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청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일청은 1899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금리의 평민 가정에서 아버지 한구현(韓九鉉)과 어머니 용궁 전씨 참봉을 지낸 전홍우(全洪佑)의 딸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경성부 연희전문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26년 6.10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태극기와 격문을 배포했다가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는 이로 인해 연희전문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1927년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 집행위원이 되었고, 『과학운동(科學運動)』의 발간에도 참여하면서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을 통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고려공산당청년회(高麗共産黨靑年會) 경기도위원회 산하 학생 야체이카 책임자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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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4월, 한일청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조선운동(朝鮮運動)』의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다 5월에 귀국하여 예천에서 석유상점 및 조선중앙일보 예천지국을 경영하였다. 그러나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0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같은 달 18일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1931년 2월 21일 출옥한 그는 1932년 6월 경북 예천에서 박호철(朴鎬哲)·김동필(金東弼) 등과 함께 비밀결사 예천적색농민조합(醴泉赤色農民組合)을 조직하여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년 11월 동지들과 함께 김기석(金己石)의 집에서 모여 앞의 결사를 해체하고 무명(無名)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때 그는 총책임자 및 서무부를 담당했다. 이후 역(驛)그룹, 교원(敎員)그룹 등의 결성을 도모하는 등 결사의 확대강화에 노력하여 예천우편소 내 지부, 적색독서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1934년 예천농업보습학교(醴泉農業補習學校) 동맹휴교를 지도하다가 동년 3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5년 5월 10일 대구지방법원과 1936년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36년 10월 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냈고 8.15 광복 후에도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서울 종로에서 평범한 한의사로 살아가다가 1960년 11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한일청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010년 2월 22일 연세대학교는 한일청의 조카 한윤동(韓潤東)[5] 씨에게 한일청의 명예 졸업증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