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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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鷲號
KN-1(T-6F Texan floatplane)
1. 개요
1. 개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해군기술장교 조경연(1918~1991) 중위[1][2] 가 육상 비행기를 수상비행기로 개조하여 진해 해군 공작소 앞에서 시험 비행을 하는데 성공했다.
압록강함의 사관으로 복무하던 조경연 중위는 목포항에서 불시착되어 폭파 해체를 기다리던 미 공군의 T-6 텍산 1대를 발견했다. 곧장 함장 박옥규 중령에게 달려온 그는 그 텍산을 고쳐서 해군정찰기로 쓰자는 건의를 하였고, 이에 박 중령은 해군본부에 보고, 해군은 미 공군과 협상을 한 끝에 '교육용'으로 이 불시착 항공기를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도입에 성공하자 조 중위는 일제 강점기 당시 진해 항공창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기술사관 14명과 함께 텍산을 수리하고 개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개조 작업은 4월에 시작해서 8월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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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취호 제작중인 기술사관들.
해취호의 플로트는 진해 항공창에 처박혀 있던 것으로, 일제 A6M2-N 2식 수상전투기(연합군 코드네임 Rufe)의 부품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겨우 비행기를 마개조해서 수상기를 만들었으나 문제가 있었다. 당시 해군에 파일럿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테스트 파일럿은 곧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진해 비행장에 있던 미 공군 듀피 대위가 이 마개조 항공기에 관심을 가져 테스트 파일럿으로 자청했던 것. 시험 비행에 성공한 듀피 대위는 '성능이 훌륭하다'고 평가했다.[3] 여담으로 해취호의 측면 사진이 이베이에 올라온 적이 있는데, 듀피 대위가 찍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에 해군은 열흘 후 정식으로 해군에 소속시키고 해취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한국 해군 함대 유일한 항공기로 해상 경비, 업무 연락, 긴급한 인원 수송에 이용되었다.
해군은 공군에 파견나가 있던 조형익 소령과 박기수 대위를 다시 해군으로 복직시켜 해취호를 이용했다. 하지만 이 해취호는 만든지 3개월 만에 추락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해상 정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비구름을 만나 착륙을 하다 사고가 났던 것. 이 사고로 조 소령과 박 대위 모두 순직하였다.
[1] 해군이지만, 예전부터 비행기 덕후라서 고향에서 이미 오토바이 엔진을 얹은 목재 비행기 모형으로 비행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중령으로 예편.[2] 해취호를 제작한 이후 SX-1 서해호, SX-3 제해호를 제작했다. 하지만 당시 6.25 전쟁 직후의 빈약한 대한민국의 경제력으로 인해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서 운용하는 실정이었는데 그 결과 국산 항공기의 경우 군수 지원이 불가능하여 해군은 보유하던 항공기를 해경에 이관하였고, 항공기를 상실한 해군함대항공대도 결국 63년 1월에 해체되었다. 항공기 이관 후 그 운용에 필요한 상당수의 해군 항공대 인원이 경찰로 이동하였고, 한국 항공사에 작지만 거대한 족적을 남긴 조경연 중령도 군을 떠났다. 자세한건 SX-1 서해호, SX-3 제해호 참고.[3] 본국도 아닌 후진국에서 고철처리할 기체를 재생한 비행기에 테스트 파일럿을 자청했으니 용기가 비범한 사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