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토 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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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Risto Heikki Ryti
리스토 뤼티
'''
'''본명'''
'''리스토 헤이키 뤼티'''
'''출생'''
1889년 2월 3일 핀란드 대공국 사타쿤타 후이티넨
'''사망'''
1956년 10월 25일 핀란드
'''국적'''
핀란드 [image]
'''직업'''
정치인
1. 개요
2. 생애
2.1. 초기생애
2.2. 젊은 정치거물
2.3. 전시총리
2.4. 전시대통령
2.5. 희생양
3. 평가
4. 기타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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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핀란드의 정치인. 제14대 총리, 제5대 공화국 대통령, 총리로서 겨울전쟁을, 대통령으로서 계속전쟁을 보냈다. 그리고 전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

2. 생애



2.1. 초기생애


핀란드 남서부 사타쿤타의 소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뤼티의 유년기 즈음에는 살림이 펴서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었고 1906년 헬싱키 대학교에 입학, 법학을 전공했다. 190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향해 변호사를 개업했다. 당시 핀란드 제일의 갑부인 알프레드 코르델린을 알게 되어 그의 친구이자 변호사가 되었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로 유학을 갔다가 1차대전이 발발하자 귀국했다.
1차대전 개전 때부터 핀란드 독립 때까지 5년여간 뤼티와 코르델린은 더욱 밀접해졌다. 하지만 1917년 11월 7일, 코르델린의 49세 생일 잔치 도중 볼셰비키 성향의 러시아 선원들이 저택을 습격했다. 뤼티 부부는 죽을 뻔 했고 코르델린은 납치당한 뒤 살해당했다. 핀란드 내전 때 뤼티는 적군이 장악한 헬싱키 지하에서 숨어 지냈는데, 남동생이 백군에 가담했다가 전사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뤼티는 좌익을 혐오하게 되었다.

2.2. 젊은 정치거물


내전 이후인 1919년 국민진보당에 입당해 의회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자당의 지도자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스톨베리의 퇴임 이후 극우의 준동으로 국민진보당은 꾸준히 세가 줄어들었지만, 뤼티는 재무장관, 국립은행 총재를 거치며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 경제관료로 행세하면서 혼자 승승장구했다. 이것은 뤼티의 처세술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좌파 혐오가 진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뤼티는 1922년 스톨베리의 내전기 적군 참여자 대사면에도 반대했다.
1925년, 스톨베리가 연임을 포기하자 인기가 높아진 뤼티가 제2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불과 35세. 2차 투표까지는 1위였지만 3차 결선투표에서 스웨덴인당농업동맹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를 지지하면서 낙선했다. 대선에서 낙선한 뤼티는 정계에서 일시 은퇴하여 막후 인물이 되었다.
뤼티의 성향은 말하자면 고전자유주의, 정통 시장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친영미파였고, 영국을 따라 핀란드 마르카를 금태환화폐로 만들고자 했다.[1] 뤼티는 실업자 구제와 빈민구호를 반대했고, 기업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동시에 국가의 부는 국민 모두에게 돌아가야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2.3. 전시총리


뤼티는 사회민주당 주석 배이뇌 탄네르[2], 그리고 농업동맹의 대통령 퀴외스티 칼리오와 신뢰관계를 구축했다. 1939년 가을 총리직을 제안받고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11월 30일 겨울전쟁이 터지면서 받아들여 12월 1일 취임했다.
소련은 오토 빌레 쿠시넨을 수반으로 내세워 핀란드 민주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우고 뤼티 내각과는 대화창구를 닫아 버렸다. 이듬해 1월까지 핀란드군은 결사적으로 분전하여 총체적인 전술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외교적 협상의 여지를 마련했다. 결국 소련은 쿠시넨 괴뢰정부를 버리고 스웨덴을 통해 핀란드와 협상을 모색했다. 소련의 날강도 같은 요구에 반대하는 각료가 없지 않았지만 뤼티와 탄네르는 이 전쟁은 빨리 끝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각료들을 설득해 3월 13일 모스크바 평화조약에 조인했다.
전쟁의 결과 핀란드는 영토의 5분의 1을 뜯겼고, 거기 살던 카리알라인 4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이런 참담한 결과에 충격을 받은 칼리오 대통령은 8월 뇌졸중을 일으켜 쓰러지고, 총리 뤼티와 군부의 만네르헤임, 그리고 외무장관 탄네르가 국무를 도맡았다. 칼리오는 대통령직 조기 사임 의향을 밝혔다. 카리알라 난민 수용문제 때문에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도 치르지 못하자 수정헌법을 통과시켜 다음 선거에서는 의회의원들이 선거인단이 되었다. 뤼티는 평화조약 주도자로서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여겨졌고, 간접선거 결과 300표 중 288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1940년 12월 19일 칼리오 대통령이 심장발작으로 사망하면서 뤼티는 예정보다 일찍 대통령직에 오르게 되었다.

2.4. 전시대통령


핀란드는 겨울전쟁 때는 스웨덴에, 겨울전쟁 이후로는 나치 독일에 의존적이 되었는데, 친영파였던 뤼티에게는 마뜩치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발트해가 독일과 소련의 호수가 된 상황에서 영국과의 교역로를 잃은 핀란드는 독일이 손을 내밀어오자 다른 대안이 없었다.
1940년 8월, 뤼티는 독일과의 비밀 군사협력에 동의했다. 이때만 해도 독일과 싸우던 서방 연합국마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경우 소련이 독일을 막아내지 못하리라 전망했었다. 뤼티 역시 그런 전망 하에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경우 겨울전쟁 때 잃은 땅을 회복할 가능성을 기대했다.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핀란드는 며칠간 형식적 중립을 취하다가 소련이 공습을 하자 소련에 선전포고했다. 영국은 핀란드를 추축국으로 규정하고 핀란드에 선전포고했다.
핀란드군은 겨울전쟁 때 빼앗긴 영토를 재확보할 뿐 아니라 원래 소련 땅이었던 동카리알라까지 정복해 군정청을 설립했다. 탄네르와 사민당은 동카리알라 공격에 반대했지만 뤼티는 탄네르를 어찌어찌 달래서 사민당의 내각 사퇴를 막았다.[3]
원래 뤼티는 칼리오가 다 못 채운 임기, 즉 1943년까지만 대통령을 지내기로 되어 있었지만 전쟁통에 차기 선거를 준비할 수 없자 1937년 다시 수정헌법을 통과시켜 뤼티가 재선출되었다. 1942년 겨울을 꺾으면서 뤼티와 만네르헤임은 독일이 승리할 가능성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지만 이미 전쟁을 무르기에는 너무 늦었다.
1943년부터 핀란드는 독일의 망조를 눈치채고 손절매를 준비했다. 뤼티는 국민연합당 총재 에드빈 링코미에스와 협상하여 링코미에스 내각을 출범시켰고, 새 내각에서 파시즘 정당 애국인민운동은 강판되었다. 1944년 6월 9일, 소련의 대규모 반격(비보르크-페트로자보드스크 공세)가 개시되었고 6월 20일에는 핀란드 제2의 대도시 비푸리가 소련군의 손에 떨어졌다.
식량과 무기 탄약이 모두 떨어지며 상황이 악화일로였던 핀란드는 스웨덴을 통해 소련과 협상하려 했지만 소련은 무조건 항복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뤼티와 탄네르는 무조건 항복이라도 해야 한다고 했지만 만네르헤임과 링코미에스는 반대했다. 같은 때 독일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예고도 없이 핀란드로 찾아왔다. 리벤트로프는 군사원조를 약속하며 소련과 싸움을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이미 독일에 망조가 든 상황에서 뤼티는 결정권을 의회로 떠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만네르헤임은 뤼티 개인 명의로 리벤트로프와 합의하기를 종용했고, 뤼티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지원을 받은 핀란드군은 소련군을 탈리이한탈라 전투에서 막아내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2.5. 희생양


7월 중순 전선이 교착되면서 뤼티는 건강을 비롯해 여러 이유를 내세워 사임했다. 핀란드 의회는 만네르헤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특별법을 제정해 만네르헤임이 차기 대통령이 되었다. 핀란드는 계속전쟁 때 확보한 영토를 모두 포기하는 대가로 소련과 단독 강화했다. 독일군은 노르웨이 방면으로 후퇴하면서 핀란드군과 교전을 벌이고 민간인을 살상했다(라플란드 전쟁).
대통령직을 사임한 뤼티는 국립은행 총재직으로 돌아갔다. 1945년 봄, 소련은 핀란드에 전범재판을 요구했다.[4] 피고는 뤼티, 탄네르, 링코미에스 등 사실상 만네르헤임을 제외한 전시 지도부 전부였다. 핀란드인들은 이 전쟁이 소련의 선제공격으로 일어난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것을 승자의 정의로 여기고 매우 못마땅해했다. 자연히 희생양으로 지목된 뤼티의 평판은 더욱 높아졌다.
핀란드 헌법은 소급입법을 금지하고 있으나, 소련의 압력으로 수정헌법을 통과시키면서 억지로 규정을 만들어 전범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나마 국내법으로 재판을 받은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뤼티는 형기가 가장 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옥중에서 위암에 걸렸다. 1949년 핀란드 "전범"들은 모두 가석방되었다. 뤼티는 석방되자마자 병원으로 실려갔다. 새 대통령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는 뤼티 등을 모두 사면했다. 사면된 뤼티는 공직에 복귀하지 않았고 1956년 사망했다. 향년 67세.[5]

3. 평가


안습의 핀란드 근대사에서 유독 안습한 인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사랑한 친영미파였지만 시대는 그의 뜻과 반대로 폭주했고 전쟁범죄자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게 되었다. 어쨌든 전쟁 중 총리와 대통령으로서 중심을 잡은 공로가 있기에 YLE의 위대한 핀란드인에서 만네르헤임 다음의 2위에 랭크되었다. 하지만 뤼티도 처음에는 책임을 의회에 떠넘기고 싶어했던 것을 보면 자의로 희생양이 된 건 아닌 것 같다(...). 핀란드군은 사실상 만네르헤임의 사병이었고[6] 그런 만네르헤임이 뤼티에게 희생양이 되라고 등을 떠밀었으니...
1994년 의회 의사당 옆에 조각상이 제막되었다.

4. 기타


  • 프리메이슨이었다. 전범재판으로 감옥에 간 뒤 전과자는 회원이 될 수 없다는 프리메이슨 회칙에 따라 제명되었다.
  • 신흥종교인 신지학 협회를 믿었다. 아서 코난 도일 등이 그랬듯 근대의 많은 명망가들이 신비주의에 심취했는데[7] 뤼티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 역대 핀란드 대통령 중 유일하게 군통수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겨울전쟁 때 칼리오 대통령에게 통수권을 이양받은 만네르헤임이 겨울전쟁 종전 뒤에도 통수권을 반납하지 않았기 때문. 이후 만네르헤임이 뤼티의 후임 대통령이 되면서 통수권은 유야무야 대통령에게 돌아왔다.

5. 둘러보기




[1] 하지만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영국과 핀란드는 모두 금태환제를 포기한다.[2] 사민당 당내 우파의 거두로 내전 이후 사민당을 개량주의 정당으로 변모시켰다.[3] 사민당은 계속전쟁 개전 전부터 이 전쟁 문제로 크게 분열이 일어난 상태였다. 전쟁자체를 반대한 당내 좌파는 결국 전후 탈당하여 합법화된 공산당과 함께 인민민주동맹을 설립한다.[4] 계속전쟁독소전쟁과 마찬가지 수준의 침략전쟁으로 규정한 것이다.[5] 마찬가지로 전시대통령이었던 칼리오도 67세로 죽었다. 그들보다 나이가 많던 스톨베리, 스빈후부드, 파시키비는 모두 80세 넘게 살았다.[6] 만네르헤임은 겨울전쟁이 끝난 뒤에도 대통령이 될 때까지 군통수권을 대통령에게 반납하지 않았다![7] 심지어 신지학 협회 신자들 중엔 구한말의 개화운동가인 서광범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