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키 리타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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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kki Ritavuori. 1880년 3월 23일-1922년 2월 14일.
핀란드의 법률가, 정치인. 국민진보당 당원으로, 초대 대통령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의 측근이었고 내무장관을 역임했다.
원래 스웨덴계로 성이 리드만(Rydman)이었으나 페노마니아들이 으레 그랬듯이 핀란드식으로 창씨를 했다. 1907년 헌법위원회(다른 나라의 헌법재판소에 해당하는 핀란드 의회 산하 상임위원회) 서기관으로 정치경력을 시작했고, 1914년 투르쿠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핀란드 내전이 우파의 승리로 끝나고 핀란드 왕국이 수립되었으나, 독일 제국이 망하면서 다 없던 일이 되었다. 이 때 신생 핀란드가 왕국이 될지 공화국이 될지 문제로 정쟁이 벌어져 몇 달 간 국가가 마비되었다. 리타부오리는 공화파로서 스톨베리가 정초한 공화국 헌법을 헌법위원회를 통해 상정시킴으로써 핀란드를 공화국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정치적 스승이었던 스톨베리와 마찬가지로 리타부오리는 헌법주의, 법치주의, 사회개혁을 추구했다. 핀란드 내전 이후 대통령이 된 스톨베리는 포로수용소에서 학대를 당하던 적군 포로들에 대한 대사면을 발표했고, 리타부오리는 그 실무 책임자가 되었다. 1921년 겨울 동카리알라(러시아령 카렐리야)에서 핀인과 동계인 카리알라인들이 핀란드와 합방하자는 봉기가 일어났다. 내무장관이었던 리타부오리는 사태 확대를 막으라는 스톨베리 대통령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여, 국경경비대를 동원해 핀인들이 동카리알라로 의용병을 가는 것을 차단했다. 이런 활동들로 인해 리타부오리는 우익들에게 극심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1922년 2월 14일, 자택 앞에서 에른스트 탄데펠트라는 스웨덴계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탄데펠트는 단독범행을 주장하여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정신병자 행세를 해서 노역 12년형으로 감형이 확정되자 배후에 군부 내 사조직이 있었음을 실토했다.
리타부오리는 핀란드 파시즘 최초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1] 1927년부터 1930년까지 3년간 핀란드 사정감독원[2]이 리타부오리 암살 사건을 재수사했지만 당시는 파시즘이 더욱 악화되어 라푸아 운동 같은 가시적 정치세력으로 대두하던 시국이라 더더욱 수사가 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리타부오리는 암살당했을 때 향년 불과 41세로 한창 나이였다. 스톨베리의 후계자로 촉망받던 리버럴 정치인이었던 그가 허무하게 죽으면서 진보당은 이후 약세를 면치 못한다. 새로운 차기주자로 떠오른 리스토 뤼티는 반공적 시장자유주의자였다. 이후 뤼티 개인은 총리, 대통령을 거치며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했지만 정작 진보당의 당세는 계속 쪼그라들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농본주의 정당이었던 농업동맹이 자유주의 의제를 흡수해 중도진영의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1] 물론 핀란드 내전 때 백군이 적군에 대해 벌인 반공학살도 우생학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핀란드 백군은 여러모로 급진우익(파시즘)보다는 정통우익(보수주의)에 가까웠다.[2] 북유럽 국가들에 있는 감사원 비슷한 기관인데 행정부가 아니라 사법부에 속하여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보장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