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공인황후

 


孝恭仁皇后 烏雅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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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 ~ 1723년 6월 25일
강희제후궁으로, 옹정제의 생모. 만주 정황기 사람이다. 몽골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그녀의 친정 가문인 우야 할라는 만주 씨족이므로 그냥 만주인으로 보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부친 위무는 자금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정3품 호군참령이고 친정은 오래된 명가라고 하나[1] 그리 권세가 있는 집안은 아니었던 듯. 만주 정황기 포의 출신으로 청대 기준으로는 나름 높은 신분이나 만주 팔기 명문가 출신이 많은 강희제의 후궁 중에서는 높은 편은 아니다. 내무부 포의 출신이기 때문에 궁녀로 입궁했다.
14살 때 궁녀로 뽑혀 강희제의 신변에서 수발을 들었다. 처음엔 오상재로 봉해졌다. 강희 17년에 아이신기오로 인전(옹정제)을 낳았고, 그 다음해에 덕빈으로 봉해졌다. 그 후 덕비로 봉해지고 인전이 황위에 오르자 인수황태후(仁壽皇太后)로 봉해지나 곧 사망하였다.
옹정제를 포함해 슬하에 3남 3녀가 있다. 특히 그 중 셋째 아들인 14황자 인티(胤禵, 윤제)를 편애해, 인전과 인티가 사이가 안 좋아지자 그녀 역시 인전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한다. 그 외 둘째 아들인 6황자 윤조(胤祚)는 5살에 요절했고, 첫째 딸은 2달 만에 사망했으며, 셋째 딸은 11살에 요절했다. 둘째 딸 고륜온헌공주[2]는 퉁기야(佟佳) 가문의 순안안(舜安顔)과 혼인했는데 그는 효의인황후의 조카였다.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1697년 초 즈음에 조금 아팠던 것으로 보인다. 강희제가 1697년 2월 8일 화이라이(懷來) 현에서 태감 구원싱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떠나올 때 덕비가 몸이 좀 안 좋던데… 이제는 병이 완전히 다 나았겠지?" 라며 자상하게 안부를 물어보는 부분이 있다.

1. 미디어 믹스



[1] 옹정제의 주장이다.[2] 강희제와 황태후가 가장 아꼈던 공주라고 한다. 다른 공주들은 거의 몽골로 시집보냈지만 온헌공주는 만주족과 결혼해 가까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