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주

 


金錫冑
1634년 ~ 16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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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
이 위엄 넘치는 얼굴을 보라!
1. 소개
2. 인생사
3. 평가와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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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청풍 김씨.
조선 숙종 초기 최강의 권력을 누렸던 인물. 권신이자 공작 정치의 달인.

2. 인생사


그는 1634년 한성부 회동(현 회현동)에서 청릉군(淸陵君) 김좌명과 신씨 부인[1] 사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육은 명재상으로 유명했고 아버지 또한 당대의 수재이자 우수한 행정 관료로 유명했다. [2] 이러한 가문의 기질을 잘 이어받은 것인지 그는 일찌감찌 명석함을 드러내 과거장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할아버지 김육은 어린 김석주를 '석아(錫兒)'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무식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정략과 문무겸비는 물론이고 글씨도 잘썼다.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할 정도였다니 글과 학문은 확실했을 듯.
일찍이 할아버지 김육이 대동법 확대를 둘러싸고 송시열 등의 산당과 대립한 것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같은 서인 계통임에도 주류인 산당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1674년 2차 예송논쟁이 터지자, 1년설을 주장하던 남인들과 뜻을 같이했고,[3][4] 결국 현종이 남인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산당 계열이 쓸려나갔지만 그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고 왕의 신임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그 해에 현종이 세상을 떠났지만...
현종의 뒤를 이어 14세의 숙종이 즉위하자 청남 - 탁남 연립 정권 내부에서 주요 외척이었던 그는 몇 안되는 서인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의 삼촌인 김우명은 3복이라 불리던 숙종의 5촌 당숙들이 남인과 쎄쎄쎄하며 잘 나가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서 제어하려 했다가 왕에게 '친족을 무고한 남' 소리까지 듣고 개망신을 당했지만 김석주 본인은 한동안 허적을 비롯한 남인, 그 중에서도 탁남 세력과 잘 지냈'''었'''다.
하지만 권력에 타성에 젖은 남인이 점차 부정부패를 일삼기 시작하자 김석주는 이들을 내쫒고 자신의 위치를 더 확고히 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야사에 의하면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가[5] 자객을 사주하여 김석주의 집 뜰에 보내놓고 허적의 소행이라고 모함을 하는 등 이간질을 했다고 하나 김석주가 그 정도에 속을 바보는 아니니 결국 자신의 의사였다고 봐야할 것이다.
남인들은 허적의 서자 허견이 유부녀를 납치하여 행패를 부리고 김우명의 첩을 폭행해 이빨을 부러뜨리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지름에도 오히려 피해자들을 협박하여 사건을 묻으려는 등 안하무인으로 굴었고 청남과 탁남은 조정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허구한 날 으르렁거려 숙종의 눈밖에 나고 만다. 결국 1680년 숙종은 급작스런 인사 교체를 단행한다.(경신환국) 일반적으로 허적이 왕의 허락도 없이 유악(천막)을 가져간 것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일단 실록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으며, 허적 본인도 매사에 신중한 성격이었던 것을 감안해 보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이 일이 있은 지 불과 며칠 후 정원로 등이 허견[6]과 복선군[7]이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을 함으로서 남인은 허적이나 윤휴같은 명망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사사됨으로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 때 김석주는 역모를 밝히는데 한 몫하여 공신 책봉을 받게 된다. 사실 정원로가 바로 김석주가 부리던 이중첩자였다. 그외에 김석주가 부리던 여러 정보원들이 대거 공신에 봉해졌다.
이무렵 청남과 탁남은 송시열의 죄를 고묘하고 안율하라는 주장을 일치단결하여 아뢰고 있었는데 덕분에 송시열의 목숨은 경각에 달린 상태였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김석주가 남인 정권을 몰아내주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자 송시열과 그의 제자 김수항 등은 모두 김석주를 최대한으로 높게 떠받들었다.
허나 김석주는 아직 남인이 남아 있다는 것에 불안은 느껴 김장생의 손자이자 처숙부인 훈련대장 김익훈 등과 연합해 남인 김환을 꾀어내어 남인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나 첫번째 시도는 그냥 허새, 이의, 권대운, 민암을 비롯한 대신들이 포함되었다는 허세에 넘어가서 허탕만 치다시피했고[8] 이에 열받은 김석주와 김익훈은 남인인 전익대남인의 중심 인물들이 역모를 일으킨다고 사건을 조작을 하려다가 전익대가 "쟤네들이 날더러 고변 안 하면 죽인다고 협박하고 증거 조작했어요!!"라고 실토하는 바람에 들통이 나고 만다. 이후 전익대는 유배 후 처형됐다.
이에 젊은 서인들이 김석주를 직접 까지는 못하고 대신에 상대적으로 만만한 김익훈을 맹렬히 비판했는데, 송시열은 "김익훈은 제 스승의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인데 못 도와줘서 미안하구만요."라고 우회적으로 김익훈에 대한 공격을 그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젊은 서인들의 어그로가 오히려 올라가서 송시열의 위신이 깎이고 박세채, 남구만, 윤증을 중심으로 소론이라는 새 당파가 분당되는 결과만 낳았다.
어쨌거나 김석주는 숙종을 거의 협박하다시피 해서 자신을 공격하던 오도일을 비롯한 젊은 서인들을 맹공하여 대관령 너머로 귀양보냈다. 사실 숙종은 대관령 안쪽인 김화로 귀양보내려 했지만 김석주가 왕의 말을 끊으며 거기 너무 가까우니 영동의 아홉 고을 중에 골라 보내라고 압박했고 왕은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걸로 김석주는 숙종의 눈밖에 난 듯했지만 이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1684년 세상을 떠난다. 향년 51세.

3. 평가와 후일담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가 죽었을 때 이렇게 평하였다.

청성부원군 김석주가 졸(卒)하였다. 김석주는 바로 명성왕후의 종부제(從父弟)인데, 침의(沈毅)하고 과감(果敢)하여 기국과 도량이 있었으나, 권모술수를 숭상하였다. 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여 대비에게 도움을 받아 이루었는데, 탁룡(濯龍)의 근친(近親)으로 청현(淸顯)한 자리에 있는 자는 오로지 김석주 한 사람뿐이므로, 드디어 차례를 밟지 아니하고 뛰어올라서 조정 정사에 참여해 들었다. 김석주가 본래 사(士)와 화목하지 못하여 갑인년의 번복(飜覆)에 혹은 몰래 알선한 바가 있음을 의심하였으나, 흉당(凶黨 : 남인)의 세력이 이루어지자, 김석주가 그 사이에 끼어 이미 서로 알력의 혐의로움이 없지 아니하였고, 이남(李柟)ㆍ허견(許堅) 등의 역모가 처음 싹틀 때에 김석주가 또 그 정상을 정탐해 얻어서 묵묵히 심기(心機)를 운용하며 은밀히 정탐을 일삼다가, 마침내 예단(睿斷)을 도와 흉얼(凶孼)을 소탕하니, 종사(宗社)를 보존한 공을 사류(士類)가 모두 인정하였다.

그러나 역적을 토벌하고 공을 논할 즈음에 김석주가 임의로 올리고 낮춘 것이 많이 있어서 청의(淸議)가 진실로 이미 이를 병통으로 여겼다. 또 김석주가 처음에는 비록 흉당을 제거하는 데 급급하여 한결 같이 정도로 나가지 못하였다 하나, 성공한 뒤에는 오로지 옛 자취를 일변시키고 물러가서 본분을 지켰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자기의 공을 과대(夸大)하여 조정의 권한을 장악하고, 유음(幽陰 : 어둡고 음험함)한 길과 밀고(密告)하는 문을 만들어 농간을 부리는 것이 이미 익숙해졌고, 수단이 더욱 교활해져 은연 중에 한편을 제거할 뜻이 있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똑똑하지만 권모술수를 잘 쓰고 교활하다는 것. 그 이덕일도 '천하의 경세가 김육에게서 어떻게 이런 후손이 나왔냐'라고 할 정도다. 하지만 이건 이덕일의 개인적 사견에 가깝다. 왜냐하면 김육 역시 대동법 실행을 위해 정치적 공격을 서슴지 않았던 것. 당시 대동법 반대 세력을 김육이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김육 항목에 자세히 나온다. 즉 오히려 김석주는 할아버지인 김육의 기질을 어느 정도는 물려받았다고 봐야한다. 그러나 김육은 사림 세력의 정치적 인정과 적을 만들지 않는 정치 활동, 탁월한 실무 능력에 기반한 왕의 절대적 신뢰가 있었지만 반대로 김석주는 적을 너무 많이 만든 것이 문제이기는 하다. 또한 김육의 경우 엄연히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정치적 생명을 걸고 싸운 것이지만, 김석주의 정치공세는 말 그대로 권력투쟁 이상으로 봐주기 어렵다는 점도 있다. 서인과 남인이 피를 흘리고 죽일 정도로 관계가 악화된 것도 이 사람의 책임이 크다. 물론 숙종의 비이성적인 정략과 송시열의 비타협적인 성향도 원인이지만 말 그대로 노골적인 공작 정치로 인해 역모 사건이 일어나 환국 이후에는 역모 사건이 일어나고 피의 보복으로 얼룩져 있고 서인도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등 자신은 군자 충신 상대는 역적 소인이라는 흑백논리가 일어났다. 왕에게 건전한 비판도 사라지고 무조건 예스맨하는 정치적 불균형을 초래하였다.
살아있을 땐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죽고나선 시련을 겪는데, 기사환국이 도래하자 공신의 칭호 및 관작이 추탈되었다.[9] 이 때 외아들 김도연[10]이 자살[11]하고 아내는 유배되는 등의 비극도 있었다. 그나마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복권되지만 남인들이 끈질긴 탄핵으로 '''부관참시될 뻔'''했지만 숙종이 끝까지 반대함으로서 면할 수 있었다.
여하간 숙종의 정치 행태를 미루어보건대 조금만 오래 살았더라면 그 자신도 환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제 명에 못살고 끔살당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죽고 난 뒤 '''불과 5년 뒤에''' 기사환국이 일어났고 권신이 되어간 김석주를 숙종도 고깝게 보고 있던 차에 김석주가 죽었으니, 박시백도 차라리 일찍 죽은게 김석주로서는 다행이었다고 평할 정도... 실제로 김석주와 손잡고 전횡하던 김익훈은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일흔의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국문장에 끌려나와 곤장을 맞다 죽었고 그가 부리던 정보원인 김환, 이회 등도 모조리 참수되었다.
거기다 원래 배향공신이었는데 출향됐다가 다시 배향[12]되는 등 죽어서도 굴곡진 운명을 겪었다.
참고로 김석주는 호포제 실시를 추진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역시 김육의 후손답다고 봐야...
여담인데 초상화가 굉장히 험악하게 생긴걸로 유명하다. 박시백도 만화같이 생겼다고 했을 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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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딸이다. 즉 김석주는 선조의 외증손자이다. 밑에도 나오지만 김석주의 외아들은 숙정공주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이는데, 숙정공주가 효종의 딸이므로 김석주의 아들은 자신의 9촌과 결혼한 것이다.[2] 김석주 본인과 조부 김육, 그리고 숙부 김우명의 초상화는 현존하는데 실록에도 '외모가 아름다웠다'고 기록된 부친 김좌명의 초상화는 남아 있지 않다.[3] 서인들은 9개월을 주장했다. 자세한 것은 2차 예송(갑인예송) 참고[4] 한편으로는 중립적으로 상황 중개 정도나 했다는 말도 있다.[5] 그의 동생이 유명한 대문장가 김만중으로 두 형제 모두 송시열의 추종자로 골수 서인이었다. 또한 김석주의 부인 이씨의 처외사촌이고 처외숙부인 김익훈의 조카이기도하다.[6] 허적의 유일한 아들. 서자이다.[7]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3남.[8] 허새가 일을 꾀하려 한건 사실이지만 권대운, 민암 등의 일은 사람들을 더 잘 설득하려고 꾸민 거짓말이었다.[9] 참고로 이 때 김익훈, 김환도 처형된다.[10] 숙정공주의 딸과 결혼했다. 이 사람도 우의정까지 지냈다.[11] 야사 중에서는 김도연에게 서인 귀신이 김석주 귀신 행세를 하고 나타나 가문을 파탄시켰다는 야사도 있다.[12] 다만, 이건 고종황제 때 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