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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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의 토함산 중턱에 있는 암자이다. 석굴은 남북국시대에 통일신라의 김대성이 만들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석굴사원으로 불교 문화재의 걸작이자 국보 제 24호. 현대에 그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아서 토함산 아랫자락의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입장료는 2020년 성인 기준 6천 원으로 불국사와는 별도의 요금이다.
관람 시 실제 석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유리로 만든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면서 보는 것만 가능하다. 습기와 바람에 따른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해 내부에는 현대 과학의 산물인 공기 순환 설비가 돌아가고 있다. 다만, 매년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에만 예외적으로 차단막 안으로 들어가 옛날 신라인들이 했던 것처럼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이 마저도 내부에선 사진 촬영은 임의로 금지된 상황이다.
통로에 '경내설명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는데, 좁은 석굴안에 사람 몇명만 말을 하기 시작해도 소리가 울리며 매우 시끄러워지기 때문. 그냥 서서 구경하는 건 제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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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백 년 동안의 석굴암 사진
2.1. 신라 ~ 조선시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를 이룬 경덕왕 시기, 재상이던 김대성과 이성룡이 창건해서 774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석불사로 불렸으며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도 석불사로 언급된다. 석굴사원은 불교의 전래 경로였던 인도와 중국[3]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반도는 조각 난이도가 높은 돌인 화강암과 청석류가 많고 기후도 달라 저들 나라만큼 석굴이 많이, 크게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 신라에서는 군위군의 삼존석굴(일명 제2석굴암), 골굴사의 12개 석굴, 양산시의 미타암, 남산 칠불암 등 한국사에서 손꼽히게 석굴사원이 많이 지어졌다. 그 중에서도 석굴암은 가장 정교하게 제작된 곳이다.
고려 건국 이후 귀족세계에서 멀어진 석굴암은 그 존재감이 약해져 일부 기행문에서 간간히 언급된다. 17세기~18세기 정시한의 산중일기, 정선의 교남명승첩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까지는 어느 정도 석굴암이 관리되었고, 산중일기를 보면 전주에서 불국사와 석굴을 보러 오는 사람이 언급되므로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참배객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숙종 29년(1703), 영조 34년(1758)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말기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이 크게 중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1909년 재발견되었을 당시 본존불의 코가 깨졌고, 연화대 또한 심하게 갈라져 파손되었으며, 천장의 1/3이 무너지고 구멍에서 흙이 내려오고 있으니 이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를 거치며 경주도 평범한 지방도시로 위상이 떨어지고[4] 불교도 숭유억불 정책으로 차츰 세가 줄어드는 와중에 석굴암도 산중턱에 있다는 점까지 겹쳐 차츰 잊혀지고 방치되었다. 특히 조선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활발해 깊은 산 속의 치안이 불안해져 스님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 비어 있는 절이 많았다고 한다. 1902년 8월 세키노 타다시, 1906년 이마니시 류 등 당대의 일제 유수의 사학자들이 불국사를 보러 와서 사진도 찍고 조사했지만 석굴암은 방문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 뒤로 얼마나 한국 유적지 이곳저곳을 활발하게 조사했는지 보면, 불국사를 가놓고도 석굴암엔 안 갔음은 석굴암의 존재를 몰랐다는 증거로 보아야 자연스럽다.
2.2. 현대의 재발견
한일 강제 합병 직전인 1909년, 잊혀 있던 석굴암을 발견한 것은 경주의 한 우체국이었다. 토함산의 동산령을 넘어 동해안 지대로 배달가던 우체부가 범곡 근처에서 능 같은 것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보니 입구에는 문이 있고 천장은 무너져 있었던 석굴암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라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후기 문인들의 기록만 보아도 상당수가 석굴암을 인지하고 방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일제의 문화사업 일종의 퍼포먼스로 그 전에는 알려져있지 않았던 새로운 유적을 발견한 양 홍보한 것이다. 다만 이 '발견' 직전까지는 잊혀져 있었던 것은 맞다.
당시 석굴암의 보존 상태는 최악이었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천장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였다. 특히 가운데 본존불의 코는 깨지고 연화대도 심하게 갈라지고 깨져 있었다고 한다. 1909년 조선통감부는 처음엔 산간벽지에 있는 석굴암을 해체해 경성부로 옮길 계획을 세웠지만 막상 해체를 시작해보니 돌들의 무게가 엄청나 이전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1913~1915년, 1917년, 1920년~1923년까지 세 차례 전면적 수리를 했다.
2.3. 일제강점기
경술국치 직전 일본에 반출될 뻔하기도 했으나 현지 관리가 이를 거절하였고 조선 총독 데라우치가 이 곳을 시찰한 뒤 석굴암을 제자리에 두되 현지에서 보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면서 한국에 남아있게 되었고 보수가 시작되었다.[5] 이미 조선이 일본의 일부가 됐으므로 어디 있든 일본 정부의 재산이니 굳이 옮길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반출 대신 관리로 노선을 바꾸게 된 것이다.[6] 1913년 10월부터 감개돌을 고정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으로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였고, 1914년 8월 말 돔형 지붕을 분리하여 완전 해체한 후, 1915년 5월 석굴을 재조립하는 등 1915년 9월까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복원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석굴암에 습기 문제가 생겼다. 석굴암이 있는 장소는 아주 습한 곳인데 수리 과정에서 불상을 습기로부터 차단하고 석병을 보강하기 위해 나름의 첨단 건축기법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석굴 밖에 외벽이 세워졌고 외벽과 석굴 사이에 콘크리트가 채워졌다. 그러나 당시엔 콘크리트의 문제점이 밝혀지지 않은 때라 안타까운 부분.[7]
석굴암은 지하수 샘물이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다. 샘물 때문에 석굴 바닥 온도는 본존불이 있는 위쪽보다 낮아 원래 이슬은 바닥에만 맺혔다. 수분은 0.1도 차이만 있어도 차가운 쪽에서 물 분자 이동이 저하돼 결로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신라 사람들은 알았고, 1천 년 이상을 버텨왔는데 일제가 이 땅속에 콸콸 흐르는 샘물을 아연관을 만들어 빼버리니 바닥의 온도가 높아져 정교한 조각이 있는 석굴 벽면표면에 결로가 생기기 시작, 잘못된 수리로 바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 결과 시멘트가 화강암을 손상시켰고, 석굴암의 상세한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로 공사를 강행하여 내부벽과 불상 표면에 '''엄청난 결로와 이끼'''가 나타났다.
1917년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드는 문제가 나타나자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해 아스팔트를 바르고 석실 지하 아연 배수로의 방향을 바꾸는 보수공사를 실시했으나,[8]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당시 보수 공사 비용은 당시 돈으로 2만 2726원. 지금 가치로 대략 38억 원 정도 된다. 이끼가 또 생겨 1934년에도 증기 세척을 했고 거친 처리로 본존불을 비롯한 조각들이 많이 마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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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복원하기 전의 석굴암 모습. 돔이 붕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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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해체된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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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복원한 후인 1920년대의 석굴암.
그러나 당시 일본 실무진들은 '''대형 고대 석조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했다. 당시 현지의 석공 장인들에게 조언[9] 을 구하거나 이들을 공사에 참여시키지도 않았다. 현장의 조선인은 잡역 인부를 빼고는 모두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또한 조선인들도 완전히 잊고 있었던 석굴암의 '제대로 된 사진'이나 '기록'은 당연히 없었다. 복원 이전에 남아있는 사진, 자료들은 대체로 일본인이 남긴 것이다.게다가 복원공사를 하며 해체과정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았고, 사진조차도 제대로 남은 것이 없다. 남아 있는 사진과 자료들은 지금의 복원 작업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만약 있었다면 해방 후 보수공사마저 이런 식으로 하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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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공사 후 다 조립하지 못하고 방치된 석굴암 석재들.
만약 해체보수를 매뉴얼대로 제대로 했다면 이 석재들은 다시 제대로 조립되었든지, 아니면 최소한 '''어느 지점에 있던 몇 번 석재''' 같은 메모라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제는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제대로 조사 기록을 남기지도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해체공사를 추진했다.
2.4. 해방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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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구조를 놓고 사학계에선 갑론을박이 심하다. [10][11]
그뒤에 장면 내각과 박정희 정권 때 다시 재보수를 했지만 콘크리트를 떼어내도 모자랄 판에 그 위에 돔형으로 콘크리트를 다시(!) 타설했다. 당시 유네스코에서 온 석조문화재 전문가까지 초빙해서 추진한 공사였으나 우습게도 그 문화재 전문가는 결정이 난 뒤에야 국내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이건 안되겠다. 하면 안된다."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복구공사 취소 및 재설계로 입장을 바꿨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 조언을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12] , 그 결과는 더 미칠듯한 내부 습기로 금세 나타났다. 이중 콘크리트 돔 사이에 들어있는 더운 공기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해서 여름이 되면 굴 내부의 상대온도와 상대습도가 급격히 낮아져 석굴 벽면에서 물이 흘러넘치는 수준이 되었다. 게다가 이 습기로 인해 내부에 이끼가 더 끼자 이를 제거한답시고 고압 증기를 이용한 세척 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훼손이 더 생긴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서울대 기계공학과 김효경 교수가 투입되어 석굴암 내부를 완전히 밀폐하고 그 안에 에어컨을 계속 가동함으로써[13] 습기를 제거하는 방법을 썼다. 이로서 일단 에어컨이 돌아가는 동안은 문제없는 상태가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에어컨의 미세한 소음과 진동이 수십, 수백년 계속되면 미세하게 훼손이 된다는 우려는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 밀폐와 에어컨 처리로 인해 석굴암은 본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완전통제구역'''이 되어버렸다. 본래 설계도만 봐도 참배객이 직접 석굴 안으로 들어와서 석굴암 본존불 주위의 10대 제자상과 11면 관음상으로 둘러진 방을 한 바퀴 돌면서 참배하는 구조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렇게 입구를 틀어막아버리고 밀폐하는 건 원래 의미를 거의 잃어버리는 뼈 아픈 결정. 게다가 24시간 365일 내내 돌아가는 에어컨 작동이 잠깐이라도 중지된다면 지금도 바로 다시 습기 문제가 발생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미봉책이었다. 하지만 일단 당장 생기는 습기는 제거해야 했기에 김효경 교수 팀은 완전 통제 및 에어컨 설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부처님 오신 날 하루만큼은 신자들을 위해 원래 용도대로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방식의 참배가 허용되는데, 이것도 문 열어놓고 에어컨 트는 격 이라 자주 그러기는 어렵다.
2013년 11월에는 대좌의 균열 문제가 심각하다는 보도가 있었다. # # 결국 긴급 점검에 들어갔다고 한다. 또한 장기적으로 원형 복원을 검토중이라고 한다. 2015년 8월 29일, 보수공사 완료 공지 안내문이 올라왔다.
2.5. 석굴암의 습기 문제에 대한 견해
- 강희정 서강대 교수는 이 복원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없었던 것인 양 발견됐다고 선전한 점, 과거 유물에 대해 찬탄하면서도 조선의 현실이 '쇠락한 문명'이라 강조되었던 점 등을 들어 석굴암이 일제에 의해 변모된 조선 근대의 표상, 제국주의의 성공적 지배의 상징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14]
-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이런 결로 현상을 해결해 주었던 것은 석굴암 밑을 흐르는 냇물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석굴암의 상황을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콘크리트를 완전히 없애고 냇물이 흐르던 처음 그대로 놔두는 것이라고 한다. 좀더 자세히 설명한 프랑스 뻬르삐냥 과학국가박사 이종호의 글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이태녕 박사는 석굴암은 본래 지하에서 용출되는 물이 굴의 바닥에 있는 암석 기초층을 관통하여 흐르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의 보수공사 때 이 지하수를 다른 곳으로 방출되도록 구조를 변경한 것도 석굴암 훼손에 한몫 했다고 지적했다.
- 이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원래 석굴암의 배수방법은 굴 안의 온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해서 벽면에 결로 현상이 생기는 것을 막았는데 이를 변경하였기 때문에 습기 문제가 생겼다. 일제가 1910년대 처음으로 석굴을 보수하기 이전에 했던 기초 조사의 평면도를 보면, 원형 주실의 뒤쪽과 2시 방향의 바로 옆면에 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샘물의 양은 10초에 1리터나 되는 많은 양으로 일년 내내 쏟아져 나왔다. 결로 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여름, 차가운 샘물이 석굴 밑의 석재 아래로 흐르면'바닥면의 온도가 낮아진다. 벽면이나 석불의 외면에 비해 바닥 면의 온도가 낮으면 이슬은 바닥 면에서만 생긴다.이러한 원리를 석굴암을 만든 신라의 석공들이 터득했기 때문에 일년 내내 샘물이 콸콸 쏟아지는 샘물 바로 옆에 석굴을 짓고 그 밑바닥으로 샘물을 흘러보냈던 것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석굴암에서 습기가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일제가 석굴암을 석굴 내부가 숨을 쉬지 못하는 밀폐구조로 복원한 뒤 박정희 시기에 재복원했을도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형대로라면 완전히 개방된 구조이기 때문에 대기의 온도가 상승하면 내부의 표면 온도도 통풍에 의하여 함께 상승하므로 결로가 생기지 않는데, 광창과 창구를 모두 막고 전면을 목조 암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상황을 악화시켰다.
- 하지만 위 주장에 대해 “신라인의 과학정신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자연 원리에 위배되는 어리석음의 극치”라며 샘물 위 축조설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다만 과학주의를 주창하는 것 치고는 과학적 이론은 불명확하다. 애초에 성낙주는 '재야 사학자'(...)로 자칭하는 국어교사로 과학자가 아니다. 이 사람은 조선총독부 해체를 반대하며 유홍준을 비난한 적도 있다. -
- 물이 흐르는 습한 땅 위에 시설물을 세운 사례로 원성왕릉도 있으며, 여기서도 바닥의 습기에서 관을 보호하기 위해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거나 물을 흘려보내는 인공수로 장치를 만들어놨다. 그뿐만 아니라 감은사는 아예 법당 밑에 바닷물이 드나들도록 지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신라인들은 습한 땅에 뭔가를 만들 때는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지 잘 알았던 듯하다.
3. 예술적 측면
석굴암 본존불은 한국 불교미술사의 석불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때를 기점으로 이후의 석불들은 조형적인 완성도에서 '''오히려 점차 쇠퇴'''한다.
통일신라는 성덕왕 때부터 전제왕권이 수립되고 효성왕~경덕왕 초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신라의 전제왕권이 극성기를 맞던 때였으며 화엄종과 같은 종파불교가 전제왕권의 이념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주는 국제도시로 변모하고 당, 인도, 페르시아 문화가 직접적으로 수입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예술적 특징은 성당(盛唐)의 사실주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신라화된 모습을 보여줘서 '이상적 사실주의'에 기반한 예술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즉,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조형적으로 완벽한 불상을 만들었다. 중국에 영향을 주었던 인도 간다라 미술의 영향도 고려된다.
석굴암 본존불은 이상적 사실주의에 바탕한 육감적인 관능성을 보여준다. 쇄골 표현이나 허리와 엉덩이는 완전히 일직선이라거나... 불상의 표정은 자비롭다기보다는 왕을 연상케 하듯 근엄하고 덩치가 크고 남성적인 느낌이 철철 흐른다. 그 이유는 위에 서술한 전제왕권 강화와 맥락을 같이 한다. 왕즉불 사상에 의거해서 실제 경덕왕의 얼굴이 본존불의 모델이라는 설도 있다.[15]
또한 실제 비율보다는 관람자의 시선을 감안해 원근법을 활용한 있다. 본존불상이 실제 인간의 신체비례와 달리 몸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고, 뒤쪽 지붕에 조각된 광배(후광)도 실제로는 약간 타원형이다. 영남대 김익수 교수는 석굴암을 건설한 김대성의 키가 170 cm일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본존불 앞에 서서 올려다볼 때 이 타원형 광배가 원근법상 가장 똑바른 원으로 보이는 지점이 172 cm인 사람의 눈높이인 160 cm라는 것이다. 172에서 신발의 높이 2 cm를 빼서 170 cm라는 것.
조각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그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보통 석조 조각은 비교적 무른 대리석(모스경도 2~3)을 이용하지만, 석굴암은 암석 중에서 특히 단단한 화강암(모스경도 6~7정도)을 깎아 만들었으므로, 조각 난이도로서는 단언 최상위라 할 수 있다. 간다라 불상이나, 당시 그리스 석상에 비해 투박하지만 조각 난이도가 매우 힘든 화강암을 이 정도로 조각한 게 용하다.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 새겨진 11면 관음은 중국 보경사 11면 관음과 상당히 유사하다.
위에서 언급했던 석불사 밑의 샘물도 주목할 만 한데, 물이 건물의 하단부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물보라를 일으켜 석불사가 마치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더욱이 햇빛이 비치는 날에는 물보라에 빛이 산란되어 무지개까지 만들어져 더욱 신비로웠다고.
4. 논란
그런데 석굴암 불상에는 논란이 있다. 첫 번째는 조성 연대 문제다.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는 751년에 중건되었다고 나오지만 문제는 저자인 일연도 정확한 조성 시기를 몰랐다는 것. 그리고 완공된 것은 774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신라 불교미술은 중대와 하대의 양식이 서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은 석굴암이 중대 양식이냐 하대 양식이냐를 결정하는 문제. 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불국사의 창건연대를 기록했을뿐 석굴암에 정확한 창건연대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불국사의 경우에도 751년에 창건을 시작하여 김대성이 774년에 사망하고 나라에서 이어 완공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는 774년 이후의 완공을 의미하지 774년에 완공이 되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거기에 불국사석탑에서 발견된 석탑중수기 일명 묵서지편이 판독되었는데 여기에는 불국사의 창건 시작 연대를 742년으로 기록하고 있어 삼국유사와는 9년의 차이가 나 학계에서의 재고가 필요하다.
어쨌든 오랜 시간을 두고 건축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 문제인 모든 조각상들의 양식이 불일치하는 문제가 생겼다. 본존불을 1양식으로 규정하고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석가의 10대 제자상을 2양식, 사천왕, 인왕상, 팔부중상은 3양식으로 규정할 때 1양식과 3양식의 조형적 미감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본존불이 최정점이라면 팔부중은 그에 비해서 세밀함이 덜하고 양감이 부족하다.
세번째 문제는 본존불의 명호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 것이다. 명호 문제가 중요한 것은 이 불상의 명호에 따라 주변에 배치된 조각상들의 명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본존불이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바닥을 보이게 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는데, 항마촉지인은 본래 석가불만 취하는 수인(手印)이다. 그래서 일본인 학자들은 오랫동안 석굴암 본존불상을 석가여래로 판단했지만, 석가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신라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했는데도 아미타불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본존불 역시 항마촉지인을 했는데도 석가불이 아닌 아미타불이다. 또한 창건자 김대성 관련 설화를 보면 아미타불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신라에서 이런 항마촉지인을 한 아미타불이 나온 이유는 당시 신라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미륵이 어느 나라에 강림하느냐에 관심을 쏟느라(...) 미륵신앙이 유행했다. 통일신라 때는 전쟁 때 희생된 전몰자들의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정토 사상에 기반한 아미타 신앙이 유행했고, 그 당시 제작된 불상은 우견편단을 하고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계에서 석가여래라는 주장을 하는 이유는 본존불 주변에 있는 10대 제자상 때문이다. 10대 제자는 석가불에만 따라붙는 상이며 아미타불은 제자상이 없다. 무엇보다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 새겨진 11면 관음의 유무인데 관음보살은 석가불을 호위하는 보살이다.[16] 어쨌든 이런 이유로 학계에서 석가여래를 주장하는 사람은 9, 아미타불을 주장하는 사람은 1 정도로 석가여래라는 것이 중론이다.
5. 각종 루머들
대중들에게 대단히 인지도가 높은 문화재이다 보니 각종 루머들이 많다.
본존 이마에 박힌 보석(호박?)을 일본인들이 빼돌렸다거나 그 보석에 햇빛이 닿으면 반사돼서 일본까지 간다는 뭔가 초현실적인 것이 많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이 이런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실 마의태자가 2명이고 1명은 금강산에 나머지 1명은 양평 용문사에 들어가 죽었다. 그것에 그의 시신과 함께 보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며, 일본군이 전쟁 말 일본 본토로 가져가려 한다는 이야기가 주 내용이다.
돔형 지붕의 뚜껑 돌이 파손되었지만, 일제가 훼손한 것이 아니라 신라시대에 건설하는 과정에서 부서진 것이다. 삼국유사에도 전설에 가깝긴 하지만 기록이 있다.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를 만들다가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 대성이 속이 상해 있다가 깜빡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시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는 내용. 창건자가 돌 깨뜨렸지만 천신이 붙여주셨으니 그냥 쓰자고 얼렁뚱땅 넘어간 것(...).[17]
다른 루머로 본존불이 바라보는 방향이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 방향이며 이는 신라의 호국불교 사상을 뜻한다는 주장이 있다. 방향이 대충 비슷하긴 하나, 정확히는 동지 때 해가 뜨는 방향에 더 가깝다. 반면 '석굴의 방향이 동짓날 일출 지점'이고 '동해의 아침 햇살을 본존불 백호에 맞추려는 거룩한 의도로 석굴이 지어졌다.'는 주장은 논지가 일본 아마테라스 신의 태양 숭배에 가깝다는 비판도 있다.
원래는 채색된 불상이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역사스페셜에서도 다룬 적이 있다.
6. 교통
대중교통으로 찾아가려면 터미널이나 경주 시내에서 바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고 불국사까지 와서 환승해야 한다. 어차피 경주 와서 석굴암만 달랑 보고 경주를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불국사를 보는 김에 석굴암도 같이 보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큰 불편은 없을 것이다. 불국사까지는 터미널이나 경주역, 시내에서 10번, 11번, 700번을 타면 된다. 신경주역에서는 35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700번을 이용하면 된다. 10번과 11번은 같은 노선으로 순환 방향만 다를 뿐이다.
불국사에서 석굴암으로 가는 버스는 12번인데 불국사와 석굴암만 왔다갔다하는 석굴암 셔틀버스나 다름없다. 불국사 주차장 맞은편(10, 11번 시내버스 정류장 맞은편)에서 탈 수 있다. (단, 불국사를 관람한 뒤 바로 석굴암으로 가려고 한다면 아래쪽 주차장까지 내려올 필요 없이 매표소 광장 앞길을 건너가면 동리 목월 문학관 넘어가는 바로 앞에도 정류장이 있다.) 불국사에서 매시 40분 출발이다. 석굴암에서 불국사로 돌아오는 버스는 매시 정각 출발. 석굴암 매표소에서 석굴암까지도 제법 걸어 들어가야 된다.
혹은 불국사 부근에 있는 토함산 정상으로 가는 산길을 이용해서 40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남산처럼 올라가는 길에도 문화재가 많거나 하진 않고 평범한 등산로다. 12번 버스를 타고 석굴암을 먼저 본 뒤 불국사를 볼 계획이라면, 이 산길을 통해 내려오는 방법도 있다. 석굴암 매표소 바로 뒤쪽으로 불국사로 내려가는 길이 시작된다. 내려올 때는 당연히 40분보다는 덜 걸린다.
직접 차를 운전해서 온다면 운전을 조심하자. 불국사와 석굴암을 연결하는 불국로와 석굴로가 상당히 구불구불하고 험하다.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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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의 배치를 기하학으로 해석했던 요네다 미요지의 석굴암 분석이다. 옹호론도 많지만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 기하학을 이용하여 건축물을 배치하였다는 뚜렷한 근거는 없으며, 지나친 서구중심적인 해석이고 실측이 좀 달라서 비판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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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에 있는 '''보문사'''에도 경주 석굴암과 비슷한 석굴암이 있다. 이 석굴암은 1970년 8월 1일에 공사를 시작해 1972년 6월 16일에 완공되었다. 내부는 경주 석굴암과 비슷하지만 약간 작다. 경주 석굴암은 문이 1개인데 보문사 석굴암은 문이 3개이며 '''팔부신중(八部神衆)'''은 생략되었다. 종영된 KBS2 프로그램 스펀지에도 나온 바가 있다.
석굴암 주차장에 있는 토암산 망원경 전망대에서는 동해가 보인다. 500원이지만, 5개 중 3개는 고장나서 그냥 돈을 먹는다. 어차피 육안으로도 떠다니는 배까지 충분히 보인다.
1년에 딱 한 번, 부처님오신날에는 석굴 내부를 개방한다.
김성모 화백의 학습만화 마계대전 문화재의 비밀에서 배경으로 등장한다. 석굴암의 수호신으로 오페라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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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원권 지폐가 처음 나올 당시에는 지금의 세종대왕이 아닌 석굴암 본존불상이 불국사와 함께 인쇄되어 나올 예정이었고, 사진 속의 시제품에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뜻하는 사인까지 적혀졌다. 하지만 기독교계는 특정 종교 편향이라고 반대했고 불교계조차도 세속의 상징인 돈에 부처님을 새긴다고 반발이 있어서, 결국 세종대왕 도안으로 변경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8. 입장
주차요금 '''(후불)'''
입장료
입장시간
6:30~17:30
9. 관련 항목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대표적인 석굴사원 유적으로 막고굴, 윈강석굴, 룽먼 석굴 등이 있다.[4] 신라시대 수도 →고려시대 3경 중 동경 → 조선시대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좀 큰 도시 정도.[5] #[6] 이 당시 매년 발간하는 보고서와 연차사업으로 간행된 조선고적도보만 보아도 병합 직후에 문화재 조사를 대대적으로 했던 정황이 드러난다.[7] 석굴암 보수에 동원된 인력들이 모두 기차철로를 부설하는 토목기술 인력이었다. 당연하게 그들은 기차 철로의 터널처럼 석굴을 수리하겠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각광받고 있는 최첨단 건축기법 중에 하나가 콘크리트였다. 미국의 시카고에서 시작한 마천루가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지는 등 당시에 가장 단단한 구조물이자 방수 등에 적격이라는 평가가 있으므로 일본인들이 재빨리 도입한 것이다. 소위 당시로서는 최첨단기술을 석굴암 복원에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과학자들은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CO2)와 칼슘(Ca)이 화강암 벽을 손상시킴을 몰랐다. 최첨단 공법인 콘크리트는 당장에는 가장 단단하고 시공이 편리한 공법으로 각광을 받았으나 화강암과는 상극이었다. 이후 21세기에는 시멘트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 시멘트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건설한 경우 적어도 건물이 준공된 후 2∼3년 동안은 작품을 전시하지 않는다. #[8] 이 보수공사에 든 돈이 1차 공사의 70%가 넘는 1만 6980원이었다고 한다.[9] 당시 현지 석공들이 일본에서 온 기술자들에 비해 뭘 알겠냐는 생각을 하겠지만 첨언하자면 이들은 그곳에 온 기술자들보다 더 오랫 동안 돌을 만지며 살아온 숙련된 전문가들이다. 현재의 문화재 관리에도 관련 학자들 사이에 목공, 석공 등 관련 장인들이 끼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10] # [11] https://youtu.be/3U3zYS9FuGI [12] 박정희는 당시 경주를 문화 관광도시로 개발하면서 경주에 있는 수많은 유적들을 속전속결로 발굴하고 개발했는데 석굴암의 경우도 여기에 편승하여 빠르게 복구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속도만 우선하다보니 제대로된 발굴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덮여버리는 대참사가 벌어지는 바람에 지금도 비판이 크다.[13] 에어컨 항목에도 나와있듯 국내 최초.[14] # [15] 남산 감실부처가 선덕여왕의 실제 얼굴을 모델로 했다거나, 중국 룽먼석굴의 대불은 측천무후의 얼굴이라거나 등등 불상을 조성하던 당시 군주 얼굴을 모델로 했다는 설은 원래 흔하다.[16] 관세음보살 항목을 보면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나오며, 11개의 얼굴 중 하나는 아미타불이다. 불교미술 연구자인 문명대 동국대 교수는 관세음보살이 석가여래와 아미타여래 둘 다의 협시보살이었지만, 통일신라 시대에는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이 원칙으로 관례화되었다고 설명했다. # 따라서 11면 관음상이 석가여래를 증거한다는 것은 다른 방식의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17] 유홍준 교수는 자신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장기간 공사에 지친 석공들이 김대성이 잠든 틈을 타 뚜껑을 끼우고 완공한 것으로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