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 아메리칸 T-6 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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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American T-6 Texan
1. 제원 및 성능
2. 개요
3. 상세
4. 대한민국 공군 최초의 항공기
5. 매체에서
6. 둘러보기


1. 제원 및 성능


'''제원'''
'''T-6G'''
승무원
2명
탑승인원
0명
길이
8.84m
익폭
12.81m
기고
3.57m
익면적
23.60m²
자중
1,886kg
적재중량
2,548kg
최대이륙중량
2,620kg
엔진
1× 프랫 & 휘트니 사 R-1340-AN-1 와스프, 600hp
'''성능'''
최대속도
335㎞/h
순항속도
233㎞/h
상승고도
7,400m
항속시간
?.?hr
항속거리
1,175km
행동반경
???km
익하중
??.?kg/m²
추력중량비
0.?? / 0.??
'''무장'''
브라우닝 기관총 3정

2. 개요


노스 아메리칸 사에서 NA-16을 기초로 제작한 본격적인 2인승 훈련기이다. 1935년 1월에 초도 비행이 이루어졌고, 이후 미 육군 항공대영국 공군에 공급되었으며, 특히 30년대 후반 영국 공군파일럿 양성 계획의 중추로서 쓰이기도 했다.
2010년대 미 공군의 초등훈련기인 비치크래프트 T-6 텍산 2가 이 기체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3. 상세


하지만 그것으로 끝(...). 사실 유별날 거 없는 기체다. 30년대 중반에, 그것도 훈련기로 개발된 기체라 선회도나 속도 등 전투기로서 중요한 그 어느 부분도 좋다고 말할 수가 없다. 최대속도가 400km/h에도 미달했으니... 대전기에는 렌드리스영연방 국가에 열심히 공급되었으나 딱히 한 건 없다. 대전 중반기로만 넘어가도 미국이나 영연방이나 파일럿 양성용으로 구형 전투기를 써도 될 정도여서 T-6는 조종간 처음 잡아보는 초짜들이나 잠깐 모는 기종이 되었다.
그래도 이걸 어떻게든 전투용으로 팔아먹어 보겠다고 노스 아메리칸 사가 만든 것이 A-27 공격기로 미 육군 항공대가 채용하여 필리핀 주둔군이 운용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초기 필리핀 방어전에서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폭격받아 다 파괴당하고 그나마 이륙한 기체들도 제로센에게 학살당했다. 1941년 시점으로도 도저히 일선 전투에서 써먹을 수 없는 기체였던 것. 대전 중 교전 기록은 이게 전부다(...).
그래도 일단 만 대 이상 찍어냈고, 군소국가들을 중심으로 헐값에 공여되었다. 주로 중남미 국가들이 운용하여 주력기나 관측기로 운용하였다. 이후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용 관측기로 쓰였고 콩고민주공화국 초기 카탕가 반군이 공격기로 사용했다. 그리스 내전에서도 실전에 투입되었으나 유의미한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기체 재고가 많고 훈련기여서 안정성이 좋았기 때문에 개조가 용이하여 영화 도라 도라 도라 등에서 일본군 97식 함상공격기, 99식 함상폭격기, 0식 함상전투기의 대역을 맡기도 했다. #1 #2,#3
마지막까지 사용한 곳은 남아공 공군으로, 1995년에 퇴역시켰다.

4. 대한민국 공군 최초의 항공기


이 항공기는 대한민국 공군이 최초로 운용한 '''제대로 된 항공기'''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깊은 기체이다.
한국 공군은 건국 초기에 제대로 된 항공기가 없었다. 미군이 선심쓰듯 10기씩 원조해준 L-4, L-5는 연락 및 포병 관측용으로나 쓸 수 있는 비행기였고, 그 이외에는 Ki-9 훈련기 등 일본이 버리고 간 구닥다리 기체들[1] 몇 대로 공군이라고 자처하는 실정이었다. 아무리 건군 초기라지만 이런 기체로는 도저히 공군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유사시 제대로 된 항공작전도 불가능했다. 때문에 미군에 전투기 지원을 요청했으나, 한국이 '''북침'''할까 걱정한 미국은, 한국에 대한 항공기 지원은 커녕 돈주고 사는 것마저 불허했다.[2] 김정렬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공군이 발족할 때 김포 비행장에 퇴역이 결정된 B-26 폭격기 30대가 있었다. 미군에게 이 폭격기들을 달라고 사정했지만 미군은 이를 거부하고 몽땅 해체, '''고철로 매각'''해버렸다. 일설에 의하면 "우리가 상부로부터 지시받은 것은 절대로 이걸 당신들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3]
이에 한국은 공군 장병들과 국민들의 성금까지 긁어 모아, 캐나다에서 퇴역해 민간에 넘어간 T-6 10기를 구매했다. 이때 도입한 T-6는 기존 T-6를 기반으로 최소한의 대지공격능력을 부여한 AT-6 형식이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남선전기, 체신부, 전매청 등 당시 회사나 공공기업에서 단체 기부를 한 것으로 보인다. 기체 이외에도 비행기에 탑재하기 위한 M2 기관총 20정과 탄약 5000발, 1년분 부속품과 연료도 함께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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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5월 14일, 캐나다에서 들여온 전투기 명명식을 통해 각 기체에 교통, 전남, 전북, 전매, 충남, 체신, 국민, 농민, 남전, 경북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며, 드디어 제대로 된 공군의 기틀을 갖췄음을 선언하고, 김포 기지를 메인 베이스로 삼았다. 그리고 40일 뒤...
개전 직후, 공군은 모든 기체를 총투입해 북한의 침략에 맞섰으나, 워낙 항공기 숫자가 부족해[4] 김포 비행장이 공습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 와중에도 한국 공군 AT-6들은 서울 사수를 위해 의정부, 파주 축선에서 남하하는 적 지상군을 향해 공습을 가했다. 당시 병기창에서 시험 제작한 15kg 폭탄을 탑재했는데, 재고가 고작 274발이었다. 이를 개전 첫날 모두 소진할 정도로 폭탄 재고 및 폭장량 모두 빈약하였고, 여기에 제대로 된 표적 관측조차 되지 않아 제대로 된 타격은 주지 못했다. 육군 항공대의 L-4, L-5 관측기들조차 수류탄이나 박격포탄 등을 싣고 날아가 파일럿이나 후방 관측사들이 직접 손으로 던져서 공습을 가하는 판국이었다. 원래 L-4, L-5 관측기들이 적 지상군을 관측한 다음 포병이나 공군이 때리는 게 원칙이지만, 건군 초기라서 현대전에 대한 이해도 능력도 부족했던 한국군은 그러질 못했다. 애초에 때릴 포병조차 없었다. 당시 한국군이 가진 가장 강력한 화포는 공수부대용 경야포 뿐이었다.
6월 26일, 미국이 AT-6 파일럿들에게 F-51 머스탱 줄테니 모두 일본으로 보내라고 지시한다. 이걸로 한국군의 AT-6 운용이 끝난 줄 알았으나, 당시 신참 파일럿이었던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에 따르면 남아있던 L-4/5 파일럿들에게 김정렬 당시 총장이 다급히 기종전환을 지시했고, 김두만을 포함한 파일럿들은 '''1-2시간의 최소한의 비행'''만 해본 후 AT-6를 타고 출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AT-6는 이 시점에서 한참 전의 구닥다리 기체였고, 이후 미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모든 하늘을 장악하고 지상지원까지 해줌에 따라 이들도 차례대로 F-51로 기종전환을 하였다. 이후 전쟁 도중 공군 규모가 확대되고, 단순한 제공전투 및 지상지원 업무 외에 정찰작전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사천의 1전비 예하 제 2 정찰비행전대가 운용하였다. 1960년대 전량 퇴역했고, 이후의 훈련 임무는 머스탱이 전담하게 된다.
한국 공군뿐만 아니라 미 공군도 한국전쟁 당시 전방 정찰용 및 표적 관제용으로 T-6를 활용했는데, 대표적으로 제 502 전술항공통제전단과 제 6147 전술항공통제전단이 AT-6형의 텍산을 운용한 바 있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야말로 1950년대 한국군의 보배와도 같은 소중한 전력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2기의 기체가 아군의 손에 파손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특이하게 대한민국 해군에서 한때 이 기종을 수상기로 개조해서 사용한 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취호 항목을 참조.

5. 매체에서


  • 에어리어88 코믹스판 극초반 에피소드에서 등장한다. 지상공격 성적만 보자면 사망전까지는 거의 원탑. 해당 에피소드에서 A81이 핵공격으로 괴멸되고 때마침 메뚜기떼가 들이닥쳐 제트기들이 이륙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활주로를 개방해준 뒤 산화한다. 미키는 파일럿들의 어머니이며 전투기 파일럿들이 항공기를 사용한 전투에 관련한 거의 대부분을 배우는 기체라고 설명한다. 파일럿인 모리스는 제트기의 계기판이 복잡해서 탈 수 없다고 하지만 계기판의 복잡도가 제트기와 다를바 없어 보이거나 맞먹는 것 같다. 민감한 전자기기들에 대한 두려움[5]과 아날로그 기기의 익숙함으로 인해 제트기로 전향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로인해 A88의 거의 전원을 살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A88의 거의 대부분을 살렸다.

6. 둘러보기











[1] 그나마 신형기는 진주한 미군이 시험용으로 모조리 걷어간 뒤였다. 그리고 미군은 자신들에게 필요없는 일본군 장비와 시설은 일단 부숴놓고 봤다. 그 때문에 일본군이 남기고 간 시설과 무기를 활용하려 했던 사람들은 다 멘붕(Ki-84 하야테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조선항공협회의 실책도 있었다). 6.25 이후에도 미군은 한국에서 퇴역 폐기하는 군장비를 한국군에게 그대로 넘겨주는 일은 없이, 일단 해체하여 고철로 불하했다. 이것을 가져다 다시 이어붙여 사용한 것 중 하나가 시-발택시, 시-발버스. 결7호 작전으로 제주도에 있던 구, 신형 치하 전차 또한 불로 태우고 처리했다.[2] 당시 남한과 북한은 하루가 멀다하고 무력충돌 중이었다. 당시 38선 상황을 보면, 한쪽에서 육탄 5용사를 만들면 반대쪽에서 육탄 7용사를 만들고, 한쪽에서 고지를 점령하면 반대쪽에서는 포로를 처형하는 막장극을 찍고 있었다. 얼마나 심각했는지 미군이 한국군이 보유한 M3 105mm 경곡사포의 조준경을 따로 압수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전차든 항공기든 함부로 줄 수 없다고 판단할 수 밖에.[3] 제아무리 B-26이 전술 폭격기라고 해도, 말만 "전술"이지 폭격기라는 그 특성상 '''전략적인 수준의 군사행동'''도 가능해지기에(특히 동북아의 경우 B-26의 성능만으로도 서울에서 평양과 도쿄, 베이징까지 전략폭격을 뛰고도 남을 정도로 좁은 범위를 가졌기에 한국이 폭격기를 가지면 미국 입장에서는 북진통일을 부르짖는 이승만 정권이 언제 평양이나 베이징, 도쿄를 상대로 폭격을 날려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4] 북한군은 야크기만 100여 기에 가까웠다.[5]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전장에서 갑자기 삑사리가 날 수 있는 전자기기가 탐탁찮을 만 하다. 모리스에게 이 말을 들을 때만 해도 대충 건성으로 넘어갔던 카자마 신은 이후에 맥코이가 달아준 레이더(오버클럭으로 탐지 범위를 몇 배나 넓힐 수 있지만, 이후 한동안 사용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를 써보고 그 기분을 체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