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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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亨植
1909년 ~ 1942년 8월 3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


일제강점기 중국공산당 소속의 동북항일연군 제3군 1사 정치부 주임, 중국공산당 북만성위원회 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공산주의자.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허극(許克)이고, 이명으로 이희산(李熙山)·이삼룡(李三龍) 등이 있다.

2. 생애


1909년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현 구미시 임은동)에서 의병 허필(許苾)의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부모를 따라 만주 요녕성 통화현[1]으로 이주했다.[2]
1929년 흑룡강성 빈현 가판참[3]으로 이주해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30년 초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그 해 5월에 있던 '간도 5·30봉기'에 참가하였고 하얼빈 일본영사관 습격을 주도했다가 중국경찰에 체포되어 선양시 감옥에서 1년간 수감되었다.[4]
만주사변이 일어난 직후 출소한 그는 중국공산당 빈현 특별지부 위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1932년 1월에는 중국공산당의 만주성위 빈현 특별지부 선전원이 되었다. 1933년 봄 탕원현[5]에서 일본에 맞서싸울 유격대의 결성을 지원했으며, 10월 주하현[6]에서의 반일유격대 결성에 참여하였다.[7]
1934년 6월 28일 주하유격대가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로 재편성되자 제3단 정치위원으로 부임하였고 그 해 가을에 제1대대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1월 합동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사로 편성되자 제2단장이 되었고 3월에는 일본군의 춘기토벌에 대항해 유수하자 전투, 소량수하자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1936년 초 인민혁명군 제3군 제3사 정치위원이 되었고, 9월 중국공산당 북만임시성위원회 위원 겸 동북항일연군 제3군 1사 정치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37년 2월 동북항일연군 사령부에서 의동지구 여러 군단의 단결과 합동작전을 강화하기 위해 의동판사처를 결성하자, 사무처 주임이 되었다.
6월 항일연군 제9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같은 해 겨울에 항일연군 제9군 제3사 사장으로서 해륜현·영안현 등지에서 일본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39년 1월에는 중국공산당 북만성위원회 집행위원 겸 눈해지구대표단 부지휘, 용남지휘부 책임을 맡았고, 동북항일연군 제 3·4지대와 독립 제1·2사를 지휘하였다.[8]
4월 동북항일연군 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에 임명되었다. 1940년 봄 제3로군 제12지대 정치위원이 되었고 9월 풍락진 전투에 참전했다. 1941년 일본의 토벌에 맞서 항일연군 제9·12지대에서 유격활동을 계속했다. 1942년 8월 3일 북만주 경성현(慶城縣) 청봉령(靑峰嶺)[9]에서 전사했다.[10]

[1] 현 중국 지린성 퉁화(通化)시.[2] 허형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3] 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빈현 빈안(賓安)진.[4] 허형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5] 현 중국 헤이룽장성 자무쓰시 탕위안현.[6] 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상즈(尙志)시.[7] 허형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8] 허형식-세계한민족문화대전[9] 현 중국 헤이룽장성 쑤이화(綏化)시 칭안(慶安)현 따뤄(大羅)진 칭송링(靑松嶺).#[10] 허형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