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 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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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촉한 후주 유선의 두번째 황후로, 장비와 하후씨의 작은 딸이자 유선의 첫번째 황후인 경애황후 장씨의 여동생이다. 회황후라는 호는 시호가 아니라 유선의 시호를 붙인 호칭이다.
2. 정사
건흥 15년(237년), 언니 경애황후가 사망하자 궁중에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었다. 유선은 자신의 처제와 재혼한 셈으로, 이전 왕조에서도 유사한 경우가 왕왕 있었으며 한나라 통치 이념의 근간이 된 춘추#s-4에서도 이에 대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다음해인 연희 원년(238년),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되었는데 후주전에 따르면 황후를 세운 기념으로 연호를 건흥에서 연희로 바꾼 것이다. 장비의 두 딸이 모두 황후가 되었으니[1] 장비의 위상이 촉한에서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황후로 봉하는 책서를 내려서 말하기를,
황후로 책봉된 해에 유선은 왕귀인 소생의 서장자 유선(劉禪)을 태자로 삼았다.짐(=유선)이 대업을 계승하여 천하에 군주로서 임하여 교묘(郊廟)와 사직을 받들어왔다. 지금 귀인을 황후로 삼노니, 행승상사(行丞相事) 좌장군(左將軍) 상랑으로 하여금 절(節)을 가지고 새수(璽綬)를 내리도록 한다. 황후는 후궁을 관리하는 일에 노력하고 공경스럽고 엄숙하게 제사지내라. 황후는 자신을 존경하라.
249년, 하후패가 촉한에 귀순하자 유선은 자신의 아이를 보여주며 "이 아이는 하후씨의 외손자요."라고 말했다. 황제 유선에게는 아들 7명과 딸 3명 이상이 있었는데[2] 이들 중에서 누가 경애황후 또는 장황후의 소생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여기서 유선이 하후패에게 보여준 아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장황후는 언니 경애황후와 다르게 요절하지 않고 오랫동안 살았다. 263년,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하면서 촉한이 멸망했다. 위나라는 촉이 멸망하자 촉의 궁녀들을 장수들 중 부인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도중 유선의 후궁 이소의가 굴욕을 참지 못해서 자결했다.(출처: 삼국지 촉서 장황후전 주석 한진춘추)
촉한이 멸망한 위나라 원제 함희 원년(264년)에 강유의 반란이 실패했고, 유선은 살아남아 전 가족과 함께 낙양으로 이송되었을 때 장황후도 유선을 따라 낙양으로 갔다. 유선은 안락공에 봉해짐에 따라 황후도 안락공부인이 되었다. 생몰년은 알 수 없으나 천수를 누렸으리라 추정되고, 언니 경애황후와 다르게 여동생 장황후는 촉한이 멸망한 이후 사망했기 때문에 시호가 없어서 그냥 장황후라고 불리고 있다.
3. 기타 창작물
삼국지대전에서 등장하며 이름이 3탄에서는 장희(張姫)로, 4탄에서는 장황후(張皇后)로 나온다. 언니 경애황후와 달리 강하다는 설정이다.
삼국전투기 외전에서 장세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장세연(張細姸)이라는 이름으로 장수로 등장했다.
삼국군영전에서 장연연(張燕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