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류지 금당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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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특징
3. 일화
4. 담징의 작품인가?
5. 보존상태


1. 개요


고구려의 화가 담징일본 호류사의 벽에 그린 그림 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논란이 있다.
한국의 석굴암, 중국의 윈강 석불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이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일본 최고(最古)의 벽화이자 인도 아잔타석굴, 중국 둔황 막고굴과 함께 세계적인 벽화 걸작으로 꼽혔다.

2. 특징


당나라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부처 옆의 두 협시보살이 취한 삼굴자세[1]는 당나라 시기 보살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3. 일화



4. 담징의 작품인가?


만약 호류지의 건물이 실제로 670년에 재건된 거라면 담징의 생몰연대를 넘어가기에 호류지 금당의 벽화는 담징 작품이 아니게 된다. 또한 호류지의 금당벽화를 그린 것이 고구려의 담징이라는 것을 학계에 알린 것은 이병도인데, 이 주장의 근거는 문헌자료가 아닌 일본의 구전이었기 때문에 신빙성에 논란이 있다. 실제로 1980년대 후반 국민학교 2학년 '바른생활 이야기'에 담징이 일본에 와서 금당벽화를 그린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넣음으로써 사실인양 가르쳤다. 그러나 현재는 담징이 그렸다는 설은 별로 지지를 못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국사교과서(6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이라고 쓰여있다. 결국 정부기관이 국민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수준의 말장난이나 해온 셈.
다만 고구려가 일본 벽화에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해 보인다. 다카마쓰 고분 벽화에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여인과 비슷한 복식을 한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

5. 보존상태


일본정부는 1934년 벽화보존을 위해 금당을 수리하기까지 했으나, 1949년 호류사에 불이 났을 때 소실되었다. 이 화재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전후 어수선하던 때라 별 조사 없이 넘어가 버렸다.
불에 타고 남은 그림 두 조각과 타버린 원화는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벽화의 마모상태가 상당히 진행되어 메이지 시대에 모사해 놓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1940년 태평양 전쟁 직전 모사되었다. 그러나 전쟁 직전이라 큰 관심을 쏟지 못한 탓에 서양화가가 모사작업에 동원되는 등의 미흡함이 있었으며, 현재 호류사의 복원한 금당에 있는 벽화는 1968년, 당시 일본 최고의 화가 14명이 1940년 모사된 그림 자료를 보고 그려 복원한 것이다.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에 미리 벽화의 상태를 꼼꼼히 기록해놓았던 덕분에 작업은 수월했다고 하나 1940년 모사 시의 미흡함을 다 복원하지는 못했다.

[1] 허리를 약간 휜 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