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삼국지)
韓遂
(? ~ 215년)
1. 개요
후한#s-1 말 양주(涼州)의 군벌. 자는 문약(文約).
사실 본명은 한약(韓約)으로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조정의 수배를 피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2. 정사
소설인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한수와 마등의 관계는 유비 · 관우 · 장비 못지 않은 의형제로 여겨지는데, 실제로도 마등과는 의형제였다. 다만,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한수의 이미지는 의리보다는 야망에 가까운 인물로 재해석된다.
한수는 한 왕조에 2번씩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장본인인 반면 마등은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으로 한의 충신의 후예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의형제 결의를 맺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것이 이전 시대 삼국지 팬덤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정사 번역이 충분히 이루어진 후부터는 마등 역시 한수와 마찬가지로 반란자이며, 다만 조조에게 처형당한 점이나 유비에게 귀순한 아들 마초의 존재 등으로 인해 연의에서 미화되었다는 게 잘 알려져 있다. 반란 이전에는 의외로 하진 밑에서 일했는데, 이때 십상시를 몰아내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하진은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마등 문서에도 나오지만 마등처럼 한수 역시 원래는 반란을 일으킬 의도가 처음부터 있었는지가 불분명하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영제 중평 원년, 금성 사람 변장, 한수가 본디 서주(西州, 서쪽 지방이라는 뜻으로 유비가 있던 서주가 아니다)에서 저명했었는데, 도적들이 그들을 유혹하며 위협해, 군정(軍政)을 전임시키며, 주군을 공격하고 불사르게 했다.'고 한다. 또 삼국지집해의 편저자 노필이 살피길 '조조와 한수의 부친은 같은 해의 효렴이고, 또한 한수와는 동시기의 연배가 같은 친구이며 한수는 본래 세가(世家)의 자제인데, 어찌하여 기병하며 도적을 따랐겠는가? 아마도 국가가 혼란스럽고, 도적들이 협박하여서지, 처음에는 본디 품은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어쩌면 마등이나 한수나 시대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휩쓸린 인물들일지도 모른다.
184년에 서량의 강(羌)족이 반란을 일으켜 호(胡)족인 북궁백옥(北宮伯玉)과 이문후(李文侯)를 장군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변장(邊章)과 한수를 끌어들여 군사들을 지휘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변장ㆍ한수의 난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호강교위 영징(伶徵)과 금성태수 진의(陳懿)를 죽였다.
185년 8월에 조정에서는 사공(司空) 장온#s-2(張溫)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변장과 한수를 토벌하게 하였다. 당시 장온의 부장으로 참전했던 동탁#s-1이 반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자 한수는 변장과 함께 유중(楡中)으로 달아났다. 장온은 탕구장군 주신(周愼)에게 이들을 쫓게 했다. 당시 주신의 부장이었던 손견은 반란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자고 했으나 주신은 듣지 않고 유중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한수와 변장이 거꾸로 토벌군의 보급로를 차단했기 때문에 주신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수는 변장, 북궁백옥, 이문후를 모두 죽이고 187년 10만 명을 거느려 농서(隴西)를 공격했다. 농서태수 이상여(李相如)는 한수에게 항복했다. 양주자사 경비(耿鄙)는 한수를 토벌하려 했으나 적도(狄道)에서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었고, 한수는 한양(漢陽)태수 부섭(傅燮)과 싸워 그를 죽였다. 한수의 세력이 커지자 경비의 부장이던 마등은 한수에게 가담하였다. 한수와 마등은 적도 사람 왕국(王國)을 자신들의 주군으로 추대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조정은 황보숭을 보내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황보숭이 반란군을 상대로 연달아 승리하자, 한수는 왕국을 참수해서 몸통과 머리통을 각각 다른 곳에 버렸다. 이후 반란군의 인물들이 서로 다투면서 내부 분열로 무너졌다.
이후 조정에서 동탁이 권력을 잡았고 동탁에게 반발한 제후들이 연합군을 결성해 공격하자 동탁은 낙양을 내주고 장안으로 천도했다. 동탁은 자기에게 반발하는 세력들을 무찌르기 위해 한수와 마등에게 장안으로 와 도와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192년에 한수와 마등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동탁은 여포#s-1에게 살해당하고 이각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이각은 한수를 진서장군으로, 마등을 정서장군으로 임명하고 서량으로 돌려보냈다.
194년에 마등은 이각에게 식량을 지원해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려 했다. 한수는 마등과 이각을 중재하려 했으나, 나중에는 마등과 합세하여 장안을 공격했다. 조정 신하들은 한수와 마등에게 사람을 보내 장안성 안에서 내응하겠다고 전했다. 이각이 곽사, 번조(樊稠)와 조카 이리(李利)를 내보내 서량군을 공격하자 한수와 마등은 패배하여 서량으로 물러났다. 한수는 자신을 뒤쫓던 번조에게 동향인이라는 점을 들어 말로써 그를 설득시켰고, 번조는 곧 돌아갔다, 번조는 이 일로 이각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각은 서량군에게 내응하려던 자들을 죽이고 조정을 움직여 한수와 마등을 사면하는 조서를 내리게 하고 한수를 안항장군, 마등을 안적장군으로 삼았다.
208년에 한수는 의형제까지 맺었던 마등과 사이가 나빠져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종요를 보내 둘을 화해하게 하고, 마등을 위위(衛尉)로 임명하여 조정으로 불러들이고 맏아들 마초를 편장군에 임명했다. 마등은 떠나길 원치 않았으나 조정에서 사자를 보내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업(鄴)으로 갔다.
다만, 연의에서는 마등이 충신인 점을 부각하여 동작대 준공식에 참가하여 황규와 결탁하여 조조를 죽이려다가 처형 당하는 묘사로 부각된다. 이 이벤트는 코에이 시리즈 삼국지6, 삼국지8, 삼국지10, 삼국지 조조전 에서 등장한다.
209년에 옹주자사 한단상을 죽인 무위태수 장맹을 210년에 공격했고, 장맹이 거느린 관민들까지 한수에게 붙어 오히려 장맹을 공격하자 장맹은 자결했다.
211년에 조조가 종요와 하후연에게 군사를 주고 한중을 공격하게 했다. 이 때문에 익주와 서량에서는 불안해했는데, 특히 서량에서는 조조가 서량을 정벌하려는 것으로 여겼다. 한수는 마초 등 서량의 장수들과 함께 거병하여 10만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공격했다.
서량군은 장안을 우회 진군하여 동관을 점령했으나 동관 전투에서 조조는 한수와 마초의 사이를 벌어지게 하기 위해 한수와 만난 자리에서 옛 일만을 이야기할 뿐 전쟁에 관한 말은 하지 않았다. 마초가 한수에게 대화의 내용을 묻자, 한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마초는 한수가 거짓말한다고 여기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또 조조는 일부러 많은 부분을 고쳐 쓴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본 마초는 한수가 조조와 내통한 내용을 숨기려는 것으로 의심하여 서량군의 내부 결속이 무너졌다. 기회를 잡은 조조가 총공격해 오자, 한수와 마초는 대패하고 서량으로 달아났다. 조조는 서량군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212년 마등과 마등의 삼족, 한수의 일족을 죽였다.
214년에 현친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후연이 한수를 공격하자 한수는 달아났고 이후 하후연이 한수 휘하 군사들의 가족이 있는 장리(長離)의 강족을 공격하자 한수는 군사를 보내 강족을 돕게 했다. 그러나 하후연은 이들을 격파하고 흥국(興國)의 저(氐)족까지 항복시켰다.
당시 한수는 약양에 주둔하게 된 하후연과 20리 거리에서 대치했다. 마초와 마찬가지로 강족을 대거 포섭한 그는 일종의 연합군을 만들어 군세를 불린 상태였다. 당연히 우습게도 하후연을 격파한 '그 마초'도 이젠 없는 그의 전열은 지난날 조조에게 패한 근본적인 원인을 전혀 자각하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꼴이라 할 것이다. 하후연은 부장들이 앞으로의 전략에 대해 논의가 분분한 것을 보고 대번에 명쾌한 해답을 내려주었다.
한수의 군사가 정예하고 흥국(興國)의 성은 견고하여 공격해도 곧바로 이길 수는 없소. 차라리 장리(長離=장리천長離川)의 여러 강족들을 공격하는 것이 낫소. 장리의 여러 강족은 한수의 군대에 소속되어 있는데, (장리가 공격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분명 돌아가 그들의 근거지를 구원하려 할 것이오. 만약 한수가 강족을 버리고서 홀로 지키려 한다면 고립되는 것을 면할 수 없고, 장리를 구원하려 한다면 우리 군사가 야전으로 싸우게 되어 반드시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소.
이러한 예측은 정확했다. 하후연의 부대가 장리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접한 한수는 강족 동맹군과 함께 부랴부랴 회군했는데, 실상 최소한 병력의 규모만 놓고 보면 하후연보다는 한수의 군세가 더 컸다. 이를 목도한 부장들은 진영과 참호에 의지하여 수비를 하자고 하후연에게 건의했지만, 이번에도 대장, 하후연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한수군이 여러 강족 부락에서 모집한 연횡 체제임을 파악하여 그들을 불리한 전장으로 끌어낸 그는 교전을 늦출 생각이 없었다.
우리가 곳곳을 이동하며 싸운 게 천 리나 되는데, 지금 다시 군영과 참호를 만들다간 병사들이 피로해지니 다시는 용병을 할 수 없게 되는 바, 비록 도적들의 숫자가 많으나 그들과 대적하는 것은 쉬울 것이오.
삼국지 위서 제하후조전 하후연전
단 한 차례의 교전으로 한수군은 궤멸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한수의 대장기마저 하후연에게 넘어갔다 하니, 중심 부대까지 하후연군에게 휩쓸렸던 모양이다. 겨우 목숨을 건진 한수를 미롯한 몇몇 요인들은 멀리 서쪽으로 달아나 처박혔고, 흥국에서 버티던 저족의 왕 천만은 순식간에 밀어닥친 하후연을 이기지 못해 마초를 따라 한중으로 달아났다.
215년에 조조가 직접 저족 공격에 나선 후 항복시켜 상황이 불리해지자, 한수는 그해 여름에 서량의 장수 국연#s-2(麴演)과 장석(蔣石)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만 왕수전의 주석으로 인용된 위략 순고전에서는 도망가서 곽헌에게 의지했다가 병들어 죽었다고 한다. 이때가 70여 세였다고 한다.
한수에게 특이점이 있는데, 그렇게 많은 반란을 주도하고도 '''자신이 맹주가 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항상 다른 누군가를 내세워서 군을 일으켰다. 처음엔 북궁백옥, 이후로 왕국, 마등, 마초를 맹주 노릇을 맡게 하였다. 하지만 '''실권 혹은 주도권은 한수 본인이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궁백옥과 왕국은 한수에게 살해당하며, 마등이나 마초와 함께했을 때도 발언권이 외려 더 강했던 걸 보면 한수가 이들과 함께했을 때 지위와 위상이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 관련 2차 창작물에선 용맹한 군사를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한 양주 출신의 군벌이라서 그런지 군재라는 측면에서 좋은 평가 받는 경향이 있는 한수지만, 실제 역사상의 한수는 군재는 별로였지만, 자신보다 군재가 뛰어난 인물들을 들었다 놨다 할만큼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고[1] 자기 영역에서 명망과 위상이 드높은 인물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3. 연의
변장(邊章)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고 짧게 언급만 될 뿐 그 이후로는 쭉 언급이 없다가 갑자기 자신의 의형제의 아들인 마초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안을 치자 호응해서 같이 공격하나 가후의 이간계에 속아 대립하게 된다. 팔 하나를 마초에게 잘리고 조조에게 항복하면서 등장이 끝난다.
한수의 이미지는 연의나 정사나 크게 다른 점이 없다. 다만 위수 전투에서는 병법을 적절히 활용하여 조조를 위기에 내몰기도 하는 등, 미비한 활약이 추가된다.
여담으로 마초와 함께 조조를 치다 반간계에 넘어갈 때 정사에서처럼 조조와 잠시 대면하는데, 고향 친구라던 조조가 나이를 묻자 "올해 마흔이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문제는 이 시점이면 친구였다던 조조는 환갑을 코앞에 두고 있고 심지어 아들뻘인 마초조차 불혹이 가까운 나이이다. 실제 동관에서 조조에게 패하고 얼마 후 나이가 70에 가까웠다는 기록을 볼 때, 이 설정은 명백한 오류이다.
4. 미디어 믹스
- 한수/기타 창작물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