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삼국지)

 





'''촉한 2대 황제'''
'''한나라 제31대 황제'''
'''懷帝 | 회제'''

'''묘호'''
없음
'''시호'''
'''서진'''
안락사공(安樂思公) / 안락혜공(安樂惠公)
'''전조'''
효회황제(孝懷皇帝)[1]
'''출생'''
207년
'''사망'''
271년
'''능묘'''
북망산(北邙山)
'''재위'''
223년 ~ 263년
'''연호'''
건흥(建興, 223년 ~ 238년)
연희(延熙, 238년 ~ 258년)
경요(景耀, 258년 ~ 263년)
염흥(炎興, 2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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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劉)
''''''
(禪)
''''''
공사(公嗣)
'''부모'''
부친:유비(孫堅)
모친:소열황후 감씨(昭烈皇后 甘氏)
황후 ||[[경애황후 장씨|{{{#000000,#e5e5e5 경애황후 장씨(敬哀皇后 張氏)
]]
황후 장씨(皇后 張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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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황제 즉위와 재상 정치
2.3. 친정 실시와 황호의 대두
2.5. 낙불사촉 일화
3. 후일담
4. 평가
4.1. 비판론
4.1.1. 통치의 문제
4.1.2. 인사 실책의 문제
4.1.3. 북벌 정책의 문제
4.1.4. 안일한 통치의 문제
4.1.5. 멸망 직전의 막장 행태
4.2. 긍정론
4.2.1. 잘한 건 없지만 잘못한 것도 드물다
4.2.2. 권력 장악은 뛰어난 군주였다
4.2.3. 인선문제에 대한 변호
4.2.4. 소결
5. 관련 논쟁
6. 가족 관계
7. 기타
8. 미디어 믹스
9.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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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주는 현명한 승상에게 정치를 맡겼을 때는 도리를 따르는 군주였지만, 환관에게 미혹되었을 때는 어리석은 군주였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흰색 실은 일정한 색깔이 없고 물들여질 뿐이다." 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구나!

《촉서 후주전》

삼국시대 촉한 제2대 군주, 마지막 황제(재위 223년 ~ 263년)이다. 촉한 정통론을 인정하면 470년을 이어온 한(漢)의 31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로서 그는 선주인 유비를 계승했으므로 후주(後主)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2]
소열제 유비의 장남이자 소열황후 감씨의 소생이며, 아명은 아두(阿斗)였다. 이는 태몽이 북두칠성과 관련된 꿈이었기 때문이다.[3] 현대 중국어에서 阿斗는 어리석고 아둔한 사람을 지칭하는 비유적인 단어로 그 의미가 굳어졌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4] 암군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현대의 평가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참고로 유봉의 이름인 봉(封)은 소열제의 친자 유선의 선(禪)과 더불어 봉선(封禪)[5]이 되는데 여기서 두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소열제의 야심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유봉은 양자 출신이므로 애초에 봉은 소열제가 지어준 이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에는, 마침 양자의 이름이 봉이라, 거기에 맞춰서 친아들 이름을 선으로 지었다고 주장한다. 정사에서는 유봉이 먼저 양자로 들어온 뒤 유선이 출생하였으나, 연의에서는 순서가 바뀐 것도 미묘한 일이라며 소열제가 개인적인 야심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어줬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연의에서 순서를 바꾸었다는 음모론도 있다. 물론 소열제가 정말 봉선에서 이름을 지었다는 근거는 없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207년 신야태수 유비가 형주목 유표에게 의지하여 형주의 신야에 있을 때 첩 감부인으로부터 태어났다. 삼국지연의 초반부에서 아명인 '아두'로 등장한다. 태어날 때 푸른 무지개 기운이 주변에 어리는 신비한 이미지를 갖는다.
208년 승상 조조가 형주를 공격했을 때, 장판파에서 조조군에 의하여 죽을 뻔 했으나 조운의 활약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는 정사에도 기록된 이야기다.[6]
위략에서 그는 어린 시절에 위나라에 잡혀가서 노예로 팔려갔다가, 유비가 한중왕이 된 뒤에야 겨우 신분을 회복하고 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다른 기록과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보통 와전된 이야기로 추측된다.
손부인이 동오로 돌아갈 때, 어린 아두를 데리고 돌아가려다가 조운이 손부인으로부터 유선을 탈환한 사건도 있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유선은 세자로 책봉되었고 221년에 소열제가 즉위하자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릉대전에서는 소열제가 성도에 부재하여 태자 유선이 대신하여 성도를 지키게 되었다. 소열제가 이릉에서 패배하자 익주에서 황원 등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태자 유선은 소열제와 승상 제갈량의 동시부재 상태에서도 양홍의 진언을 받아 황원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자신의 친위병을 파견하였으며, 장군 진홀과 정작에게 황원을 토벌하게 하는 위기관리능력을 보여줬다. 후일 회제가 완전 얼간이 오브 얼간이가 되어서 그렇지 실상 사람믿고 일을 맡기는 군주로서의 가장 중요한 능력을 보여준 셈. 그 외 남중반란 등은 후일 제갈량 등의 활약으로 이를 진압하였다.

2.2. 황제 즉위와 재상 정치


223년 5월, 회제가 성도(成都)에서 제위를 이었는데 이때 나이 17세였다. 황후를 황태후로 올렸다.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이 해가 위나라 황초 4년(223년), 촉한의 연호로는 건흥(建興) 원년이다.[7]
건흥(建興) 원년(223년) 여름, 장가(牂牁) 태수 주포(朱褒)가 군(郡)을 끼고 모반했다. 이 이전에 익주군(益州郡)의 대성(大姓-대족,호족) 옹개(雍闓)가 모반하여 태수 장예(張裔)를 오(吳)로 내쫓고 군(郡)을 점거한 채 복종하지 않았다. 월수(越嶲)의 이왕(夷王) 고정(高定) 또한 배반했다. 이 해, 황후 장씨(張氏)를 세웠다.[8] 상서랑 등지를 오(吳)에 보내 우호를 굳게 하자 오왕 손권이 촉과 화친하여 사자를 보내 방문하니, 이 해에 서로 통하여 우호를 맺게 되었다.

건흥 2년(224년) 봄, 농사에 힘쓰며 곡식을 기르고, 관문을 닫고 백성들을 쉬게 했다.

건흥 3년(225년) 봄 3월, 승상 제갈량이 남쪽으로 4군(四郡, 장가,월수,익주,영창)을 정벌하여 모두 평정했다. 익주군(益州郡)을 건녕군(建寧郡)으로 바꾸고, 건녕군, 영창군(永昌郡)을 갈라 운남군(雲南郡)을 설치했다. (익주, 영창→ 건녕, 운남, 영창) 또한 건녕군, 장가군을 갈라 흥고군(興古郡)을 설치했다. 12월, 제갈량이 성도로 돌아왔다.

건흥 4년(226년), 도호(都護) 이엄(李嚴)이 영안(永安)에서 강주(江州)로 돌아와 머물고 큰 성을 쌓았다. 지금 파군(巴郡)의 옛 성이 이것이다.

건흥 5년(227년) 봄, 승상 제갈량이 출병해 한중에 주둔하고, 면수 북쪽 양평(陽平) 석마(石馬)에 영채를 세웠다. 제갈량집에 기재된 회제의 3월 하조(下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짐이 듣건대 천지(天地)의 도(道)는 인(仁)에 복(福)을 내리고 간사함에 화(禍)를 내리니, 선을 쌓은 자는 창성하고 악을 쌓은 자는 망하는 것이 고금의 불변의 법칙이다. 이 때문에 탕왕, 무왕은 덕을 닦아 왕이 되고, 걸왕, 주왕은 극도로 포악하여 망했도다.

지난날 한조(漢祚)가 중도에 쇠잔해져 흉특(凶慝)한 자들을 그물에서 빠져나오게 하니 동탁이 난을 일으켜 경기(京畿)를 어지럽히고, 조조는 화란을 불러일으켜 천자의 권위를 훔쳐 틀어쥐고 해내(海內)를 잔박(殘剝)하며 무군지심(無君之心)을 품었다. 그 아들 조비는 고아가 된 더벅머리 아이로 감히 뒤이어 난을 일으키고 제위를 도적질해 제왕의 성씨를 바꾸고 문물제도를 고쳐 대대로 그 흉악함을 드러내었다. 이때 제왕의 법도가 온통 어두웠고 천하에 주인이 없으니 우리 천명이 아래로 떨어졌다.

소열황제(昭烈皇帝, 유비)께서는 영명하고 식견이 원대한 덕을 갖추시어 문무(文武)를 빛내고, 건곤(乾坤)의 운행원리에 응하시어 출신(出身)해 난을 평정하고 사방을 경영하시니, 사람과 귀신이 함께 꾀하고 백성들이 현능한 이를 추천하고 만백성들이 즐거이 추대했다.

부참(符讖)을 받들고 순응해 제위를 세워 연호를 고치고, 하늘의 질서를 크게 받들어 피폐해지고 쇠미해진 것을 돕고 일으켜 선조의 대업을 회복하고, 조정의 기강을 이어받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했다. 그러나 만국(萬國)이 평정되기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나셨도다.

짐은 어린 나이에 대업의 터전, 왕업을 이어 태보, 태부의 가르침을 미처 익히기 전에 조종(祖宗)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천하가 가로막히고 사직이 제대로 세워지지 못했으니 그 까닭을 길이 헤아리고 바로잡아 선대로부터의 사업을 빛내려 하나 아직 이룬 바가 없어 짐은 심히 두렵도다. 이 때문에 이른 아침에 일어나고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며 감히 자신의 안일을 바라지 않고, 매양 근검절약하여 나라에 도움을 주고 농사를 권하여 백성들의 재물이 늘어나도록 하고, 유능한 인재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사사로움을 끊고 마음을 기울여 장사(將士)들을 길렀다. 이에 검을 휘두르며 멀리 달려가 흉역(凶逆)을 토벌하려 했으나 붉은 기를 들어올리기도 전에 조비가 죽고 말았으니 이는 이른바 땔나무에 불을 지피기도 전에 스스로 타 버린 것이다. 그러나 잔당, 남아 있는 추악한 이가 또 천화(天禍)를 계속하여 하수, 낙수에서 제멋대로 날뛰며 무력을 믿고 그치지 않는다.

제갈승상은 포부가 크고 굳세며 충성스럽고 장렬하여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를 걱정하니, 선제(先帝)께서 그에게 천하의 일을 맡겨 짐을 위해 힘쓰도록 하셨다. 이제 그에게 백모와 황월(군권을 상징)의 중임을 주고 임의로 명령하는 권한을 맡겨, 보기(步騎) 20만 군사를 통령하고 병거를 감독해 천벌(天罰)을 행하게 하니, 우환을 제거하고 난을 평정해 옛 도읍을 회복하는 일이 이번 거행에 달려있도다. 옛날 항우는 강대한 군사를 거느리고 주(州)를 타넘어 땅을 차지해 크게 힘썼으나, 끝내 해하(垓下)에서 패하고 동성(東城)에서 죽어 종족들을 불태우고 천년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는 모두 그가 의롭지 못하고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아랫사람에게 사납게 굴었기 때문이다.

지금 적(賊, 조위)이 그 죄악을 본받아 하늘과 사람이 원망하니, 천시를 따라 의당 신속히 움직인다면 염정(炎精, 불의 정기. 오행설에 따르면 한나라는 불火) 조종(祖宗) 위령(威靈)의 도움에 힘입어 향하는 곳마다 반드시 이길 것이다. 오왕 손권은 함께 재난과 환난을 근심하니 은밀한 군사로 공모하여 그 후방을 기각(掎角, 적을 협공함)하고, 양주(涼州) 여러 나라의 왕들은 각각 월지(月支), 강거(康居)의 호후(胡侯, 호인 제후)인 지부(支富), 강식(康植) 등 20여 명을 보내 절도(節度, 지휘통제)를 받게 할 것이니, 우리 대군은 북쪽으로 출병하여 병마를 거느리고 창검을 휘두르며 선봉이 되려 한다. 천명(天命)이 이미 이른데다 인사(人事) 또한 마련되었으니 군대를 엄정히 해 기세를 아우른다면 필시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무릇 왕자(王者)의 군대가 정벌함에는 싸움이 없고, 존귀하고 의로운 군사에는 감히 항거할 자가 없으니, 이 때문에 명조(鳴條) 싸움에서 은 탕왕의 군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았고, 목야(牧野) 싸움에서는 상(商, 은나라)의 군사들이 창을 거꾸로 든 것이다. 지금 대장기가 향하여 지나는 곳마다 또한 무력을 남용하지 않으려 한다. 사악함을 버리고 정의를 뒤쫓아 단사호장(簞食壺漿)으로 천자의 군대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나라의 상규에 따라 각각 등급과 한도를 두어 크고 작은 봉총(封寵)을 내릴 것이다.

위나라의 종족(宗族), 지엽(支葉), 중외(中外)도 능히 이해득실을 살피고 역순(逆順)의 도리를 헤아려 항복하는 자는 모두 사면할 것이다. 옛날 보과(輔果)는 지씨(智氏)와 관계를 끊어 온 종친이 복을 입었으며, 미자(微子)는 은나라를 떠나고 항백(項伯)은 한나라로 돌아와 모두 제후의 봉토를 받는 경사를 누렸으니, 이들은 전대의 뚜렷한 증험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미혹되어 정의로 되돌아오지 않고 장차 난을 일으킨 자를 도우며 왕명(王命)을 본받지 않는다면 처자식까지 주륙하여 사면하지 않을 것이다. 은혜와 위엄을 널리 베풀어 그 원수(元帥, 으뜸 장수)를 용서하고 피폐해진 백성을 위로하노라. 그 외 조서(詔書)와 율령(律令)은 승상이 천하에 노포(露布)하여 짐의 뜻에 부합하도록 할 것이다.

건흥 6년(228년) 봄, 제갈량이 출병해 기산(祁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겨울, 다시 산관(散關)을 나와 진창(陳倉)을 포위했다가 군량이 다해 물러났다. 위나라 장수 왕쌍이 군을 이끌고 제갈량을 추격하니, 제갈량이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고 왕쌍을 참수한 후 한중으로 돌아왔다.

건흥 7년(229년) 봄, 제갈량이 진식을 보내 무도(武都), 음평(陰平)을 공격하고 마침내 두 군(郡)을 평정했다. 겨울, 제갈량은 승상부와 군영을 남산(南山) 아래 평원으로 옮기고, 한성(漢城), 낙성(樂城)을 쌓았다. 이 해, 오나라의 대제가 칭제하고 촉과 맹약하여 함께 천하를 나누기로 했다.

건흥 8년(230년) 가을, 위나라가 사마의는 서성(西城), 장합은 자오(子午), 조진에게는 야곡(斜谷)을 지나게 해 한중을 공격하려 했다. 승상 제갈량이 성고(城固), 적판(赤阪)에서 이들을 기다렸는데, 큰 비가 내려 길이 끊기자 조진 등이 모두 돌아갔다. 이 해, 위연이 양계(陽谿)에서 위나라 옹주자사 곽회를 격파했다. 노왕(魯王) 유영(劉永)을 옮겨 감릉왕(甘陵王), 양왕(梁王) 유리(劉理)는 안평왕(安平王)으로 삼았는데, 노(魯)와 양(梁)이 모두 오나라의 분계(分界)에 있었기 때문이다.[9]

건흥 9년(231년) 봄 2월, 제갈량이 다시 출군해 기산을 포위하고, 처음으로 목우(木牛)로 운량했다. 위의 사마의, 장합이 기산을 구원했다. 여름 6월, 제갈량이 군량이 다해 군을 물렸는데, 장합이 추격해 청봉(靑封)에 이르러 제갈량과 교전하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 가을 8월, 도호(都護) 이평(李平,이엄)이 재동군(梓潼郡)으로 폐사(廢徙, 관직을 폐하여 유배함)되었다.[10]

건흥 10년(232년), 제갈량이 군사들을 쉬게 하며 황사(黃沙)에서 농사를 장려하고, 유마(流馬), 목우(木牛)를 완성하고, 교병(敎兵), 강무(講武)했다.

건흥 11년(233년) 겨울, 제갈량이 제군(諸軍)을 시켜 쌀을 운반해 야곡구(斜谷口)에 쌓고 야곡의 저각(邸閣, 창고)을 수리했다. 이 해, 남이(南夷) 유주(劉冑)가 모반하자 장군 마충(馬忠)이 이를 격파해 평정했다.

건흥 12년(234년) 봄 2월, 제갈량이 야곡을 거쳐 출병하고 처음으로 유마로 운량했다. 가을 8월, 제갈량이 위빈(渭濱)에서 죽었다. 정서대장군 위연이 승상 장사 양의(楊儀)와 권력을 다투어 불화해 군사를 이끌고 서로 공격하고 위연이 패주했다. 위연을 참수하고 양의는 제군을 이끌고 성도로 돌아왔다. 대사령을 내렸다. 좌장군 오일을 거기장군 가절 독한중(督漢中)으로 삼았다. 승상 유부장사 장완(蔣琬)을 상서령으로 삼고 국사(國事)를 총통하게 했다. 회제는 상복을 입고 3일간 애도하였다. (화양국지)
이후 장완, 비의, 동윤 등의 능신에게 국정을 맡겼으나, 후궁을 늘리려 하거나 놀이와 향락에 빠졌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동윤초주가 이에 대해서 간언하였다.

건흥 13년(235년) 봄 정월, 중군사(中軍師) 양의가 한가군(漢嘉郡)으로 폐사(廢徙)되었다. 여름 4월, 장완의 지위를 대장군으로 올렸다.

건흥 14년(236년) 여름 4월, 회제가 전(湔)에 이르러 전망하기 좋은 언덕에 올라 문수(汶水)의 물흐름을 보고 열흘 뒤에 성도로 돌아왔다. 무도(武都) 저왕(氐王) 부건(苻健)과 저민(氐民) 4백여 호를 광도(廣都, 촉군 광도현)로 옮겼다.
건흥 15년(237년) 여름 6월, 황후 장씨(張氏)가 훙(薨, 제후급의 죽음)했다.

연희(延熙) 원년(238년) 봄 정월, 황후 장씨(張氏)를 세웠다.[11]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건흥 → 연희) 아들 유선(劉璿)을 태자로 세우고, 아들 유요(劉瑤)를 안정왕(安定王)으로 삼았다. 겨울 11월, 대장군 장완이 출병해 한중에 주둔했다.

연희 2년(239년) 봄 3월, 장완의 지위를 대사마(大司馬)로 올렸다.

연희 3년(240년) 봄, 월수(越嶲)태수 장억을 시켜 월수군을 평정했다.

연희 4년(241년) 겨울 10월, 상서령 비의가 한중에 도착해 장완과 함께 일의 계획을 의논하고, 연말에 돌아왔다.

연희 5년(242년) 봄 정월, 감군(監軍) 강유가 편군(偏軍, 한 무리의 군대)을 인솔해 한중에서 부현(涪縣)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연희 6년(243년) 겨울 10월, 대사마 장완이 한중에서 돌아와 부현에 머물렀다. 11월, 대사령을 내렸다. 상서령 비의를 대장군으로 삼았다.

연희 7 년(244년) 윤월, 위(魏) 대장군 조상, 하후현 등이 한중으로 향하자 진북대장군 왕평이 흥세(興勢)주변에서 이를 막았다. 대장군 비의가 제군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자 위군이 퇴각했다. 여름 4월, 안평왕 유리가 죽었다. 가을 9월, 비의가 성도로 돌아왔다.

연희 8년(245년) 가을 8월, 황태후가 훙(薨)했다. 12월, 대장군 비의가 한중에 도착해 수비군(圍守)를 순시했다.


2.3. 친정 실시와 황호의 대두


연희 9년(246년) 여름 6월, 비의가 성도로 돌아왔다. 가을, 대사령을 내렸다. 겨울 11월, 대사마 장완이 죽었다. 위략에 따르면 장완이 죽자 회제가 스스로 국사(國事)를 관장했다.
연희 10년(247년) 양주(涼州)의 호왕(胡王) 백호문(白虎文), 치무대(治無戴) 등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자, 위장군(衛將軍) 강유(姜維)가 이들을 맞이해 안무하고 촉군 번현에 거처하게 했다. 이 해, 문산군 평강현의 이족이 모반하자 강유가 가서 격파해 평정했다.

연희 11년(248년) 여름 5월, 대장군 비의가 출군해 한중에 주둔했다. 가을, 부릉속국(涪陵屬國)의 백성과 이(夷)가 모반하자 거기장군 등지(鄧芝)가 가서 공격해 모두 깨뜨리고 평정했다.

연희 12년(249년) 봄 정월, 위나라에서 대장군 조상 등을 주살하자 우장군 하후패가 와서 항복했다. 여름 4월, 대사령을 내렸다. 가을, 위장군 강유가 출병해 옹주(雍州)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장군 구안(句安), 이소(李韶)가 위나라에 항복했다.

연희 13년(250년), 강유가 다시 서평(西平)으로 출병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연희 14년(251년) 여름, 대장군 비의가 성도로 돌아왔다. 겨울, 다시 북쪽으로 한수(漢壽, 예전의 가맹)에 머물렀다.(※) 대사령을 내렸다.[12]

연희 15년(252년) 오의 대제가 훙(薨)했다. 아들 유종(劉琮)을 세워 서하왕(西河王)으로 삼았다.

연희 16년(253년) 봄 정월, 대장군 비의가 위나라에서 항복한 곽순(郭循)에 의해 한수(漢壽)에서 살해되었다.[13] 여름 4월, 위장군 강유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남안(南安)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렇게 능신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성품은 바르지 못했지만 능력은 있었던 진지마저 258년에 사망하자, 회제는 친정할 수밖에 없었다. 회제는 대사령을 남발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또한 환관 황호를 총애하여 국가의 기강을 문란케하였다. 친동생인 유영이 황호를 비판하자, 회제는 유영을 멀리하였다. 249년에 하후패가 촉한에 망명해오자, 회제는 하후패와 회견하여 그를 칭송하였고 전한 고제의 건국 공신이었던 하후영을 들어 유씨와 하후씨의 인연을 강조하였다. 회제는 하후패를 극진하게 대해 작위를 높히고 높은 벼슬과 은상을 하사하였다.
연희 17년(254년) 봄 정월,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 대사령을 내렸다. 여름 6월, 강유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농서(隴西)로 출병했다. 겨울, 농서군의 적도(狄道), 하관(河關), 임조(臨洮) 세 현의 백성을 뽑아 광한군 면죽현, 촉군 번현에 거처하게 했다.

연희 18년(255년) 봄,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 여름, 다시 제군(諸軍)을 이끌고 적도(狄道)로 출병하고, 위(魏) 옹주자사 왕경(王經)과 조수(洮水) 서쪽에서 싸워 대파했다. 왕경은 물러나 적도성을 지키고 강유는 종제(鍾題, 임조 남쪽, 조수의 서쪽)에 주둔했다.

연희 19년(256년) 봄, 강유의 지위를 올려 대장군으로 삼고 융마(戎馬)를 지휘하도록 했다. 진서장군 호제(胡濟)와 천수군 상규현에서 만나기로 기약했는데 호제가 약속을 어기고 도착하지 않았다. 가을 8월, 강유가 위(魏) 대장군 등애에게 상규에서 격파되었다. 강유는 군을 물리고 성도로 돌아왔다. 이 해, 아들 유찬(劉瓚)을 세워 신평왕(新平王)으로 삼았다. 대사령을 내렸다.

연희 20년(257년), 위(魏) 대장군 제갈탄이 수춘을 점거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강유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낙곡(駱谷)으로 출병해 망수(芒水, 위수의 지류)에 이르렀다. 이 해, 대사령을 내렸다.

경요(景耀) 원년(258년),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 사관(史官)이 경성(景星, 도가 있는 나라에서 보인다고 하는 상서로운 별)이 보였다고 말하자 이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연희 → 경요) 환관 황호(黃皓)가 처음으로 정사를 오로지했다. 오(吳) 대장군 손침이 오의 소제를 폐하고 낭야왕 손휴(孫休)를 세웠다.

이 무렵 강유는 대규모 북벌을 도모하여 적도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단곡에서의 패배가 단초가 되어 북벌을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다. 이에 258년에 염우가 황호와 결탁하였으며, 황호는 강유와 염우를 교체하려고 획책하였다고 한다. 제갈첨, 동궐 등은 강유가 공적이 없고 국내가 북벌로 인하여 소진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소환하여 군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번건(樊建)과 더불어 염우(閻宇)로써 강유를 대체할 것을 모의하였으나(학경 속후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제는 끝내 강유의 직책을 유지토록 지시하였는데, 이는 당시에 강유를 대체할 만한 경험과 재능을 가진 사령관급 무장이 없어서이기도 했고, 더불어 회제가 관료들 사이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필 그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중용하고 총애했던 인물이 간신인 황호였다는게 문제였을 뿐이다.
경요 2년(259년) 여름 6월, 아들 유심을 북지왕(北地王), 유순(劉恂)을 신흥왕(新興王), 유건(劉虔)을 상당왕(上黨王)으로 삼았다.

경요 3년(260년) 가을 9월, 공신인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경요 4년(261년) 봄 3월, 공신인 장군 조운의 시호를 추증했다. 겨울 10월, 대사령을 내렸다.
경요 5년(262년) 봄 정월, 서하왕 유종(劉琮)이 죽었다. 이 해, 강유가 다시 군을 이끌고 후화(侯和)로 출병했다가 등애에게 격파되고, 돌아와 답중(沓中, 음평군 음평현)에 주둔했다.


2.4. 촉한의 멸망


263년, 위나라 군대가 촉한으로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고 강유는 "장익과 요화를 보내어 양안 관구와 음평 교두를 나뉘어 지키게 하여 미연에 방비해야 합니다."라는 표문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황호가 적군은 오지 않는다는 점괘를 회제에게 보여주고 회제가 이를 믿었기 때문에 회제는 방어에 태만하여 제대로 적에 대응하지 못했다. 대사령을 내렸다. 연호를 염흥(炎興)으로 고쳤다. 결국 강유의 우려대로 등애가 음평 방면으로 우회하여 촉한 내지로 직접 공격해왔으며, 면죽에서 제갈첨이 이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한편 촉한의 조정에서는 등애가 이미 평지로 들어왔다는 소식[14]을 듣자, 회제는 신하들을 모아 상의했지만, 누구도 좋은 계책을 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촉은 본래 오와 동맹국이었으므로 오나라로 도주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남중(南中, 익주(益州)의 남부 지역)의 일곱 군이 험준하고 두절되어 있어 스스로 방어하기 쉬우므로 남쪽으로 도망 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 초주는 직책이 광록훈 아래 자문에만 응하는 광록대부였는데 조정에서 오로지 혼자 항복론을 주장했다. 남쪽으로 가봐야 반란뿐이고 오나라에 의지해봐야 나중에 오나라가 망하면 두 번 항복하는 꼴이 된다며 그냥 요약하면 '걍 깔끔하게 여기서 항복합시다'라고 주장한 것인데 위나라는 항복을 받지 않을 거라는 비난도 초주가 다시 동오가 항복하지 않았으니 촉을 대우해 줄 것이라고 반박해 초주의 이치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다 돌아가다 보니 촉한의 대신들이 조정에서 남쪽으로 피신할 것을 주장한 건 일리가 있었다. 이때 유선이 항복하자는 초주의 말을 듣고 남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결정짓지 못하며 주저했으나 조정의 어떤 이들은 '폐하께서 위나라 군대가 깊숙이 침입하도록 하기 위해 남쪽으로 갈 계획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황제의 권위가 강한 촉한에서 황제의 의중이 남중으로 피신하는 계책을 쓰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고 초주도 주로 남중으로 피난가려는 걸 반박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촉한 조정의 의론은 남중으로 가려는 것으로 흐르고 있었던 듯하다. 또 이 기록은 초주의 말을 듣고 주저하고 있다고 해도 유선 역시 처음엔 남쪽으로 들어갈 결정을 지을 생각이 있었다는 말도 된다.
이에 초주는 상소를 올려서 남중으로 가면 이민족을 소모시켜 심하면 반란의 위험이 있다는 주장에 덧붙여 여기에 일찍 항복하면 작위와 토지를 얻을 수 있고 만약 남쪽으로 가서 대세가 다하면 큰 화를 입을 것이며 성인은 운명을 알고 자기 견해를 고집하지 않는다고 회제를 유혹했다. 그래서 회제는 결국 수도에서 항전하거나 일단 다른 곳으로 후퇴하여 적의 보급선을 늘려 그들을 불리하게 하여 싸워볼 생각도 없이 조정의 의론도 무시하고, 나라를 구하러 각지에서 달려오는 군대들도 무시한 채 '''오로지 혼자 항복을 주장한 초주 단 한 사람의 말만 듣고 등애에게 항복한다.''' 회제의 다섯째 아들 북지왕 유심이 이에 반발해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다 자살하였지만 회제는 항복 결정을 굽히지 않았다.
회제는 '장강, 한수로 한정되고 나뉘어서 깊고 멀리 떨어지고, 촉 땅에 의지해 한쪽 구석에 두절되니, 천운을 범하며 점점 여러 해를 지나 마침내 수도와 만리나 떨어지게 되었다. 부덕(否德)하고 암약(暗弱)한 나는 선대의 유업을 탐하여 여러 해 동안 그럭저럭 처신하며 큰 가르침[15]을 따르지 않았다며 왕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신무하니 어찌 순종하지 않겠느냐면서 즉시 장수들에게 명해 내던지고 갑옷을 벗도록 하고, 관부에 저장된 물건은 조금도 훼손하지 않도록 하였다. 백성들은 들에 퍼져있고 여분의 식량과 남은 곡식이 밭이랑에 쌓여 있으니 훗날 은혜를 입어 백성의 목숨이 보전되길 기다리며 하명을 청하며 성심을 고하고 충성과 정성을 공경히 바치니, 존망과 임금의 하사가 모두 그대에게 달려있어 수레에 실어놓은 관를 가까이 두고 더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라고 등애에게 항복편지를 보냈다.
회제의 아들 북지왕 유심은 망국에 절망하여 자살했다. 장소, 등량은 낙현(雒縣)에서 등애와 만났다. 등애는 서신을 받아보고 크게 기뻐하며 이내 답장을 썼다. 회제는 또한 태상 장준, 익주별가 여초(汝超)를 보내 절도(節度)를 받게 하고, 태복 장현을 보내 강유에게 (항복) 칙명을 전했다. 등애는 장소, 등량을 먼저 돌려보냈다.
또한 상서랑 이호(李虎)를 보내 사민부(士民簿)를 전하니, 영호(領戶,거느린 민호) 28만, 남녀구(男女口) 94만, 대갑장사(帶甲將士,무장병) 10만 2천, 관원 4만 명, 쌀 40여만 곡(斛), 금은 각 2천 근(斤), 금기채견(錦綺綵絹) 각 20만 필이었으며 나머지 물건들은 이에 상응했다. 그리곤 등애가 (성도) 성 북쪽에 도착하자 스스로 몸을 묶고 관을 등에 맨 모습으로 위군 등애의 진영을 찾아가 항복하였다.
등애는 결박된 것을 풀고 관을 불태우고 회제를 청하여 맞아들여 서로 만났다. 황제의 권한을 편의로 행사하여 회제를 표기장군으로 삼았다. 수비군들은 모두 회제의 칙서를 받은 연후에 항복했다. 등애는 회제를 옛 궁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그곳으로 가서 만났고, 물자는 엄정히 해두고 쓰지 않았다. 진제공찬(晉諸公贊)에 따르면 회제는 노새가 끄는 수레(騾車)를 타고 등애에게 나아가니 망국(亡國)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
264년, 위군의 내분을 틈타 강유는 회제에게 촉한 재흥의 밀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강유의 반란은 실패하고 강유와 많은 신하들, 그리고 태자 유선을 잃었다. 회제는 살아남은 가족들과 함께 낙양으로 이송되었고, 그를 따르는 신하는 극정 등 몇몇에 불과하였다. 회제의 후궁 이소의가 자결했다.
이후 유주 안락현에서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져서 말그대로 '''안락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서진에서 받은 시호는 사공(思公)이지만 기록에 따라서 혜공(惠公)으로 되어있다. 이후 전조의 유연에 의해 다시 효회황제의 시호를 받는다. 오의 말제 등과 함께 낙양 북망산에 묻혔다.

2.5. 낙불사촉 일화


촉한이 망한 이후 촉한의 유신들과 회제를 모아놓고 사마소가 베푼 잔치에서 사마소가 그를 위해 옛 촉의 가무를 짓게 했다. 주변의 촉한 유신들이 모두 슬퍼했으나 회제는 기뻐하고 웃으며 태연자약했다. 심지어 사마소조차 어이가 없었는지 "저렇게 사람이 무정하니 (촉이) 망했을 것이다, 제갈량이 살아 있었더라도 힘들었을 텐데 하물며 강유는 가능했겠는가?" 라고 가충에게 털어놨을 정도. 다른 날에도 태도가 똑같아서 사마소가 그런 그에게 '옛날 촉의 생활이 그립지 않소이까?'라고 물어보자 그는 웃으며 '이렇게 즐겁게 해주시니 조금도 촉이 생각나지 않습니다.(樂不思蜀)'라고 대답했다 한다.
이에 극정이 보다 못해 회제를 만나길 청해 귀띔하기를 "사마소가 또 한 번 묻는다면 '조상들 묘가 멀리 촉에 있어 마음이 서쪽을 향했고 비감하니 하루라도 생각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 눈을 감으십시오."라고 말했다. 사마소가 이를 엿들었는지 아니면 사마소가 극정에게 지시해서 말한 것이었는지 다시 '촉이 생각나지 않소?'라고 묻자 극정의 말처럼 대답하려했다. 그러나 회제는 현 상황이 그다지 슬프지 않고 눈물을 짜내려고 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아 그 모습을 본 사마소가 "극정이 그리 울라고 시키던가요?"라고 말하자 회제는 놀라서 쳐다보며 '''"그 말씀대로네요."'''라고 대답했다 한다. 이윽고 좌중은 웃음 큰 잔치. 그에 회제는 자기도 좌중을 따라 같이 웃었다고 한다. 그 이후 사마소는 회제를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회제의 행동이 하도 한심하여 어떤 이들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하는데, 이 이야기는 습착치가 지은 역사책 한진춘추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배송지가 정사 삼국지에서 후주전의 주해로 인용해 전해졌다.[16] 사실 중국 역사에는 회제보다 더 한심한 황제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사마소의 손자인 서진 혜제가 그렇다.
이 에피소드를 한쪽은 회제가 아무 생각 없는 최악의 얼간이라고 해석하고 한쪽은 아버지 소열제가 위나라 무제와의 술자리에서 번개를 두려워한 에피소드와 비교하여 처세를 위한 현명한 대답이라는 사람도 있다. 이유는 사마소가 회제에게 재기의 의지가 있는지를 떠보고 만일 그럴 생각을 갖고 있다면 제거하려고 시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 사마소가 황제도 대낮에 시해한 잔인한 인물이었기에 여기서 회제가 재기의 의지를 보였으면 진짜로 죽였을 수도 있다.[17]
처세술이라고 긍정하는 측에선 사마소가 회제에게 재기의 의지가 있는지를 떠보고 만일 그럴 생각을 갖고 있다면 제거하려고 시도한 것일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멸망한 나라의 군주가 살해당하는 경우가 많은건 그가 자신의 나라를 찾기 위해 겉으로는 충성을 해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서 망국이라 할지라도 그 군주라던가 관련된 인물이라면 그 망국 출신 인사들에게 하나의 '''구심점'''이 될 수도 있다.[18] 그렇기에 회제의 이런 태도는 '난 다른 뜻이 없으니 굳이 사마소 니가 경계할 이유가 없는 행동만 하겠다'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일종의 처세술로 보기도 한다. 이때 다들 어이없어한 것은 촉한의 구신들마저 지적할 정도로 촉에서의 태도와 끌려온 후의 태도가 달랐기 때문으로도 볼 수도 있다.[19] 실제로 강유 등이 촉한 부흥을 시도한 바 있고 설사 회제가 뭔가를 할 수 없다고 해도 시기 변화나 상황 변화가 이뤄지는데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고 혹은 반란군들에게 추대될 수도 있었으므로 의심이 가면 가차없이 제거할 생각으로 떠본 것일 수 있다. 어쨌든 회제는 군주였고 서진에서 일하고 있는 촉한의 구신들도 많았다. 당장 사마소의 손자 사마치가 이런 의심을 사서 죽었다. 사마치 입장에서는 딱히 뭔가를 시도한 것도 아니었는데, 옛 신하들이 수모를 못 참고 울었다가 덤으로 독살당했다는 게 안습.
거기다가 사마소가 회제를 죽일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회제를 살해한다면 훗날 오 침공 시, 손호는 어차피 항복해봤자 죽을 거 최후까지 저항할 것인데, 단지 일말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상당한 군사적 희생을 감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회제를 살해한다면 또 그건 그것대로 저항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 만약 사마소가 이렇게 생각했다면 오히려 회제를 살해하기는커녕 보약이라도 보내야 할 판이고, 때문에 단지 회제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회제의 처세술이 확실히 있었다는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처세술일 뿐이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똑똑한 사람이 처세술 차원에서 바보로 위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촉한의 황제이던 시절에 신하들 앞에서 같은 처세술을 보여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촉한에서 온 사람들이나 이들과 교류한 많은 사람들이 회제의 실제 모습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지금까지 남은 몇몇 에피소드만으로 유선을 평가하게 되지만, 당대의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대의 사람들이 바보라고 판단했다면 단순히 에피소드의 재해석만으로 그러한 평가를 뒤집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냥 처세술이 아니더라도 막장이고 처세술이면 더 오히려 까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백 번 양보해 처세술이 사실이었다 한들, 항복을 한 건 백성들을 위해서라고 쳐도 왜 아들인 유심처럼 항복 직후에 자결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즉 '''왜 그런 모욕까지 듣고도 유심처럼 자결하지 않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구차하게 계속 살아 있었냐'''는 견해. 실제로 유선의 태도에 어이없어한 건 촉의 구신이나 인사들만이 아니라, 위(사실상 서진)의 인사들조차도 그랬다. 물론 망국의 군주라고 해서 꼭 목숨을 내던지는 것만이 책임지는 자세인 건 아니고 촉이 망한 게 회제의 탓만도 아니지만 회제가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정도가 너무 심해서, 그래도 옛 군주라고 모시기를 원했던 극정 등 신하들조차 나라를 잃은 군주면 좀 슬퍼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대놓고 까고, 적국의 수장인 사마소조차 망국의 군주면 나라가 망한 것에 대해 능력이 안 돼서 항복한 건 이해가 가지만 최소한 죄책감 정도는 가지라고 비난할 정도였다.[20] 항복론을 주장한 초주에 대한 평가긴 하지만 홍대용은 담헌서에서 '임금이 사직(社稷)을 위해 죽는 것은 천지의 대의(大義)가 아니겠는가?'라고 간접적으로 당시 회제의 행동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게다가 처세술이 맞다고 해도, 최소한 이것은 본인의 안위와 부귀영화만을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로 이 행동으로 인해 망국 촉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역사가들이 이를 부끄러운 행위라고 기록했는데, 이렇게 역사에 남을 줄을 회제가 몰랐다면 바보이고, 알고도 상관 안 했거나 자기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이 길을 선택했다면 이기적인 졸장부이다.
어쨌건, 위진남북조 시대의 군주, 그것도 망국의 군주[21] 치고는 그 일생이 놀라울 정도로 안락(...)했기에 정말 보신의 처세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 적어도 황실과 자신의 권위를 살리는 능력은 있지 않았느냐는 평가도 있다. 이에 대해선 제갈첨 문서의 각주에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어쨌건 이게 처세술이건 아니건 사마소는 촉정을 시작할 때부터 회제를 우매하다 평가했고 이런 꼴까지 봤으니 회제를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에 놔둔 것 같다. 어쨌거나 회제는 이 사건으로 자신의 본질이 자신의 권력과 안위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만으로 만족할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어필했고 그것으로 사마소에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3. 후일담


이후 회제의 후손들은 안락공의 작위를 이어 적당히 살다가, 오호십육국시대흉노유요#s-2왕미가 하북 지방을 유린할 때 몰살당하거나 흩어져 버렸다. 이때 헌제#s-2의 후손도 대부분 몰살당했으며 일본으로 달아난 유하지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또 채모의 후손도 유연의 부하 왕여 일행에게 모두 몰살당했다.
다만 친족 중 한 명인 유현이 촉 땅으로 도망쳐서 당시 촉 땅을 지배하고 있던 저족의 성한으로 망명했다. 유현은 회제의 동생이었던 유영의 손자다. 그는 거기서 촉 지방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환대를 받았고 동진의 역사가 손성과 만났다고 한다. 현재 소열제의 후손은 모두 유현의 후손이라고 한다.

4. 평가


회제의 치세는 40년이 넘어갈 정도로 길다. 이후 중국사에서 40년이 넘어가는 치세를 이룬 군주는 혼란과 광기로 가득한 위진남북조 시대를 포함해서 수백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470여 년간의 한나라 치세 전체를 봐도 회제보다 오래 재위한 군주는 한무제 뿐이다. 이는 소열제제갈량이 한실 부흥의 이데올로기 하에 촉한 정국을 잘 안정시켜 승계시킨 것도 있지만 회제 또한 자신이 누리는 권력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어느 정도 평가가 정착됐듯, 회제가 난세의 전제 군주 차원에선 무능한 인물일지 몰라도 적어도 인성은 모나지 않아서 인심이나 신하들의 마음을 떠나가게 할 만큼 악정을 펼치진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유지하거나 개인의 보신을 위해 살아남는 것은 어느 정도 유능한 자였기 때문에 40여 년이라는 치세를 유지하게 가능했다. 즉위 기간 대부분은 무난했지만 말년의 행적이 비판받는 군주라는 점에서 촉빠 가운데서도 그에 대한 옹호론과 비판론이 존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위의 낙불사촉 일화만 해도 양측의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는 일화 중 하나고.
회제에게 촉한 멸망의 책임을 모조리 돌릴 수는 없어도 결국 군주인 그에게 가장 큰 책임이 돌아가기에 사람들은 그의 행적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대해 숱한 가설을 제기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연의에도 나오는 얘기로 조운이 장판파에서 기를 쓰고 구해왔을 때 소열제가 땅에 내리치는 삽질을 하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아둔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근거는 없다. 위략에서는 소열제가 여기저기 떠돌아 다닐 때 헤어져 노예로 팔려갔다가 입촉 후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이른바 '''유선 벤허설.''' 촉과 에 대한 위략의 기록을 믿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조운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던 장판파#s-1에서는 미션 목표로 당당히 활약(?)했다. 사실 이 부분은 정사엔 없는 부분이라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이 망한 촉나라에 이유라도 달아주기 위해 회제를 의도적으로 더 얼간이로 바꾸지 않았나 하는 의혹도 있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아래에 나온 긍정론이나 부정론이나 모두 동의하는 회제 말년의 인선 실책에 대해선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단 것이다. 결국 이 떡밥 역시 '말년의 행적'에 대한 것으로 연결이 되는 사안이기도 하고.
확실한 건 회제는 보필하는 신하의 재량에 따라서 그 행적이 매우 달라지는 타입의 군주라는 것이다. 괜히 진서(晉書)에서 제환공의 다음으로 평가받는 게 아니다. 제 환공 역시 관중 생전에는 매우매우 훌륭한 군주였지만, 관중, 포숙아 사후 폭망했다.
결국 진수 말마따나 아주 얼간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총명한 군주도 아니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누리며 권력을 부여한 신하가 잘났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은 군주였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는 난세의 군주로서는 실패한 삶을 살았던 황제라고 할 수 있다.

4.1. 비판론


회제의 권력 기반이 공고하여 그 권위를 이용하여 제갈량 사후에도 장완, 비의 등 능력있는 신하들을 적절히 이용하여 내치에서 멸망 직전까지 딱히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 회제의 권력 장악과 유지 능력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소열제 사후 촉의 실질적 1인자였던 제갈량은 얼마든지 어리고 국정 경험 능력이 전무한 회제를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출사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항상 황제를 깍듯이 군주로 대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사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제갈량 항목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제갈량은 촉한의 재정을 익주 한 지역에서 나올 수 있는 극한까지 풍족하게 할 수 있는 체계를 확보해놨다. 장완과 비의 역시 제갈량이 생전에 안배해 둔 후계자들이며 그들이 자신들을 발탁해 준 장본인이자 롤 모델, 촉한인들의 우상인 제갈량의 행보를 따라 회제를 존중하고 떠받드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회제는 제갈량이 뼈빠지게 이룩해 놓은 체계의 결과물을 취했을 뿐이다.
애당초 제갈량이 기획한 건 제갈량 사단의 충심과 선정+회제의 덕(德)이었다. 때문에 회제의 권위를 짓누르려 하지 않았고 회제가 정사에서 관심을 떼게 만들려 하지도 않았다. 최종 결재는 반드시 회제가 했으며 회제가 지금 당장 정사를 주도하지 않는다 해서 사치+향락에 빠지지도 못하게 했다. 즉 회제가 정사를 주도하지는 않지만 국정에 관한 대부분의 일을 체득할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리 표면적으로 신권>왕권의 구도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정치싸움이나 권신이 국정을 농단하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수준이다. 위, 오와 비교할 때 말이다. 회제의 황권 장악도 기실 따지고 보면 회제가 뭔가 엄청나게 영악했다기보다는 장성한 황제가 권력을 먹어가는 순리였을 확률이 크다. 회제가 장성했으니 친정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황제가 친정을 하니까 기존 재상의 권력이 줄어드는 것 또한 당연하다.
충분히 잘 했다고 봤건 아니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딱히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더라도 주변 환경에 의해 물들기 쉬운 인간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정사 후주전에서의 평에도 나오는 것으로, 현명한 재상이 있을 때는 도리를 따르는 군주였으나 환관에게 물들어 우매한 군주가 되었다고 나온다. 장완, 동윤,[22] 비의 등이 보필할 당시에는 촉한의 국정이 크게 문제 없이 잘 돌아갔으나, 비의가 죽고 그나마 재주는 있던 진지가 죽으니 촉한이 제깍 막장테크를 타는 것을 보면, 결국 1차적 책임은 황호를 총애한 회제가 질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촉의 중앙집권화나 황제의 권위는 위, 오와 비교해 높은 수준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황호를 제어할 수 없었다. 회제는 대사령을 남발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또한 환관 황호를 총애하여 국가의 기강을 문란케 하였다. 친동생인 유영이 황호를 비판하자, 회제는 유영을 멀리하였고 진지 이후 황호가 득세하여 세도를 떨치자 촉한 사람들은 다들 동윤을 그리워 했다.

4.1.1. 통치의 문제


회제의 치세는 41년에 이른다. 이는 삼국 시대는 물론, 위진남북조 시대까지 망라해도 왕으로서는 독보적으로 긴 치세이다. 연의에서 제갈량 사후 스토리가 대폭적으로 축소됨에 따라 제갈량이 원맨쇼로 다 먹여살렸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회제는 제갈량 사후에도 29년을 통치했다. 물론 이걸 다 회제의 능력으로 평가하긴 어렵고, 제갈량이 자신의 사후를 대비해 그만큼 건실한 국력과 정치 시스템을 잘 확립해두고 이를 이끌어나갈 후계자들을 잘 선택해 놓아서 가능했다. 실제로 촉의 사영의 마지막 주자인 비의의 죽음 이후 10년 만에 촉한은 인격도 능력도 안 되는 환관 황호가 권력을 독점해 국정을 농단함으로써 종막을 고한다.
촉한이 멸망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진지의 대두를 들긴 하지만 적어도 진지는 거버넌스를 어느 정도 책임질 능력은 있었다. 진지의 문제는 역량 부족이 아닌 황호가 회제에게 다가가게 만들어 권력에 참여할 물꼬를 터준 것이 핵심이다. 진지가 죽자 회제는 크게 비통해하고 즉시 시호를 내릴 정도였으니 그렇게 총애한 진지와 친했던 황호에게 그 감정이 옮겨간 건 인간적인 측면에선 얼마간 자연스러웠을지도...결론적으로 촉한의 본격적인 막장화는 진지 사후 회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황호의 독주를 더 이상 견제할 방법이 없어졌을 때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고작 환관에 불과한 황호를 총애해 거버넌스를 붕괴시킨 건 어디까지나 회제의 선택이니 촉한의 멸망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은 당연히 회제라는 건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내용에 있어서는 좀 더 세심한 고찰이 필요하다. 회제의 죄목은 '''한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리더로서의 역량 부족'''에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 즉 말년으로 갈수록 영민한 재상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회제 본인에게로 권력이 전폭적으로 이양됐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권력의 주도권이 자신에게로 넘어오자 이를 다뤄 국정을 주도할 리더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즉 권력장악을 아무리 잘했다 한들 제대로 써먹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 맞물려 권력 분점의 파트너를 잘못 선택해 이들의 전횡을 방치함으로써 국가기강의 해이를 유발하고 거버넌스를 붕괴시킨 게 최대 문책 사유다. 그래서 여러 인재들을 소외시키고 국가 기강을 재정비할 뚜렷한 국가 비전을 제시하는데도 별 관심이 없이 유유자적 안분지족으로 일관, 회제가 초래한 정치적 아노미에 빠져 초점을 잃은 신하들이 자기 보신에만 급급한 각자도생의 상태로 전락하게 만들어 최종적으로 촉한의 멸망을 야기한 '''정치'''적인 차원의 자질부족이 두드러진다.

4.1.2. 인사 실책의 문제


흔히들 회제의 촉한은 아버지 소열제가 이릉대전에서 다 말아먹은 관계로 어쩔 수 없었다고도 한다. 실제로 이릉대전은 촉 8만 대 오 6만 5천~ 7만 정도 규모의 전투로, 촉은 북벌을 위해 조련한 병마를 오로 돌려 아직 완전히 오에 복속되지 않은 형주를 탈환하기 위한 것이고 오는 국가의 존망을 걸고서 겨룬 대전이었다. 촉한은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으나 결국 육손에게 대패하고 이후 1세대 장수들을 대신하여 군부를 이끌 수많은 인재와 병력을 잃어 국력이 파탄날 지경은 아니었지만 큰 피해를 입었다. 이릉 대전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듯이 이릉대전 '''직전'''에도 관우, 장비, 마초, 황충 등의 촉한 군부의 기둥들이 연이어서 죽고 그 외의 여러 인재들도 죽었는데, 그 뒤를 책임질 인재들은 이릉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이후 당시 명성을 천하에 떨치던 소열제의 죽음으로 국내외가 혼란하기는 하였지만 제갈량을 비롯하여 이엄#s-1, 이회, 장억 등에 의해 진압되고 몇 년 동안 제갈량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국력을 회복하여 소열제 시절보다 더욱 발전하게 된다. 거기에 제갈량은 이후 장완, 동윤, 비의를 비롯하여 자신의 북벌을 대신 수행할 강유라는 인재까지 포섭해서 자신이 죽은 이후까지 잘 대비했다. 거기에 제갈량이 죽고 나서는 하후패라는 인재까지 강유의 휘하인 거기장군으로 들어와 힘을 합쳤다.[23]
이렇듯 촉한이 무조건 인재가 척박한 땅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하고 그렇게 인재가 없었다면 서진 시기에 촉땅의 인재들이 천거 받아 중앙 정계에 들어갈 일도 없었을 것이지만 막상 강유시대의 고군분투를 보면 인재 부족의 열악함은 심각한 수준이다. 여기에 서진 시기 중용되었던 촉한 출신 인사들 상당수가 황호에 의해 중앙 권력에서 배제된 인사들이나 그에 반대한 인사들이 꽤 있었다는 부분까진 부정하긴 어렵다. 또, 촉한의 가장 큰 문제인 군부의 고령화 원인이 제갈량부터 잘못된것인지는 쉽게 판단 할 수 없고 제갈량, 장완, 비의, 강유의 군부 인재 발탁 시스템이 어떠했는지를 증명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회제의 친정 이후부터 하나의 흐름을 관찰할 수 있다. 비의 암살 전후로 정계와 군부를 분리시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정계와 군부 이원화 핵심은 황제=정계>군부였고 군부 1인자에게 인사권한을 삭탈했기 때문에 촉 후반기 군부 인선 문제는 황제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어쨌거나 인재가 부족했든 아니면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든, 문제는 그렇게해서 잘했으면 당연히 욕을 먹을 일이 없고 친정(親政)도 인재 선정도 적절한 판단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는 부분일 것이다. 집권 말기에 회제의 큰 실책이라고 평가받는 부분이 제갈첨, 동궐, 강유가 국정의 문란을 초래하는 황호의 계파에 속하는 인물들을 제거하라고 해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는 점인데 재위 기간 동안 큰 숙청 없이 국정을 운영했던 회제 입장에선 이전에 해오던 대로 자기가 믿음직하다고 생각한 인물들을 중용한 것이겠지만 문제는 이 시기 회제가 총애한 인물들이 국정에 믿음직한 인물들이 못 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 오나라의 사신으로 왔던 설후도 촉한 국정의 문란함을 회제와 대신들의 문제라고 판단했는데 분명 회제 말기의 인재 중용에서 그의 방식이 어긋난 부분이나 인재를 고르는 안목의 문제는 어쩔 수가 없다고 본다. 아무리 이전의 영명한 재상 가운데 한 사람추천한 인재그와 같이 일한 인물을 신뢰했다고 해도 분명 그 인물은 다른 영명한 재상이 엄하게 질책하고 가까이 두지 않길 권했던 인물이었는데 회제는 후일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그 사람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 인재가 어떤 인물인지 판단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의 문제는 군주 자신의 판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당장 촉한 멸망 당시 '적국이 공격한다는데 신하들 가운데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하고 따를 것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단순히 총신의 말을 따르고 다른 신하들에겐 알리지도 않았다는 사실에까지 이르면 회제의 판단을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스스로도 촉한이 망하고 끌려갈 때 극정을 보고서야 이런 신하를 진작에 못 알아본 것을 후회했다고 하니 결국 통치 기간 말기 회제의 선택은 스스로를 망친 선택이 되었던 것이다. 극정의 말을 그대로 따라주고, 극정을 일찌기 중용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면 인재 부족에 대해서 그도 늘 안타깝게 여기며, 아버지만큼 적극적이진 않았으나 현자를 찾는 군주의 미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그런 인재를 찾는 데 있어서 그의 판단이 아쉬운 부분이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부분이고 회제의 실책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울 뿐이다. 극정은 몇십여년간 군주 밑에서 봉사하던 인물이었는데 그 능력을 일을 그르치고 나서야 알고 중용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부분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특히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황호시대에 그나마 있던 인재들마저 황호의 눈 밖에 나면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하는 상황까진 옹호하기가 어렵다.

4.1.3. 북벌 정책의 문제


강유를 훼방놓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 역시, 정사 강유전에 엄연히 '암살의 위험을 느끼고 농서의 답중으로 도망하여 기회를 노렸다.'는 내용이 뚜렷이 있다. 강유의 북벌이 성과가 지지부진했다는 점을 들어서 회제를 옹호하는 의견도 있는데, 강유의 북벌이 이전 시대 제갈량의 북벌보다 규모가 작았다는 점은 일단 둘째치고 설령 그 규모가 커서 촉한에 경제적으로 부담을 준다면, 강유를 질책한 다음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제갈량 시대처럼 국가적인 재정비를 통해 소모적인 북벌을 유도하기보다 한번에 성공 가능성을 높이도록 북벌군에 충분한 지원을 해 준다든가, 그것도 별로라고 생각한다면 아예 비의처럼 군사 1만 정도만 주고 위나라에 대해서 견제만 하도록 하든가... 하여튼 '강유의 북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은 많았고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서 문제를 수정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며 회제는 그럴 만한 권위가 있다. 그러나 회제는 우유부단하고, 국가의 위기에 나태하고 태만한 태도를 취할 뿐. 적극적으로 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결단하는 지도력, 리더십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또한 강유의 북벌을 막지 않은 것은 강유의 능력을 믿어주고 활용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촉한의 국가 이념과도 직결된 문제이다. 북벌을 포기하면 장안과 낙양 등 한나라의 수도들이 있던 고토 수복을 포기한다는 것이고 한(漢)의 정체성을 잃은 것이므로 안 그래도 조위에 비해 국력에서 밀리는 데 국가 존재 이념조차 흐릿해진다면 그냥 멸망하겠다는 소리밖에는 안 된다. 북벌에 가장 소극적인 신권 1인자였던 비의도 암살 직전 동오와 연계하여 북벌을 하려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이 문제에서 회제가 지닌 문제는 북벌을 지속하는 '정책'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의사를 결정하는 '정치' 차원의 문제다. 염우 같은 장군이 회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 황호와 결탁하여 정쟁을 도모하거나, 강유 같은 인물이 암살 위험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회제가 주도하는 정치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다는 방증이다. 이는 회제가 황호를 중심으로 한 비선 라인에 필요 이상의 힘을 실어주었고, 그 결과 과거에는 정상적으로 진행되던 정책 논의 활동이 마비되어버렸다는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거기다가 동윤이 죽은 이후 회제의 사치 기록이 늘어나는 등 그의 자제력을 통제할 인물이 없어지면서 회제 자신도 갈수록 방종해졌다는 것 자체도 문제였다. 황제의 권위가 확고할수록 그만큼 정치적으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도 모자랄 판인데 회제는 이 부분에서의 자제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역사에 남은 암군 중 상당수는 신하가 똑똑하면 훼방을 놓았던 것과 비교해 보면 제갈량, 장완, 동윤, 비의 대에는 재상들에게 권력을 맡기고 그들의 조언에 따라 정치를 했으니 그 점은 인정해 줄 만하지만[24] 강유의 시대에는 '''훼방을 했다.''' 삼국지연의에서 강유를 제갈량의 후계자로 묘사해 오해를 사는 요지가 많은데, 강유는 위 셋과 같은 재상의 위치가 아니라 동오의 대도독과 비스무리한 장군의 위치였다. 비의의 뒤를 이은 것은 진지였고, 진지를 거쳐 황호가 중용되었기 때문에 강유는 발목을 잡히게 된다.

4.1.4. 안일한 통치의 문제


황호와 회제의 삽질 때문에 촉한은 위의 침공에 제 때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방어 체계가 무너져 멸망하고 만다.
회제는 '안락공'이라는 칭호대로 국가의 안녕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더 생각하는 행위를 보여줬다. 주도면밀하게 국가의 안위를 위해 노력한 제갈량과는 달리, 회제는 지나치게 안일했고 자신의 권력 강화에 더 몰두한다. 그 말인 즉슨, 위나라의 움직임이 회제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에서 촉으로는 공격은커녕, 촉으로 오는 길 자체가 험하다. 따라서 위나라의 공격 시도 자체가 촉과 싸우기도 전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위가 침공하는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굳이 방비를 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설사 오더라도,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충분히 막을 수 있으니, 위의 침공이 확실시 되는 시점에서 비로소 위에 대한 방비를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실제로 위나라에서는 촉 공격 얘기가 나올 때마다 '거긴 사람이 갈만한 곳이 절대 아니니, 제발 촉을 공격하지 말자'는 반대가 주류를 이룬다. 물론 회제가 위나라의 여론까지 고려했을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촉에 대한 공격이 엄청난 고난도임을 몰랐을 리는 없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회제는 안일한 생각을 갖고 황호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촉한 멸망...태평성대에는 회제의 정치술이 효과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회제가 살았던 시대는 난세였다. 더욱이 회제의 통치는 국론의 분열을 초래해 국가 행정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따러서 회제를 "사람은 좋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아무것도 안하는 상사는 때때로 대하기 편한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고 회제는 정확히 여기에 부합하는 사람이다. 애초에 회제가 강유를 진심으로 아꼈다면 강유가 조정 세력의 견제를 부담스러워해서 대장군씩이나 달고 최전방인 답중에 처박혀 있었을까. 회제를 옹호하는 발언 대다수는 "신하를 옭아매지 않았다" 가 섞이는 경우가 많은데, 실상은 제갈량 - 장완 - 비의 레벨으로 자기관리 철저한 원리원칙 주의자들이 재상을 맡지 않으면 제대로 보좌할 수도 없는 작자라는 게 다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는 상태이다.
촉한이 멸망하는 과정을 보면 회제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게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중침공 징후를 포착했음에도 점쟁이 말이나 들으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한중이 뚫려 검각에서 방어전에 벌어지는 시점에서 지원군이든 유격군이든 후방편성을 해야 할 테고, 실제로 지방에서 지원을 가겠다는 요청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인데 "아무것도 안 하고". 갑자기 산악왕이 뙇하고 등장해서 급히 편성한 요격군까지 갈아버리는 시점에서 성도성 농성을 하고 버티면 또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인데 여기서도 농성 같은 거 "안 하고" 넙죽 항복. 심지어 항복한 이후에도 "아무것도 안 하고" 지혼자 잘먹고 잘살다 죽는다. 상사가 "아무것도 안 하고" 점잔만 빼는 인간이면 최소한도의 책임감이란 게 살아있는 부하한테는 직장이 그냥 지옥이다.
따라서 회제의 행위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 권력을 추구하는 행위는 정치 과정에서 필연적 행위이다. 하지만, 권력을 추구하는 행위가 적절한 선에서 이뤄져야지, 지나친 권력 추구는 도리어 국가에 해를 입힌다.
  • 조직의 해체는 한순간에 오지 않는다. 촉한의 예로부터 알 수 있듯이, 조직은 해체 이전에 쇠퇴하기 시작한다. 해체는 조직 쇠퇴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시 말해, 조직이 쇠퇴하고 있는 와중에 특정 사건을 계기로 조직은 해체된다.
  • 조직은 외부 변화에 대해 민첩하게 반응해야 한다. 안일한 대응은 조직의 해체를 초래할 수 있다.

4.1.5. 멸망 직전의 막장 행태


멸망 직전인 260년에서 264년 정도까지의 행보를 보면 머저리도 이런 머저리가 없다. 당장 이 시기 회제에 대한 평가는 적군, 아군을 통틀어서 좋지 않다. 사마소는 회제를 검각만 뚫리면 지레 겁먹고 항복할 인물로 평가했으며 막상 정말 사천 평원에 적이 나타나자 항복론자 초주의 말만 듣고 항복해 버렸는데 이 조치는 당대 촉한 인사들을 비롯해 서진, 동진의 학자들에게까지 그 상황이면 근왕군이나 오의 지원군도 있는데 그냥 지레 항복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오의 사신 설후의 경우엔 대놓고 촉한이 쇠퇴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회제 탓이라고 했으며 또 중신들은 바른말을 하지 않고 백성들의 안색은 채소빛이었다고 한다. 육개는 익주의 지세는 위험하고 험난하며 병사들은 대부분 정예이고 강하였으므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 만대를 보존할 수 있었겠지만, 촉한은 주는 것과 빼앗는 것이 어그러졌고, 상벌(賞罰)은 마땅함을 잃었으며 군주는 마음대로 사치스럽게 하고, 백성들의 힘을 긴급하지 않은 곳에서 고갈시켰다고 비판했다. 오나라의 장제는 '촉한은 환관들이 전횡하여 나라에서는 정령을 내리지 못하고 무력을 남용해 백성들은 피곤하고 병사들은 지쳤다는데 밖에 있는 이익을 다투어, 지킬 준비를 못하였소' 라고 했다. 서진에 등용한 촉한 인사들 역시 이 당시 회제의 통치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당시 원자에서 원준도 당시 위나라도 앞에 수춘전투가 있고 뒤에 촉을 멸하는 공로가 있으니 백성들은 가난해지고 창고가 비었다고 했으며. 오나라 인물들도 사마씨가 국정을 다스린 이래로, 큰 재난이 자주 이르러, 지력이 비록 넉넉해도, 백성은 아직 복종하지 않고 있다. 지금 다시 그들의 자력을 다하여, 파촉을 원정하며, 병사는 힘들고 백성은 피곤하나 가엾게 여김을 모르니, 무엇을 할 겨를도 없이 패할 것인데, 어찌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했을 지경이니 위나라 역시 군사를 동원하는데 사정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촉한도 나라 사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촉한이 이기면 오히려 역전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항복한 것이다.
회제가 농부 같은 일반 직업을 가진 일반인이었으면 문제가 없지만, 그는 한 나라의 군주였다. 어찌되었거나 결국 촉한 멸망에 대해서는 그가 가장 큰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두고 서양적 사고관이라며 동양적 군주론에 의하면 회제보다는 보필할 인재 등의 부족이 문제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견 역시 존재한다. 제갈량 생전에도 커다란 계획을 잡고 전투 중이었던 제갈량에게 이엄의 거짓말을 듣고 다시 돌아오게 해서 큰 작전을 망친 적이 있었고 보필했던 인재나중에 아첨을 듣자마자 이를 갈면서 원망하고, 나중에 중용한다는 자가 아첨밖에 모르는 환관밖에 없는데, 이 자에게 나라의 권세가 집중되니 이쯤되면 인재가 모자랐다기보다는[25] 간신들에게 모든 힘이 돌아갔다고 밖엔 볼 수 없다, 강유를 고립시켜 말뿐인 대장군을 시켰으며 그외에 다른 장수들도 방해가 심했으며 또 회제가 그들을 총애하여 이를 해결하려는 마음가짐이 없었던 탓이 크다. 도리어 강유의 급박한 서신을 황호의 말을 듣고 무시하고 덮었는데[26], 이는 인재가 없었다는 이유로 커버되지 않는다.
군주가 인간적으로 제법 선량했거나 방탕하지 않았다는 것은 국가를 지키려는 의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사소한 부분이다. 회제는 촉한멸망전 당시 황호가 추천한 무당의 말을 믿고 최전방에서 강유가 올린 보고를 무시하다 한참 늦은 대응을 하였고, 마막 같은 인간을 강유관의 수장으로 있게 하였으며, 언제인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남반부에 있던 곽익이 성도로 지원을 가려 하자 거부했다. 이 셋 중 한 가지 일만 없었다면 등애가 성도를 위협하는 일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27] 설령 제갈첨이 이끄는 성도 방어군이 무너졌으며, 강유와 염우가 이끄는 촉군과 동오의 지원군이 오는 것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해도 절벽 타고 온 등애군이 공성 장비가 없을 것이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회제가 백성들을 징발하고 최대한 병사들을 끌어모아 성도를 방어하거나 하다 못해 청야하고 피난이라도 했다면 험지를 넘느라 지치고 제갈첨군과 싸우다 상한 등애군이 회제를 잡는 것은 어려웠을 것인데, 회제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보다도 못한 국가 사수 의지를 보였다. 인간성이 좋았다는 것은 아주 지엽적인 논쟁에 불과하며, (멸망에 처한 나라치고는)비교적 양호했던 촉한의 국가 상황은 오히려 회제가 암군이었다는 확실한 증거일 뿐이다.[28]
이렇게 자기가 통치를 잘못해 나라를 말아먹어 백성들이 외적의 침공에 공포에 떨게 되었는데 권력의 정점에서 가장 책임을 다해야 할 군주란 자가 외적을 물리치지 않고 한다는 짓이 (자기가 사지로 몰아넣은) 백성을 위해 항복하자는 웃기지도 않은 명분을 내세우곤 실제론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항복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후 회제의 이름은 사천 지방 사람들에겐 '어리석은 자가 천리강산을 소홀이 했다'는 한탄의 대상이 되었다. 회제는 한마디로 권력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는 알았지만 결국 그 정도 뿐의 인물이었다. 이때 황호에게 휘둘리는 회제는 군주론에서 "군주는 충고를 잘 들어야 하지만 아무나 당신에게 충고를 하게 해선 안 되며 최종 결정권자는 어디까지나 군주 자신이어야 한다."의 격언에 어울리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4.2. 긍정론


일단 긍정론이라는 것은 이상과 같은 평가가 다소 가혹하다는 옹호이지, 그가 촉한 멸망을 자초한 암군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4.2.1. 잘한 건 없지만 잘못한 것도 드물다


회제는 '''민생과 내치'''에 있어서는 뚜렷한 치적을 남긴 게 아닐[29] 뿐, 정치적인 측면과 달리 두드러진 실정은 없다. 물론 치세 후반에 많은 문제가 생긴것은 사실이긴 하다.[30] 그런 의미에서 황호가 집권한 경요 연간(258~263)에 오나라의 사신으로 촉한에 갔던 설후는 촉의 정치가 막장이고 촌야를 지나가보니 백성들의 얼굴빛이 (잘 먹지 못해) 채소빛이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회제가 항복했을 때 항복 조서에 따르면 '백성들은 들에 널리 퍼져있고, 여분의 식량과 남은 곡식은 밭이랑에 가득히 쌓여 있으니 (풍년이 들었습니다.)'라고 쓰여있다.(百姓布野,餘糧棲畝)[31][32][33] 들에 농사짓는 백성들이 퍼져 있고 풍년이 들어 백성들에게 여분의 식량이 남았다는 얘기인데 자기의 통치가 부덕하고 암약하다며 까는 와중에 촉한의 통치 사정을 굳이 미화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또, 막상 촉을 정벌한 등애는 촉한에서 철과 소금을 굽고 배를 만들면 다음 해 가을 겨울에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했다. 오나라의 육개는 비록 군주는 사치스럽고 백성들의 힘을 긴급하지 않은 곳에서 고갈시켰다고 까긴하나 촉한의 멸망 당시 병사들은 대부분 정예이고 강하였으므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 만대를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화핵 역시 적이 서쪽으로 개미떼처럼 몰려들었을 때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했으며 촉나라는 토지가 험하고 견고하며, 게다가 소열제의 통치 방법을 이었으므로, 그들의 수비는 오랜 시간 지탱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전복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평가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한때 촉한의 멸망의 핵심으로 전쟁광 강유가 북벌에 미쳐 나라를 거덜냈다는 시각이 유력시됐지만 이는 많은 반례의 등장에 힘입어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하루에 천금을 소비한다는 전쟁이 지속되었으니 촉한의 재정에 꽤 부담을 준 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일 터인데 여기에 회제의 사치까지 도가 지나쳤다면 당연히 촉한의 재정은 거덜났을 것이다. 그러나 외려 후에 촉한을 점령한 등애가 촉한의 물산으로 능히 동오를 칠 수 있으니 신속히 공격하자고 주장하고 비단이 수십만 필씩 쌓여있는 촉한의 경제 사정은 망국의 그것과는 달리 꽤 건실했다는 것이 근래의 주된 평가다. 등애의 주장은 강유와 회제를 동시에 변호하는 논거로 쓸 수 있다.
삼국지연의가 너무 히트를 치는 바람에 회제는 암군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같은 망국의 군주인 동오의 말제마냥 딱히 폭정이나 학정을 저질러 애꿎은 신하들을 도살하고 백성을 괴롭힌 게 아니다. 치세 동안 쓰레기짓만 일삼다 나라를 거덜내고 서진에 잡혀가서 의연한 태도 좀 보인 걸 근거로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같은 일부 2차 창작물에선 회제보다 훨씬 더 대접이 좋은 게 말제인데 회제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할 듯. 또 본인과 비슷하게 환관을 권력 파트너로 삼아 국가를 말아먹은 후한의 환, 영제처럼 국정 운영에서 완전히 유리돼 황음무도를 달리다 국가 재정을 거덜내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것도 아니다. 물론 놀기 좋아했다는 평가나 동윤이 후궁의 수를 늘리고 싶어하는 회제의 요구를 이미 만석이니 증원할 수 없다고 일축한 것처럼 전제 군주의 스탠스에 입각해 적당한 선에서 향략과 여색을 즐겼으니 삼국 시대 검소의 아이콘 오 대제처럼 딱히 근검 절약[34]하는 군주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한 토목 공사 등으로 국가 재정에 압박을 줘 백성을 괴롭히고, 심지어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장수들과 병사들의 봉록까지 깎게 만들어 신하들로부터 비판받은 동시대 위 명제 수준에 준하는 실정도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즉 회제는 '''적어도 사람은 확실히 착했고[36][37] 아버지 소열제가 남겨준 인재들을 신뢰하고 그들의 역량을 십분 잘 써먹은 군주이긴 하다'''. 제환공에게 비견된 것처럼 군주가 이렇게 신하들을 신뢰하고 권력을 맡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38][39] 황호의 발호를 허용한 진지 역시 회제가 마지막 사영인 비의의 추천을 받아서 등용한 인재이고 적어도 진지는 아부를 잘하고 황호가 국정 운영에 참여시킨 것 외에는 큰 무리수를 두진 않았다.[40] 진지가 국정을 운영하던 당시엔 황호가 대놓고 전횡하는 일은 없었으며 초주와 협공으로 강유를 견제하긴 했지만 이는 성과를 내는 데 지속적으로 실패한 북벌이라는 정책의 지속 여부를 두고 벌어진 정상적인 정쟁이었지 후에 황호 시절 마냥 강유가 신변에 위험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즉 마지막 5년의 황호 시절을 제외하면 회제는 삼국 시대 군주들 가운데 그렇게 악평만 받을 군주는 아니라는 것이다.

4.2.2. 권력 장악은 뛰어난 군주였다


국정의 상당 부분을 능력 있는 신하들에게 위임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회제는 동시기 위와 오의 전폐제, 후폐제, 원제, 소제처럼 무력하게 군주의 권리를 놓친 적은 없었다. 회제의 재위 기간은 자그마치 40년이나 되는데, 이는 삼국시대 모든 황제들 중 가장 길고, 전한-후한-촉한의 모든 황제 중 전한 무제의 재위 다음으로 가장 길다. 즉 이러한 점은 회제가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황실의 위상을 유지할 만한 능력은 갖춘 전제 군주임을 보여 준다. 갈수록 재평가되듯 회제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리더로서의 리더십과 역량은 떨어졌을지 몰라도 적어도 황권과 신권을 적절히 조율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하는 제왕학적인 면모, 정치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고단수에 가까웠다.
실제로 회제의 권력 장악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즉위 초에는 아버지 소열제의 유언을 받들어 탁고대신인 제갈량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거의 전권을 위임하여 전한 초기의 제도를 따랐지만,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하자 더 이상 후임 승상을 임명하지 않아서 즉각 한무제 이후의, 황제가 직접 국정을 관장하는 제도로 권력 구도를 재편했다. 이는 상징적으로는 제갈량을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촉한의 신하로서 더 이상 올라설 곳이 없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추켜세우는 것으로 대개는 제갈량에게 간택받은 인물들 혹은 추종자들로 짜여진 촉한의 인적 네트워크, 즉 신권에 존중을 보이는 표시임과 동시에 현실적으론 앞으론 그 누구도 제갈량과 같이 전권을 누리지 못하도록 만든 권력 의지의 표현이다.
애당초 제갈량 생전에도 회제의 권위와 권력, 권한이 결코 적지가 않았다. 비록 정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선제 회제에게 조언하는 수준의 위치였지만 그래도 조정의 원로이자 거기장군이었던 유염만 해도 회제를 간통으로 의심하고 아내를 폭행해 감히 황제의 권위에 손상을 입히려하자 바로 재판에 넘겨져 처형당하는 것을 보면[41] 당시 촉한에서 회제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회제가 재판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는데도 재판하는 관리가 황제에게 감히 기군망상의 불경죄를 저지른것은 설령 거기장군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 알아서 회제에게 기었다는 소리니까. 이건 제갈량이 아직 살아있고 한중에서 북벌군을 막 이끌고 출발하려 할 때 성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갈량이 서거하자 그를 욕한 이막을 바로 죽인 것도 그렇고 회제는 제갈량-장완 시절에도 촉한의 황제로서의 막강한 권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신하들의 생살여탈권을 쓰려면 얼마든지 바로 쓸 수 있었다. 단지 유능한 재상들에게 정사를 맡기는 게 더 편하고 굳이 심각한 일이 아니면 신하들을 해치지 않으려는 성품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그런 재상체제에 자신의 권력을 어느정도 이양하고 이걸 인내하면서도 필요하면 '내가 안 써서 그렇지 주어진 권력을 쓸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보통의 권력 감각을 가지고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제갈량 사후 그의 사당을 짓는 것을 불허하기도 했다. 물론 회제가 인간적으로 제갈량을 싫어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제갈량 사후에 이막이 제갈량을 비방하자 평소와 달리 크게 노하며 즉시 이막을 하옥하고 죽인다.[42] 이막은 익주 토박이 출신에 재능과 명망이 있었지만 너무 오만하고 방자해 스스로 명성을 실추시켜 형제들인 이조, 이소,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요절한 형제가 이씨 삼룡으로 세간의 칭송받을 때 여기서도 소외될 정도로 돌출된 성격의 인물이다.
이막은 이미 회제 이전에도 소열제와 갈등을 빚다 그 재능을 아낀 제갈량의 변호로 겨우 화를 면한 인물인데, 그후 제갈량에게 중용받아 나름대로 출세 가도를 걷다 제갈량의 1차 북벌까지 종군했으나 신상 필벌의 원칙에 따라 마속을 처벌하려는 제갈량을 걸고 넘어져 결국 실각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자신을 구해주고 중용한 제갈량이 죽자 마속의 처벌 문제로 자신을 실각시킨 원한을 잊지 못하고 곧바로 제갈량을 비방하는 걸 보면 배은망덕하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회제도 이를 잘 알기에 예외적으로 크게 화를 낸 걸지도 모를 일이다. 이막과 비슷하게 마속 문제로 실각한 상랑은 별 말이 없다.
여담으로 사사건건 촉한의 최고 권력들과 쓸데없는 대립각을 세우다 결국 화를 자초한 이막과는 달리 형제 이조와 이소는 촉한의 최고 권력들에게 총애를 받았다. 이조는 소열제의 총애를 받아 소열제의 한중왕 즉위에 논리적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문서 작업을 담당했고 이릉 대전까지 종군했다가 패배하고 퇴각한 영안에서 사망한다. 이릉대전에서 부상을 입어 죽은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 편. 이소는 제갈량의 총애를 받았다. 제갈량은 1차 북벌에 귀순해 온 강유를 두고 "양주 최고의 인물로 계상과 영남도 여기에 못 미친다"고 찬사를 보냈는데 여기서 영남이 바로 이소다. 계상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량. 형주파를 대표하는 재능으로 일컬어지고 무엇보다 의동생으로까지 보는 시각이 있을 정도로 제갈량과 친분이 깊었던 마량과 같이 언급되는 걸 보면 재능도 뛰어나고 제갈량도 많이 총애한 듯.
어쨌거나 회제는 개인적으로는 몹시 신뢰하고 좋아한 제갈량이고 또 그 능력을 아주 요긴하게 잘 써먹었지만, 공적으론 제갈량 사후 백성들이 그의 사당을 세우는 걸 허락하지 않는 걸로 신권이 황권의 경계를 넘어서는 걸 적절히 견제했다는 뜻이다. 군주 입장에서 회제는 위대한 대신에 대한 추종이 지나친 것을 경계했을 공산[43]이 있다는 것이다. 제갈량은 단순 재상 개인에 국한된 존재가 아니라 그가 선택한 장완, 비의, 동윤, 강유 등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가 촉한의 인적풀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신권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따라서 적절한 수준에서 견제가 필요했을 것이다.[44]
또 회제의 치세는 황족들이나 외척의 간섭에서 자유로웠으며 신권과 황권이 갈려 권력투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신하들끼리 당파를 나눠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파벌 다툼도 없었다. 당장 위와 오가 이런 로 얼마나 피바람이 몰아쳤는지를 생각해 보면 말년을 제외한 회제의 전반적인 치세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만큼 소열제-제갈량이 깔아놓은 촉한 특유의 정치 시스템인 '''한실 부흥의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유씨 황제의 확고한 권위하에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재상 중심 체제로서의 군신 관계'''를 제대로 이행하고 또 이용한 군주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 안배한 인재들의 능력을 통한 것도 상당했겠지만... 즉 회제의 치세 동안 오직 황제의 그림자 밑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인 환관 황호만이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다는 것은[45] 그만큼 촉한 황실의 위상이 동시대 타 국가에 비해 확고한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쩌면 말기의 회제는 내정의 황호, 외정의 강유 이렇게 나누어서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46] 막판에 강유 등을 견제한 것에 대해서는 황권을 강화시키기 위함이라는 의견도 있다지만 회제의 헤게모니는 제갈량 사후 승상직을 공석으로 남겨놓은 것이 말해주듯 꾸준히 강화되고 있었고 회제는 끝까지 강유와 황호 둘 다 죽이거나 내치지 않고 안고 가려고 했다. 회제의 즉위 40여 년 동안 제갈량과 강유는 한실 부흥을 명분으로 30년에 걸쳐서 끊임없이 북벌을 행[47]했는데, 정말 회제가 강유를 견제해 북벌을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옹, 양주를 아우른다는 목표 달성에 계속 실패한 강유의 북벌을 얼마든지 중단시킬 명분도 권위도 여론도 다 갖추고 있었지만 북벌 자체를 회제가 그만두라고 한 적도 없었다. 강유가 황호를 죽이려 한 것처럼 황호 역시 강유를 상당히 미워했을 텐데 회제는 둘 사이에서 나름대로 균형자 역할을 하려고 했을지도... 다만 황호를 강유보다도 더 신뢰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자세히 보면 회제는 장완 사후부터 친정을 시작하며 황제권을 계속 늘려갔으니 일하기 싫어서도 아니다. 황제 노릇 하기 싫고 그저 놀고만 싶다면 태자 유선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군림하면 그만이다. 당장 제갈량 시절에는 탁고대신 제갈량이 북벌 계획을 수립하고 황제에게 보고하는 방식이었다면 장완때부터는 황제 스스로가 신권 1인자에게 개부 명령을 내려 실질적으로 북벌 계획을 명령하는 모습을 보인다. 회제가 친정하기 전 부터 말이다. 촉한의 이념이 한실부흥이고 여기서부터 권력이 나온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제갈량 사후 북벌을 주도하는 권한이 실질적으로 회제에게 있었다는 것은 그의 권력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자치통감과 후주전에 보면 장완시기인 236년에 전(湔)현에 이르러 멀리까지 관람할 수 있는 조망대인 관판[48]에 올라 문수(汶水)의 강물을 구경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대목에서 자치통감의 음주자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제갈량이 죽은 후 회제가 (촉한 지역을) 유람하고 관람하는 걸(游觀) 아무도 감히 막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이미 장완 시절부터 회제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음을 뜻한다. 비의 때부터 회제는 본격적으로 친정했고 이 시기 강유의 북벌이 철저하게 회제가 뒤를 봐주지 않았다면 강유의 입지상 강유 혼자 북벌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는 점도 이를 시사한다.
애당초 제갈량이 후계자로 지목한 장완과 비의 같은 경우도 그렇다. 장완의 경우 제갈량이 평소 성질이 나쁜 양의가 자신이 죽고 나서 대신하는 일이 없도록 장완을 추천한 것에 가깝고 비의는 회제가 제갈량 사후 국정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상의하기 위해 직접 이복을 자신의 대리자로 오장원에 있던 제갈량에게 보냈을 때 장완과 같이 추가적으로 지목된 것으로 회제가 제갈량더러 사후 후임자를 정하라고 한 것에 가깝다. 또 비의는 진지를 중히 여겨 회제를 모시게 했고 회제 역시 진지를 총애했다. 이는 회제가 친정을 시작하던 비의 시기에 제갈량의 후계 세력이 회제와 잘 영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회제 말년에 강유, 진지-황호-염우, 제갈첨-동궐-번건 모두 어느 누구도 정국의 주도권을 못 갖고 서로 치고 박고 싸운다. 회제는 이 세 그룹들을 다 중용하며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권력을 나눠주었다. 동시기 조위와 손오에서 권력투쟁에서 밀린 정파와 인사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갈려나가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는지를 감안한다면 아무리 한실 부흥의 이데올로기하에 안정된 정치 시스템을 가져간 촉한 특유의 정치 생태계라지만 이건 황제의 결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어쨌든 이건 뒤집어 말하자면 어느 누구의 피도 흘리지 않고 최종 결정권자인 회제의 권력이 올라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파벌들이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고, 실제로 회제 입장에선 꽤 효과적인 권력 분배였던 건 사실이다. 문제는 이 권력 분배의 한 축에 능력도 인성도 안 되는 간신 황호가 있었다는 점. 진지 같은 경우는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모를까 재상이라는 중책을 맡기에는 품성엔 문제가 있었지만 적어도 능력은 있어서 국정을 이끌어나가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남겨준 신료들을 신뢰하고 중용하고 권력을 맡기면서도 황실의 위상을 유지하는덴 나무랄대가 없었지만, 정작 그 인재들이 하나둘 사라지거나 노회하면서 자기의 능력으로 국정을 이끌어가고 또 함께 만들어나갈 인재를 선택해야 할 시기가 닥치자 자신에게 아부하고 좋은 말만 해주는 예스맨들만을 기용하여 중히 쓰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선 정말 회제가 진지나 황호 말고 다른 대안을 찾았더라면 촉한이 그 지경까지 가진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 전폐제와 오의 소제는 9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불과 1~2년 이내에 권력을 빼앗겼고, 위의 후폐제, 원제, 오의 경제는 허수아비로 즉위한 경우인데, 심지어 경제 손휴는 권력을 되찾아오기도 했다. 게다가 즉위당시 회제보다 입지가 좋았다고 보기 힘든 위 문제나 명제는 물론, 처형당한 죄인의 아들이자 막장군주였던 오 말제마저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왕조의 정통성을 내세운 촉한에서 17세의 나이에 충신들의 보좌를 받으며 즉위한 회제가 9살짜리 어린아이에 비해 나았다고 해서 '권력 장악에 뛰어났다'라고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위 문제, 명제, 오 말제 등은 신하들의 간언을 무시하고 사치를 부린 것에 반해, 회제는 동윤의 간언에 꼼짝도 못하고 두려워했고 그의 사후에 황호와 진지등의 협조를 받고나서야 마음껏(?) 사치를 부린 것을 보면, 촉한의 입장에서는 다행한 일이었겠지만 권력 장악 능력도 오히려 수준이하였던것으로 보인다... 라는 주장도 있지만, 권력 장악력이란 단순히 '쫒겨나지 않는 능력' 의 수준이 아니라 국정 전반에 대한 장악력까지 포함한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호족이나 문벌의 득세를 통제하지 못한 위, 오에 비해 회제의 촉한은 어쨌건 황제 개인에게 권위와 전권이 집중되는 체제였던 것. 물론 이것은 회제의 능력으로 인한 성과라기보다는 소열제가 기초를 닦고 제갈량이 완성한 권력 구조 위에 회제가 잘 올라타서 가능했던 일로 보이기는 하나, 결과적으로 보면 촉한이라는 나라 전체를 통제하는 권력의 '장악력'이 특히 명확했음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4.2.3. 인선문제에 대한 변호


이러한 인선 문제를 어느 정도 변호의 여지가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첫째로 자기 정치를 해보고 싶은 회제의 권력 의지를 든다. 본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평생을 아버지 소열제와 제갈량이 마련해 둔 인맥풀의 한복판에 있다 보니 전제 군주로서 어느 정도 염증을 느끼는 게 인지상정이지 않냐는 얘기다. 즉 본인 주도하에 자기 사람들을 중심으로 인적 개편을 하고 싶어하는 '물갈이' 욕구가 드는 건 당연지사이지 않겠냐는 시각이다. 이는 현대 권력 정치에 있어서도 지도자가 바뀌면 흔히 일어나는 정치 스케줄이다. 때문에 진지와 황호를 총애하고 귀순한 하후패를 우대한 것은 본인 중심의 리더십을 형성하기 위한 권력의지의 발로로 이해하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진지는 회제가 발굴한 인물이 아니라 비의의 추천으로 임용된 인물이고 황호는 진지 사후 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체재에 가까웠다. 기존의 인적 네트워크에서 동떨어진 인물들이 아니었다는 얘기. 그리고 하후패 같은 경우는 강유와 장억과 금세 친해진 것이 말해주듯 기존의 군부 네트워크에 녹아든 인물이지 회제의 비호하에 새로운 그룹을 형성한 진지-황호와 가까웠다는 얘기는 없다. 게다가 하후패는 귀순 시점에 이미 환갑을 넘긴 노장 중의 노장(...)이다. 회제가 주도하는 새로운 리더십을 창출하는 대임을 맡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둘째로 촉한의 인재난이다. 회제 말기 남아있던 소열제-제갈량 시대의 구신들은 강유, 요화, 장익, 종예, 호제, 동궐, 곽익 등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군부의 인물이었고 무엇보다 곽익 정도를 제외하면 다들 나이가 너무 많았다. 맹광이나 내민 같은 인물도 있었지만 이들은 초주처럼 정치가라기보다는 학자적 정체성이 강한 인물이었고 이들 역시 나이가 너무 많았다. 황호를 총애한 게 아니라, 그나마 본인 시야 안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게 황호 뿐이었을 가능성도 크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낙양으로 끌려간 이후 그제서야 극정의 식견에 감탄하며 진작에 중용했다면 하고 한탄[49]한 것을 보아 걍 본인의 안목 부족 혹은 황호에 대한 총애가 지나쳤다고 봐야할 듯. 극정은 연의에서처럼 갑톡튀한 인물이 아니라 촉한에 30년 이상을 봉직한 인물이다. 즉, 촉한사영으로 대표되는 소열제와 제갈량이 남겨준 도덕성과 능력이 검증된 인재풀이 소멸되기 전에 선대처럼 황권강화를 뒷받침할 도덕성과 능력을 갖춘 친위세력 인재풀을 진작부터 육성해야 했는데 회제는 여기에 소홀했고, 결국 남은 대안이 없자 이전부터 총애하던 황호 같은 환관이 익숙하니까 국정을 맡기고야 만 것이 유선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강유의 황호 제거 간언 같은 사태가 발생할 지경으로 와도 사실상 황호의 전횡을 방치하고 아무것도 안 한 것도 큰 실책이었다. 황권을 위해서 환관을 이용하려면 적당한 수준에서 환관을 제어할 필요가 있는 것인데 회제는 황제로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또, 북벌의 경우 전쟁을 준비하면서 문무에 능한 인재를 선발하고 이들을 황제의 친위세력으로 삼아 그들의 유능함과 공적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신하들이 불만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가지는데 말년의 회제는 북벌을 강유에게만 떠넘긴 채 강유가 성공하던 실패하던 그를 제대로 보좌할 인재를 새로 선발하거나 중용하지 않았다.[50] 결국 강유는 혼자서만 죽어라 분투했고[51] 혼자서 욕받이가 되었으며 북벌의 성공 가능성도 갈수록 낮아지게 된다. 즉, 본인이 국정 운영을 할 거면 본인의 인재풀을 만들어 쓰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소열제와 제갈량은 뭐 아무런 노력도 안하고 회제에게 남겨줄 그런 인재풀을 끌어 모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회제는 황제로서 국정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거기에 신경을 써야 했음에도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말로 촉한에 정무를 맡기고 황제에게 충성할만한 인물이 그렇게 없던 것도 아니다. 번건, 왕숭, 문립, 수량, 이밀, 두진, 진수, 이양, 두열 같은 촉한의 구신들은 서진 정권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고 꽤 출세한 인물들[52]이다. 따지고 보면 황호에 의해 소외된 나헌 같은 경우도 원래 문관에 가까웠던 인물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진지에 의해 소외되었던 방굉 같은 인물도 있다.

4.2.4. 소결


요컨대 촉한이 멸망하기 10년 전 정도에 죽었더라면 '''나쁘진 않은''' 군주, 아니 나름의 성군이자 명군으로 남았을 여지가 있는 황제였다.[53] 촉한 멸망 10년 전이면 253년인데 비의가 그해에 회제 대신 암살당해 죽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조금 놀기 좋아하긴 했지만 황호도 권세를 누리지 못했고, 정사의 언급처럼 훌륭한 신하가 있을 때는 도의를 따르는 군주였기 때문에 암군까진 아닌 평범한 군주로 남을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삼국지가 2천년의 시간이 지나며 민간설화화, 소설화되면서 삼국지의 인물들은 역사를 떠나 많은 사람들 머리 속에서 이상적인 영웅화가 되었고, 이들 사이에선 "주인공"이나 다름없는데다 소열황제 유비와 제갈량에 대한 아쉬움도 컸다. 안 그래도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던 소열제, 관우, 장비와 제갈량에 대한 미화가 이를 보여준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 촉을 멸망시킨(?) 회제는 아주 바보천치거나 인간쓰레기로 보는 폄훼가 많았다. 또한 이에 대한 반발로 회제를 명군의 자질은 있는 불운의 군주로 보는 미화도 있어왔다.
그러나 공정하게 보면 당시 촉한의 상황이 안 좋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안 좋은 상황을 타개할만큼 군주로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즉, 능력적으로 보면 회제는 훌륭했다고 보긴 당연히 무리지만 그렇다고 아주 형편없다고 보기도 힘든 '''평범한''' 인물이었다는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황제인 회제가 쓰레기, 혹은 완전한 무능력자였다면 아무리 제갈량이 시스템을 잘 구축해놔도 고대국가가 40년이나 운영되는 건 무리다. 그렇다고 별다른 업적도 없는 회제의 능력을 고평가하는 것도 말도 안된다.
회제가 능력의 능력을 두고 뛰어났냐/무능했냐고 딱 잘라 말하는 건 무리인게, 역사적으로 둘 다 아닌 평범한 군주들이 훨씬 많다. 회제 역시 능력으로는 별로 튀지도 않으나 인품은 괜찮고,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그럭저럭 다스릴 평범한 군주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난세에 약소국가를 이끌어나갈 인물은 아니었기에 말년에 결과적으로 큰 실책을 여러번 저질렀고, 이에 따라 암군으로 기록되게 된 것이다.[54]

5. 관련 논쟁


회제의 통치가 실망스럽다보니 '회제에게 황제를 물려주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하는 떡밥이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은 코에이 삼국지가 아니다. 소열제가 게임마냥 능력치 보고 "아, 유선은 능력치가 안되니 왕세자 시키면 안 되겠음."할 수 없다. 연의에 묘사된 내용은 이미 알려진 역사적 내용을 가지고 재구성했기에 '회제는 무능하니 이랬을 것이다.'라고 판단해 각색을 한 거지 정사에는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부터 제갈량 사후 이전까지는 능력에 대해 이렇다 할 검증된 것도 없었고 무능의 징조도 없었다.
특히 "촉한"이라는 국가가 조위에 대항해 명분과 정통성을 갖기 위해서는 소열제의 혈육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위 문제는 역성혁명을 일으켰지만 헌제를 통해 "선양 받았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촉은 전한 고제가 일어섰던 한중을 토대로 한중왕에서 시작했고, 소열제가 칭제한 이후에 선택한 국호도 "한나라"였다. 그리고 본래있던 한나라를 무너뜨린 위 문제를 역적으로 규명한다. 따라서 그에 대립할 만한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는 한실의 핏줄이 닿아있는 소열제의 혈육이 황제가 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55]
일단 소열제의 한중왕 즉위 시점에서 보자면 회제를 대체할 만한 사람이 있냐에 대해서 의문점이 든다. 유봉의 경우 양아들인 탓에 서자이긴 해도 온전한 혈육인 회제에 비해 정통성 면에서 떨어지므로 국론 분열의 우려가 있다. 당장 위 명제가 양자인 전폐제를 후계로 삼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자. 능력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유봉은 군공을 세운 전적이 있지만 군주로서의 능력이 검증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천하는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으로 봐도 유봉 역시 맹달과 불필요하게 반목하며 그의 군악대를 몰수한 탓에 맹달이 위로 투항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는 등 군주의 자질 측면에서 미덥지 못한 점이 많다. 그렇다고 유영유리의 경우 회제보다 낫다고 장담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결정적으로 이 둘은 너무 어렸다. 당장 이 양반한 일이 기어코...
그렇다고 소열제가 유언을 남긴 것처럼 제갈량이 회제의 제위를 찬탈하는 것[56]도 불가능하다. 아니 애시당초 위에서 설명했지만 소열제와 제갈량이 세운 시스템 자체가 황권의 권위 확립과 그를 바탕으로 한 신권의 원활한 통치인데 그걸 만든 사람이 뒤집을 리가 없다. 아무리 선제가 유언을 그리 남겼다해도 과연 따를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의문이고, 결정적으로 회제가 막 즉위했을 시점에도 정치적 경험이 없다 뿐이지 회제의 능력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 '''괜히 소제를 폐위한 동탁역적이라고 욕을 먹는 게 아니다.''' 물론 동탁이 게임 데이터[57]를 들고 와 "후소제가 이렇게 능력치가 부족해 무능하다고 볼 수밖에 없으므로 폐위시켜야 함." 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58] 설령 그랬다 쳐도 욕을 먹을 판국이다. 또한 헌제조씨가문으로 예로 들면 더 심각해지는데, 이렇게 보면 '''조씨 집안이 했던 짓을 그대로 답습하는 격이 된다.''' 이러면 촉한정통론이고 나발이고 망했어요가 된다.
즉, 능력이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폐위를 운운하는 건 명분도 없을뿐더러 애당초 '''회제의 어머니 감씨를 소열황후로 높여서 회제의 권위를 확고부동하게 만든 것이 제갈량'''이다. 제갈량 입장에선 회제의 정통성을 부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촉한이라는 나라 자체의 대의명분, 소열제-제갈량의 정치적 입장이 바로 '''소열제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제3의 한실을 세우고 나라를 찬탈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간적 조씨를 멸하는 것(한적불양립)'''이라는 걸 생각해보자. 손성같은 경우엔 소열제의 저 발언을 그야말로 미친 짓이라며 디스했지만 오히려 소열제의 이 발언이야말로 '''한실 부흥''' 명분하에 '''확고부동한 황제의 권위'''가 세워진 상황에서 제갈량이 그럴리가 없기에 나올 수 있는 발언이고 그 시스템을 세우는 데 일조한 제갈량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거기에 소열제가 붕어한 223년 시점에서 소열제의 실질적인 정치적 후계자는 나이도 어리고 능력도 아직은 미숙한 혈육인 회제가 아니라 능력이 검증된[59] 제갈량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저 발언 자체도 소열제가 자신의 사후 제갈량이 '선제가 무한한 권력을 넘겨 주겠다고 할 정도로 신뢰를 받았다'고 인증해 그의 위치를 촉한에서 실질적 1인자로서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기에 나온 발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소열제는 제갈량은 자신의 천하삼분지계 전략 다 짜주면서 그걸 실현까지 시켜준 최고의 브레인이자,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으며, 수어지교 타령하며 밤마다 손잡고 잠자기까지 한 자신이 제일 신뢰할 수 있는 인물로 보고 뒷편에서 반란들을 진압한 이엄을 2인자로 삼을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열는 제갈량에게 촉한을 맡길 수밖에 없었고, 제갈량이 소열제 사후 국정을 맡다보면 분명 회제의 권능을 넘어서 처리해야할 업무도 분명히 예측했다면, 제갈량에게 황제까지 갈아치울수 있는 권능을 부여함으로써[60] 제갈량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제갈량의 정치적 행동에 대해 '역모'라는게 성립하지 않도록 모든 권력을 제갈량에게 몰빵시켜준 격을 만들었다. 황제마저 갈아치울 수 있는 권위를 부여받았다면 그보더 수위가 약한 모든 행위에 대해서 제갈량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능을 소열제로부터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게 소열제가 촉한을 위해 죽기 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를 통해 삼국지 후반부 제갈량은 소열제의 유지이기도 한 원맨쇼 북벌[61]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만한 시스템 구축과 신뢰 관계가 있었기에 후세사람들이 '한 소열과 제갈무후'를 이상적인 군신의 관계라고 칭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본인이 촉한 멸망의 원인이 되어 무능의 대명사로 찍혀 후대 창작물에서 백하팔인으로 취급되고 회제의 황제 즉위가 불행의 씨앗으로 여겨지는 것이지, 소열제가 한중왕에 오른 219년 시점에서는 아들들의 능력이 검증된 바 없기에 그나마 친장자라 정통성이 있는 회제의 치세는 당대로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물론 강유대장군에 오르고 난 뒤 무능을 이유로 정변을 일으켜 교체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눈 앞의 강대한 적을 앞두고 내분을 일으키는 것만큼 나라를 좀먹는 일은 없으니[62] 논외로 하고 애당초 강유 자체도 군부 외에선 세력도 없거니와 나라가 망한 와중에 어떻게든 유씨 사직 한번 되살려보겠다고 종회한테 환갑이 넘은 나이에 눈물겨운 제비짓까지 하다가 죽은 인물이라 IF가 의미가 없다.
그 외에 "곽순비의가 아닌 회제를 죽였다면 촉한구국영웅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개드립도 있지만 그래봐야 '''회제의 아들인 태자 유선이 촉한의 3대 황제가 되는 것이니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오히려 곽순이 그럭저럭 나라를 잘 운용하고 있던 회제를 죽여 촉한을 어지럽혔다는 평가를 들을 가능성이 더 높다. 물론 재상의 권한과 능력이 보장되는 촉한이고 살아남은 비의의 보좌를 받았을 테니 아예 막장까지 가진 않았을터이지만.

6. 가족 관계



7. 기타


유선빠와는 별 상관없지만 회제도 모에선의 수혜를 피할 수는 없어서 (주로 여성향 쪽에서) '너무 위대한 아버지 때문에 비뚤어져버린 시니컬 미청년'이라든가 '천연 미소년'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때론 천하의 주인이 누가 되던, 백성들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을 그만두는게 최선으로 생각하기에 본인이 일부러 바보짓을 한다는 속뜻을 지닌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을 실제로 실현시킨 내용으로 나온 게 진삼국무쌍 시리즈유선.
장비의 딸들을 연이어 황후로 맞이했다. 회제의 첫 번째 부인이 장비의 딸 중 언니인 경애황후, 두 번째 부인이 동생인 장황후다. 경애황후가 죽자 이듬해 동생을 황후로 맞이하였다. 경애황후가 죽은 해와 장황후가 귀인으로 입궁한 연도는 건흥 15년(237년)으로 같으며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불확실하다.
상당히 오래 재위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대부분 재상들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의례적인 일만 맡았기 때문에 회제의 재위 기간에 대해서는 후반부의 병크를 제외하면 별다른 설명 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매우 많다.
사마소와의 연회는 이문열이 본인의 소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옹호하기도 했다. 회제를 옹호하다가 너무 극심해진 것인지 김운회 교수 등 유선빠(!)가 간혹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람은 혼돈의 시대에서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아간 진정한 행운아였다. 본인이 기억할 수 있는 한도에서는 고생을 해보지 않았으며, 생명의 위협도 어렸을때 빼면 없었다. 수없이 많은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서로 치고박고 싸우며 대치하는 100년 안되는 삼국지의 시간 동안 이처럼 고생 안해보고 평생동안 잘 먹고 잘 살며, 적어도 허울만이라도 좋은 대접을 받은 사람은 삼국지 시대를 통틀어서 얼마 없다.
놀라운 것은 조선 정조도 사마소와의 연회 부분에 대해 평가를 내리면서 회제에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회제가 정말로 사마소를 속이기 위해 연기한 것인지 아닌지는 이미 몇 백년 전부터 꽤나 평가가 분분한 부분이었던거 같다.

후주(後主)가 촉(蜀)을 생각한다고 대답한 것은 천고의 비웃음거리가 될 만하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을 자세히 음미하면 혹 자신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일부러 이러한 말을 하여 속마음을 감추려고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대저 그 사람은 참으로 말할 것이 없고 평소 그의 사적(事蹟)을 살펴보더라도 진 혜제(晉惠帝)에 비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비록 극정(郤正)이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촉을 그리워하는 한 생각이 없겠는가. 이는 참으로 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단지 저들의 의심만 야기시킬 뿐이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극정이 말한 것에 대해서도 가부를 살피지 못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어떻게 극정을 너무 늦게 알았다고 한스러워할 수가 있겠는가.

유학 이지연(李志淵)이 대답하였다.

후주는 제 환공(齊桓公)과 같은 자품을 지녔음은 물론 그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습니다. 온 나라를 들어 공명(孔明)에게 맡긴 것은 제 환공이 관중(管仲)에게 위임한 것에 부끄러울 것이 없고, 장완(蔣琬), 비위(費褘), 동윤(董允) 등 제현(諸賢)을 들어 쓰는 것을 잊지 않은 것은 제 환공이 역아(易牙)를 써서 국난을 야기한 것보다 한 단계 높으니, 참으로 용렬하고 아둔한 자가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촉을 생각한다고 대답한 것은 그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님을 참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전연 없다는 것을 보여 저들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도록 하고 다시 자신의 진심을 토로하는 듯이 ‘삼가 분부대로 하겠다’고 하여 매우 어리석은 행동으로 자신의 진심을 숨겼으니, 이것은 자못 '''선주(先主)가 젓가락을 떨어뜨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출처

참고로 원본은 홍재전서 위 원제편이다.
참고로 제환공의 경우, 자신의 아들은 신의있는 인물에게 부탁했기 때문에 나라를 보존하고 아들에게 공위를 물려줄 수 있었지만, 관중이 자신의 후임자를 지정하지 않은 상태로 죽었고 이후 관중이 쓰지 말라고 한 신하들을 중용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반면 회제는 비록 나라는 망하고 아들들이 자살하거나 살해당하는 불상사를 맞이했지만 현명한 재상이 살아있을 적에는 그에게 국사를 일임하고 그가 정해준 후임을 중용했으며 나라가 망한 뒤에도 처신을 잘 함으로써 망국의 군주치고는 평안한 삶을 살다 갈 수 있었다. 물론 누가 더 낫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참으로 대조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속담 중에서 '일으켜 세우지 못할 아두'라는 말이 있다. 다 된 밥상에 숟가락도 얹지 못하는 구제불능자를 빗대는 것으로, 회제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시선이 잘 나타난 속담. 그 때문인지 제갈량을 모신 무후사에 회제의 목상을 가져다 놓은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보이는 족족 부숴 버려서''' 결국엔 치워버렸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쩍새의 수많은 이름[63]들 가운데 하나인 귀촉도(歸蜀途)는 '''회제의 이야기가 아니다.''' 놀고 먹다가 신하에게 배신당해 죽은 촉의 망제 두우라는 황제를 다룬 이야기다. 촉하면 촉한의 이미지가 커서 회제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촉은 삼성퇴 유적으로 유명한, 엄연히 고대에 존재하던 국가 이름이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촉왕본기'는 회제는 태어나지도 않은 전한 시대의 책이다.
고우영 화백은 만화 삼국지에서 조운이 회제를 구해올 때 소열제가 신하를 잃느니 아들이 죽는게 낫다며 아기인 회제를 내던질때 그 충격으로 바보가 되어버렸다는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
도홍경(452년 ~ 536년)의 책 '고금도검록'에 따르면 회제는 대단한 명검을 만들어 소유했다고 한다. 물론 후세까지 전해지지는 않았다.

후주 유선은, 연희 2년, 한 자루의 큰 검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1장 2척이었다. 칼날이 산을 진정시켰고, 왕왕 사람이 볼 때 빛을 뿜었는데, 후세 사람이 이를 구하려 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


8. 미디어 믹스



9. 둘러보기(계보)


유한(劉漢)의 역대 황제
30대 열조 소열제 유비

31대 회제 유선

유한 멸망
삼국시대 촉한의 역대 황제
1대 열조 소열제 유비

2대 회제 유선

조위 5대 원황제 조환
'''조위의 안락공'''
신규 책봉

'''유선'''

유현(성한)



[1] 오호십육국 시대에 한(漢, 훗날의 전조)을 세운 흉노 출신의 유연(劉淵)은 자신이 한나라#s-1.2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면서 유선에게 성조(聖祖)라는 시호를 올렸다. 다른 한나라 황제식으로 읽으면 '촉한 회제 유선'이 되겠다.[2] 이는 정사 삼국지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저자 진수(陳壽)를 정통으로 썼기에, 촉한의 군주들에게는 제(帝)자를 붙이지 않았고, 대신 유비는 선주(先主) 그리고 유선은 후주(後主)라고 지칭했다. 참고로 손권의 경우는 오주(吳主).[3] 사식의 <황제들의 중국사>에서는 아승(阿升)이 진짜 아명이라고 한다. 두와 승자가 비슷하여 후대에 잘못 표기했다고 주장한다. <위략>에서 조예의 포고 기록에서 유승지라는 언급이 나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한다. [4] 예를 들어 你真是个扶不起的阿斗(넌 정말 아무리 도와줘도 안 되는 아두 같은 놈이다.)[5] 흙을 쌓아 올려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봉(封), 땅을 깨끗이 하고 산천에 지내는 제사를 선(禪)이라 하는데 중국의 역대 제왕이 정치상의 성공을 천지에 보고하기 위해서 태산에서 행한 국가적 제전이다. 이 봉과 선은 원래 별개의 유래를 가지는 제사였다가 양자를 합쳐 봉선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지냈다.[6]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직후 유비가 '하마터면 훌륭한 장수를 죽일 뻔 하였구나'하며 유선을 바닥에 내던지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이때 머리를 다쳐서 유선이 나중에 장성한 후 조금 모자란 모습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는 개드립이 있지만 내던져진 장면은 연의의 창작이라서 정사와는 관련 없다.[7] 위략에 따르면 어리고 정치적 경험이 없었던 회제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제갈량에게 정무를 맡기고, 자신은 주로 황실의 제사 등 국가 의례 업무를 맡겠다고 했는데 이 기록은 애시당초 회제가 노예가 되어 팔려갔다는 위략의 이른바 '유선 벤허설'에 등장하는 얘기라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있다. 다만 배송지가 비판한 것은 유선 벤허설뿐이고 이 일화 자체는 비판하지 않았으니 사실이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제갈량 시절 회제가 의례와 필수적인 결재(決裁)만을 담당했다고도 볼 수 있는 일화다.[8] 훗날 경애황후라는 시호를 받는 장비의 딸.[9] 229년 오나라의 대제가 즉위하자 촉에서는 이를 승인하고 진진을 사신으로 보내고, 이때 촉, 오가 서로 천하를 나누기로 맹약하는데, 서주, 예주, 유주, 청주는 오(吳)가 차지하고, 병주, 양주(凉州), 기주, 연주는 촉이 차지하되 사례주는 함곡관을 기준으로 양분하기로 약속한다. (삼국지 오주전, 진진전) 유영, 유리의 기존 봉지인 노(魯)와 양(梁)은 예주 소속으로 이 맹약에 의하면 오나라의 영역이므로, 이 때문에 봉지를 감릉, 안평(기주 소속)으로 옮겼다는 뜻.[10] 한진춘추에 따르면 겨울 10월, 강양(江陽)에서 강주(江州)에 이르기까지 강남에서 강북으로 날아 건너려는 새가 있었는데, 건너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은 새가 천 마리를 헤아릴 정도였다.[11] 이전 장황후의 여동생[12] 소열제가 촉을 점거한 후, 광한군의 가맹, 부성, 재동, 백수 4현을 떼어내고, 가맹을 한수로 이름을 고치고, 또 한덕현을 새로 세워 (이들을 속현으로 해) 재동군을 설치 (劉備據蜀, 又分廣漢之葭萌、涪城、梓潼、白水四縣, 改葭萌曰漢壽, 又立漢德縣, 以爲梓潼郡 / 진서 지리지)[13] 촉서 비의전에서도 곽순으로 되어 있으나, 위서 삼소제기, 촉서 장억전, 자치통감에서는 곽수(郭脩)로 표기[14]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정사 삼국지 초주전에서 등애가 음평(陰平)에 들어올 때부터 백성들이 동요한 것은 후대에 잘못 쓰여진 것으로 음평에서 '음(陰)'자를 빼서 등애군이 '평지(平)'에 들어오자 백성들이 동요한 것이라 적어야 한다.[15] 회제가 쓴 항복문서에 따르면 황초(220~226) 연간에 조비가 선우보에 명해 조서를 전해 3가지 좋은 은덕을 배풀었고 대의가 분명했다 한다.[16] 그리고 이문열 평역 삼국지는 '이 일은 실제 역사에선 없었던 일이다.'라고 적었다(...)[17] 회제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인 최훈도 삼국전투기 낙불사촉 일화에 '촉이 그립지 않냐'라는 사마소의 표정과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회제의 표정을 음영을 넣어서 그렸다. 다른 의도가 존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셈.[18] 대표적인 게 초한쟁패기에서 항량항우와 함께 거병할 때에 범증의 제안에 따라 자기 자신을 지도자로 내세우지 않고, 시골에 숨어지내던 초나라 왕족의 후손인 웅심(초 회왕)을 전면에 내세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실질적으로 가장 권력이 강한 사람은 항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구심점'으로 초나라 왕족의 후손을 내세웠기 때문에 과거 초나라의 사람들이나 인재들을 불러모을 수 있었다. 이는 삼국시대에도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형주를 정복한 위 무제가 오 대제에게 항복을 권유할 때 노숙이 손권이 항복하지 않기를 권유했던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손권 자체가 특별히 모난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에 항복을 해도 충분히 오나라의 신하들이나 잔존 세력들에게 있어서는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조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19] 고도의 처세술이라면 이 에피소드에서 극정의 역할이 은근히 의미심장한데 극정은 회제가 낙양으로 끌려갈 때 '이런 신하를 진작에 못 알아봤다'고 탄식한 신하였다. 이 점은 하술하겠지만 후일 조선 정조도 지적한 얘기.[20] 회제의 행태를 보고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저렇게 무심한가! 제갈량이 살아 있었어도 저런 자 밑에서는 결국 나라를 보전하지 못했을 텐데, 강유라면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대놓고 말했다. 회제가 항복해서 가장 큰 이득을 본 그가 이럴 정도면 회제에 대한 평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21] 게다가 당시 촉나라 최고의 장수였던 강유가 반란에 실패하여 일족이 몰살당했는데도...[22] 촉한의 간신배로 알려진 황호는 적어도 동윤이 살아있을 때는 동윤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회제에게 접근을 못했었다. 황호의 전횡은 동윤이 죽으면서 시작되었고 진지가 죽으면서 브레이크가 풀린다.[23] 게다가 위로서는 정통성 측면에서 촉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는데(선양은 위 문제가 받았지만, 소열제도 황실의 후손으로서 국호를 한으로 선언했으므로), 40년이나 지나서야 촉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공격해 들어가기가 힘들고, 혹여 들어갔다가 깨지면 장안까지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 년에 걸친 공작인 비의 암살과 준비 끝에 공격했던 것. 참고로 촉에는 위로부터의 투항 장수가 꽤 많았으며 장억이 이들을 중히 여기지 말라고 비의에게 충고한 내용도 엄연히 있다.[24] 애시당초 제갈량은 소열제의 탁고 대신이라는 입장에서 국사를 총괄하고 있어서 회제가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제갈량 이후의 회제의 행적을 보면 대체적으로 신하에게 의지하는 정치를 한 것은 분명하다.[25] 당시 촉한에 인재가 없었다고 하기에는 두각을 드러낸 인물들이 너무 많다. 강유는 말할것도 없고 극정, 곽익, 장익, 요화, 나헌 등까지. 거기다가 결국은 실패한 인재인 제갈첨도 나름의 가능성이 있었고 부장급인 유은, 장빈, 왕함 등도 분명히 할 일을 충실하게 한 인재들이니. [26] 들여다 보지도 않았다.[27] 첫 번째에서 강유의 말대로 행동했다면 위군은 음평교랑 양평관에서 발이 묶였을 확률이 크고, 두 번째에서 강유관을 적임자에게 맡겼다면 등애군은 말그대로 전멸, 세 번째에서 곽익을 불렀다면 성도 방어군을 그와 제갈첨이 같이 맡았을 거를 생각하면 역시 등애군은 면죽에서, 종회군은 검각에서 전멸했을 확률이 크다.[28] 또한 촉한 멸망 이후 익주 지방은 서진이 동오를 멸망시킬 때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하게 되어 딱히 백성들은 편하지도 않았다는게 함정이다. 백성들을 위해 항복했다기보단 회제는 그냥 정줄 놓고 있다가 멘붕 와서 항복한 게 다이다.[29] 이 부분에 있어서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게 분명 회제가 국정 운영을 주도해서 별다른 치적을 올린 건 없지만, 제갈량을 위시한 촉한의 4영이 쌓은 여러 공적들은 얼마든지 회제의 치적으로 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회제의 허가 아래에서 진행돼 결실을 맺은 것들이니...[30] 물론 신하들이라고 손만 놓은 건 아니었다. 진지를 비판한 방굉부터 시작해 번건, 제갈첨, 동궐 등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이들은 이전 시대 촉한사영 만큼의 권위가 없었다. 그나마 제갈첨이 아버지의 정치적 후광을 받고 있었지만 제갈첨은 너무 늦은 시기에 정치에 참여한 데다가 경륜도 부족했다. 나중에는 정치에 신경을 쓰지 않던 강유까지도 이걸 수습해보려 했지만 심지어 녹상서사 직위임에도 정치적으로 황호에게 파워가 밀려 외지로 도망가는 신세만 되었을 정도니...[31] 세종실록을 보면 '布野'는 '人畜布野'의 뜻으로 쓰여 '사람과 짐승이 들에 펴졌으며'라고 써서 들에 널리 퍼짐을 뜻하는 말이다. 또, 여량(餘糧)은 먹고 쓰고 남은, 잉여의 식량을 뜻하고 '초학기(初學記)'에 따르면 '棲畝'의 뜻은 남은 곡식이 밭이랑이 있음을 뜻하며 풍년의 성세를 칭송하였다는 말이고 네이버 한자사전에 따르면 棲畝는 '남은 곡식이 밭이랑에 가득히 쌓여 있다는 뜻으로, 풍년이 들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해당 해석은 여분의 식량과 남은 곡식이 널려있어 풍년이 들었다는 관용어구로 봐야 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성종 18년 8월 5일 기사에도 (풍년으로) '식량이 남아 돌아 밭이랑에 두었다(餘糧, 棲于畝)'라는 유사 표현이 등장하고 광해 11년 10월 13일 기사에도 요동과 광녕 지역에 해마다 풍년이 들어 '여분의 곡식이 밭고랑에 쌓여 있다(餘糧棲畝)'라는 표현이 등장한다.[32] 그냥 추수철이라서 곡식이 들에 남았다고 해석하기도 어렵다. 회제가 등애에게 항복하여 저 서찰을 보낸 때가 음력 11월 겨울이다. 즉, 이미 추수철은 끝났고 한겨울인데도 여분의 식량과 곡식들이 들판에 널려 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에 그만큼 '추수철이 지나도 여분의 곡식이 들판에 남았다'='풍요롭다'는 해석을 해야한다. 그렇다고 백성들이 추수철에 추수를 못 했다고 보기 어려운 게 자치통감에 따르면 등애가 평지로 들어올 때까지 촉한 인심은 동요되지 않았다. 삼국지집해에서도 등애가 평지에 들어오고 나서야 촉한 인심이 동요되었다고 해석하는 게 맞는다고 하고 있다. 또, 등애가 음평으로 들어간 때가 겨울 10월이다. 이미 그 시점에도 추수철은 다 끝나고 추수가 끝난 시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추수철인데 수확을 못해서 들에 곡식이 남았다라는 해석은 들어맞지 않는다.[33] 그리고 '중국전사 위진남북조경제사'에서도 '제갈량의 사후에 장완, 비의가 잇따라 집권하여, 제갈량의 기정 국책을 계속 집행하고, 내부 안정을 중시하여, 쉽사리 출병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촉중의 농업생산은 이 시기에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촉한 말기까지 여전히 칭하기를 '남녀(백성)들은 들에 퍼져있고 농사지은 곡식은 들판에 널려있다'고 할 정도로 농업에도 근본적인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诸葛亮死后,蒋琬、费祎相继执政,继续执行诸葛亮的既定国策,重视内部安定,没有轻易出兵攻魏。因此,蜀中农业生产在这一时期能持续稳定发展。直至蜀末,犹谓 男女布野,农谷栖亩,农业也未受到根本损伤。)'라고 하여 촉의 풍요로움이 유지되었다 보고 있다.[34] 사실 손권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역대급으로 검소한 군주인 대제 역시 여색은 꽤 밝힌 인물이다. 물론 위 무제나 문제처럼 도덕적 지탄을 받을 만한 과정을 통해 여색을 밝힌 것도 아니고 자기 손자 말제의 5천 궁녀 컬렉션(...), 사마염의 1만 궁녀 컬렉션(...)처럼 국가 재정에 심한 압박을 줬던 것도 아니니 고대 전제군주 레벨에선 흠잡을 구석은 아니다. 유선 같은 경우는 거느린 궁녀 수는 알려지지 않았고 후비를 12명 뒀는데 더 늘리고 싶다고 하자 동윤에게 저지당했던 기록이 있다. 참고로 대제는 노복+궁녀가 100명을 넘지 않아 당대에 매우 검소한 군주란 소릴 들었으니 놀기 좋아한다는 평을 들었던 회제가 거느린 궁녀의 수는 못해도 세 자리 수는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황제도 아니고 왕도 아니고 고작 형주라는 지방의 실세에 불과했던 채모가 첩 수백 명을 들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그리고 당대 난세 대호족들이 보여준 인간 군상을 감안할 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채모 같은 케이스가 분명 더 있었을 것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대제는 정말 검소한 고대 중국의 전제 군주가 맞는다.(...)[35] 그러나 제갈량의 법치는 진나라의 법치와는 다르게 엄정하면서도 백성을 바르게 하는 것을 알려주었기에 백성들은 제갈량의 뜻에 감복하고 질서가 바로잡혔다. 회제는 그딴 큰 뜻 없이 무분별한 사면령을 내려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36] 영민한 재상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회제의 친정 체제가 강화될수록 촉한은 사면령이 증가한다. 이는 제갈량 이래로 확립된 법치를 해친다는 부정적인 평을 받았지만, 회제 나름대로는 자신의 인간적인 매력과 장점을 어필해 법치에 입각했던 기존의 권력과는 다른 변별적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백성의 호감을 사고 황권을 강화하려는 제스처였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론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고 신하들의 문란함을 야기해 촉한의 멸망을 앞당기는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는 혹평을 듣지만 의도 자체를 좋게 보자면 진나라의 가혹한 법치에 지쳐있던 백성들을 위무하고자 약법삼장을 내세운 선조 한 고제의 민심 유화책을 카피한 정책 기조였을지도.[35]그게 맹광의 지적이나 촉과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촉한의 사정상 한 고조의 방식을 무조건 카피할 일이 아니었기에 의도만 좋았다가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오 말제가 황권을 강화한답시고 저질렀던 쓰레기짓들은 극단적인 예지만, 대개의 전제 군주가 황권을 강화하려고 마음 먹으면 대개 백성을 괴롭히려고 작정한 듯한 행보를 보이는 걸 보면 회제의 인격을 의심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37] 연로하고 병에 걸린 장억이 회제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북벌에 꼭 종군하고 싶다고 밝히자 회제가 눈물을 쏟았다는 기록 역시 이에 대한 증좌일지도... 결국 장억은 북벌에서 순사한다. 결론적으로 회제가 능력은 몰라도 인간적으론 꽤 선량하고 인정많은 인물이었다는 것은 사실에 근접할 것이다.[38] 그러나 그 신하들이 자신의 아버지유언에서 자신을 부탁한 신하와 그 신하가 후임자로 지목했던 들임을 생각하면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다.[39] 제환공에게 비견된 이유는 제환공도 관중포숙아가 모두 죽자 관중이 그렇게 쓰지마라던 역아#s-1, 수초#s-2, 개방을 모두 중용하는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고, 회제고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소인배를 곁에 두지 말라니까 결국 황호를 곁에 두는 짓을 해버려 비견된 것이다[40] 제갈량의 출사표에는 소인배와 환관을 멀리하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회제는 이 것을 잊은듯이 환관을 곁에 둬버리는 짓을 해버리고 만다. 아무리 신하가 추천하더라도 황제란 자가 충신의 말조차 잊고서 승락한 것 자체가 잘못이다.[41] 다만 제갈량에게 사죄하는 유염의 글을 보면 유염은 애당초 술에 취해 실수를 하는 일도 많았고 중대한 실수로 재판에 넘겨질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유염의 처형은 그런 것이 쌓이고 쌓이다가 이 일로 폭발한 것일 수도 있다.[42] 회제는 기록에서 화를 낸 적이 거의 없다.[43] 부족한 군주 개인의 역량을 메꾸고자 신권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신하들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되, 군주의 위엄과 황권의 위상을 격하시키지 않는 권력 분립의 균형 달성은 흔히 살얼음판을 걷는 것에 비유될 정도로 조금만 삐끗해도 황권을 망가뜨릴 수 있는 고도의 정치술이다. 물론 이걸 다 회제의 능력으로 보기는 어렵고 소열제-제갈량 두 사람이 구축한 이래로 확립된 황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룩한 촉한의 정치 시스템을 잘 계승해서 잘 써먹었다고 봐야 할 듯. 당장 위 명제가 유능한 사마의에게 홀딱 빠져 권력을 무작정 강화시켜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다만 조예는 부모의 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사마의에게 인간적으로 집착한 거라서 비교 대상으로는 애매하다.[44] <그러나 제갈량은 유언에서까지 소열제의 은혜를 생각하고, 아버지가 자신을 맡긴 탁고대신이고 자신이 황제를 하기위한 기틀과 방향을 마련한 사람이다, 신권이 뭐고간에 이런 은혜를 받았는데도 사당을 세우는 것과 제갈량을 본받는 것을 장려하지 않고 오히려 사사로운 사당을 금지시키니 자신의 권위를 위한 일이라기에는 이상하다> 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전제군주정에서 '왕권'의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일단 유교적 군주정의 논리대로라면 <군주가 신하에게 은혜를 받았다> 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전력을 다해 군주를 보필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은 신하의 '''의무'''이기 때문. 물론 이것은 원칙일 뿐이고 원칙이 언제나 지켜진다는 보장은 없으니 현실적으로 제갈량은 흔히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헌신적인 충성을 보여주었고, 이에 대해 회제 개인의 차원에서는 당연히 제갈량 개인에게 고마움을 느낄 만 하며, 실제로도 평소에는 사람 죽이기를 싫어했으면서도 제갈량을 비방한 이막은 바로 죽여버리는 모습까지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회제 개인의 감정 및 제갈량 개인의 품성과는 별개로 '공식적으로는' 아무리 위대한 재상 제갈량이라고 해도 그 권위가 황제의 권위를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 따라서 제갈량의 위상이 지나치게 커질 경우 적절한 수준에서 이를 '견제' 해 줄 필요성은 제기될 수 있다. 즉 <신권이고 뭐고 제갈량을 본받는것을 장려하지 않고 사당을 금지시키는 것은 이상하다>는 주장은 권력 구조가 다양한 권력 주체들간의 '균형' 위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권력 관계를 단순한 개인의 관계와 똑같이 보는데서 나타난 오류인 것.[45] 당장 십상시를 보라. 그들의 가족과 친구조차 국정에 간섭했는 데 반해 황호는 그러지 못했다.[46] 제갈량이 올린 출사표에는 '후한이 망한 이유는 환관과 소인을 가까이 하였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도 회제는 황호를 가까이 한다.[47] 이론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 제갈량조차 4차 북벌과 5차 북벌 사이엔 3년의 텀이 있었고 강유 자신이 계획을 수립한 북벌은 제갈량의 북벌 20여년 후이기 때문.[48] 수경주에 따르면 도안현에 도관이 있는데 촉의 태수였던 이빙이 여기에 큰 제방을 만들었고 이를 전붕, 혹은 전언이라고 하고 그 위에 관판이라고 조망대가 있었다.[49] 그래서 조선 시대 정조 같은 임금은 극정의 이 일화를 보고 그래도 회제가 군주고 말만 촉이 그립지 않다고 한거 아니냐고 해석하기도 했다. 뭐 해석하기 나름이지만...[50] 진북장군으로서 북쪽을 진수하며 강유를 뒷받침했어야 할 진지는 성도에서 대사면이나 매년 연속으로 내리고 있었다. 생전의 제갈량이 제일 싫어할 나라 운영을 하고 있었던 것.[51] 물론 유은이나 왕사 등과 같이 강유를 보필하는 인재들도 있었지만 이들도 나이가 매우 많았다.[52] 워낙에 촉한의 기록이 부실해서 쉽게 단정하기 어렵지만 사서에 남아있는 기록만으로 볼 때 촉한 인재풀의 문제점은 내정을 돌볼 만한 인재들이 없던 게 아니었다. 촉한 말기 인재풀을 살펴보면 문관 성향이 아닌 무관 성향의 인재들이 극히 부족해보인다. 오죽하면 '''60대 초반의 강유가 군부에선 어린 축(...)'''에 들어갈 정도이다. 게다가 촉한 말기 고위급 장군직에 올랐던 인물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종예동궐 같은 경우는 문관으로 봉직한 세월이 압도적으로 긴 인물들이었다.[53] 촉한사영으로 대표되는 명재상들로 하여금 국정 운영을 빼어나게 잘 한 점이 분명하고, 무엇보다 인성은 좋았다는건 팩트다. 이 시절만 판단하면 오히려 삼국시대 최고의 명군이자 성군으로 남을 여지도 있었다.[54] 위에 나온대로 10년 전에 죽었다면 암군까진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분명 말년에 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하는 실책을 저질렀고, 이와 같은 행적에 따라 암군이라고 불리는 것까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자기가 저질른 행동이니까. 다만 "회제가 암군이 된 이유가 오직 그의 무능 때문이었느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라는 것. 상황이 안 좋았던 것도 컸다.[55] 또한 삼국시대 이후 1800여년 동안 구주 중 하나(라고 하긴 익주가 굉장히 크고 영향력이 큰 땅이긴 하지만)만을 차지한 촉한을 정통으로 취급하는 촉한정통론이 그토록 인기가 많았던 것도 어쨌거나 이 나라가 한 황실에 핏줄이 닿아있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방계 중 방계고 희미한 줄이라곤 하나 어쨌든 분명한 유씨의 나라였으니까. 그런데 고작 2대도 채 못 가고 양자나, 제갈량에게 황제자리가 갔다면 그 명분이 송두리때 사라지는 셈이고, "걸출한 영웅들이 있던 지방국가" 이상으로 기억되진 못했을 것이다. 촉한 정도 국력을 지닌 국가는 중국 역사에 많았다. 그런데 이 작은 국가가 2천년이 지나는 동안 당대에보다 더욱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된 것에는 촉한정통론이 컸다. 만약 이 명분이 없었다면 당대에도 큰 문제였겠지만, 후대에 와서는 이 국가의 인물들이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56] 제갈량 본인이 황제가 되거나 아니면 소열제의 다른 아들을 옹립하는 것을 말한다.[57] 삼국지에서 후한 황제들의 능력치는 보통 책정되지 않지만 일부 시리즈 한정으로 더미 데이터화 되어 있기는 하다.[58] 물론 후소제의 언행이 경박하다는 기록은 있으나 후소제와 헌제의 나이가 모두 어린 탓에 둘을 비교하며 자질론을 운운하는 건 시기상조다. 게다가 언제나 언급되는것이지만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다. 폐위시킨 황제에 대한 기록이 좋을 리가 없다.[59] 소열제 스스로가 탁고를 맡기기 전에 그대의 재능은 조비의 10배이니 충분히 대사를 이룰수 있다고 언급한 걸 기억해 보자.[60] 물론 절대 제갈량이 자신이 황제가 될 거란 생각을 안 하고 촉한에 충성을 바칠 거라고 소열제는 굳게 신뢰하고 있었을 공산이 높다.[61] 병권, 인사권, 정권을 모두 손에 쥐어야만 가능한, 사실 황제가 실질적으로 주도해야 하는 업무[62] 실제로 손침손량에게 그랬다가 정봉의 지원을 받은 손휴에게 죽었고, 사마씨가 황제를 폐위하자 나라 곳곳에서 들고 일어난 적도 있다.[63] 소쩍새는 전설이나 설화의 소재가 된 덕분에 이명이 많기로 유명하다. 이조년의 다정가에 등장하는 자규(子規), 여인에 빠져서 나라를 잃은 황제에 관련된 망제혼(望帝魂) 혹은 두우(杜宇), 불여귀(不如歸)또는 두견새. 솥이 적다라고 가난과 관련된 소쩍새, 의붓 어머니와 관련하여 동생을 걱정하는 접동새가 죄다 한가지 새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이 소설 또는 시의 소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