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행궁
1. 개요
황해도 해주시 읍내에 위치하였던 조선시대의 행궁
2. 상세
고려시대에 해주에서 시험을 보기 위해서 지은 행궁으로 이후에도 행궁으로서의 지위가 유지되었다. 행궁이므로 자연스레 왕실의 건물로서 그 격을 높였고,이후 선조와 광해군이 이곳을 거쳐갔으며 정정옹주와 인조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2.1. 기록상의 모습
최초로 나오는 기록상의 모습은 이렇다.
태조실록 1권, 총서 71번째기사. 태조가 자유 자재로 활을 쏘다
신우(辛禑) 11년(1385) 을축, 태조가 우왕을 따라 해주(海州)에서 사냥하였다. 화살 만든 장인(匠人)이 새 화살[新矢]을 바치니, 태조가 지환(紙丸)을 쌓아 >놓은 벼[稻] 위에 질서 없이 꽂아 놓게 하고 이를 쏘아 모두 맞히고는, 좌우(左右)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짐승을 쏘면 마땅히 모두 등골을 맞힐 것이다."
하였다. 태조가 평상시에는 짐승을 쏘면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雁翅骨)을 맞혔었는데, 이날은 사슴 40마리를 쏘았는데 모두 그 등골을 바로 맞히니, 사람들이 그 신묘한 기술을 탄복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짐승을 쏠 적에, 짐승의 왼쪽에 있으면 짐승의 >오른쪽을 쏘아서, 짐승이 오른쪽으로부터 가로질러 달아나>서 왼쪽으로 나오면, 짐승의 왼쪽을 쏘는데, 태조는 짐승을 쫓아서 짐승이 비록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나오더라도 즉시 쏘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의 말을 돌려 꺾어서 채찍질하여 짐승으로 하여금 >왼쪽에서 바로 달아나게 하고서, 그제야 이를 쏘는데 또한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雁翅骨)을 맞히니, 이때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온갖 짐승을 쏘되, 반드시 쏠 때마다 그 오른쪽을 맞힌다."
하였다. 우왕이 일찍이 해주행궁(行宮)에서 여러 무신(武臣)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는데, 과녁[的]은 황색 종이로써 정곡(正鵠)을 만들어 크기가 주발만 하게 하고, 은(銀)으로써 작은 과녁[小的]을 만들어 그 복판에 붙였는데, 직경(直徑)이 겨우 2치[寸] 정도이었다. 50보(步) 밖에 설치했는데, 태조는 이를 쏘았으나 마침내 은 과녁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였다. 우왕은 즐거이 >구경하기를 촛불을 밝힐 때까지 계속하였으며, 태조에게 좋은 말 3필을 내려 주었다. 이두란(李豆蘭)이 태조에게 말하였다.
"세상에 드문 재주는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