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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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청나라 제5대 황제. 강희제의 넷째 아들로 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중국 역사에서 제갈량과 쌍벽을 이룰 법한 지독한 워커홀릭. 강희제의 치세가 워낙 길었기 때문에 1722년 즉위했을 때 이미 45세였으며, 그 후 13년 동안 재위했다.
2. 후계자 다툼, 황제 즉위
강희제 17년인 1678년 12월 13일, 강희제의 4남으로 후궁 우야씨가 자금성에서 그를 낳았다. 당시 우야씨는 서비(庶妃)[4][5] 로 옹정제를 기를 수 없었다. 이 시기에 황귀비이자 내궁을 관리하던 동가씨[6] 의 유일한 자녀가 요절했는데 강희제는 그녀에게 옹정제를 양자로 줘 버렸다. 동가씨는 옹정제를 친자식처럼 총애하며 길렀고 강희제가 정무를 보는 도중에 붓을 놓거나 옥새를 가져오는 등 강희제의 잔시중을 들게 하여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주었다고 한다.[7]
청나라 시절 황자들의 교육은 상서방(上書房)이 맡았는데, 강희제는 직접 나라의 특급 인재들을 뽑아 황자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옹정제를 비롯한 황자들은 상서방에서 만주어, 몽골어, 한어 등 3가지의 언어를 배웠고 역사책과 여러 경사들을 익힘과 함께 말 타기, 활쏘기, 심지어 수영까지 익히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린 나이에 춘일독서, 하일독서 등 시가를 창작하여 부친을 기쁘게 했다.
나이가 들면서 옹정제는 아버지인 강희제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16세 때 공자의 고향 곡부로 가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낸 일, 19세 때 부친이 최후의 몽골 제국으로 불리는 준가르의 갈단 칸을 공격할 때 따라가서 정홍기의 군영을 관장한 일 등 여러가지 일을 거들면서 자신의 입지를 키워 옹친왕(雍親王)에 올랐다.
강희제에게는 아들이 모두 35명이 있었는데 어려서 죽거나 양자로 준 아들을 제외하면 26명이 있었다. 이 아들 가운데서 둘째 아거(阿哥)[8] 윤잉(1674~1725)만이 효성인황후가 낳은 아들이었다.[9] 적장자인 윤잉을 강희제는 몹시 귀여워했다.[10] 강희제는 그렇게 예뻐한 적장자인 윤잉을 빠르게 황태자로 만들고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 윤잉은 강희 36년(1697년) 3차 준가르 원정 때 강희제 본인은 직접 원정에 참전하였고 윤잉을 베이징에 두어 정사를 대신 처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윤잉은 이때부터 강희제의 신뢰를 잃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윤잉은 자신의 심복들을 보내는 등으로 부친의 행동을 관찰하고 탐문하게 되었다. 결국 이에 참다못한 강희제는 윤잉을 한 차례 황태자 자리에서 폐하고 감금시킨다.[11]
윤잉이 황태자의 자리에서 쫒겨나자 황자들은 저마다 황태자가 되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황태자당(윤잉의 붕당), 황8자당, 황4자당 같은 파당이 형성되었다. 강희 47년(1708년) 9월, 강희제는 황태자 폐위 사건에 연루 된 황태자, 1황자, 3황자, 4황자(옹정제), 5황자, 8황자, 13황자를 연금하였고, 황태자와 1황자, 13황자를 제외한 황자들은 11월 석방되었다. 황태자를 복위시킬 마음이 있었던 강희제는 11월 14일, 여러 황족과 대신을 불러서 1황자를 제외한 황자들 중에서 황태자를 추천하라 명하였고 악륜대, 규서, 왕홍서, 마제, 동국유 등 황8자당에 속한 많은 대신들이 8황자를 추천하였다. 강희제는 이를 빌미로 8황자가 1황자와 결탁하였으며 당파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작위를 박탈하였고, 황8자당의 세력을 약화시킨 다음 이틀 뒤인 16일 황태자를 석방하면서 황태자 복위 의사를 밝혔다.[12] 그리고 강희 48년(1709년) 윤잉을 다시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강희 51년(1712년) 윤잉은 몇몇 대신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다시 황태자 자리에서 쫒겨나 함안궁에 연금되고 만다.
이렇게 태자 윤잉은 다시 폐위되었고 능력 있는 황자들이 다시금 황태자 자리를 노리고 황위 다툼을 벌인다. 특히 4황자(옹정제), 8황자, 14황자들이 치열하게 다투었다.
하여간 황자들이 이렇게 다투는 와중에, 옹정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퉁기야 롱코도(Tunggiya Longkodo, 佟佳 隆科多, 동가 융과다), 연갱요(年羹堯) 등 자신의 세력은 모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견제받을 만큼 크게 파당을 만들지는 않고, 후계자 쟁탈전에도 전면에 나서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늙고 기력이 떨어진 강희제는 말년에 아들들의 이런 행각을 보고 진저리를 치던 바, 옹정제의 이런 태도는 강희제의 마음을 잘 공략했다. 더구나 마침 강희제는 옹정제의 아들이자 뒷날의 건륭제인 어린 손자 훙리의 귀여움과 똑똑함에 흠뻑 빠져있던 바, 손자에 대한 애정은 옹정제에게도 영향을 끼쳤다.[13] 최후까지도 불분명했던 후계자 자리였지만 강희제는 죽기 전에 옹정제를 후계자로 만들어 놓았다. 다만 이 과정은 상당히 논란이라, 옹정제의 정적들은 그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조서를 위조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옹정제는 이런 논란을 마구 패서 잠재웠다.[14][15]
3. 업적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가 문무가 비교적 균형을 이루었던 데 반해 철저할 만큼 문치(文治)에 비중을 두었다. 선제인 강희제가 삼번(三藩)의 난 평정, 대만 정복, 러시아와의 분쟁, 외몽골 정복 등을 감행하고 준가르와 전쟁을 치르는 등 외정에 직접 관여하여 성과[16] 를 내면서 내치도 돌본 것에 비교하면 철저하게 평화주의나 부전(不戰)주의로 일관했는데, 즉위 초기에는 연갱요가 서북에서 군사 작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1731년 티베트의 갈단 체링에게 청군이 대패한 뒤로는 군사적인 정복 활동을 벌이는 작업에서 거의 손을 놓았다.
그렇지만, 내치에서는 선제 때 마무리가 안 된 수준의 내정 체계를 크게 정비하여 강희제와 거의 동급의 찬사를 받는다. 팔기군 체제를 손보고 군기처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으로 권력을 황제에 집중시켰고, 1727년 러시아와 캬흐타 조약을 맺어 국경선을 명확히 그었다. 또한, 하술되는 '본인 즉위 문제'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황태자 밀건법[17] 도 시행했다. 다만 만주족 후비에게서 난 소생이 본인 뿐이던 건륭제 등의 사례로 실제 이 법의 효과가 있었던 때는 적다.[18]
3.1. 군기처
본래 황제 중심의 정치에서는 황제가 모든 일을 알아야 했는데, 이런저런 관리를 거쳐서 올라오는 상소문(제본)은 비밀성이 뚝 떨어지다 보니 황제가 쉽게 휘어잡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옹정제는 황제에게 곧바로 바칠 수 있는 사적인 연락통인 '''주접'''[19] 을 강화시켰다.
이를 통해 옹정제는 각 관리들의 생각과 행동을 알아냈는데, 아무래도 황제가 모두 하기엔 일손이 모자란지라 '''군기처'''라는 주접 전담 부서를 만들어 돕게 하였다. 이들은 황제의 최측근이었고, 황제 집무실 근처에서 숙직하며 필요할 때마다 바로바로 대응했다.
여담이지만 이 주접이 유명한 까닭은 '주비 유지'란 것 때문인데, 쉽게 말하면 '''빨간펜 선생님'''이었다. 다만 부정적이라서 문제지(…). 황제와 사적으로 이야기하는 주접이다 보니까 당연히 황제가 직접 답장을 썼는데 그 답장이 '그래 잘 받았다'가 아니라 '''보낸 사람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내용이 이게 뭐냐', '왜 긴 종이에다 적게 써서 종이를 낭비하냐' 등등. 오죽하면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걸 두고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인 독재 군주''''라고 평할 정도.[20] 이런 옹정제의 비밀 정치에서 주고받은 편지뭉치는 청조가 망할 때까지 자금성의 구석진 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이들은 추리고 추려서 112권에 달하는 옹정주비유지라는 제목의 전집으로 정리, 출판되었다. 각종 욕설과 비난이 자유자재로 쓰이지만 악플만으로 일관하지 않고 열일하는 부하한텐 선플도 달아주는등[21] 정조 어찰첩의 대륙 스케일이라 볼 수도 있을 듯.
3.2. 숙청
옹정제가 황제에 올랐을 때 사정은 불안한 점이 많았다. 티베트 정벌에 나섰던 14황자 윤제는 군사력을 손에 쥐었고, 퉁기야 롱코도(Tunggiya Longkodo, 佟佳 隆科多, 동가 융과다)와 연갱요(年羹堯)라는 측근들은 분명 유능했지만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다. 다른 황자들도 마찬가지로 위협적이었다.
옹정제는 무자비했다. 온갖 꼬투리[22] 에 말도 안 되는 듯한 죄명을 붙여 윤제와 그의 가족, 측근들을 때려잡았고 다른 형제인 윤사는 아키나(akina, 阿其那), 윤당은 서스허(seshe, 塞思黑)라는 호칭으로 부르도록 했는데 이는 만주어로 각각 개와 돼지를 뜻하는 말이다.[23] 옹정제는 이렇게 형제를 탄압하고 유배시키고 집안에 가두는 등 어쩌면 악랄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로 형제들을 잡았다.[24]
때마침 서북 지역의 전쟁에 나섰던 옹정제의 신하 연갱요가 승리를 거두면서 옹정제의 입지는 탄탄해졌다. 만약 이 전쟁이 뜻한 바대로 끝나지 않았다면 다른 황자들에게 공격받았을 수도 있지만, 승리를 거두면서 자신의 위상을 제대로 잡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 연갱요가 문제였다. 승리를 거둔 데다 옹정제에게 매우 좋은 대접을 받자 연갱요는 자신감이 넘쳐서 무례하게 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옹정제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군에서 연갱요가 가지는 영향력이었는데, 연갱요와 함께 군대를 둘러보던 옹정제는 병사들이 땀에 젖어 몹시 힘들어 하자 말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연갱요는 침묵을 지켰고, 병사들도 그저 가만히 있었다. 옹정제는 못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번 말했으나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옹정제가 속으로 경악하고 있을 때가 돼서야 연갱요가 느긋하게 말했다.[25][26][27]"날이 더운데 중무장을 하고 있으니 고생들이 많구나. 모두 갑옷을 벗고 쉬도록 하라."
그때가 돼서야 병사들은 옷을 벗었다. 이 모습을 본 옹정제는 연갱요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손을 대진 않고 오히려 많은 상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연갱요의 밑에 있는 인물로, 악비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있던 악종기의 위상을 높여주며 정보를 수집하고 기회를 엿보았다."황상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너희들은 옷을 벗고 쉬거라."
이를 갈면서 기회를 엿보던 옹정제는 즉위 3년째인 1725년, 연갱요를 숙청하는 데 나서기 시작한다. 이 해의 2월에 해와 달이 동시에 뜨는데다 하늘에 좋은 길조가 나타나자 많은 신하들이 옹정제의 덕을 칭찬하며 아부하는 말을 올렸는데, 물론 연갱요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글을 쓸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을 하신다."(朝乾夕惕)는 말을 "저녁부터 아침까지 열심히 일을 하신다."(夕惕朝乾)라고 바꾸어 적어버렸다.
연갱요가 실수는 했지만 큰일은 아니었는데 옹정제는 이 일을 꼬투리 삼아 연갱요를 마구 공격하고 비난했다. 그와 함께 동시에 연갱요의 영향에 있는 지방의 관리들을 경질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임명하며, 신하들에게는 "요새 연갱요가 너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니 조심하라."는 식으로 정치질을 해서 그의 영향력을 없앴다. 끝내 연갱요는 버티지 못하며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사후 연갱요의 재산은 옹정제에게 모두 몰수된다. 사실상 옹정제에 의해 숙청당한 셈.
다음 대상은 바로 외삼촌인 롱코도였다. 그는 옹정제가 황제로 즉위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지만 역시 그 권력은 그냥 두고 보기에는 상당했으니 옹정제는 롱코도를 제거하려 했다. 롱코도가 국경 문제 때문에 러시아 사신과 협상을 하러 떠난 사이, 옹정제는 그를 체포하고 베이징으로 압송하여 41가지의 죄를 묻고 그를 처리한다.[28] 다만 연갱요와는 달리 옹정제는 롱코도에게는 최소한의 동정을 보였는데, 목을 베고 가족들을 노비로 만들며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 대신 작은 집에 가두어 놓았고 롱코도가 감금된 지 1년 만에 사망하자 죽을 때 장례를 치러주었다.
악종기도 옹정제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준가르는 티베트 쪽을 배회하며 청나라의 국경을 교란시켰기에 옹정제는 준가르를 물리치려고 했지만, 적의 상황을 잘못 판단한 옹정제는 예상 외로 막강한 준가르의 전력에 고전하고 말았다. 그러자 악종기를 희생양으로 삼아 그를 매우 비난했고, 악종기는 안절부절 못하며 필사적으로 지키고 수비하려 했지만 끝내 모든 관직을 잃고 감옥에 들어가 버렸다. 악종기는 건륭제가 즉위하자 그때서야 다시 자신의 업무에 복귀했다.
3.3. 문자의 옥
옹정제의 탄압은 측근과 형제들만 머물지 않았다. 이민족으로 중국을 통치한 만주족은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통제를 펴야 했기에 자주 문자의 옥(文字之獄)이라는 필화 사건을 일으켜 많은 책을 검열하고 분서시켰는데,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 시기를 걸치며 더욱 강화시켰고 가경제 때부터 줄어들었다.
강서성에서 과거를 책임지는 관리 사사정은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시제를 냈는데, 유(維) 자와 지(止) 자가 옹정제의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의 변만 뺀 것이라 해서 옹정제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뜻으로 해석해 구족을 베어버렸다. 문제는 이게 창작이 아니라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에 나오는 말이다(...).[29] 또 한림학사 서준이 '폐하'(陛下)의 '폐'(陛) 자를 들개를 뜻하는 '폐'(狴)자로 바꾸어 쓰자 그를 죽여 버리기도 했다. [30] 이렇게 무자비한 탄압에 옹정제의 권력은 커지기만 했다. 설령 형제나 아들이라도 황제인 자신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절해야 하는 신하임을 강조하여 사적으로는 형제나 아들이나 공적으로는 엄연히 군신지간임을 강조하였다.[31]
전설의 무기인 혈적자가 이때 옹정제가 보낸 환관 무사들이 숙청 대상자를 암살할 때 썼던 무기라고 전한다.
3.4. 지정은제의 확립
지정은제는 명나라 때의 일조편법(一條鞭法)에서부터 출발한다. 당시 지방에 세력이 컸던 향신세력(鄕紳勢力)이 소유한 땅을 속여 보고하고 탈세하는 일이 많았지만, 장거정은 이에 단호히 대처하여 관청 몰래 경작하는 대량의 땅을 적발하였다.
그때까지의 세제인 양세법은 항목이 너무 많고 복잡하여, 불공정한 점이 많았다. 일조편법은 그것을 일관화시켜 과세 대상을 토지로 옮기고, 당시 보급하던 은으로 납세시켰다. 이러한 개혁으로 명의 재정은 크게 호전되었고, 국고에는 10년분의 식료와 4백만 냥의 잉여금을 축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세, 노역을 대신 하는 정은, 잡세, 잡역 모두 은으로 내게 했는데, 이때쯤이면 민간에서는 화폐 경제가 활발해졌고(무협 소설이 그래서 배경으로 명나라를 쓰기가 편하다) 나라 입장에서도 가격이 요동치는 현물보다는 화폐가 편했다.
청나라 시기에도 이런 일조편법은 쭉 계승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났는데, 그 하나만을 꼽자면 지방의 유지들은 관리들과 유착해 자기들 세금을 일반 농민들에게 떠넘겼고, 못살겠다 싶은 농민들은 달아나서 나라는 안정적인 수입원을 못 얻었다. 특히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워낙 많이 도망쳐도 관리들이 책임을 피하려고 숫자를 속이고 하다 보니 정세(인두세)를 매기기가 힘들었다.
정역(征役), 즉 조세와 부역을 부과하려면 인구 조사는 필수인데 가난한 농민들은 대책이 없으니 도망가거나 납세를 안 하고, 부자들은 당연히 이를 피해버렸다. 나라의 재정은 엉망이었고, 관리들도 문책을 겪으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청나라 강희제 50년인 1711년에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이 실시되었다. 정세는 사람의 머리수만큼 걷는 것. 결국 사람이 늘어나면 더 걷어 들이는데, 바로 이 해인 강희제 50년에 인구를 조사한 다음 정세를 영원히 동결시켰다. 말 그대로 세금이 더 안 늘어났다.
이는 엄청난 뜻이 있는데 이때부터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으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났던 농민이 그만큼 많았다가 그러한 부담이 사라지면서 이 체제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애를 많이 만들어도 이젠 뭐 부담도 없고.
이 정책으로 전국의 정세 수취량은 고정했으나 정세 대상인 농민들이 도망쳐 정세 수취량은 다시 줄기 시작하였다.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풀기 위해 지세 1냥당 약간의 정세를 부과하는 식의 탄정입묘(攤丁入畝) 방법을 고안하였고, 정세가 지세로 합쳐지게 되었다. 하도 큰 일이기에 우선 광동성에서 먼저 시험을 해보았고, 결과가 괜찮자 사천, 절강, 하남성에서 시행해서 효과를 보았다.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이렇게 시행되었다. 이 지정은제가 시행되기까지 엄청난 논란이 있었으나 옹정제 때 끝내 시작되었고,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선 반대가 극심했다. 정세를 지세에 통합하면 토지의 소유자는 세금이 늘어나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세금이 사실상 면제였다. 당연히 땅 가진 부자들은 세금을 많이 내야하는터라 반대했다.
1726년, 향시에 응시한 천여 명의 응시생들은 단체로 시위하면서 항의했고, 상인들에게는 문을 닫으라고 협박했다. 지정은제에 찬성하던 순무 이위(李衛)[32] 는 이들을 간단하게 때려잡아 처벌했다. 그 뒤 2년 동안 지정은제는 복건, 섬서, 감숙, 강서, 호북, 강소, 안휘성을 걸치고 산서성에서도 시행해 건륭 연간에는 완벽하게 정착했다.
옹정 5년, 계주의 지주 서리 진순예(秦順兒)는 지세를 납부하라고 재촉했지만 지방의 유력자들은 반발하고 거부하며 오히려 진순예를 탄핵했다. 하지만 옹정제는 진순예는 그대로 두고 지세 납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때려잡았다.
당시 중국의 사회계층들인 향신(중국의 과거에 합격하고 임관하지 않은 채 향촌에서 사는 자 또는 향촌의 퇴직 관리나 대지주, 유력 인사 등)들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실질적인 향촌 지배자였다. 이들은 지세 납부에 반발하며 계속해서 저항했는데 1727년 동광현의 지현 정삼재(鄭三才)는 혀를 내두르면서 황제에게 이렇게도 보고했다.
격노한 옹정제는 진상 조사를 철저하게 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향신들은 영향력이 워낙 커 관리들도 다루기가 힘든 존재들이었기에, 순진한 지방관들은 오히려 이들에게 털리기 일쑤였다고..."이곳의 악랄한 향신들이 온갖 구실로 관을 위협하고 지세를 내지 않아 백성들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얼마나 지세 납부에 대한 향신들의 반응이 나빴나 하면, '''"지세를 내면 대장부가 아니다!"'''라는 말까지 퍼져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아예 향시의 시험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누군가가 나가면 응시자들의 답안을 뺏어서 찢어버렸다. 호광 지역에서도 이들은 단합해서 지세 납부를 거부하며 관과 맞서면서 뻗댔다.[33]
옹정제는 이에 강력히 대응했다. 응시생들이 단체 활동을 한 번만 더 벌이면 영원히 응시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조서(詔書)를 내리고, 산동 지방의 진사, 거인, 수재, 감생 등 1천 4백여 명의 공명을 모두 박탈시키는 등 불이익을 주거나 벼슬길 자체를 아예 막아버렸고, 지세를 미납한 사람은 모조리 체포하는 등의 강력한 대응 끝에 향신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로 바뀌었고, 지정은제를 확립했다. 즉 현대 중국에서도 하기 어려운 일을 밀어붙여서 해낸 것이다. 심지어 이때 중국은 지금보다 더 넓은 주제에 교통도 통신도 극악이라 각 행정 구역 경계에 숨어사는 사람을 못 잡아내던 때였고, 향신들의 힘이 지방관보다 강한 것도 당연한 데다, 이미 그놈의 '꽌시' 문화로 지방관과 향신이 결탁하기 쉬운 시대였다.[34] 이를 극복해 낸 것은 그야말로 조세 행정에 있어 몹시 철두철미했다고 볼 수 있다.
3.5. 부정부패의 근절
옹정제는 관리들의 부정부패 문제를 가장 많이 손봤다. 명·청 시대에는 모선(耗羨)이라는 공공연한 관행이 있었는데, 본래 지정한 세금보다 쌀이나 은을 조금 더 걷는 것이었다. 이 관행은 기본적으로 행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부가세의 필요성과 관리들의 봉급이 너무 적다는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청나라 시대, 북경의 문무 관리들의 1년 봉은은 다음과 같았다.[35]
관료에게는 봉은 외에 봉미도 지급했다. 봉은 1량 당 봉미 10말을 추가했는데, 외직에 나간 문관들은 봉미가 없었고, 무관의 봉은은 북경에 있는 무관의 절반이었다. 이 계산으로 보면, 지방 최고의 수장인 총독은 연봉이 180량, 포정사는 150량, 안찰사와 염운사는 130량, 도원과 지부는 105량, 동지와 지주 80량, 통판과 주동 60량, 현령과 학부교수 45량, 현승, 교유, 훈도 각기 40량, 주부 33량 1전, 전사와 순검 31량 5전이었다. 재부는 12량, 포병 8량, 문자, 마부, 고사, 옥졸은 연봉이 6량이었다.[36] 청나라 시대의 소설인 홍루몽을 보면, 제법 무난하고 사는 농민이 1년에 20량 정도를 버니 말단 관리들은 봉급만으로 생활하자면 사실상 빈민이었다. 더구나 상사의 접대, 지인과 자신을 추천해준 은인에게 주는 선물, 부족한 행정 비용 문제까지 겹친다면?
이런 상황에서 세금을 규정액보다 조금 더 걷는 "모선"은 관리들 입장에서는 생계와 임무 수행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었다.[37] 강희제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1량을 걷을 때 1할만 걷는다면 청렴한 관리"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모선은 정규 세금이 아닌 부가세이고 필요할 때마다 걷는 것이다보니 내는 사람은 내고 안 내는 사람은 안 내는지라, 지방의 막강한 향신과 지주들이 갖은 수를 써서 내지 않으려 하여 다른 농민들에게 세금이 전가되는 폐단이 심했다.
옹정제는 현실적인 사람이었기에 부정부패를 막으면서도 이런 관행을 완전히 근절시키려고는 하지 않았다. 대신에 모선귀공(耗羨歸公)제를 실시해서 모선을 정규 세금화하여 모선의 징수 과정과 징수량을 국가에서 파악해 부정부패가 일어날 소지를 줄였다. 그리고 관료들의 모선 징수를 합법화하는 대신, 그 수치를 정해 놓고 그 범위 안에서만 징수하게 했다. 또한 관료들에게 양렴은을 지급해서 관료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면서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관리들은 가혹하게 처벌했다. 양렴은은 말 그대로 '청렴을 기르는 은'이라는 의미인데, 명청대의 관료 봉급이 중국 역사상 역대급으로 낮았고, 관료가 현실적으로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고서는 생계는커녕 자비로 지출하는 경비조차 충당하기 힘든 구조를 감안하여 원래 녹봉의 최대 300배에 달하는 양렴은을 관료에게 지급하여 관료들에게 경제적인 안정을 제공하는 대신 부정부패에 대해서 엄단하는 정책을 취했다. 관료의 봉급이 지나치게 낮은 것 자체가 부정부패의 한 유인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했던 것이다.
만약 모선귀공 제도를 했는데도 또 다른 부패가 있다면 오히려 새로운 제도는 부담만 늘어날 뿐이다. 그래서 옹정제는 각 성의 지세 보유량을 확실하게 파악하면서, 측근들을 모아 적자 상황을 관리시켰다. 적자가 나면 책임자가 자기 돈으로 채워야 했다. 그리고 조사해서 세금을 착복한 사람이 나오면 옹정제는 만주족이든 몽골의 귀족이든 한족 신사층이든 예외없이 모조리 처벌했고, 이들은 추징금을 납부하기 위해 자기 재산을 털어 메꿔야 했다. 심지어 강희제의 자식들까지 착복한 세금을 메꾸기 위해 가재 도구와 집까지 팔아 황제에게 돈을 바쳤다.[38]
중앙과 마찬가지로 지방에서도 이러한 조사는 철저했다. 옹정제는 심지어 '''"몰수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각 부와 주현에서 세금을 횡령한 관리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모조리 국고에 집어넣고, 은닉한 재산까지 찾아내서 몰수해 경매에 붙여서 팔았다. 지주의 착취로 부당하게 천민이 된 사람은 확실히 조사해서 다시 원래 신분을 회복시키고, 못된 지주는 강력히 처벌했는데 심지어 사형까지 시켰다.
이전까지의 관행으로는, 횡령죄가 드러나도 횡령금을 채워놓으면 관직을 유지했다. 하지만 옹정제는 이러한 제도의 허점(횡령한 금액을 채워놓기 위해 관리들이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돈을 마련함)을 깨달았다. 옹정제는 즉위하자마자 횡령 사실이 드러나면 곧바로 관리들을 파직시켰고, 옹정제 3년에 호남성에서 조사를 시작하자 무려 호남성의 관원들 중 절반 이상이 부패혐의로 쫓겨났다. 허베이 성에서도 3년 이상인 고참 관리들 대부분이 파직으로 밀려났다.
관리가 백성들의 돈을 뺏어먹으면, 그 혜택은 관리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 친척들까지 돌아간다. 그래서 옹정제는 횡령 사실이 드러나면 가족과 친구는 물론 이런 친척들까지 다 털어 재산을 뺏어갔다. 그러자 탐관오리들은 자기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까지 연루시키지 않기 위해 꼼짝도 못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대신 횡령금을 배상하는 제도도 없앴다. 그리고 죄를 추궁받아 자살한 사람마저도 철저하게 털어서 가족들에게 책임을 물었기에, 탐관오리는 자살해도 그 죄를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조금이라도 흠을 보이는 관리는 곧바로 파면하고, 후임자를 바로 임명했기에 많은 관리들은 얼마든지 자신을 대신할 존재가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비리가 너무나도 심한 관리나 지주의 경우엔 배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처형했다. 적자로 적자를 메우는 편법을 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39] 이러한 정책들은 끝내 성과를 내어, 옹정 10년차에는 원래 적자에 시달리던 하남성[40] 이 70만 냥의 은을 보유하며 완연한 흑자로 돌아섰다. 뒷날의 역사학자 장학성(章學誠)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옹정제의 개혁에도 한계가 있었다. 모선귀공제와 양렴은은 물가 상승을 반영하지 않았기에 나중에가면 점점 그 가치가 떨어졌고, 옹정제 사후의 청 조정이 물가와 행정 비용 상승률에 맞춰 제도를 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뒤에는 제도 자체가 거의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버렸다. 결국 관료들은 다시 부가세인 누규를 추가로 징수해야 했고, 관료 사회의 기강은 다시 무너지고 부정부패가 퍼져나갔다.[41][42]"옹정제가 관료 사회를 개혁하여 기강을 바로잡은 일은, 실로 천 년에 한 번 있을 만한 쾌거로다!"
3.6. 농업 장려
옹정제는 매년 경작에 들어가기에 앞서 직접 농사를 지었는데, 보여주기 식이지만 일전의 제왕들은 한두 번 하다 마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옹정제는 이를 정례화해서 계속했는데, 옹정제 밖에 그런 인물로는 1900여 년 전의 검소한 황제 한문제 정도가 대표적. 옹정제는 자신뿐만 아니라 관리들에게도 강요했고, 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벌했다.
농업을 발전시키려는 옹정제의 생각은 파격적인 선택으로 이어졌다. 그 전부터 중국의 왕조에서 농업을 중시했으나, 이는 생산량과 수탈하는 문제의 이야기지 농민의 사회적 지위나 이익하고는 무관했다. 그런데 옹정제는 농민에게 벼슬을 내려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당시 지방에서는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는 있어도, 생산을 지도하는 관리는 없었다. 옹정제는 경험 많고 모범적인 농민들을 8품의 벼슬에 임명하고, 농민들의 농사에 도움을 주게 했다. 물론 이런 제도도 금세 폐단이 나타나 가짜 농부들이 이 벼슬을 받고 행세하는 일도 있었지만, 옹정제는 이런 사람들을 탄압함과 동시에 자수를 하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하여 이런 가짜 농부들을 없앴다.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잘 활용한 셈.
3.7. 개토귀류(改土歸流)
옹정제는 믿을맨 3총독 중 유일한 만주인인 시린교로 오르타이를 운귀광총독에 기용하여 사천, 운남, 귀주 등의 서남지역 지방 행정제도에 대해 개혁을 단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개토귀류 정책이다. 당시 서남지역에서는 토사제(土司制)가 실시되었는데 이 제도는 세습적인 토착 소수민족들의 우두머리들인 토사들이 지방 세력을 키우고 할거하는 데 유리했다. 특히, '''서남 지역은 구리 광맥이 풍부'''하여 중앙정부가 화폐 주조권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통제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지정은제를 실시해도 '''은'''은 어디까지나 '''세금 납부의 편의성을 위한 고액권'''이었을 뿐, '''일상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구리로 만든 동전'''이었기 때문.[43] 따라서, 동전의 유통량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하면 은 : 동전의 교환비가 불안정하여 국민들의 납세 부담이 커지거나 국가 재정이 불안정해지기 때문에 전 국토에 대한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실질적인 화폐인 동전의 주조에 필요한 구리가 많이 산출되는 서남 지역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던 것.
게다가, 경제적인 문제와 맞물리는 정치-행정적인 문제도 있었다. 사실, '''청나라의 통치 체제는 하나의 중앙정부가 여러 세력들을 각각의 방식에 맞춰 통치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청나라의 황제는 '''만주와 몽골의 대칸'''이자 '''한족들의 천자'''이며 티베트 불교와의 최왼 관계를 통한 '''티베트의 보호자''', '''서남지역 토사들의 우두머리'''를 겸하는 동군연합 통치 체제의 최정점에 있었다. 청나라가 괜히 '''키메라의 제국'''이라 불린 게 아닌 것.
각 타이틀들은 하나같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1. 만주와 몽골의 대칸 자리는 청나라 황실의 강력한 지지기반, 특히 무력기반인 팔기군을 제공했는데, 이는 만주와 몽골의 귀족들이 많이 믿는 티베트 불교의 보호자라는 타이틀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했고
2. 한족의 천자 자리는 청나라의 재정적 기반을 제공받는 기반인데, 여기서 징수하는 세금을 통해 만주와 몽골의 빈약한 경제력을 보완하여 귀족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함과 동시에 그들이 제공하는 무력으로 한족들을 통제했으며
3. 티베트의 보호자 자리는 제정일치 체제인 티베트의 상징적 통치자인 달라이 라마와 최왼 관계를 맺어 한족에게서 비롯되는 경제력과 만주와 몽골에서 제공되는 무력으로 티베트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대가로 티베트의 실질적인 통치권, 그리고 티베트 불교를 믿는 만주-몽골의 귀족들에 대한 통치 정당성을 종교적으로 부여받았고[44]
4. 서남지역 토사들의 우두머리 자리는 한족의 경제력과 만주와 몽골의 무력으로 통제하여 반란 세력을 통제함과 동시에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하여 경제의 혈액과 같은 화폐, 그것도 실질적으로 많이 쓰이는 동전의 주조에 필요한 구리를 안정적으로 수급하는 등
청나라는 매우 '''정교하면서 유기적이고 다원적으로 작동되는 물적 동군연합 통치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무력과 경제력을 확실하게 장악해야 이러한 통치 체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핵심인 화폐 주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서남지역에 대한 장악력을 높일 필요가 있었던 것.
따라서, 옹정제는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서남지역의 토착 소수민족 세력을 견제하고, 나아가 이들을 중국화시키기 위해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인 유관으로 하여금 지방을 다스리게 하고 조정이 파견한 군대로 지방군을 대체하게 했으며 토지를 통일적으로 측량하고 세수표준을 통일시켰으며 세습적인 토사제를 폐지하고 부역제도를 개혁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이처럼 개토귀류의 정책 실시는 지방 할거 세력을 견제하고 변방을 공고히 했으며 서남 지역 소수민족의 중국화, 경제와 문화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4. 워커홀릭 & 악덕 고용주
'''지독한 일 중독자였고, 신하들도 자기처럼 일하길 원해서 이를 강요하다시피한 악덕 고용주였다.''' 옹정제는 13년 통치 중 선제인 강희제를 본받아 정무에 주력했는데 이게 도가 넘어서 잠도 고작 4시간밖에 안 자는 정도로까지 심해졌다. 보통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정무를 보기 시작하여 늦은 밤까지 대신들조차 질릴 만큼 철저하게 집무에 임했다. 특히 제위에 오른 이후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순행을 가지 않았고 그저 수도인 북경에서 일만 계속 했다. 아직 어린 아이였던 8세에 즉위해 16세에 친정을 시작한 아버지 강희제나, 팔팔한 청년이었던 25세에 즉위한 아들 건륭제와 달리, 인생의 장년기인 44세에 즉위해서 황제의 업무를 집행한 시점이 다른 황제들에 비해 늦었음에도 재위 13년 만에 57세로 사망한 것은 과도할 만큼 세심하게 정무를 집행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다시 말해 '''과로사'''.
옹정제는 철저하게 지방관을 관리 감독하고 이중삼중으로 감시망을 펼쳐서, 늘 모반 가능성을 염두에 둬 세밀하게 관리들을 통제했으며 전국의 수많은 관리들이 보내는 보고서를 '''빠짐없이''' 읽고 모두 황제 전용의 붉은 먹으로 주석을 덧붙여 써서 돌려보내는 방식으로 업무를 보았다. 사실 이것은 선제인 강희제가 도입한 제도였는데 옹정제는 아버지가 만든 이 제도를 매우 적극적으로 써먹었다. 그야말로 고든 램지처럼 신하들을 한계치까지 인정사정없이 쥐어 짜낸 공포의 황제(...). 오죽했으면 청나라의 어떤 문인이 '옹정제 때 관리들 평가를 보면 부지런하고 유능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건 칭찬할 게 못 된다. 그 시대에는 그러지 못했으면 관직 생활을 못 했으니까.'라는 말을 했겠는가.
이 중에는 정책 관련의 진지한 답변은 물론, 옹정제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있다. 그 가운데는 형편없이 일하는 관리에게 '월급만 축내는 밥버러지'라는 등 대놓고 면박하는 글까지 있다. 원문에는 '無知(멍청한 놈)', '無識小人(무식한 소인배)', '覽, 笑之(쭉 훑어봤는데 웃기는구나)' 등의 표현들이 있다. 마치 뒷날 조선의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비밀 어찰을 연상케 하는 수준. 이것들을 보면 옹정제는 상당한 독설가였다. 이 때문에 신하들 입장에선 죽어나는데 내용을 빼먹고 쓰면 나중에 귀신 같이 알아서 그걸로 까고, 쓸데없이 장황하게 써서 진짜로 중요한 내용을 못 보고하면 또 그걸로 욕먹었다. 그런데 어떤 관리들은 정말 글 잘 쓰는 사람들을 옆에 두고, 적절하게 꾸며 써서 옹정제를 속이기도 했다니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는 듯하다.
이러한 관리의 철저한 감시에는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는데, 하루는 한 신하가 신나게 도박을 하고 놀았다. 그런데 마작패 하나가 사라져서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자 퇴근해서 그냥 집에 돌아왔다. 다음 날 출근했을 때 황제가 그를 불러 어제 뭐하고 놀았냐고 묻자 놀란 그 신하는 감히 황제를 속일 엄두가 안 나서 이실직고를 했다. 그러자 갑자기 황제가 사라진 마작패를 그에게 던지면서 솔직하게 말했으니 이번은 봐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그 신하는 공포에 질려서 그 뒤로는 도박할 엄두를 못냈다는 이야기.
또 한 가지 에피소드로는 형부의 신하가 옹정제를 알현했는데, 황제가 담당하는 부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물어보기에 그 신하는 대충 "잘 돌아갑니다."라고 대답했다. 조금 뒤 황제는 다시 "그래, 거기 부서에 걸린 현판도 잘 있더냐?" 하고 물어봤을 때도 신하는 "예, 제대로 걸려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그 관청 건물에 걸려있던 현판을 가져오게 해 그 신하 앞에 집어던졌다. 황제가 '''전날 밤에 측근을 시켜 관청의 현판을 떼어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형부의 현판은 본보기 삼아 한동안 원위치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쯤되면 전근대판 빅 브라더.''' [45]
5. 사망
이렇게 심한 일 중독자다 보니 몸이 남아날 리가 없었고 말년엔 과로로 몸과 마음이 다 망가져 요양을 해야할 지경까지 되었다. 문제는 그 와중에도 일을 손에 놓지 않아 이게 수명을 더욱 갉아먹고 만다. 1735년 8월 20일(음력)부터 상태가 나빠졌지만 21일에도 평상시처럼 정사를 봤다고 하며, 22일은 상황이 나빠져 보친왕 등이 간호하였고 23일에 원명원에서 사망하였다.
황제의 유해는 허베이 성 바오딩시 이현에 조성된 청나라 황실의 능구(陵區)인 청서릉(淸西陵)의 첫 번째 황릉인 태릉에 안장되었다.
옹정제가 이토록 세심하게 통치에 몰두한 것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 하나로 옹정제가 제위를 계승할 때 강희제가 지목한 열넷째 아들(十四子)의 유언을 고쳐 넷째 아들(第四子)로 조작했기 때문에 관리들의 반대가 있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삼번의 난이나 대만의 정씨(鄭氏) 일족(정성공 문서 참조)의 저항처럼 한족의 반란을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가짜유조설은 조선왕조실록에 옹정제가 즉위했을 때 사신이 만나보고 경종에 보고할때 거론될 정도였다.
실제로 옹정제의 치세에는 유명한 반청(反淸) 모의 사건이 일어났다. 쓰촨성(四川省) 총독인 악종기에게 반란을 권하는 통고문이 왔는데[46] 악종기가 이를 보고하자 옹정제는 사건을 세심하게 조사하여 모반자의 사상적 스승인 여유량(呂留良)을 부관참시하고 그 일족과 친구들을 처벌하였으며 저서들을 압수해 파기했다. 이 직후 만주족의 통치가 천명(天命)을 따라 올바르다는 식의 주장을 담은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직접 저술하여 널리 읽게 했다. 그러나 안습하게도 이 저술은 바로 다음 황제이자 아들인 건륭제가 금서(禁書) 처분을 하는 수모를 겪는다. 현대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책에 논리적인 허점이 많아 되려 한족 지식인들의 공박의 빌미가 될 우려가 있어 금서 처분시켰다고.[47]
6. 가정 관계
6.1. 아내
효경헌황후 오랍나랍씨(孝敬憲皇后 烏拉那拉氏)
1679년 출생 ~ 1731년 사망
효경헌황후의 유일한 아이로 2살 때 조부 강희제(康熙帝)로부터 화석단군왕(和碩緞郡王) 작위에 책봉되었지만 5년 후 1704년에 홍역으로 인하여 향년 7세로 요절하였다. 사후 31년이 지난 1735년에 이복동생인 건륭제가 등극 후 단친왕(端親王)으로 추봉해 주었다.
옹정제와 생사를 건 황위쟁탈전을 같이 한 조강지처로, 13살 때 패륵이었던 옹정제의 적복진으로 간택되었다. 옹정제 즉위 후 황후로 책봉되었으며 옹정 9년에 붕어한 후 효경황후로 추봉되었다.효성헌황후 뉴호록씨(孝聖憲皇后 鈕祜禄氏)
1692년 출생 ~ 1777년 사망
개국오대신 액역도의 사촌인 액역등의 증손녀로 1704년 수녀 간택에서 옹친왕부의 격격으로 출가하였다. 명문가의 방계는 맞지만 증조부와 조부는 관리가 되지 못해 조상들의 능력 부족으로 권력이 쥐뿔도 없는 가문 출신으로 보면 된다. 원래 하오기인 양백기 출신이었으나 건륭제 등극 후 황태후에 책봉되면서 양황기로 편입하였다. 건륭제는 생모에게 둘도 없는 효자였고, 청의 전성기에 태어나 최전성기의 황태후로 살다가 기울어지기 전에 죽은, 청조 역사상 가장 복받은 여성.
6.2. 첩
'''돈숙황귀비 연씨(敦肅黃貴妃 年氏)'''
?년 출생 ~ 1725년 사망
- 황4녀 1715년 ~ 1717년
- 7남 복의 1720년 ~ 1721년
- 8남 화석회친왕 복해 1721년 ~ 1728년
- 9남 복패 1723-1723
'''순의황귀비 경씨(純慤皇貴妃 耿氏)'''
1689년 출생 ~ 1784년 사망
'''제비 이씨(齊妃 李氏)'''
1676년 출생 ~ 1737년 사망
시첩 출신의 후궁으로 옹정이 청년기에 가장 사랑한 후궁이었다. 그러나 연귀비가 시집오면서 총애는 밀렸고 홍시 문제까지 겹쳐서 냉대 받게 된다. 원래는 포의 출신이었으나, 장자 홍시의 체면 때문인지 제비에 대한 정이 남은건지 신분을 상승시켜주긴 하였다.
'''겸비 유씨(謙妃 劉氏)'''
1714년 출생 ~ 1767년 사망
말년기에 가장 사랑받은 후궁. 1729년 궁녀를 뽑는 수녀 간택에 참여했다가 옹정의 눈에 들어서 한번에 답응이 되었고, 몇 달뒤인 1730년 1월에 상재로, 또 두 달 뒤인 3월에 귀인이 되는 초고속 승진을 했다. 3년 뒤 아들 홍염을 낳고 겸빈이 됐다가 건륭제가 즉위하면서 태비가 되어서 최종 품계는 겸비. 홍염은 강희제의 황17자이자 옹정제의 심복인 아우 과친왕이 아들을 낳지 못했기에 과친왕의 양자로 출계하여 과군왕작을 이어받았다.
6.3. 평가
문무겸비였긴 하지만 옹정제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외적인 측면에서 국력을 과시한 아버지 강희제나 아들 건륭제보다는 내치에 힘써 뭔가 겉으로 보여줄만한 건덕지가 적었고, 아우가 오를 제위를 빼앗아 자신이 대신 올랐다는 소문 등으로 인해 근현대까지만 해도 민간에선 폭군이란 이미지가 강해 평가가 그리 좋지 않았다.
허나 학계 등에서 옹정제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며, 현재는 옹정제가 외정(外征)을 철저히 삼가고 내적 충실과 국가의 안정에 힘써 강희제의 60년 치세 뒤 동요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다져놓은 명군이었다는 평도 받고 있다.[48] 사실 강희제와 더불어 당대 유럽 일각에서 '청나라야말로 이 세상의 유토피아'라는 평가를 내리게 만든 군주기도 한걸 보면, 당대에도 평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모양. 요컨대 강희제에 의해 전성기에 진입한 청 제국이 옹정제의 치세를 거치며 더욱 반석 위에 올라서고, 건륭제 때 그 영화를 누렸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일본의 동양사학자 중 한명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옹정제를 세심하게 조명한 평전 <옹정제>에서 옹정제의 재위기간이었던 13년이 본인과 관료들이 버틸 수 있는 최대 한계라 봤는데, 충분히 일리가 있다. 오늘날 회사로 비유하면 야근 강요는 기본에 불법 사찰, 사내 정치질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관료들 피를 말리다시피 하며 그들의 역량을 쥐어짜낸 악덕 고용주였던지라 그 이상 했다간 서로 뒷감당이 어렵다는, 즉 혹사당한 신하들이 황제를 몰아내려는 반정 내지 역성혁명을 모의하고는 더욱더 나아가면 내전까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말. 그래도 미야자키는 옹정제를 '엄청난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라기보다 구도하는 수도자처럼 경건하고 치열한 자세로 정치에 임하며, 전제 군주제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극한의 선을 실천한 군주'로 호평했다. 한국판 위키백과도 참고.
실제 말년에 사치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은 특히 임기가 무한보장되는 전제군주제 시절 지도자에게 있어 중요한 덕목이다. 그리고 의외로 폭군 이미지와 달리 옹정제의 인품을 알 수 있는 한 마디가 한국의 도덕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는데, 바로 '''"이 한 몸을 위해서 천하를 희생시키지는 않으리라."''' 물론 그 대신 천하를 위한답시고 자신과 신하들을 갈아 넣었다. 명군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란 것을 보여주는 또다른 예.
한편으로 미야자키는 옹정제를 '''소심하고 내성적인(?!)''' 인물이라 분석하기도 했다. 옹정제한테 잘못 찍혀 목이 잘린 신하들이 들으면 머리 없는 귀신도 뒷목을 붙들고 쓰러질 말이지만, 그의 평가를 찬찬히 곱씹어보면 단순히 옹정제의 천성이 나약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내성적인 사람이 강한 기를 품고 있다고 보는, 즉 소심하다기보다는 마이클 조던처럼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던 '''쪼잔한''' 성격이라 본 것. 순진무구한 촌뜨기 선비인 증정에 대해 듣고는 천자로서 그냥 목을 쳐버릴 수도 있는데(실제로도 건륭제는 답답한 놈 상대하기 싫다고 다짜고짜 목을 날려버렸잖은가!) 사상개조해보겠다고 직접 하나하나 반박하며 승복시키던걸 보면 확실히 쪼잔한 인물은 맞았던 듯.
7. 기타
[image]
희대의 악덕고용주라는 이미지와는 별로 안 어울리지만 이런 그림도 있다. 서양 가발을 쓴 모습이다. 실제 옹정제는 코스프레를 즐겼던 황제라고 한다.(...) 특히 옹정제는 코스프레를 하고 다닌것을 그림들로도 남겼다.#
위에 소개된 코스프레 그림들을 보면 아무리 중국 천자라도 남자의 주적은 피할 수 없었던 듯 보인다. 훈남이었던 옹친왕 시절 머리가 조금 자란 상태의 초상화##를 보면 중년에 황제에 오르고 격무에 시달리며 스트레스성 탈모가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49]
청나라의 야사가 담긴 '청대야사필기대관'이라는 책에 따르면, 옹정제의 한족 신하들이 스스로를 '노재'(奴才)[50] 라고 하는 걸 듣자 엄히 질책하면서 다시는 그런 말 실수를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이 일은 심지어 정사에서도 나온 기록이다. 옹정제가 왜 한족 신하들이 스스로 노재라고 칭하는 것을 금지시켰냐면 처음부터 그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재는 황제의 가노(家奴), 포의를 뜻한다. 즉 만주족 신하들은 대대로 청 황제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써도 되지만, 한족 신하들은 피고용인이지 진정한 황제의 사람은 아니기에 노재라고 칭할 자격은 없다고 여겨 그리 일침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만한을 가리지 않고 관료들을 '''골고루 불신'''했던 옹정제였음을 감안하면[51] 딱히 만인이라고 함부로 노재라 칭해도 옹정제한테 욕 안 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선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몸소 수행했으며, 스스로에게 원명거사(圓明居士)라는 호를 붙이기도 했다. 여러 화두를 타파할 정도로 상당히 높은 경지였다고 하나, 말년에는 도교의 연단술에 심취해서 단약을 과다복용한 부작용, 즉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고도 한다. 실제 사인은 비소에 의한 독살이었음을 검시를 통해 밝혀낸 광서제의 예처럼 청서릉을 발굴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아저씨의 생활 습관으로는 단약이 아니었어도 딱히 오래 살았을 것 같지는 않다는게 아이러니.
옹정제의 치세(1722년 ~ 1735년) 기간은 조선 왕조의 경종(1720년 ~ 1724년)의 재위 기간과 영조(1724년 ~ 1776년)의 재위 초반 10년과 일치한다. 같은 시기 일본 에도 막부(1603년 ~ 1867년 / 1868년)의 쇼군은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1716년 ~ 1745년)다.
8. 옹정제가 등장한 작품
원래는 아버지인 강희제, 아들인 건륭제에 밀려 영화나 드라마 등의 주인공인 횟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주인공으로 많이 안 나왔을 뿐이지, 강희 만년의 후계자 분쟁 과정의 논란이 해결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흑막으로 나왔던 적도 많았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강희제, 건륭제 관련 사극이 원체 많이 나와서인지 대타격으로 옹정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도 나오고 있다.
8.1. 드라마
- 《대내군영(大內群英)》[52] 배우 : 만자량
홍콩 RTV(現 aTV) 제작. 이 드라마는 애당초 무협 드라마에다가 여사낭과 옹정이 러브라인으로 맺어지는 막장 설정이니(결말은 배드 엔딩) 해당 드라마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매우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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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청십삼황조(滿淸十三皇朝之雍正)》 배우 : 위열(煒烈)
만청십삼황조 역시 홍콩 aTV에서 만든 드라마로, 청나라 13명의 황제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단, 1980년대에 제작했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야사를 참고했기 때문에 내용전개에 있어서 현재 새롭게 밝혀진 역사적 사실과 다른점이 많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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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이 옹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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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이 옹정제.
- 《구왕탈위(九王奪位)》[54] 배우 : 강화
이 드라마도 홍콩 aTV에서 제작했고, 옹정제를 '황위를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성격의 캐릭터로 설정하였으며, 황제에 등극하고 자신의 절대 권력을 확립하는 피 튀기는 과정이 여과없이 나온다. 옹정제가 강희제의 유조를 위조하였다는 설을 채택하였고, 심지어는 강희제를 살해한 것이 옹정제 자신이라는 설정까지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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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제작. 강화가 연기한 <구왕탈위>의 옹정제보다 잔인함은 줄어들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훌륭한 행정가이자 황제인 옹정제의 모습을 그렸다. 폭군으로 묘사되기 일쑤인 다른 시리즈에서의 옹정제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만큼 불쌍하리만치 일만 하다 윤상, 홍시, 윤사 등의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 둘 잃어가며 한 인간으로서 무너져가는 처연한 워커홀릭을 잘 묘사한 당국강의 명연기가 일품이다. 짬이 날 때 코스프레를 하면서 어진 한 번 그려보라고 선교사들 불러다 놓고도 상소문 받아 읽다가 화딱지가 나서 다 내쫓아버리자 선교사들이 그림 언제 다 그리냐고 투덜대거나, 옹정 3총독 중 이위가 글자도 모르는 무식한 옹왕부 가노였는데 옹왕부의 다른 시녀와 눈이 맞아서 사천으로 쫓겨나 글을 배우고 일도 배우기 시작했다는등 코믹한 설정도 눈에 띈다.[56] 여기서는 염친왕 윤사가 변경의 팔기군을 북경에까지 끌어들여 쿠데타를 모의했다가 다 죽어가는 윤상에 의해 가까스로 제지당한 후 아키나라고 개명당하며 유폐되는 것은 역사와 대충 비슷한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어리바리한 철부지 홍주와 홍력에게 열등감을 가진 홍시를 끌어들였다고까지 설정했다. 홍시가 그 후에도 철없이 굴다 사사당한 것도 윤사의 충동질 때문이었다는 설정, 그리고 홍주는 아버지와 형제들 간의 권력다툼에 환멸을 느끼며 개망나니 행세나 하면서 몸을 낮춘다는 설정은 덤. 그래도 형제는 형제인지 윤상, 홍시를 잃으며 쇠약해진 말년의 옹정제에게 마지막 결정타를 먹인 사건 또한 윤사의 죽음이었다고 묘사된다. 윤진은 침침해지는 눈으로 빨간 붓을 들고 열일하던 생애 마지막 밤에 윤사가 앞서 사망하며 남긴 애증 어린 유서를 읽으며 윤사의 환영을 보다 산더미 같이 쌓인 밀지 위에서 피를 토하며 사망한다. 국내 p2p 사이트에서도 쉽게 드라마와 자막을 구할 만큼 옹정제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중에서는 널리 알려졌다.
대륙 제작. '냉면왕(冷面王)'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침착하며 감정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데다가 여자에게도 냉정한 나쁜남자 설정이다. 여주인공 마이태 약희를 일편단심으로 사랑하면서도, 황제에 등극하기 위해 물 밑에서 고군분투하고 끝내 최후의 승자에 올랐다. 그러나 공포 정치와 정적 숙청으로 약희와 틀어져 헤어지고, 끝내 약희의 죽음을 뒤늦게 깨달아 오열한다.
대륙 제작. 전반적으로 보보경심과 견환전의 옹정제를 섞어놓은듯 하다. 한 여자에게 빠지면 한 여자만 바라보는듯 싶다가도 정작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여자는 이용하려고만 하는등. 역사는 결국 4황자 손을 들어주지만 사랑은 쉽게 되지 않는 캐릭터로 나온다.
- 《후궁견환전(后宮甄嬛傳)》 배우 : 진건빈
대륙 제작. 독재자에 정적에게 잔인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일편단심이었던 대부분의 옹정제와는 달리, 특정 후궁을 편애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황제의 면목을 보인다.[57] 그러나 끝내(드라마니까) 희귀비 견환을 총애하고, 견환과 자신의 동생의 사이를 의심하던 중 병으로 쓰러져 후환을 두려워한 견환이 독살시킨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싱크로율로는 역대 옹정제 역인 배우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옹정제(후궁견환전) 참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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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소설
- 2005년 로맨스 소설 《보보경심》: 드라마 보보경심의 원작 로맨스 소설로 동화(桐华) 작가가 썼다. 대한민국에서는 2013년 번역 출판되었다.
8.3. 영화
- 쇼브라더스사에서 제작한 혈적자 1,2편
[1] Hūwaliyasun Tob Han[2] Nayiraltu Töb Khaan[3]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4] 서비나 빈 미만 후궁들이 황손을 낳으면 황후나 빈 이상 높은 후궁이 맡아 길렀다.[5] 봉작되지 못한 관녀(官女)와 함께 서비(庶妃)로 통칭/명나라와 청나라 후궁에겐 품계가 없다.[6] 강희 28년(1689년)에 황후로 진봉됐으나 이틀 후에 사망하여 효의인황후란 시호를 받았다. 효의인황후의 아버지 동국유(1643~1719)는 강희제의 외삼촌이 된다. 따라서 강희제와 효의인황후는 부부이자 이종사촌 관계였다.[7] 이 덕에 효의인황후의 남동생인 롱코도가 외숙부로서 옹정제를 물심양면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롱코도 역시 옹정제에 의해 숙청됐다.[8] 만주어로 왕자, 황자,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9] 윤잉 전에 승호(承祜)란 아들을 두었으나 요절하였다.[10] 윤잉이 겨우 한 살하고 일곱 달이 되었을 때 황태자로 책봉했을 정도다. 위에도 서술했다시피 윤잉은 첫째 황자, 즉 서자까지 포함시키면 장자는 아니다. 또한 강희제 이전 누르하치-홍타이지-푸린의 시대를 생각해보면 만주족 통치자들이 황태자라는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비록 황후의 소생은 아니지만 서자인 皇長子 윤제도 혜비 납라씨 소생으로서 윤잉의 외숙 색액도와 권력을 다투던 납란명주와 인척관계(叔姪인 것으로 생각된다.)로 세력이 매우 막강하였다.(누르하치 시기에는 적복진이 여럿 변경되기에 불명확하지만, 홍타이지 사후에 마지막 적복진인 오라나랍씨 소생인 도르곤이 계승권을 주장하고, 홍타이지의 장남이자 장성하여 여러 전공을 세운 숙친왕 호격 대신에 5비 중에 막내인 차서궁 장비 박이제길특씨의 소생에 어린 나이에 푸린이 즉위한 것에서 이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푸린 사후에도 강희제는 장남이 아닌 3남이었음에도 조모 박이제길특씨의 지원을 받아서 등극된다는 점에서도 적자의 개념이 적복진 소생이기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11] 물론 단순히 이것뿐만 아니라 윤잉 자체가 주색에 빠지는 등 막장 짓들을 벌였었다.[12] 이게 사실 웃긴 게 청나라에서 이제까지 다음 후계자를 세울 때에 관리들과 상의를 한 적이 없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후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아서 사후에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아들들과 조카들 중에서 팔기의 수장이된 사람들로 구성된 회의체가 열렸고, 강희제는 조모이자 홍타이지의 측복진인 차서궁 장비이며, 순치제의 친모인 박이제길특씨의 지명으로 등극하였다. 다만 관리들의 의견을 잘 청취하던 강희제의 평소 행동을 보고 착각했을 수는 있지만, 왕조시대에 군주가 자신의 후계를 신료들의 의견을 결과에 반영시킬 수는 있어도 이에 따라서 세우지는 않는다.[13] 영락제가 손자인 선덕제를 총애해 그 아버지인 홍희제에게 다음 보위를 물려준 것과 같다. 하지만 홍희제는 영락제의 적자이자 장남이기에 당연한 후계자이다. 다만 동생들에 비하여서 무른 성격에 군사적인 전공이 없기에 교체의 빌미가 될 수있는 여지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교사회에서 장남이 아닌 아들에게 보위를 물려주면 뒤가 너무 시끄러워진다는 것을 조카를 쫓아낸 영락제가 모를 리는 없다.(조카 건문제 측근에 간신 토벌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며, 건문제가 사라졌다는 명분으로 즉위한 영락제는 많은 유학자들로부터 외면 받았다. 이를 자신의 武功으로 채우고자 한 것인데, 또다시 외정에만 몰두해야 하는 경우를 만들기에는 나라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14] 이 논란이 사라진 건 강희제의 유조가 공개된 2013년이다. 앞의 유조가 없어도 사실 조서 위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당시 청나라는 공식문서를 한자로만 작성한 것이 아니라 만주어로도 작성하였으며, 조작되었다라는 글자는 당시 황실에서 사용하지 않았으며, ''0황자''라고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황0자''라고 표기하였다라는 것을 생각하면 확실하다. 다만 강희제 사망쯤에 베이징이 사실상 거의 폐쇄상태였다라는 것과 옹정제가 후계자로써 임종을 지키지 않고, 유조 발표때에도 있지 않았다라는 것등으로 인하여서 아직까지도 약간의 의혹들이 남아 있다.[15]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옹정제 평전에서, 1황자와 한때 태자였던 2황자는 부황의 눈 밖에 난 후이고, 3황자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능력이 부족해 외면받던 상황에서 가장 큰 정통성을 가졌던 4황자 윤진(옹정제)이 황위를 물려받는 게 맞았다고 주장했다. 아들인 홍력의 총명함이나 쓸데없이 앞에 나서지 않는 옹정제의 치밀함은 부가적인 것이라고 봤던 것.[16] 강희제 중반기까지의 외치는 외몽골 일대까지 안정시키는 등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강희제 말년에 이르면 준가르가 강화되고, 황자들의 후계다툼이 커지면서 상황이 어려워졌다.[17] 생전에 황태자를 발표하지 않고 적어서 상자 안에 봉해 두었다가 사후에 공개하는 방법. 생전에 황태자의 파벌을 형성하거나 선조처럼 황태자를 바꾼다고 신하들이 대립하는 경우가 없어지는 효과가 있었다.[18] 오히려 건륭제는 본인이 너무 오래오래 사는 바람에 아들들이 먼저 죽자 슬퍼하며 자기가 봉인해놨던 유조를 직접 꺼내보이는 일도 여러 번 있었고, 결국 본인이 죽기 전에 제위를 물려주기까지 했다.[19] 본래의 의미는 문안 인사나 하사품의 답례 등 그냥 개인 연락망이었다.[20] 명 홍무제 주원장이 처음 계획하고, 영락제가 체계를 구축한 황제가 모든 행정을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은 옹정제에 이르러서 더이상 발전할 수 없는 최고의 체제를 만들었다. 중국 전역의 지방관들과 직접적인 통교는 여럿 체계를 거쳐서 진행되는 행정적인 지연을 방지하고, 민생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업무를 가장 빠르게 진행하는 등의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업무 과다로 황제의 수명 단축과 황제 측근의 총애받는 권신들이 모든 국정사무를 농단할 문제점들을 발생시켰다.[21] 옹정제의 믿을맨 3총독인 하남총독 전문경, 절강총독 이위, 운귀광총독 시린교로 오르타이 중에서도 만주인이라 유달리 신임이 두터웠던 오르타이에게 옹정제는 대략 "흐규흐규 니 편지 읽으면서 야밤에 눈물이 난다 너 같은 착한 놈은 조상님들도 9대조까지 극락왕생하실거야ㅠㅠ", "니 글은 진짜 정성이 느껴진다 한글자 한글자 읽을 때마다 각잡고 읽는중!", "천지신명이시여 우리 오르타이 무병장수하고 자손만대 부귀영화 대박나게 해주세요 우리 오르타이 하고 싶은거 다해♡"(...) 같은 편지를 보내며 '주접을 떨었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옹정이 자손만대 부귀영화 누리라던 오르타이도 사후 10년 만에 후손들이 문자의 옥에 휘말려 자기 위패까지 태묘에서 쫓겨났다는 게 아이러니. [22] 예를 들어 옹친왕 시절부터 예산 낭비에 대해선 봐주지 않는 옹정제의 까탈스러운 성격을 잘 알기에 강희제의 능원 공사에서 돈을 아꼈더니 네놈은 선황을 능멸할 셈이냐며 욕하고, 다른 곳에서는 돈을 물쓰듯이 낭비한다고 욕하는 식이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그냥 화병이 나서 죽어버리라는 듯이 정말 온갖 문제에 대해서 열심히 꼬투리를 잡았다.[23] 다만 현대 만주어에서 개는 인다훤(indahūn), 돼지는 울갼(ulgiyan)이다.[24] 강희제는 조선의 세종과 비슷하게 아들들에게 여러 정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황태자로 삼은 윤잉은 다른 형제들보다 더 엄격한 교육을 받았지만, 장성한 다른 황자들도 모두 고등교육을 받고 여러가지 업무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강희제 말년에 장성한 황자들의 후계다툼은 강희제 본인이 단초를 만든 것이었다.(강희제 본인은 황태자 윤잉에게 보위를 승계하고자 하였기에 이러한 혼란을 생각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거기다가 엄격한 4황자인 옹정제보다는 8황자 윤사가 형제들과 관료들 사이에서 깊은 신망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황위는 황제가 지정하는 것이지 형제들과 신료들의 추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은 헛된 꿈을 놓지 못하고, 옹정제 시대까지 와서도 황제와 대립하였다. 원~명나라 이전시기까지는 황제의 권한이 절대적이지 못하였기에 변경될 여지가 있었으나, 이후 시기에는 이러한 생각은 정말로 어리석기 그지없다.[25] 황제는 소위 '''천병'''의 소유자이며, '''최종 군통수권자'''다. 병사들이야 명령체계를 따른다 쳐도, 연갱요는 두 번이나 군령을 씹은 것이다.[26] 약간 더 부연하자면 황제는 최종 군통수권자이며, 팔기 중 상삼기(양황기, 정황기, 정백기)를 관장하는 기주이다. 이에 비하여 연갱요는 준가르정벌을 위하여서 파견된 대장군으로 옹정제로부터 지휘권을 이양받은 것이지 본인이 통수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였다,(일단 연갱요 본인도 양황기 한군 소속이 아닌가!) 그런데 이때는 준가르 정벌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베이징으로 돌아와서 생긴 것으로 이양된 지휘권이 옹정제에게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였음에도 이같은 행태가 나타난 것이다. 비슷한 사례인 주아부 같은 경우에는 한 문제가 주아부가 통솔하는 군영으로 갔을 때에 생긴 것으로 이때는 북방의 흉노가 갑작스럽게 침공할 여지가 있는 상태에서 사전에 연락하지 않고서 황제가 진짜로 왔는지 판단되기 어려웠기에 용인되는 것이였다. 또한 연갱요 이전에 대장군직을 황제의 형제나 황자가 맡았기에 이러한 행태가 용인 되었을 지는 몰라도 옹정제로서는 이 지위를 가지고서 자신에게 대항한 동복동생인 황14자가 머릿속에서 떠올랐을 것이다. '''연갱요는 만인도 아닌 한인 출신에 오직 옹정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높은 지위에 이르렀음에도 자신이 잘난 것으로 착각해서 오만불손한 행보를 보였으며, 연갱요의 말년이 괴로워진 것은 모두가 그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27] 물론 군대에서도 상관이 명령을 잘못 내릴 수있고 이에 대해 하급자가 반대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는 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는 장수가 황명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있다. 허나 연갱요는 항명도 아닌 무시를 했다. 상급자가 명령을 했으면 따르던지 안따르던지 뭐라도 반응은 보여야하는 것이 고금을 막론하고 군대의 예법이다. 군통수권자로부터 군령이 두번 씩이나 내려왔는데 정면으로 무시한 데다 그 무시를 말리는 사람도 없게 만들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28] 그 죄들 중에는 '자신을 제갈량에 비유한 오만함'이라는 죄명도 있다.[29] 다만 사사정을 죽인 것은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다.[30] 심지어 서준은 이렇게 하고서도 뻔뻔스럽게도 한자도 모르면서 문자를 마음대로 뜯어고친다며 비꼬는 시를 짓기까지 했기 때문에 괘씸죄로 목이 베여서 효수되었다.[31] 옹정제가 과한 측면이 있지만, 앞서 이야기한 강희제 말년의 황자들의 황위 계승 다툼과 이 과정 속에서 황8자이던 염친왕 윤사가 신하들의 중망을 받아서 옹정제에게 대항하였던 측면을 고려하면 전혀 이해 못 할 것은 아니기는 하다.(강희제의 그 많은 아들들 중에서 옹정제의 편에 있었던 사람은 아주 어린 황자들 몇을 빼고는 황13자 윤상과 황16자 윤록, 황17자 윤례 등이 전부였고, 나머지들은 여러 트집을 잡아서 박해하였으니 옹정제가 사람 불신에 빠진 것이 이해가 될 정도이다.)[32] 중국 드라마 이위당관(李衛當官)에서의 이위가 바로 이 사람이다. 어릴 적에 고아가 되어 무술을 익혔지만 무관직에서는 출세하기 힘든 한인인지라 정작 벼슬살이에 필요한 글공부는 못해서 겨우 연납으로 호부에서의 말단 벼슬자리를 얻어 성실히 일하던 중 옹친왕의 눈에 띄었던 인물인데, 어지간한 매관매지션(...)들이 백성에게서 본전을 뽑으려 쥐어짜는 탐관오리로 흑화하는 것과 달리 오히려 자신을 과거 합격자가 아니라고 깔보던 웬만한 과거급제 출신 기성 관료들보다 훨씬 나은 일처리와 청렴함(!)을 선보인 덕에 관료집단을 극혐하던 옹정제가 크게 신임했다. 사실 저학력은 어쩔 수 없었는지 일처리가 실제로 뛰어났다기보다는 불도저식 업무로 일관했다는 평가도 있긴 하나, 오히려 과거제의 학맥에 연연하며 썩어가던 관료사회의 고인 물을 정화하는 데에 꼭 필요한 강단 있는 성품이야말로 옹정제가 옹친왕 시절부터 아주 높이 평가하던 장점이었다. [33] 만주족이 산해관을 넘은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인 순치제와 강희 초년에는 사회지도계층인 향신들을 회유하고자 비교적 많은 양보를 하였다(이 양보라는 것이 엄청난 것은 아닌데, 이전 시기 향신들이 각 지방에서 가지고 있던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강희제가 친정을 한 이후에는 황제가 천하제1의 유학자라는 것을 타이틀로서 한족들을 통치하고자 하면서 또한 많은 우대와 대화를 하였다. 이에 향신들은 몇십년에 이르는 동안 각 지방을 예전처럼 장악하고, 중앙정계에까지 진출하여 강력한 계층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서생들은 주원장 이후 편성된 황제독재체제로 구성된 행정체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유학은 周代 봉건이나, 宋代에 君臣共治라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음). 강희제의 양보와 배려를 마치 자신들이 원래부터 가졌던 권리인 마냥 생각하였기에 이딴 웃기지도 않는 일을 벌였다. 다만 옹정제는 어차피 만주인이건, 한인이건 고위관료들과는 원래부터 척을 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가신들(대표적으로 일 잘하는 3총독 전문경, 이위, 시린교로 오르타이)이 그들보다 훨씬 유능하였기에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34] 현대 중국에서도 지방 유력가들과 관료들이 꽌시 문화를 통해 결탁하고 카르텔을 형성하곤 한다.[35] 출처는 등예쥔, 치국[36] 참고로 은 1량(兩) = 1200푼(이건 공식적인 시세이고, 실제로는 등락이 있었다.)[37] 최하위 지방관인 지현조차도 1년 지출이 천 냥이 넘는데, 국가에서 받는 돈은 100냥이 안 되니 방법이 없었다.[38] 강희제도 자신이 근검절약하고, 근검절약하는 청렴한 관리들을 우대하여(고위직 임명과 자신의 내탕금으로 생활 보조 등) 부정부패를 처리하였다. 그러나 중반까지는 그런대로 흘러갔지만, 노년이 되면서 황제의 국정 장악력은 떨어졌고, 황자들이 후계자가 되기 위하여 여러 부정부패들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것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국고의 자금을 관료들이 빌리고서 계속해서 갚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생활이 어려운 관리들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갚도록 하는 좋은 제도였는데, 문제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갚는 것을 계속해서 미뤄버리면서 국고가 비게되었다. 강희제도 나중에 이것을 깨닫고 황4자 옹친왕에게 이 일을 맡겼는데, 그 뿌리가 깊고 거대하였기에 황제가 되고 나서까지도 이와 같은 부정부패 일소에 전력을 다하였다.(우리가 잘아는 김용의 소설 <녹정기>의 주인공 위소보의 모티브가 된 인물 중 한 명인 위동정이라는 인물도 국고에서 많은 금액을 빌렸는데, 옹친왕에게 혹독하게 당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이 국고에서 빌린 이유는 강희제가 강남에 원행을 갔다가 올 때에 최소금액으로 다녀오면서 총신이던 위동정의 집에 자주 갔었는데, 위동정으로서는 황제에게 극진히 대우하면서 많은 금액을 지출하였다. 강희제는 내무부에 이야기해서 내탕금을 받으라고 했지만, 황제가 집에 오신것으로 이미 '''황은이 망극하옵니다'''인데 받을 수 없기에 자신의 이름으로 국고에서 금액을 빌렸다. 이후 이 사실을 들은 강희제는 내탕금으로서 결손부분을 채웠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옹정제는 즉위 후 베이징 밖으로 사적인 순행을 떠난 적은 없다.)[39] 그에 반하여 그 아들인 건륭제 때부터는 이런 기강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황제 개인까지 뇌물을 받아서 재산을 착복했으니 말 다한 셈이다. 게다가 현대 중국도 민국, 중공 가릴 것 없이 부정부패와 비리가 끊이지 않아서 중국 정부에서 근절 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해도 제대로 되지않는 상황이다. 이러니 재위 당시의 옹정제가 보통 위인이 아닌 셈.[40] 이곳이 옹정제의 믿을맨 3총독 중 전문경이 관장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전문경은 이미 강희 때부터 오랫동안 일한 고령의 관료였기에 건강을 많이 해쳐 틈만나면 사직을 청했으나, 옹정제는 전문경의 건강을 내심 걱정하면서도 사직을 끝끝내 허락하지 않다가 희대의 풍작을 일궈내어서야 유종의 미로써 사직을 허락했다. 결국 전문경은 옹정 10년 사직 이후 2년여만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옹정제는 하남성에 사당을 지어 기리도록 했다. [41] 가깝게는 이러한 관료제도를 만든 명 태조 홍무제에게 죄가 있고, 멀게는 봉건제를 가장 좋은 이상적 사회구조로 여기고 행하려던 유학에게 이러한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청나라의 대부분의 제도는 명의 것을 이어받았는데, 홍무제는 과거 유랑하던 사람으로 반지식인층 사람에 가까웠다. 이에 금의위라는 감시기구를 통하여서 통제하며, 관료들의 급여도 매우 짜게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이 사실 홍무제가 짜게 주려는 의도가 포함된 것이기는 하지만, 유학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정부체계가 최대한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 생긴 문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가장 이상적 국가였던 周는 봉건제로 중앙의 관리 급여가 거의 무급이였다. 이에 지방에 자기 소유의 토지소유자가 아닌 이상 관료가 되어서 먹고 살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편이였다.(물론 고위급에 오르면 그것으로 살 형편이 되겠지만, 그때까지 오르려면 단계적으로 올라가야 했다.)[42] 비슷한 제도를 가진 조선왕조 또한 500년 내내 중앙정부는 예산부족에 시달리고 자원봉사에 가까운 관리의 녹봉 때문에 생계형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었다.[43] 유럽 국가들도 금본위제, 은본위제를 택했지만 실제로는 그에 가치를 엮은 지폐를 활용한 것과 같다.[44] 초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45] 여기까지 보면 조선의 태종, 세종, 정조를 보는 듯하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공신들을 숙청한 데다가 신하들 행동반경을 꿰고앉았던 인물이고, 세종은 과로에 신하들은 종신노예급으로 부린 인물인 데다가 신하들이 똘똘 뭉쳐 조작 및 은폐 공작을 하였으나 글 몇줄 읽고 수상한 점을 찾아낸 인물이며, 정조는 옹정제처럼 관료들을 불신하여 막후정치를 실시하며 수많은 욕설(...)을 후세에 전한 독설가였다. 게다가 이들 모두 희대의 천재 군주들 이었다는 것이다. 태종은 조선 왕 중 유일한 과거 급제자 관료 출신, 세종과 정조는 희대의 책벌레로 말빨로는 이들을 당할 신하가 없었다. 그나마 태종은 숙청이 악명에 비하면 의외로 자비로운 편이었고, 세종은 능력만 있다면 인격 따위 상관 않고 과로사할 때까지 쥐어짰고, 정조는 입이 걸걸해서 그렇지 처벌까지 참혹하게 행하지는 않았음을 생각해 보면 이들을 모신 신하들은 옹정제의 신하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훨씬 편하게 일한 것이다. [46] 앞서 말했듯 악종기는 악비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악비처럼 한족을 위해 싸워주길 기대한 듯 싶지만(...).[47] 애초에 대의각미록은 저 악종기 사건의 주범으로 잡혀온 증정이라는 인물과 옹정제가 중심 인물인데, 이 둘의 토론을 통해 '''증정이 사상 개조되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그런데 문제는 건륭제 즉위 이후 저 증정이 대역 죄인으로 모가지가 날아갔다. 그 결과 증정과 옹정제의 토론이 주인 대의각미록도 같이 파묻혔다.[48] 이는 그의 아들 건륭제가 말년의 사치 등으로 현대 들어 평가가 예전만 못한 측면과도 대비된다. [49] 변발을 국시이자 민족 정신으로 규정한 청나라였기에 탈모 따위 무슨 의미가 있었겠냐마는, 아무리 만주족이라도 현실적으로 매일매일 대머리 깎으며 살 것도 아니고 빛나는 스킨헤드보다는 오늘날의 스포츠 머리 내지는 훈련병 머리로 지내는 기간이 당연히 더 많았다. 물론 대청 황제씩이나 되면 중요한 공식석상에서는 금전서미만 남기고 빡빡 민 후 관모를 쓰는게 정석이었지만, 옹정제는 오덕(...)이었던지라 관모를 쓰지 않은 엉뚱한 차림으로도 많은 초상화가 남았고 그 덕에 M자 탈모의 흔적마저 전해지고 말았다. [50] 조금 애매한 번역이긴 하지만 번역하자면 하인이 주인에게 소인이라고 하는 거라 보면 된다.[51] 오히려 옹정제의 최측근 가신들 중에는 만인 못지 않게 한인도 많았다. 강옹건 3대를 섬긴 장정옥이나 연갱요가 대표적. 또한 전문경이나 이위처럼 진사를 못 따고 연납으로 임용되어 진사 출신자들에게는 낙하산 취급을 받는 한인 부하들도 많았다. [52] 속편도 있으며 이 속편은 국내에도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속편에는 장국영 출연.[53] 이점에 있어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조선왕조 오백년과 비슷하다.[54] 해외 출품명은 군림천하. 한국에서도 이 제목으로 알려졌다.[55] 당국강은 뒷날 강산풍우정에서 홍타이지 역을 맡았다. 1994년 삼국지 드라마에서는 중국사의 또 한명의 과로사의 아이콘인 제갈량 역으로도 호연을 선보였다. [56] 이 드라마의 영향으로 이위는 이위당관 등 옹정 연간을 다루는 드라마에 등장할 때마다 무식한 껄렁패 건달처럼 묘사되는 클리셰가 생겼다. 물론 실존인물 이위가 향신들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고 일처리를 무식하게(옹정제 입장에서는 시원시원하게) 밀어붙이던 인간 불도저였던건 사실이지만, 총독씩이나 되어서 체통도 모르고 '우리 주인님'한테 헛소리하는 증정을 직접 두들겨패주는 단순무식한 종놈 취급은 좀 심했지 싶다... [57] 다만 이 작품에서도 일찍 죽은 첫 적복진 순원황후에게만 일편단심이긴 하다.[58] 국내 방송명은 요리왕 고천보.[59] 이 학살 미수 사건이 누가 반역자고 무고한 양민인지 몰라 일단 죽인다는 것도 아니고, 죄 없는 무고한 양민들을 계속 처형하다 보면 결국 반란분자들이 자수할 것이라는 정신나간 발상으로 저지른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