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쿠아이마루 사건

 



博愛丸事件
1. 개요
2. 하쿠아이마루
3.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혹사당하는 노동자들
4. 그 후
5. 기타


1. 개요


1926년 북양어업에 이용된 공선(工船)[1] 하쿠아이마루(博愛丸)에서 일어난 노동자 혹사 사건.

2. 하쿠아이마루


하쿠아이마루는 원래 일본적십자사 소속의 병원선으로, 1898년 영국 로브니츠 앤 컴퍼니 조선소에서 건조된 선박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병원선이지만 평시에는 우편선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러일전쟁까지 병원선 및 환자 수송 선박[2]으로 이용되다가 1926년에 매각, 개조되어 북양어업에 투입되었다.

3.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혹사당하는 노동자들


당시 북양어업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북태평양의 험난한 환경 속에서 장기간 조업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배에 탄 노동자들은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밤낮없이 무리한 조업에 내몰리며 혹사당하고 있었다. 선장과 수산회사 측 조업 감독관들의 학대는 기본. 게다가 하쿠아이마루 자체도 오래 방치되다가 낡은 배를 공장선으로 급조한 것이었기 때문에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그야말로 최악의 노동환경이었다. 사건을 보도한 당시 오타루의 지역 신문에서도 '생지옥'이라고 표현했을 정도.
감독관이 조업중에 잡부를 윈치에 매달아 놓고 그 모습을 보며 조롱하는 등의 린치가 가해지는 것은 일상이었고, 개중에는 선장과 감독관의 괴롭힘과 가혹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는 노동자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인권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에도 하쿠아이마루의 노동자 혹사 문제는 신문 기사로 다루어질 만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으나, 그 이후에도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채로 북양어업은 계속되었다.

4. 그 후


하쿠아이마루는 이후에도 조업을 계속하다 1945년 6월 28일 군수물자 수송 도중 미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 39명이 사망했다.
하쿠아이마루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지치부마루 조난 사건[3] 이후에도 북양어업은 계속되어 태평양 전쟁 이후까지 계속되다가 1976년 이후로 급격히 쇠퇴했다.
프롤레타리아 작가 코바야시 타키지가 이 사건과 지치부마루 조난 사건을 모델로 쓴 대표작 '게잡이 공선(蟹工船)'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4] 이후 코바야시는 이 작품 내의 묘사 때문에[5] 불경죄 및 신문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수감생활을 하게 되며, 이후에도 '전형기 사람들', '공장 세포' 등의 프롤레타리아 소설을 발표하는 한편 공산당의 일원으로 지하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했다.

5. 기타


이 사건을 포함해 당시 북양어업의 가혹한 노동환경이 워낙 악명높았기 때문인지, 일본 창작물에서는 간혹 어떤 이유[6]로 열악한 환경에서 중노동을 하며 착취당하는 모습이 북양어업 어선 노동에 비유되기도 한다. 대충 한국식으로 치면 새우잡이 배(...) 정도.
[1] 자체 공장 시설이 갖춰진 선박으로 조업한 수산물들을 바로 선내의 공장에서 통조림 등으로 가공한다.[2] 의화단 운동 당시 환자 수송선으로 지정되었다가 1901년 4월 2일에 지정 해제.[3] 1926년 4월 17일 하코다테에서 출항한 공선 지치부마루가 시린키 해협에서 조난당한 사건.[4] 작품의 무대인 공선 '핫코마루(博光丸)'의 모델이 하쿠아이마루이며, 지치부마루라는 이름의 공선이 조난당하는 장면이 나온다.[5] 작중에서 천황에게 헌상될 게 통조림을 두고 "돌멩이라도 넣어 둬!"라고 하는 어부의 대사가 '천황에 대한 불경죄'으로 간주되었다.[6] 주로 악덕 사채업자에게 사채를 썼다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