종속시켰으며, 719년 프리슬란트 반란을 진압하고, 섭정 플렉트루드를 상대로 승리했다. 724년에는 프랑크 왕국의 왕 티에리 4세를 앞세워 궁재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갖게 된 카롤루스 마르텔은 귀족들의 분란을 잠재우고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군을 격퇴하면서 군사적 권위를 얻었다. 또, 카롤루스 마르텔은 처음으로 유럽 문명을 이슬람에 대치시키고, 자신을 기독교의 수호자로서 자리매김해 종교적/군사적 권위로 자신의 정통성을 변호했다.
서자라는 약점을 군공으로 극복하면서 가문을 이어받은 카롤루스 마르텔은 내란으로 잠시 공석이 되었던 왕위를 대신하여 메로비우스 왕조를 통치하기도 했지만 감히 왕위까지는 넘보지 않았다. 하지만, 737년 왕 티에리 4세가 죽었을 때 그는 왕을 새로 교체하지 않고, 공석으로 두며, 스스로에게 "부(副)왕"(subregulus)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피핀 3세'''(Pépin le Bref)와 카를로만, 두 아들을 후계자로 두었으나 카를로만이 750년 수도자로 귀의하면서 피핀 3세가 권력을 독점했다. 751년 피핀 3세는 결국 교황 자카리아의 지원을 등에 업고 메로비우스 왕조의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며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피핀 3세는 적극적으로 교황에게 군사적 도움을 주었다. 754년 랑고바르드 왕국을 격파하고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라벤나 일대의 토지를 기증하여('피핀의 기증'이라 함) 교황령의 시초를 만들었다. 또한 정복을 계속해 759년 나르본과 알 안달루스 지역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또 우마이야 왕조에 적대적인 아바스 가문과 군사적 동맹을 맺어 (767년) 우마이야 왕조를 견제했다.
피핀 3세의 아들이 그 유명한 '''카롤루스 대제'''였으며 800년 교황 레오 3세에게 로마 제국 황제의 칭호를 받아 신성 로마 제국의 시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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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대제 사후 그의 유일한 아들 경건왕(자비왕) 루도비쿠스 1세(루이 1세)가 뒤를 이었다.

2.3.2. 카롤링거 르네상스


영: Carolingian Renaissance
프: Renaissance carolingienne
카롤루스 대제는 문화적 부흥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정작 본인은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메로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왕들은 글을 읽고 쓸 줄 알아 공식 문서에 서명을 남기기도 했으나, 카롤루스 대제는 글을 쓸 줄 몰랐다. 허나 교육과는 별개로, 그가 교양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학과 수학에도 관심을 보였고 (특히 기하학에 두각을 보였다고 한다) , 프랑크 언어와 더불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을 청해(聽解)할 줄 알았다. 왕국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카롤루스 대제는 점차 문화적 부흥을 자신의 재위의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팔라틴 아카데미 (Académie palatine)'''
780년부터, 카롤루스 대제는 유럽의 방방곡곡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로마의 지식인들이 잔류하던 이탈리아에서 언어학자들과 사학자들을 모집했고, 서고트에서 영입한 신학자 테오둘프(Théodulf (d'Orleans))를 오를레앙의 주교로 삼았다. 또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당대의 다빈치라 일컬을 만한 다재다능한 알퀸을 부사제로 임명, 자신의 고문관으로 두어, 신학, 법학, 천문학, 논리학 등을 가르치게 했다. 이 지식인들은 가히 학회라 부를 만한 소모임을 이루었고, 이 "학회"를 팔라틴 아카데미라 명명한다. 대부분 외래 지식인들로 구성된 초대 팔라틴 아카데미는 2대에 이르러서, 아인하르트 등 토착 프랑크 왕족의 지식인을 배출하는 데 성공한다.
'''학교'''
카롤루스 대제는 789년 칙령(admonitio generalis)으로 학교를 설립하는 데도 힘쓴다. 이런 학교들은 교양있는 성직자들을 길러내는 데 전념하였다.
당시 학교에서 가르치던 문학 세 과목과 과학 네 과목으로 다음과 같다.
1학년: 구약성서 시편을 교재로 삼은 읽기 수업
2학년: 문학 trivium (문법론, 수사학, 논법)과 과학 quadrivium (산수, 기하학, 천문학, 음악)
이 일곱 과목은 13세기까지 중세 대학의 교과과정의 초석을 이룬다. 그 외에, 카롤루스 르네상스 시대의 발달로는 오늘날 알파벳 소문자의 기초가 되는 속기술 발명, 첫 음표의 발명 등을 꼽을 수 있다.
'''속기술과 출판 문화의 발달'''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지식인들은 엄청난 필사작업에 착수한다. 이 작업의 목적은 이중적인 것이었는데: 우선 "틀린 라틴어"로 쓰인 메로빙거 왕조 시절의 문서들을 올바른 라틴어로 고치는 것이었고, 고대 로마의 걸작이라 판단되는 작품들과 성경 주해등 종교적 문서들을 복제해 판본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시절에 필경사들이 질이 낮다고 판단한 문서들은 폐기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베껴쓴 책들은 수도원들에 소장되는데, 수도원의 규모에 따라 수십 권에서 수백 권 정도 보관되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절 주목할 만한 점은 괄목할 만한 문서 공유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인쇄술의 발명 전이라, 아무리 많은 판본을 필사한다 해도 한계가 있었고, 그 한계를 수도원들 사이에서 책을 빌려주는 시스템으로 메꾸었다. 이런 "책 공유망"은 굉장히 활발했고, 프랑크 왕국 내부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수도원에게도 빌려주는 등 국제적 차원에서도 공유가 이루어졌다.
'''성공 여부'''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문화적 여파는 분명 실재했고,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가 기대하던 만큼 발전했는지, 또 근세의 "르네상스"에 비교해 그 이름이 과연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우선, 속기술과 출판 기술의 발달로 과거에 이미 간행되었던 책 판본의 권수는 확실히 증가했다. 하지만 메로비우스 왕조에 비해 새로운 출판물의 수는 정체 내지 줄어들었다. 둘째, 카롤루스 대제가 학교라는 개념의 창시자라는 것은 잘못된 학설이다. 메로비우스 왕조에도 학교는 있었지만, 카롤루스 대제는 학교 수를 증가시켰을 뿐이다. 또한 전국 곳곳에 학교를 만들어 지식의 보편화시켰다는 설 또한 증빙이 부족하다. 로마 시대때도 그랬지만, 교육은 어디까지나 권력자들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고, 규모나 시설도 근세적인 학교에 비해 너무 조악했다. 팔라틴 아카데미 또한 고작 몇십 명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사교 모임에 가까웠고, 중세 중기(12세기 즈음)에 발달되는 대형 고등 교육기관들인 "대학"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또 재밌는 점은 역설적으로 올바른 라틴어를 가르침과 동시에 라틴어를 구사하는 인구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성직자들이 로마 제국 시절의 일반인이 구사하기에는 어려운 라틴어를 구사하자, 점차 일반인이 사용하는 언어와 성직자 내지 지식인이 구사하는 언어가 괴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인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점점 변형돼 원시 프랑스어로 변모하기에 이른다.

2.4. 분열



카롤루스
대제

'''신성 로마 황제 초대'''
카롤루스 1세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
루도비쿠스 1세
경건왕

'''신성 로마 황제 2대'''
루도비쿠스 1세
카를 2세[8]
피핀 1세

아키텐
샤를 2세
대머리 왕

네우스트라시아

서프랑크

'''신성 로마 황제 5대'''
카롤루스 2세
로타리우스 1세

이탈리아

'''신성 로마 황제 3대'''
로타리우스1세
루트비히 2세
독일인 왕

바이에른

동프랑크
피핀 2세

아키텐
루이 2세
말더듬이 왕

''' '''[9][10]
프로방스의
카롤루스

프로방스
루도비코 2세
이탈리아인 왕

이탈리아

'''신성 로마 황제 4대'''
루도비쿠스 2세
로타리우스 2세
카를 3세[11]
뚱보 왕

슈바벤

알레만시아

'''신성 로마 황제 6대'''
카롤루스 3세
카를로만

바이에른

동프랑크[12][13]
흘로도비쿠스
* 카롤루스 대제와 루도비쿠스 1세는 프랑스 왕국, 독일 왕국, 이탈리아 왕국에서 각자 자국 왕으로 생각하여 국왕의 대수에 포함시킨다.
카롤루스(샤를, 카를로, 카를), 루도비쿠스(루이, 루도비코, 루트비히)
* 원래 대수를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으로 구분하기 어려워 별명을 붙였다.
이탈리아의 루도비쿠스, 독일의 루도비코스
[1] 이 언어의 직계 후손뻘 되는 언어는 다름 아닌 '''네덜란드어이다.'''[2] 메로비우스 왕조를 비롯한 중세 전기는 반천 년(476년부터 888년, 혹은 1,000년까지)이라는 비교적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서유럽 역사 중 고고학 활동이 가장 활발하지 못한 시기 중 하나인데, 이것은 다른 시기(고대 로마 시대, 중세 후기, 르네상스, 바로크 유럽과 근현대)에 비해 적은 역사적 자료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세 전기는 유럽 역사 연대기의 구멍이라면 구멍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이 분야의 권위자로는 프랑스 소르본 대학의 브뤼노 뒤메질(Bruno Dumézil) 교수가 있다.[3] 다만, 살리카법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확대, 과대 해석이다.[4] 로마의 식민지는 오늘날의 식민지와는 다른 개념으로, 식민지인들은 로마인의 외국인들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근현대 식민지는 넓은 경지, 인력, 자원 등을 이용해 본국에 이익을 가져다주기 위함인 것에 반해, 로마 제국의 식민지는 "국경선이 확장된 국토"에 더욱 가까웠다. 실제 212년 카라칼라 황제의 칙령(안토니누스 칙령이라고도 함)은 식민지를 포함한 모든 국토에 거주하는 남성 자유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줄 것을 명시하고 있다. 로마가 500년이 넘게 유럽, 북아프리카, 근동아시아를 아우르고 1억명에 가까운 인구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던 것도, 식민지인이 점층적으로 "로마인"과 동화된 것도, 이와 같은 포용적인 정책을 실행했기 때문이었다.[5] 이는 후일 청나라의 만주족이 한족의 문화에 동화된 것과 비슷한 이치라 볼 수 있다.[6] 궁재 직위는 이때만 해도 엄연한 공무원직이어서 세습될 수 없었다. 세습의 시도는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 다른 귀족 가문들 사이에 파문이 일어 척결되었다. 피핀 가문은 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이 분열된 틈을 타 직위를 세습하는 데 성공한다.[7] 왕과 같은 행보에도 불구하고, 피핀 2세가 아직 궁재라는 것을 잊지 말자.[8] 부왕인 카롤루스 대제가 공동황제로 임명했으나 단명[9] 대관을 망설였다.[10] 4대손 루이 5세를 끝으로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는 단절되었다.[11] 카롤루스 대제 이후 베르됭 조약, 메르센 조약, 리베몽 조약으로 분열된 프랑크 왕국을 일시적으로 재통일했다.[12] 루트비히 2세의 장남으로 바이에른을 물려받았다. 사촌인 루도비코 2세에게 제위를 약속받았으나 삼촌인 샤를 2세가 먼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대관식을 받았다. 단명하여 이탈리아와 제위를 막내 카를 3세에게 상속하였다.[13] 카를로만의 서자 아르눌프가 일시적으로 제위를 얻었으나, 그 아들 유아왕 루트비히 4세를 끝으로 동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는 단절된다.
프랑크 왕국의 분열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거대한 국토에서 비롯된 행정적인 어려움, 민족적 다양함, 지방 귀족들의 강력함과 성직자들과 세속적 귀족들의 라이벌 구도 등 여러 방면에서 내분이 일어나기 좋은 환경을 조성했다.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루도비코(이), 루이(프), 루트비히(독) 1세)는 장남 로타리우스 1세를 815년 공동 황제로 선포하고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 이후 이탈리아 왕으로 삼는다. 둘째 피핀에게 서프랑크의 남부인 아키텐, 가스코뉴 등의 지역을, 셋째인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에게 바이에른, 슈바벤 등 동프랑크 지역을 나눠주기로 한다. 후처에게서 샤를 2세(대머리 샤를)을 얻자 영지를 조정하여 샤를에게도 영지를 나눠주려 했으나, 829년에 세 아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 내전은 왕국의 권력을 심각히 약화시켰다. 이후 아키텐의 지배권을 두고 피핀 1세와 대머리 샤를이 싸우던 도중 838년 피핀 1세가 죽자 루도비쿠스 1세는 다시 한번 아키텐을 대머리 샤를에게 넘겨주려 했으나 아키텐 지역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피핀1세의 아들인 피핀 2세가 상속받는다.
840년 루도비쿠스 1세가 죽자, 장남 로타리우스 1세는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려 하였다. 이에 대머리 샤를과 독일인 루트비히는 힘을 합쳐 로타리우스 1세에게 대항하였고 아키텐의 피핀 2세는 삼촌인 로타리우스 1세편을 든다. 결국 세 형제는 843년 프랑스 북부의 베르됭에서 만나 프랑크 왕국을 삼분하는 '''베르됭 조약'''을 맺는다. 조약에 의해 대머리 샤를은 자신의 영역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받았고 피핀 2세는 아키텐을 노리던 대머리 샤를을 주군으로 섬기게 되었다. 피핀 2세는 반발을 했으나 결국 아키텐마저 잃게 된다. 최종적으로 제국은 3개(서·중·동) 지역으로 분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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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리우스 1세는 제국의 중앙 부분인 로타링기아, 알자스, 부르군트,이탈리아 왕국을 가졌으며, 루트비히 2세는 제국의 동쪽 부분인 라인강 동쪽에서 이탈리아 북동쪽에 이르는 지역을 가졌다. 그리고 샤를 2세는 제국의 서쪽 지역인 네우스트라시아(테두리 위쪽)와 피핀 2세에게서 빼앗은 아키텐(테두리 지역) 지역 등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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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리우스 1세 사후, 중프랑크 또한 세 아들이 물려받았는데, 855년 '''프륌 조약'''으로 영토를 셋으로 분할하여 장남 루도비코 2세(이탈리아인 루도비코, 루도비쿠스 2세, 독일인 루트비히의 조카)가 제위와 이탈리아를, 로타르 2세가 로타링기아(로트링겐(독), 로렌(프))로 불리는 중북부를, 프로방스의 샤를이 중남부의 부르군트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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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르 2세는 자신의 영지를 정부에게서 난 아들 사생아 위고에게 물려주기 위해 사생아라는 법적 지위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채 869년 죽게 된다. 로타르 2세의 삼촌들인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와 샤를 2세(대머리 샤를)는 조카손자 위고가 법적 권리가 없는 사생아라고 선포한 뒤 870년 '''메르센 조약'''을 맺어 로타링기아를 나눠가졌다. 프로방스의 샤를은 869년 이른 나이에 죽었고 그의 영지는 루도비코 2세(이탈리아인 루도비코)가 차지했다가 샤를 2세(대머리 샤를)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메르센 조약은 중세 유럽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조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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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비코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사촌인 루트비히 2세의 장남 카를로만에게 상속을 하였다. 그러나 샤를 2세(대머리 샤를)가 이탈리아로 진격해 황제로 즉위한다. 이를 계기로 서프랑크와 동프랑크 간의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형인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가 죽자 샤를 2세(대머리 샤를)는 황제라는 명분으로 동프랑크 지역의 영지들을 노골적으로 탐내었다.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의 둘째 아들인 '작은 루트비히'(홀로도비코스, 루트비히 3세)가 이를 저지하였고 그 와중에 샤를 2세(대머리 샤를)는 병사한다. 샤를 2세(대머리 샤를)의 아들 루이 2세(말더듬이 루이)가 제위를 물려받으려 했으나 이탈리아로 가기를 망설였고 카를로만은 상속을 명분으로 이탈리아를 차지했으나 교황이 황제 대관을 해주지 않았다.
교착상태에서 둘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다. 카를로만은 동프랑크의 영지들과 이탈리아, 제위를 동생 카를 3세(뚱보 카를)에게 상속시켰다. 아들인 아르눌프가 있었으나 사생아였기 때문에 물려주지 않았고 이에 계속 분쟁이 발생되자 카를 3세는 상속한 영지 중 아르눌프가 다스렸던 바이에른 지역을 넘겨준다. 카를 3세는 형 카를로만이 상속해준 제위와 바이에른을 제외한 동프랑크 지역의 영지들, 부르군트를 제외한 이탈리아와 중프랑크 지역의 영지들, 서프랑크의 샤를 3세(단순왕)[14]가 어린 나이(5세)라는 이유로 서프랑크의 왕을 대리함로써 제국을 다시 통합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1년 만에 다시 분열된다. 이후 귀도 왕조를 거쳐 아르눌프가 제위를 차지하기도 하지만 아르눌프를 끝으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는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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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5년 카롤루스 왕가의 지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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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중엽 서프랑크 왕국의 왕령지(노란색이 카롤루스 왕조의 명령이 미치는 부분. 랭스를 포함한 샹파뉴 지방에 국한된다.)

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프랑스 왕국
  • 서프랑크 왕국: 후처 소생의 막내 샤를 2세의 나라.
  • 아키텐: 차남 피핀 1세의 영토. 하지만 피핀 1세는 839년 사망했기 때문에 형제들의 상속 전쟁에 끼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 루도비쿠스 1세는 아키텐을 샤를 2세에게 넘겨주려 했지만, 아키텐의 귀족들은 집단으로 반발했다. 이에 아키텐의 귀족들은 피핀 1세의 아들 피핀 2세을 지지하여 루도비쿠스 1세는 결국 피핀 2세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855년에 대머리 샤를 2세는 피핀 2세를 사로잡고 축출시켰으며, 피핀 2세의 동생 샤를은 수도사로 만들어 아키텐을 강제로 뺏어버렸다.

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로타링기아

서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고지 부르군트 왕국
저지 부르군트 왕국
이탈리아 왕국
  • 중프랑크 왕국: 장남 로타리우스 1세의 나라. 중심지인 로타링기아를[15] 비롯한 중부 영토, 이탈리아 영토, 로마 제국 황제 칭호를 받았다. 따라서 왕에 불과한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을 명목상으로 지배하였다.

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독일 왕국
  • 동프랑크 왕국: 삼남 루트비히 2세의 나라.
855년 로타리우스 1세가 죽자 중프랑크 왕국은 프룀 조약을 통하여 그의 세 아들인 장남 루트비히 2세, 차남 로타르 2세, 막내 샤를 2세에게 또 다시 분할되었다. 루트비히 2세는 이탈리아, 신성 로마 황제 칭호, 로타르 2세는 로타링기아, 샤를 2세는 부르군트를 나누어 가졌다. 863년에 샤를이 후사 없이 죽자, 그의 두 형은 샤를의 부르군트 영지를 나누어 가졌는데, 부르고뉴(고지 부르군트) 지역은 로타르 2세가 가졌고, 프로방스(저지 부르군트)는 루트비히 2세가 가졌다. 869년에 로타르 2세가 죽었다. 그는 서자였던 위그 외에는 후계자가 없었다. 위그는 계승자를 선언했지만, 결국 그들의 숙부들인 동프랑크 왕국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와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 샤를 2세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두 숙부들은 870년에 메르센 조약을 맺어 로타링기아를 동서로 나누어 가졌다. 875년에는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가 후사 없이 죽었는데, 이탈리아, 저지 부르군트, 신성 로마 황제위는 모두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2세가 가졌다. 그러나 877년에 샤를 2세가 사망하자, 이탈리아, 저지 부르군트, 그리고 신성 로마 황제위는 그의 조카이자 동프랑크 왕국의 카를로만(동프랑크 왕국 루트비히 2세의 장남)에게 넘어갔다. 그 후 이탈리아는 혼란을 겪다가 962년 독일 왕국오토 1세가 가지게 되었다.
동프랑크 왕국은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증손자 유아왕 루트비히 4세가 911년 후계자없이 사망하여 망했다. 서프랑크 왕국은 대머리 샤를 2세의 5대손 무위왕 루이 5세가 987년 후계자없이 사망하여 망했다.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일 드 프랑스(Île-de-France, 파리)의 백작 위그 카페[16],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프랑켄 공 콘라트 1세[17]가 왕위에 선출되어 독일과 프랑스는 완전히 분리되었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참고로 위그 카페는 계속 대를 이어 카페 왕조를 이루었고 방계 왕조인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를 이루며 절륜한 가계를 자랑했지만 콘라트 1세는 딸 쿠니군데 외에는 아들 헤르만이 요절하여 후계가 단절되고 만다. 또한 판노니아 지역에서 마자르족이 계속 동프랑크 왕국과 바이에른을 침공했으며, 결국 콘라트 1세는 죽기 전에 왕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였던 작센 부족 공국의 하인리히 1세에게 왕위 계승권을 주게 되었다.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이 오토 1세이며, 이후 동프랑크의 역사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승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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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영토는 결과적으로 12세기에 프랑스 왕국신성 로마 제국 두 국가로 통일된다.

3.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동로마 제국과는 당연히 사이가 나빴다. 일단 로마의 발상지이자 이 당시에는 동로마 영토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중부 이탈리아를 피핀 3세가 멋대로 교황에게 바치는 바람에 사이가 틀어졌으며 이후 카롤루스가 동로마의 봉신국이던 베네치아와 직할령인 남부 이탈리아까지 노리면서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표면적으로나마 교황이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 자리를 수여하였고 카롤루스가 당시 동로마 여제 이리니와의 혼인을 통해 동로마 황제 자리까지 노리면서[18]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동로마 제국의 입장은 476년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제위를 동로마 제국에게 바쳤기 때문에 자신들이 동서로마 황제 자리를 동시에 보유한 로마 제국이며, 따라서 프랑크 왕국이 서로마 제국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은 자신들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글자를 몰라서 열십자를 긋는 걸로 서명을 대신하는 무식쟁이 게르만인이 로마 주교와 결탁하여 멋대로 로마 황제를 자칭했다고 생각하여[19] 자존심이 상한 동로마인들은 자기들 여제가 아예 황제 자리를 넘겨주려 한 사실이 발각되자 결국 폭발하여 이리니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로 니키포로스 1세를 추대한 다음 프랑크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양측은 베네치아와 아드리아 해를 중심으로 전쟁을 펼쳤다.
하지만 카롤루스는 막강한 경제력과 해군력을 가진 동로마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더이상 세력을 확장할 수 없었고 도리어 유능한 아들만 하나 잃었으며 동로마는 북쪽 국경에 나타난 신흥 세력 불가리아과의 전쟁에서 니키포로스 1세가 전사하는 참극을 겪으면서 멀리 떨어진 프랑크 왕국보다 직접적으로 제국을 위협하는 불가리아를 더 큰 위협으로 보았기에 양측은 곧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되었다. 따라서 양측은 전쟁 전 세력권을 그대로 유지하며 동로마 측에서 로마 제국 황제가 아닌 황제 칭호만 인정해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후 둘은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어 멸망할 때까지 친교를 유지한다.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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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말더듬이 루이 2세의 아들이자 뚱보 카를 3세의 5촌 조카[15] 이곳이 바로 훗날의 알자스-로렌이 되는 '로렌'('로트링겐') 지방이다.[16] 할머니가 카롤루스 왕조 루도비쿠스 1세의 딸 아델라이드였기 때문에 왕족의 후손이었다.[17] 어머니가 동프랑크 왕국 아르눌프의 딸 글리스무트였기 때문에 그 역시 왕족의 후손이었다. 동프랑크 왕국 마지막 왕 루트비히 4세는 그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아르눌프의 아들이기 때문에 항렬 상으로는 루트비히 4세는 외삼촌이었고, 콘라트 1세는 외조카에 해당되었다.[18] 이리니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귀족들에 맞서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던 것이었겠으나, 살리카법에서 알 수 있듯이 게르만족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작위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롤루스의 눈으로 보면 동로마는 그냥 황제 자리가 빈 거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리니는 그 이외에도 서로마 제국 작위를 자칭하는 자가 나타나자,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로 동서로 나뉜 로마 제국의 재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착각한 것도 있었다. 당연히 당대인들은 그런 그녀의 생각에 대해 이뭐병을 외쳤지만(...).[19] 사실 카롤루스 마뉴스는 분야가 좀 달랐을 뿐 결코 무식한 왕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