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라울 카파블랑카
José Raúl Capablan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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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11월 19일 ~ 1942년 3월 8일
쿠바 출신의 체스 선수이자 3대 세계 챔피언이다. 체스 역사상 가장 재능있던 플레이어였으며, 어려서부터 체스 신동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1909년 21살의 나이로 미국 챔피언 프랭크 마셜과의 일련의 시합에서 8승 13무 1패로 프랭크 마셜을 꺾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정상급 마스터들이 챔피언도전자를 선발하기 위해 모였던 "산 세바스티안 토너먼트(1911년)"에서 무명선수였던 카파블랑카는 원래 참가자격이 없었으나, 자신이 꺾었던 마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그는 이 대회를 6승7무1패로 우승하며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21년에는 당시 챔피언이었던 엠마누엘 라스커를 꺾고 3대 세계 챔피언이 된다. 1921년부터 1927년까지 6년간 체스 챔피언 자리를 지켰으며, 당시 전성기이던 카파블랑카는 1916년부터 1924년까지 8년간 '''63전 40승 23무 0패'''라는 어마어마한 기력을 보여주며 '''"human chess machine"'''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 또한 그의 실력이 100% 반영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이, 그의 전성기는 양차 세계대전과 겹치는 시기였다. 많은 이들이 이것이 아니었다면 카파블랑카가 훨씬 일찍 챔피언으로 등극해 더 오랜 시간 집권했을 것이며, 훗날 자신에게 챔피언 자리를 빼앗은 알렉산더 알레킨에게도 다시 타이틀을 되찾아왔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처음 대회에 참가했을 때 제대로 아는 오프닝이 거의 없었고, 계산력이나 다른 기량이 특출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어마어마한 기록의 원천은 바로 시대를 앞선 전술 및 전략의 이해도였다. 지금은 당연시되는 전술, 전략의 개념들을 20세기 초에 선보여 체스 발전에 혁명적인 기여를 했다. 이 외에 주목할 점은 바로 아직도 역대 최고로 꼽히는 엔드게임의 정확도이다. 전성기 시절에는 철저한 포지션 우위로 폰 하나정도의 이득을 챙긴 다음, 그야말로 엔진과 같은 엔드게임을 선보이며 상대를 눌러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그의 엔드게임은 오늘날 인공지능으로 분석해도 실수가 거의 없을 정도라고. 바둑으로 비유하자면 이창호 9단과도 비슷한 스타일. 딱히 적극적인 전술이나 공격을 하지 않는데도 어느새 게임이 카파블랑카에게 기울어 있다.
체스 챔피언으로 지내던 동안인 1925년에 체스에서 무승부를 줄이기 위해 체스에 2개의 기물을 추가해 가로줄을 10칸으로 늘린 카파블랑카 체스는 최초의 변형 체스이다. 이는 그랜드 체스 등 다양한 변형 체스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1942년 3월 7일 고혈압에 의한 뇌졸중으로 쓰러져 다음날 새벽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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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88년 11월 19일 ~ 1942년 3월 8일
쿠바 출신의 체스 선수이자 3대 세계 챔피언이다. 체스 역사상 가장 재능있던 플레이어였으며, 어려서부터 체스 신동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2. 생애
1909년 21살의 나이로 미국 챔피언 프랭크 마셜과의 일련의 시합에서 8승 13무 1패로 프랭크 마셜을 꺾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정상급 마스터들이 챔피언도전자를 선발하기 위해 모였던 "산 세바스티안 토너먼트(1911년)"에서 무명선수였던 카파블랑카는 원래 참가자격이 없었으나, 자신이 꺾었던 마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그는 이 대회를 6승7무1패로 우승하며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21년에는 당시 챔피언이었던 엠마누엘 라스커를 꺾고 3대 세계 챔피언이 된다. 1921년부터 1927년까지 6년간 체스 챔피언 자리를 지켰으며, 당시 전성기이던 카파블랑카는 1916년부터 1924년까지 8년간 '''63전 40승 23무 0패'''라는 어마어마한 기력을 보여주며 '''"human chess machine"'''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 또한 그의 실력이 100% 반영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이, 그의 전성기는 양차 세계대전과 겹치는 시기였다. 많은 이들이 이것이 아니었다면 카파블랑카가 훨씬 일찍 챔피언으로 등극해 더 오랜 시간 집권했을 것이며, 훗날 자신에게 챔피언 자리를 빼앗은 알렉산더 알레킨에게도 다시 타이틀을 되찾아왔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처음 대회에 참가했을 때 제대로 아는 오프닝이 거의 없었고, 계산력이나 다른 기량이 특출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어마어마한 기록의 원천은 바로 시대를 앞선 전술 및 전략의 이해도였다. 지금은 당연시되는 전술, 전략의 개념들을 20세기 초에 선보여 체스 발전에 혁명적인 기여를 했다. 이 외에 주목할 점은 바로 아직도 역대 최고로 꼽히는 엔드게임의 정확도이다. 전성기 시절에는 철저한 포지션 우위로 폰 하나정도의 이득을 챙긴 다음, 그야말로 엔진과 같은 엔드게임을 선보이며 상대를 눌러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그의 엔드게임은 오늘날 인공지능으로 분석해도 실수가 거의 없을 정도라고. 바둑으로 비유하자면 이창호 9단과도 비슷한 스타일. 딱히 적극적인 전술이나 공격을 하지 않는데도 어느새 게임이 카파블랑카에게 기울어 있다.
체스 챔피언으로 지내던 동안인 1925년에 체스에서 무승부를 줄이기 위해 체스에 2개의 기물을 추가해 가로줄을 10칸으로 늘린 카파블랑카 체스는 최초의 변형 체스이다. 이는 그랜드 체스 등 다양한 변형 체스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1942년 3월 7일 고혈압에 의한 뇌졸중으로 쓰러져 다음날 새벽 병원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