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바야시 타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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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林多喜二(1903~1933)
1. 개요
일본의 소설가.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여겨진다.
2. 생애
1903년 아키타현 시모카와조이 마을[1] 에서 소작농가의 차남[2] 으로 태어났다. 4세가 되던 해에 홋카이도 오타루에서 사업을 하던 큰아버지의 제안으로 일가가 모두 오타루 와카타케쵸(若竹町)로 이주하면서 오타루는 사실상의 고향으로 자리잡았다.[3] 오타루로 이주한 후에도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타키지는 큰아버지가 경영하는 미츠보시 빵 공장[4] 에서 일하는 대신 학비를 지원받아 오타루 상업학교[5] 를 거쳐 오타루 고등상업학교(오타루상과대학의 전신)까지 진학했다.
학생 시절부터 문예지에 작품을 기고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각종 창작 활동에 몰두했으며, 특히 그림을 좋아해서 한때는 화가를 지망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취미 장사나 마찬가지'라는 큰아버지의 만류로 결국 그림을 접게 되었지만[6] , 대신 문학 활동에 적극적으로 몰두했다. 시라카바파 작가들의 소설을 즐겨 읽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시가 나오야의 작품을 통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배우면서 시가를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한편 시가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고 답장도 받곤 했다고 한다.[7] 한편 고등상업학교 재학 시기를 전후로 가족들의 궁핍한 생활과 당시의 심각한 불황에서 비롯된 사회적 불안 등의 영향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칫코 항구에서 혹사당하며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아 왔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8]
1924년 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타키지는 홋카이도 척식은행 오타루지점에 취직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장래가 보장된 엘리트 코스를 의미하는 것이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키지는 사회의 하층민들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았고, 은행에 근무하는 한편 농민과 노동자들의 가혹한 현실을 다룬 작품들을 틈틈이 쓰면서 노동운동을 지지했다. 이 시기에 5세 연하의 여성 타구치 타키(田口タキ)를 알게 되는데,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기 위해 어린 나이에 아마키야라는 술집에 팔려와 작부로 일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마키야에 미인 작부가 있다는 친구들의 말에 호기심으로 찾아간 타키지였지만, 타키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된 후로 급격히 그녀에게 이끌리기 시작, 급기야 친구에게 돈을 빌려가면서까지 타키를 기적에서 빼내는 데 성공,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게 되었다. 코바야시 일가는 타키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고 가족들 모두가 마음에 들어했지만, 이후 타키는 학식도, 교양도 없는 자신은 타키지에게 짐이 될 뿐이라며 '코바야시 집안을 나오더라도 타락의 길은 걷지 않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을 감춘다.[10][11]
1928년 3월 15일에 일어난 '3.15 사건'[12] 으로 오타루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는 광경을 목격한 타키지는 이 사건을 소재로 소설 '1928년 3월 15일'을 집필, 문예지 《전기(戦旗)》[13] 를 통해 발표했다. 다만 이 작품으로 인해 타키지는 특별고등경찰의 분노를 사게 되고, 훗날 고문 끝에 살해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작중에서 노동자들이 대거 수감된 유치장의 모습과, 특히 고문수사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에(이는 타키지 자신도 여러 차례 경험한 일이기도 했다) 이것이 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특고)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 대체적인 해석이다.
1929년에 일어난 하쿠아이마루 사건과 지치부마루 조난 사건을 모티브로 북양어업의 가혹한 노동환경 속에서 혹사당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린 중편소설이자 대표작인 '게잡이 공선(蟹工船)'을 《전기》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일약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기수로 주목받게 된다. 이 작품은 신츠키지극단에 의해 연극으로도 만들어졌지만, 연극의 경우 원작을 지나치게 각색했다는 이유로 '북위 50도 이북'이라는 제목으로 개명되어 상연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게잡이 공선'의 작중 묘사[14] 때문에 특고에게 완전히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기 시작한다. '게잡이 공선'과 '1928년 3월 15일'을 비롯해 잡지 《중앙공론》[15] 에 발표한 소설 '부재지주[16] '가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은행에서 해고되었고[17] , 이후 도쿄에 상경했다.
도쿄에 상경한 뒤 일본 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의 서기장으로 선출되었고, 1930년 5월 23일 오사카에서 일본 공산당에 대한 자금 원조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일단 석방되었다. 그러나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체포되어 불경죄로 추가기소되었으며, 이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가 추가되어 도요타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1년 1월 22일에 보석으로 풀려난 이후부터 가나가와현의 나나사와 온천에서 숨어 지냈다.[18] 동년 10월에 공산당에 정식 입당, 11월에는 나라에 거주하고 있던 시가 나오야를 방문했다. 이듬해인 1932년 봄에 실시된 위험사상 일제 단속을 계기로 본격적인 지하활동을 시작, 이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생활자(党生活者)'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하활동을 계속하던 1933년 2월 20일, 아카사카의 가두연락 접선 장소에 나갔다가 대기중이던 특고의 스파이 미후네 토메키치에 의해 체포, 츠키지 경찰서 내에서 3시간 이상 자행된 가혹한 고문 끝에 결국 츠키지서 유치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29세.
특고는 당초에 타키지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공식 발표했으나, 시신의 상태가 워낙 참혹해서[19] 누가 보더라도 고문이 원인이라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이 발표를 믿는 사람은 사실상 없었다. 문학동맹에서 활동했던 동료 작가 에구치 칸의 증언에 따르면 타키지의 시신이 모친에게 인도된 시점에서는 이미 고문으로 인한 내장파열로 다량의 내출혈이 일어나 복부에 고인 혈액이 안에서 부패하기 시작했을 정도였다고 하며, 타키지의 남동생 산고도 특고의 발표에 대해 "심장이 안 좋다고? 대체 어딜 봐서 심장이 안 좋다는 거야? 우리 형은 전혀 심장이 나쁘지 않습니다. 만약 심장이 나빴으면 수영도 못 할 텐데, 우리 형은 어릴 때부터 수영을 잘 했단 말입니다.[20] " 라고 반박했다.
이 사건은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된 문인 학살 사건'으로 알려져 큰 파장이 일었으며, 중국의 작가 루쉰도 이 소식을 듣고 타키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발표했다. 또한 타키지가 생전에 스승처럼 받들었던 시가 나오야는 자신의 일기에서 타키지의 죽음에 대해 "코바야시 타키지가 2월 20일(내 생일)에 특고에게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경관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참으로 불쾌하다. 비록 단 한번 만났을 뿐이나 나는 코바야시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고 마음에 들어했건만, 암담한 심경이다."라며 특고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21] 뿐만 아니라 시가는 타키지의 어머니 세키 앞으로 조의금과 함께 다음과 같은 조문을 보내기도 했다.
사망 후 센다 코레야에 의해 데스마스크가 제작되었고[22] , 약 한 달이 지난 1933년 3월 15일에 노농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23]아드님의 서거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전도유망한 작가로서도 실로 아까운 일이며, 또 만난 것은 한 번이었습니다만 인간으로서도 친근감을 느꼈습니다.
그의 부자연스러운 죽음을 생각하니 암담할 따름입니다.
만났을 때도 타키지 군은 집에 돌아가지 않는 밤에는 어머님이 걱정하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고,
그 일을 떠올리니 더더욱 어머님의 심정이 헤아려집니다.
동봉한 것으로 꽃을 영정에 바쳐 주시기 바랍니다.
3. 기타
전반적으로 다소 어두운 작품의 분위기와는 달리 타키지 본인의 성격은 명랑하고 사교적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인기 가수였던 후지와라 요시에 흉내를 내면서 주변 사람들을 종종 웃기곤 했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그런가 하면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면도 있어서, 학생 시절에는 교사에게 토론을 걸었다가 '건방진 녀석'이라고 낙인이 찍힌 일도 있었다. 한 출판기념회에 참석했을 때는 책의 저자와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 결국 졌는데, 이게 어지간히도 분했던지 출판기념회에서 돌아와서는 친구를 붙잡고 펑펑 울기까지 했다고(...). 또한 감수성이 상당히 풍부했다고도 하는데, 이게 지나쳐서 감정과잉으로 뜬금없이 눈물을 흘린다던가 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고생하는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친구를 당황하게 한 일이 있었는가 하면, 타구치 타키가 편지를 남기고 가출한 날의 일기에는 타키가 어딘가에서 남들 눈치를 살피며 불안해하고 있지 않을까,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식으로 불안한 마음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는데, 정작 그 시각 타키는 불안해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자립하기 위해 한창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었다(...).
시가 나오야와 관련해서 이런 일화가 있다. 한번은 타키지가 시가를 동경한다는 것을 안 친구 하나가 장난으로 시가의 필적을 흉내내서 오타루에서 강연회를 열 예정이라는 가짜 엽서를 보냈고, 엽서를 받은 타키지는 매우 기뻐하면서 환영회 준비를 하는 한편 시가에게 강연회에 대한 감사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되돌아온 답장은 강연회를 한다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고, 그제서야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화가 난 나머지 그 친구와 한동안 절교상태까지 간 적이 있다고 한다.
시가 나오야는 원래 각종 사상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고 문학에 특정한 사상이 반영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입장이 아니었다.[24] 하지만 타키지의 초기 작품들을 의외로 많이 읽었고, 타키지가 자신의 소설에 대해 아직도 너무나 부족하다고 하면서 '시가의 입장에서 기탄 없이' 비평해 달라고 요청한 편지와 함께 보낸 '게잡이 공선'과 '1928년 3월 15일'[25] 에 대해서는 작품 내의 사실적인 묘사를 높이 평가하는 한편으로 문학이 사상의 선전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비평을 해 주기도 했다. 이 비평은 일견 타키지의 문학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키지는 시가의 비평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좋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31년에 시가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도 타키지는 시가가 이제까지 만났던 운동가들과 달리 자신의 사상을 설파한다거나 하는 언동을 전혀 하지 않고 순수하게 존경하는 작가로서 시가를 대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은 상당히 온화한 분위기였다고 한다.[26] 또한 타키지는 평소 바쁘게 지내면서 오래 앉아 글을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항상 연필과 종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틈틈이 글을 쓰는 습관이 있었는데, 시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매우 감탄했다고 한다. 후에 소설가 오자키 카즈오가 한동안 집필을 중단하고 있던 시기에 시가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시가가 타키지의 이야기를 하면서 '글을 쓰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못 쓸 것도 없지 않느냐'며 타키지를 본받으라는 듯한 뉘앙스의 언급을 했을 정도.
가족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고 한다. 지하활동을 하면서도 원고료는 늘 어머니에게 보냈고, 죽기 직전에도 동료 작가에게 어머니에게만은 꼭 자신의 죽음을 알려달라고 부탁했을 정도. 형제들에게도 자상한 형이자 오빠였으며, 특히 남동생 산고에게는 은행에서 받은 첫 월급의 거의 절반을 털어서 바이올린을 사 주었다. 타키지가 소설을 쓰는 옆에서 산고가 서투른 솜씨로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있을 때도 단 한 번도 시끄럽다고 한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빵 공장에서 일하면서 매일 아침 빵 반죽을 할 때도 "산고 손가락은 바이올리니스트 손가락이야"라며 절대로 일을 시키지 않았다. 다만 늘 자상하던 타키지도 딱 한 차례 산고를 크게 혼낸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산고가 바이올린 연습을 건성으로 하는 모습을 보고 제대로 하지 않을 바엔 아예 바이올린을 그만두라고 엄하게 꾸짖었다. 형이 처음으로 화를 내며 자신을 꾸짖는 모습에 놀란 산고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열심히 연습하게 되었고,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훗날 도쿄 교향악단에서 제1 바이올린 주자가 되었다.
타구치 타키에게 맨 처음 보낸 편지의 첫 문장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다(闇があるから光がある)'가 유명하다.
2008년에 일본에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갑자기 '게잡이 공선' 붐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이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는 비정규직과 워킹 푸어, 블랙기업이 만연하는 노동시장 문제 등이 작중에 등장하는 게잡이 공선 노동자들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신쵸샤에서 발행된 문고판[27] 의 경우는 50만 부 이상 판매되어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기도 했다.
출신지가 출신지다보니 작품에 홋카이도 방언[28] 이 자주 등장한다. 대표작인 게잡이 공선이나, 아예 홋카이도가 작중 배경인 '방설림', '부재지주', '전형기 사람들' 등이 그 대표적인 예.
작품 내에서 일본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에 대해서도 간간이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미완의 장편 '전형기 사람들'에서는 오타루에 살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직접 등장하는 부분이 있으며 관동 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도 짧게나마 나온다.
웹 게임 문호와 알케미스트에서도 캐릭터로 등장,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코바야시 타키지(문호와 알케미스트) 참조.[30]이듬해 가을, 연중행사인 '발화연습[29]
'시기가 다가왔다. 삼백 명 정도의 학생이 눈사태가 난 계단식 밭 위로 일제히 뛰어올라갔다. 그때 군사교련 교관으로부터 (육군소령이었다) 지령이 떨어졌다."약 일 킬로미터 전방에 불령한 조선인들이 나타나 시가지에 불을 붙이고 폭행을 저지르고 있다......"
모두 뛰어올라 가면서 서둘러 덜그럭거리며 강관을 열고 장전을 실시했는데, 갑자기 대여섯 명이 지령을 듣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 불령한 조선인이라고?!"
"맞아! 맞아!"
"인도적 차원의 문제야!"
평소부터 군사교련에 반대 입장이던 학생이 총 개머리판을 땅바닥에 꽂아 세웠다. 사사키와 친구들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 그런 모멸적인 지령에 움직이는 건 우리 학생들의 수치야! 그만둬! 그만둬!"
학생들은 모두 당황해서 웅성웅성 대오를 흩트려 버렸다. 모두에게는 관동대지진 때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퍼뜨려 조선인들을 학살했던 기억이 또렷했다. (후략)
- 《전형기 사람들》 中, 홋카이도 대학생들의 군사교련 반대 운동 장면에서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어머니(母)'는 어머니 세키의 시점에서 바라본 타키지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2017년에 '어머니 - 코바야시 타키지의 어머니 이야기(母 小林多喜二の母の物語)'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고, 시오야 슌[31] 이 타키지를 연기했다.[32]
4. 주요 작품
- 1928년 3월 15일(一九二八年三月十五日)
- 게공선(蟹工船)
- 부재지주(不在地主)[33]
- 공장 세포(工場細胞)
- 독방(独房)
- 전형기 사람들(転形期の人々)
- 방설림(防雪林)[34]
- 누마지리 마을(沼尻村)
- 지구 사람들(地区の人々)
- 당생활자(党生活者)[35]
[1] 현재의 오다테 시.[2] 위로 형이 있었으나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장남이나 마찬가지였다.[3] 오타루에서 지낸 시기가 길었기 때문에 간혹 오타루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출신지는 아키타현이 맞다.[4] 현재도 홋카이도에 있는 제과회사인 주식회사 미츠보시의 전신.[5] 현재의 오타루 상업고등학교.[6] 여기에는 가족들이 이주하기 전 큰아버지가 먼저 오타루로 데려와서 돌보고 있던 타키지의 형이 병으로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기 때문에, 밤늦도록 그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고 자칫 타키지까지 형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닌지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다.[7] 훗날 타키지가 시가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이 무렵부터 편지를 많이 보냈던 것을 기억한다는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8] 당시 타키지의 가족들이 일하던 미츠보시 빵집에는 이런 가혹한 노동 환경을 견디다 못해 도망쳐 나온 노동자들이 자주 찾아와 숨어 지냈고, 어머니 세키가 종종 이들에게 빵을 주면서 도망을 도와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9] 게다가 타키지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은행원으로 취직하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10] 타키의 가출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이 날 타키지는 눈이 빨갛게 부을 정도로 울면서 타키를 찾아 밤새도록 오타루 시내를 돌아다녔다고 한다.[11] 그 후 타구치 타키는 본인이 결심한 대로 평범한 일생을 보냈고, 2009년 6월 102세의 나이에 사망했다.[12] 특별고등경찰에 의해 실시된 공산주의자 대규모 검거 사태.[13] 1928년 5월부터 1931년 12월까지 간행. 프롤레타리아 문학 작품의 주요 발표처였다.[14] 소설 후반부에 천황에게 헌상할 게 통조림을 두고 한 어부가 "돌멩이라도 넣어 둬, 상관없어!"라고 하는 부분이 소위 '천황에 대한 불경'으로 간주되었다.[15] 1887년에 창간된 종합월간지로 현재도 발간되고 있다.[16] 1928년에 집필한 중편 '방설림'을 개작한 소설.[17] '부재지주'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은 오타루의 유명 대지주 이소노 스스무의 소작지에서 일어난 이소노 소작쟁의였는데, 이 이소노가 공교롭게도 홋카이도 척식은행의 주주였다. 이 때문에 '부재지주'가 발표되자마자 갑자기 은행 측에서 타키지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결국 해고로 이어졌다.[18] 타키지가 머물렀던 방이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19] 전신에 피멍이 든 것은 물론 오른손의 손가락이 전부 손등을 향해 반대로 꺾여 있었는데,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이렇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20] 어머니 세키의 회고에 따르면 타키지는 운동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었지만 수영만은 상당히 잘 했다고 한다.[21] 이 당시는 개인의 일기나 편지조차도 모두 특고의 검열 대상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이 한 문장 때문에 시가 자신도 불경죄로 걸려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22] 현재 오타루 문학관에 보존되어 있다.[23] 사망 직후에는 특고의 방해로 인해 공개적인 장례는 치르지 못한 채 약식으로 가족과 친지들만 참석해서 화장을 하는 데 그쳤었다.[24] 여기에는 당시의 학자와 노동운동가들이 시가의 자택을 찾아와서 사회주의를 거의 강요에 가깝게 설파하는 바람에 이들에게 염증이 난 상태였다는 것도 한 몫을 했다.[25] 당시 타키지는 '게잡이 공선'의 개정판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헌책방을 돌면서 초판본을 구해 시가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 초판본은 현재 일본근대문학관에 소장되어 있다.[26] 타키지 사후에 시가는 당시를 회상하며 쓴 글에서 "여기(나라)에 왔을 때도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면서 조금도 먼저 변명하거나 비판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을 대부분 긍정하고 있었다. 그 긍정이 내 입장에서의 긍정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훌륭한 인품이라고 느꼈고 어엿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때까지 갖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작가라는 이들에 대한 생각을 바꿔 준 사람이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27] 게잡이 공선과 당생활자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28] 토호쿠 북부 지역과 인접해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토호쿠벤과 거의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29] 실탄 없이 화약만 넣은 상태로 실시하는 사격 훈련.[30] 이 캐릭터가 공산당에서 발행하는 일간지 아카하타의 기사에서 소개된 일 때문에 일부 부녀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었다. 자세한 경위는 여기를 참조.[31] 인풍전대 허리케인저의 시나 요스케 역.[32] 어머니 세키 역의 배우는 테라지마 시노부.[33] '방설림'을 개작한 작품.[34] 1928년에 집필했으나 원고는 작가 사후인 1947년에 발견되었다.[35] 이론과실천 출판사에서 나온 타키지 선집에서는 '당 활동가'로 번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