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당(붕당)
1. 개요
인조반정 후 형성된 비공신 중심 청서의 실무 관료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2. 상세
『당의통략(黨議通略)』에 따르면, 인조조 말년 서인은 낙당(原黨)·원당·산당·한당(漢黨) 등으로 분화되었다. 형성된 이유는 소현세자 사망 뒤 동생인 봉림대군[1] 이 세자가 되고, 소현세자의 빈인 강빈이 역모에 연계되고 사사되는 과정에서 각자의 입장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한당의 유래는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한당의 한은 한강을 뜻하며 한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도 있다. 한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은 구성원들이 실무 관료진이자 역사적으로 왕실과 혼인관계도 맺었다. 대동법 등 국정 현안마다 명분보단 현실을 중요시하는 현실론자들이였다. 인조조 때는 김류가 중심이었으나, 김류가 인조 25년에 사망하면서 김육으로 넘어왔고, 대체적으론 효종 때의 명재상 김육과 그의 가족[2] , 그리고 역시 인척 신면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관료 지향적 성향이 매우 강한 집단이었다. 이후 산당과 함께 노론으로 이어진다.
한당은 산당보다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지만, 산당과 손을 잡으려고 하면서도 슬쩍 견제하려고도 했던 효종의 발탁에 한당이 정책은 일부 시행될 수 있었다. 특히, 산당은 김육과 적대관계였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한당 특유의 현실적인 대책들은 성리학 교조적인 산당이 반대했기 때문.[3] 김육과 적대관계였던 송시열은, 그 대가를 숙종 때 치르게 된다.
송시열은 남인을 몰아내려 애썼고, 한당이고 능력이 있으며 왕의 신임까지 있는 김육의 장남 김좌명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김좌명이 사망했고, 이를 알리 없는 김우명과 김우명의 조카이자 김좌명의 아들인 김석주는 송시열을 가문의 적이라 부르며 지속적으로 공격한다. 이들은 2차 예송 때 남인의 편을 들며 송시열을 꺾었고, 산당 역시 위축되었다. 산당과 남인의 대결에 한당은 한 발 빠져있었지만, 김석주는 지속적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고, 역전에 성공했다. 송시열의 지지를 얻은 것은 덤.
그러나, 김석주 사후 한당이 중심정을 잃고 뿔뿔이 흩어질 때 산당은 여전했고, 한당은 산당의 분화 때 노론에 가까운 성향을 보이며 합쳐졌다.
나무위키 조선의 붕당 틀에서는 청서에서 발전했다고 나왔으나 붕당의 성격만 보자면 공서에 더 가까웠다.
3. 주요 인물
[1] 즉 효종이다.[2] 장남 김좌명과 차남 김우명, 손자 김석주 등등[3] 지금와선 한당이 옳아보이지만, 당시의 관점으로도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조선은 양란 후 체계가 무너진 반대급부로 성리학 교조주의가 유행했다.[4] 영의정을 지낸 신흠의 손자이며, 선조(宣祖) 부마(왕의 사위) 신익성의 장남으로 왕실의 핏줄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