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캐번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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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Cavendish
1731년 10월 10일 ~ 1810년 2월 24일
영국의 화학자. 하지만 화학자로서보다는 '''중력 상수의 값을 실험실에서 측정'''한 물리학자로 더 유명하다. 어차피 물리학과 화학 구분은 100여 년은 더 지나서야 태어나는 마이클 패러데이 시기에 생긴 것이기도 하다.
18세기의 평균 수명을 훌쩍 넘긴 79세까지 살았으며, 할아버지는 데번셔 공작[1] 에 부자였고, 외할아버지는 해군 사령관이던 켄트 공작이었는데, 외삼촌이 후손을 남기지 않고 일찍 죽어서 외갓집 재산의 상당량을 이어받았다. 작위도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켄트 공작 작위는 딸이나 사위에게 상속되지 않아서 외조부의 죽음으로 단절되었다. 그리고 데번셔 공작 작위를 받은 사람은 헨리 캐번디시의 큰아버지이고, 외조부의 재산은 이모들과 나누어서 분배받았다.
즉, 헨리 캐번디시는 '''친가와 외가 모두 공작위를 보유하고 있는 대귀족 집안 출신에, 6개의 성과 8개의 별장을 보유했고, 재산이 수조 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막대한 유산 덕에 돈이 넘쳐날 정도로 부자라서 거액의 돈이나 비싼 선물을 지인들에게 거리낌없이 주기 일쑤였고, 그의 예금을 맡고 있던 은행에서 너무 큰 돈을 예치하고만 있기가 미안해서 예금의 일부를 투자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했으나, 그는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하면서 도리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내성적인 성격과 심한 여성공포증 탓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어느 정도로 심했냐면, 하녀들이 자신의 방에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마주치지 않게끔 하녀들이 다니는 계단을 따로 만들었고 모든 의사소통을 쪽지로 처리했다. 더욱이 어느 하녀가 자기 얼굴을 보자 바로 해고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여성을 싫어하고 남성들을 좋아했느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남자들도 자기한테 가까이 다가오는 걸 싫어해서 오로지 은둔형 폐인으로 화학연구에 전념했다. 한번은 오스트리아에서 그의 추종자가 그를 만난 감격을 나타내자 그대로 도주. 그에게 연구 결과를 인정받으려면 근처에서 아무도 없는 척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려야 했을 정도다. 그래봤자 대부분 도주했다고 한다. 심지어 캐번디시가 초상화 그릴 때 화가를 만나는 것조차도 부끄러워했다. 결국 화가는 어쩔 수 없이 대충 몸만 스케치하고 얼굴은 기억해 두었다가 집에 가서 따로 그렸다는 얘기가 있다. 그래서 그 초상화도 캐번디시가 옆으로 슬쩍 얼굴을 돌린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위에서 두 번째 초상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그가 자폐증이었다는 주장도 있고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라는 분석도 있다.
라부아지에와 마찬가지로 같은 시대에 산 엄청난 부자인 화학자이다. 화학사에 큰 공로를 세웠다. 한편, 동시대에 살던 진보적인 화학자 프리스틀리가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다가 왕당파에게 죽을 뻔해 미국으로 달아날 때 그 모든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한 것도 캐번디시였다. 이념이 달라도 같은 화학자이기에 그를 도왔다고 한다.
더불어 라부아지에를 살리기 위해 프랑스 혁명정부에 막대한 돈을 지불하겠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정부가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를 영국으로 와서 살게 할 것이고 그 모든 비용은 자신이 부담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거부당하고 라부아지에는 결국 참수당하고 말았다. 캐번디시는 정치적인 부분엔 무관심했고 단지 같은 화학자라는 동료 의식으로 과학자들을 도왔다는 게 정설이다. 그의 생활을 보면 이해가 갈 듯.
캐번디시의 가장 유명한 업적 중 하나는 지구의 질량을 계산한 것이다. 1797년에서 1798년 동안 이루어진 이 실험은 당시로써는 굉장히 정밀하고 섬세한 조건이 요구되었었고[2] , 이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집안에 두께 60cm짜리 헛간을 지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계산된 지구의 질량은 장장 97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최근의 결과와도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3] 그리고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대기 표본을 채취한 최초의 과학자이기도 하다.
다만 그의 성격은 과학사에 있어선 좋지 않았는데, 그는 물이 산소와 수소로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각종 원소들은 물론 쿨롱 법칙과 옴의 법칙 등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를 안 해서 그 영광을 각각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여러 과학자들이 가져갔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그가 죽은 뒤에 책상서랍을 뒤지니 평생에 걸쳐 연구해온 자료들이 꽁꽁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4][5]
그가 그런 데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는 건 그의 성격을 볼 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히 그의 자폐 스펙트럼 설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먼저 발견해놓고 발표를 안 한 건 일반인 입장에선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 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과학사에 이름을 남긴 건 놀라운 일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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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Cavendish
1731년 10월 10일 ~ 1810년 2월 24일
1. 소개
영국의 화학자. 하지만 화학자로서보다는 '''중력 상수의 값을 실험실에서 측정'''한 물리학자로 더 유명하다. 어차피 물리학과 화학 구분은 100여 년은 더 지나서야 태어나는 마이클 패러데이 시기에 생긴 것이기도 하다.
2. 생애와 업적
18세기의 평균 수명을 훌쩍 넘긴 79세까지 살았으며, 할아버지는 데번셔 공작[1] 에 부자였고, 외할아버지는 해군 사령관이던 켄트 공작이었는데, 외삼촌이 후손을 남기지 않고 일찍 죽어서 외갓집 재산의 상당량을 이어받았다. 작위도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켄트 공작 작위는 딸이나 사위에게 상속되지 않아서 외조부의 죽음으로 단절되었다. 그리고 데번셔 공작 작위를 받은 사람은 헨리 캐번디시의 큰아버지이고, 외조부의 재산은 이모들과 나누어서 분배받았다.
즉, 헨리 캐번디시는 '''친가와 외가 모두 공작위를 보유하고 있는 대귀족 집안 출신에, 6개의 성과 8개의 별장을 보유했고, 재산이 수조 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막대한 유산 덕에 돈이 넘쳐날 정도로 부자라서 거액의 돈이나 비싼 선물을 지인들에게 거리낌없이 주기 일쑤였고, 그의 예금을 맡고 있던 은행에서 너무 큰 돈을 예치하고만 있기가 미안해서 예금의 일부를 투자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했으나, 그는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하면서 도리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내성적인 성격과 심한 여성공포증 탓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어느 정도로 심했냐면, 하녀들이 자신의 방에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마주치지 않게끔 하녀들이 다니는 계단을 따로 만들었고 모든 의사소통을 쪽지로 처리했다. 더욱이 어느 하녀가 자기 얼굴을 보자 바로 해고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여성을 싫어하고 남성들을 좋아했느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남자들도 자기한테 가까이 다가오는 걸 싫어해서 오로지 은둔형 폐인으로 화학연구에 전념했다. 한번은 오스트리아에서 그의 추종자가 그를 만난 감격을 나타내자 그대로 도주. 그에게 연구 결과를 인정받으려면 근처에서 아무도 없는 척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려야 했을 정도다. 그래봤자 대부분 도주했다고 한다. 심지어 캐번디시가 초상화 그릴 때 화가를 만나는 것조차도 부끄러워했다. 결국 화가는 어쩔 수 없이 대충 몸만 스케치하고 얼굴은 기억해 두었다가 집에 가서 따로 그렸다는 얘기가 있다. 그래서 그 초상화도 캐번디시가 옆으로 슬쩍 얼굴을 돌린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위에서 두 번째 초상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그가 자폐증이었다는 주장도 있고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라는 분석도 있다.
라부아지에와 마찬가지로 같은 시대에 산 엄청난 부자인 화학자이다. 화학사에 큰 공로를 세웠다. 한편, 동시대에 살던 진보적인 화학자 프리스틀리가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다가 왕당파에게 죽을 뻔해 미국으로 달아날 때 그 모든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한 것도 캐번디시였다. 이념이 달라도 같은 화학자이기에 그를 도왔다고 한다.
더불어 라부아지에를 살리기 위해 프랑스 혁명정부에 막대한 돈을 지불하겠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정부가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를 영국으로 와서 살게 할 것이고 그 모든 비용은 자신이 부담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거부당하고 라부아지에는 결국 참수당하고 말았다. 캐번디시는 정치적인 부분엔 무관심했고 단지 같은 화학자라는 동료 의식으로 과학자들을 도왔다는 게 정설이다. 그의 생활을 보면 이해가 갈 듯.
캐번디시의 가장 유명한 업적 중 하나는 지구의 질량을 계산한 것이다. 1797년에서 1798년 동안 이루어진 이 실험은 당시로써는 굉장히 정밀하고 섬세한 조건이 요구되었었고[2] , 이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집안에 두께 60cm짜리 헛간을 지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계산된 지구의 질량은 장장 97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최근의 결과와도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3] 그리고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대기 표본을 채취한 최초의 과학자이기도 하다.
다만 그의 성격은 과학사에 있어선 좋지 않았는데, 그는 물이 산소와 수소로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각종 원소들은 물론 쿨롱 법칙과 옴의 법칙 등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를 안 해서 그 영광을 각각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여러 과학자들이 가져갔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그가 죽은 뒤에 책상서랍을 뒤지니 평생에 걸쳐 연구해온 자료들이 꽁꽁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4][5]
그가 그런 데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는 건 그의 성격을 볼 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히 그의 자폐 스펙트럼 설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먼저 발견해놓고 발표를 안 한 건 일반인 입장에선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 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과학사에 이름을 남긴 건 놀라운 일이다.[6]
[1] 아버지는 데번셔 공작 데번셔 2세의 5남이었다.[2] 오히려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게 도움이 됐다고 분석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3] 뉴턴은 실험을 일절 해보지도 않고 지구의 평균밀도를 통해 지구의 질량을 도출해낸 적이 있다. 그런데 뉴턴이 철저하게 이론적으로만 접근해서 구해낸 지구의 질량과 캐번디시가 실험적으로 알아낸 지구의 질량은 '''거의 차이가 없다.''' 뉴턴이 지구의 질량을 도출해낸 것은 캐번디시가 실험을 통해서 지구의 질량을 알아내기 무려 '''100여 년''' 전이다.[4] 비슷한 경우가 조지프 프리스틀리(1733년~1804년, 지우개를 발명했다.)가 1774년에 발견했다고 알려진 산소 발견이다. 스웨덴의 화학자 빌헬름 셸레(1742년~1786년)가 1771년에 먼저 산소를 발견했는데도 발표하지 않아 프리스틀리가 그 영예를 가져갔다. 셸레의 경우는 당시 학계에서 스웨덴어가 인지도가 거의 없었다.[5] 셸레의 이름을 듣고서 어?할 사람 있을텐데 셸레 그린의 그 셸레 맞다[6] 사실 그의 업적도 맥스웰 방정식으로 유명한 제임스 맥스웰이 그의 논문들을 파헤친 덕에 발견될 수 있었던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