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

 





聖祖 康熙帝
성조 강희제

묘호
만주어
ᡧᡝᠩᡯᡠ
셩주
한자
성조(聖祖)
시호
만주어
ᡤᠣᠰᡳᠨ ᡥᡡᠸᠠᠩᡩᡳ
고신 황디
한자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
孝敬誠信功德大成皇帝[1]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
효경성신공덕대성황제
존호
천고일제(千古一帝)
한호
얼허 타이핀 한
ᡝᠯᡥᡝ ᡨᠠᡳᡶᡳᠨ ᡥᠠᠨ
Elhe Taifin Han
칸호
엥케 아무굴랑 칸
ᠡᠩᠬᠡ ᠠᠮᠤᠭᠤᠯᠠᠩ ᠬᠠᠭᠠᠨ
Энх-Aмгалан хаан

만주어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여이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ᡥᡳᠣᠸᠠᠨ ᠶᡝᡳ
Aisin Gioro Hiowan yei
중국어
愛新覺羅 玄燁
아이신줴뤄 쉬안예
Àixīnjuéluó Xuányè[2]
Oi Xin´ Gog` Loˇ Hienˇ Ngiabˊ
한국어
애신각라 현엽
연호
(청)

만주어
얼허 타이핀
ᡝᠯᡥᡝ ᡨᠠᡳᡶᡳᠨ
Elhe Taifin
한자
강희(康熙)
몽골어
엥케 아무굴랑
ᠡᠩᠬᠡ ᠠᠮᠤᠭᠤᠯᠠᠩ
Энх-Aмгалан
출생
음력
1654년 5월 4일 청나라 직예성 북경 자금성 동육궁 경인궁
사망
음력
1722년 12월 20일 청나라 직예성 북경 창춘원 청계서옥
신장
170~약 175cm[3]
재위 기간
음력
1661년 2월 5일 ~ 1722년 12월 20일 (61년 318일)
1. 개요
2. 일생
2.1. 어린 시절
2.2. 순치제의 죽음과 즉위
2.3. 영명한 청년 군주, 삼번의 난의 극복
2.4. 대만 평정
2.6. 준가르 정벌과 티베트 복속
2.7. 국가의 전성기를 이끌다
2.7.1. 만주족과 한족이 공존하는 천하
2.7.2. 죄인도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
2.7.3.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
2.7.4. 문화 사업
2.7.5. 종교
3. 사생활
3.1. 서양 문물 애호
3.2. 자식 교육
3.3. 천고일제의 말년
3.4. 기타 이야깃거리
4. 비판
5. 기타 등등
5.1. 동시대의 조선 정세를 평하다
5.2. 동시대 각국의 군주들
5.3. 당시 사람들의 평가
6. 미디어믹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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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제4대 황제이자 몽골 제국 제43대 대칸. 청나라 뿐 아니라 전 중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뛰어난 군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중국 역사상 가장 긴 61년이란 긴 세월 동안 청나라를 통치했다.[4] 즉위 당시 겨우 8살의 어린 나이였으며, 1722년 사망 당시에는 69살이었다. 1616년에 건국되어 1912년에 멸망하여, 전체 기간이 300년이 채 되지 않는 청나라 역사의 1/5이 넘는 기간이 강희제의 시대인 셈.
그는 엄청난 공부와 수양을 통해 지식과 교양을 쌓았으며 한편으로는 직접 전쟁을 지휘하고 원정을 강행한 것에서 보이듯이 만주족 전통의 무술과 기마술을 단련하는 데에도 힘썼다. 강희제는 진정한 의미에서 문무를 겸비한 만주족의 군주였다.#
처음으로 중국에서 태어나 유학을 배우며 자랐고 만주식 이름과 중국식 이름을 동시에 가진 최초의 청나라 황제였다. 요컨대 중국 전체를 지배한 왕조로서의 청나라의 시작은 실질적으로 강희제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세계사적으로도 손꼽힐 만큼 매우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도 천고일제(千古一帝, 천 년에 한번 나오는 황제)라고 불릴 정도의 위대한 황제로 여겨지고 있다.[5] 그래서 강희대제라고도 한다. 마치 대한민국에서 조선의 세종세종대왕이라 하듯이.
<강희자전>을 편찬하면서 만주 황실에서 중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허가한다. 그러니까 강희제 때부터 본격적으로 만주족이 한화되어간다고 봐도 될 듯. 강희제 자신은 만주어와 중국어에 모두 능통하여, 관리들에게 반드시 만주어와 중국어 공용으로 공문서를 작성해서 자신에게 보고하게 했다고 한다.

2. 일생



2.1. 어린 시절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나라를 통치하고 정책을 결정함에 보여 준 모든 것들이, 마치 수십 년간의 통치 경험을 가진 노련한 황제와도 같았다.

조아섕 부베[6]

강희제는 1654년(순치 11년) 5월 4일 , 자금성의 동육궁 중 하나인 경인궁(景仁宮)에서 순치제의 후궁인 서비 동(佟)씨, 그러니까 뒷날의 효강장황후 퉁기야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로써 강희제는 청나라 역대 황제 중 처음으로 자금성에서 태어난 황제가 되었다. 강희제는 서비 동씨의 유일한 자식이라,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양육된 것은 물론이다.
이런 부류의 인물들이 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부터 책을 잘 읽고 활도 잘 쏘는 등 다재다능해서 아버지 순치제와 조모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에게 사랑을 받았다.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한 건 5살 때부터로, 이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차기 군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7살 때인 1660년(순치 17년), 순치제의 4남으로 강희제의 이복 동생인 영친왕(榮親王)이 생후 3개월 만에 이름도 짓지 못하고 요절하자 강희제가 황태자로 정해졌지만, 공식적인 건 아니었다. 강희제가 황태자에 지명된 이유는 어머니 서비 동씨가 승은공 동도뢰(佟圖賴)[7]의 딸로 개국 공신 집안 출신이고, 당시 황후였던 효혜장황후 보르지기트씨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순치제는 후궁 소생 황자들 중 총명한 히오완예이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2.2. 순치제의 죽음과 즉위


그해 11월, 갑자기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졌다. 현비 동고씨가 천연두에 걸렸으며 히오완예이 역시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히오완예이는 얼마 안 되어 다행히 나았다. 그러나 차도가 나아지지 않은 채 현비 동고씨가 결국 죽자, 순치제는 즉시 그녀를 효헌단경황후 동고씨(孝獻端敬皇后 棟鄂氏)로 올리고 신주를 태묘에 올린 다음 자신이 아끼던 태감을 오대산 청량사(淸凉寺)에 보내어 그녀의 명복을 빌게 했다. 이후 아직 젊은 순치제는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비통함에 빠져들었다. 세상사에 지쳐버리고 의욕을 상실한 순치제는 급속도로 병에 굴복해버렸고, 어떤 처방도 소용이 없었다.
히오완예이가 8세가 되던 해인 1661년 2월, 병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던 황제는 아담 샬에게 만약 자기가 살아난다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아담 샬도 그를 구할 순 없었다. 죽어가는 순치제는 거듭 아담 샬에게 누가 황위를 계승하면 좋을지, 현명한 판단을 부탁했다. 아담 샬이 조용히 불러준 이름은 다름 아닌 히오완예이로 이미 천연두를 한번 앓고 난 뒤여서 오랜 재위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순치제는 이에 동의하고 사망했다.
  • 순치제의 죽음을 둘러싼 묘한 이상 기류 때문에, 간혹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갑자기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순치제가 죽지 않고 황위에서 물러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이야기와 관련되어 오대산 청량사의 주지와 관련된 기괴한 이야기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이 절의 주지를 모델로 하여 만든 상이 있는데, 그 모습이 죽었다는 황제와 꼭 닮았다던가 하면, 새 황제는 즉위 후 10년 동안 세 번을 청량사에 왔는데, 주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단 한 번도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것이다. 1670년 주지가 35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새 황제가 실물 크기의 주지 금상을 절에 내리고, 그의 무덤에 부장할 보화들도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용의 대표작 중 녹정기도 이 설을 비중 있게 작중에서 다루고 있다. 그래서 순치제 치세나 강희제 치세 초기를 다룬 중화권 사극에서는 작품마다 정사에서 다루는 것처럼 순치제가 요절한 것으로 나오기도 하고, 순치제가 생전 퇴위 직후 출가하여 정사에 나온 것보다 오래 살았다는 설을 따르기도 한다.
1661년 2월 5일 순치제가 사망하자 히오완예이의 할머니이자 순치제의 어머니인 황태후 효장태후는 아들이 붕어하자 크게 놀라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각지의 신료들과 친왕, 군왕들을 불러 모아 후사를 논의하였다. 2월 7일에 청나라 조정은 순치제의 붕어를 공식적으로 알리고 국상을 준비하였으며 2월 17일에 세조(世祖)라는 묘호와 장황제(章皇帝)의 시호를 올리고 그 릉을 효릉(孝陵)으로 하였다. 이후 유조에 따라 황태자 히오완예이가 새로운 청의 황제로 추대되어,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로 즉위했다.
강희제는 어머니 강비 퉁기야씨와 순치제의 황후인 효혜장황후 보르지기트씨를 황태후로 격상하고, 조모인 효장태후는 태황태후로 격상하였으며 이듬해인 1662년에 연호를 순치(順治)에서 안녕과 평화를 뜻하는 강(康)'과, 조화와 흥성을 뜻하는 '희(熙)'자를 써서 평화로운 조화를 뜻하는 연호 강희(康熙)로 개원했다.

2.3. 영명한 청년 군주, 삼번의 난의 극복


즉위 당시 너무 어려서 정황기 출신 감국 대신 겸 이부 상서 허서리 소닌(赫舍里 索尼, 혁사리 색니), 양황기 출신 병부 상서 구왈기야 오보이(瓜爾佳 鼇拜, 과이가 오배), 정백기 출신 형부 상서 나라 숙사하(納喇 蘇克薩哈, 납란 소극살합), 양황기 출신 호부 상서 니오후루 어빌룬(鈕祜祿 遏必隆, 뉴호록 알필륭)의 보정 대신 4인이 대리 통치를 담당했으며, 이 중 오보이가 다른 셋을 제치고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8] 오보이는 권력이 하늘을 찔러 숙사하를 죽이고 황제인 강희제 앞에서도 무례하게 굴었을 정도였다. 이런 오만방자한 태도와 권력 남용은 성장 중이던 강희제에게 당연히 위험하게 보였고, 결국 오보이는 1669년 강희제가 주도한 친위 쿠데타에 의해 권력을 잃게 되었다. 이후 16세의 강희제는 죽을 때까지 직접 나라를 다스렸다.[9]
통치 실권을 쥔 강희제가 처음부터 선정을 베풀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할 당시 앞잡이로 활약했던 한족 무장인 오삼계, 경중명, 상가희 3인은 이른바 삼번(三藩)을 형성하였다. 각각 오삼계의 운귀(운남, 귀주), 경중명의 복건, 상가희의 광동 지역을 중심으로 강남 일대에서 사실상의 반(半) 독립 왕국을 세워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고 그들이 가진 군사력과 경제력은 청 정부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되었다. 강희제는 삼번이 청 정부의 강남 직접 통치에 방해되는 애물단지라고 판단하고, 이를 제거할 기회를 노렸다.
이런 가운데 강희제가 기다리고 있던 기회가 드디어 왔다. 삼번왕 중 하나인 상가희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온 것이다. 이는 상가희가 본디 요동 사람인데, 나이가 많아 죽기 전에 고향을 보고 싶어진 것. 강희제는 이것을 대범하게 받아들여주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지배하던 번을 없애버리는, 즉 철번(撤藩, 번왕국을 폐지함)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던 상가희로선 뒤통수를 맞은 셈. 하지만 상가희는 일단은 황명을 따르기로 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에 삼번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던 오삼계는 강희제를 떠보기 위해 자신도 같은 주청을 올렸는데, 강희제는 상가희 때와 마찬가지로 대응했다. 그러자 오삼계는 이에 불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1673년에 터진 이 반란을 삼번의 난이라고 하며, 오삼계는 자칭 황제가 되어 강남 일대를 통째로 쥐고 흔들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여기에 경중명의 번왕 자리를 세습했던 경정충이 합세하고, 상가희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장남 상지신이 아버지 상가희를 감금하고 반란에 가담하면서 난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이로 인해 자칫하면 청 왕조는 산산조각날 위기에 처했으나, 강희제는 서전의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엄격히 병사들을 단속하고 직접 전략을 총괄하였다. 민족 반역자 출신인 오삼계는 중국 한족에게조차 이념적으로 어필하는 바가 적었고 청군이 강력한 반격을 가해오자 순식간에 오삼계의 세력은 축소되기 시작했다.[10] 결국 8년 간의 전쟁 끝에 1681년 오삼계 일족의 근거지였던 쿤밍이 함락되고 오삼계의 일족이 몰살되면서 삼번의 난은 청 왕조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이로서 1644년 입관(入關)한 후 약 40년 만에 실질적으로 청 왕조가 중국 전토의 직접 통치권을 갖게 되었다. 이때 조선은 숙종 치세로, 이 삼번의 난 때 윤휴북벌을 무척 지지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이 북벌론을 좋아하지 않아 폐기되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보면 알겠지만 삼번의 난의 주동자들은 명분이 매우 적었고 조선 또한 기껏해야 이유가 오랑캐들에게 복수하자는 정도고 삼번과는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연계하기도 쉽지 않았을 테고 무엇보다 강희제가 능력 있는 황제라서 승산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여튼 당시 조선 조정은 남인들과 윤휴를 숙청하는 고육책까지 써 북벌론을 잠재웠고, 삼번의 난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현종시기 조선에서는 경신대기근이 일어나 조선에선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동지사 복선군 이남이 청나라로 찾아갔는데 이때 강희제가 이남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군주에게 전하도록 하라.


2.4. 대만 평정


삼번의 난을 평정하는 동안 강희제는 북방의 압박도 받았다. 제정 러시아의 왕조가 지원해주던 러시아 탐험가들이 동방을 개척하는 시기였고, 시베리아를 지나 청나라의 북방 영토인 만주내몽골로의 확장을 노렸다, 이에 몽골계인 오이라트 계열의 부족 연합체인 준가르가 러시아에 협력하면서 일거에 청의 북변(北邊) 치안은 위태로워졌다.
이에 강희제는 1683년 대만 정복을 통해 남방의 변란 위협을 모조리 제거한 뒤에 북방 문제에 뛰어들었다. 당시 대만과 펑후 제도의 36개 섬은 정성공이 네덜란드 인들을 몰아내고, 그의 아들 정경이 세운 정씨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삼번의 난에도 가세했을 만큼 큰 위협이었기에 반드시 처리해야만 했다.
정경이 죽자 풍석범이라는 인물이 정극상이라는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사태가 변한다. 정극상은 고작 12살이라 실권은 풍석범이 쥐고 있었는데 몹시 전횡을 휘둘러 많은 불만이 발생하게 되었다. 강희제는 때는 지금이라는 걸 깨닫고 중국 동남부와 대만 쪽 전문가인 요계성(姚啓聖)을 복건, 절강 총독으로 삼고 수군을 잘 다루고 적을 잘 아는 수사제독(水師提督) 시랑(施琅)[11]을 파견하여 정씨 왕조를 무찌르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시랑이 과거에 정경의 부하였다는 것이다.[12] 이 때문에 그가 배신할 것이니 뭐니 하는 말이 많았으나 강희제는 그를 불러 경을 믿는다고 말하였고, 이에 감격한 시랑은 맡은 일을 멋들어지게 해치웠다. 강희제가 그 후에 행한 조치도 멋들어지고 영리한 행동이었는데, 항복한 대만인들을 탄압하는 대신 오히려 끝까지 충절을 지켰다면서 정성공에게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려준 것이다. 정성공&정경이 반 만주족 감정을 내세웠으니 '사실 우리도 그런 사람 아니랍니다.'라고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강희제가 현명하게 대처한 덕분에 대만 섬은 중국의 영토로 편입된다.

2.5. 러시아 제국네르친스크 조약을 맺다


당시의 제정 러시아로마노프 왕조[13]는 모피 무역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가는 무장 탐험가와 개척자들을 후원했고, 무장 탐험가들은 청나라와 사사건건 충돌했는데 당연히 청나라 정부는 러시아인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다. 나선정벌이 있던 시기도 바로 이 시기로, 물론 청나라쯤 되는 거대한 나라가 소규모 탐험대에게 그렇게 깨져갔던 이유는 순전히 남명 정권과의 전투에 정예병을 모조리 투입해야 하는 상황 때문이었으며, 실제로 나선 정벌 당시 조총병으로 한정해도 주력은 엄연히 청군이었다.
어쨌든 1658년 청군은 조선군과 함께 스테파노프의 탐험대를 격파하고 스테파노프 그 자신도 죽여버리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문제는 러시아의 탐험대는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1665년 체르니코프스키가 아르바진으로 군사를 이끌고 진격해 아르바진 요새를 세우고 수령이 되어 10년간 통치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아르바진은 체르니코프스키의 통치하에 꽤나 번영했기 때문에 이웃 네르친스크에 식량을 대 줄 수 있을 정도의 규모가 되었으며, 이는 러시아 조정을 고무시켰다. 한편 이 상황을 지켜보던 청나라는 관리들을 파견해 러시아인들이 청나라 영토 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으나 이 정도로 끝날 리는 당연히 없었다.
1667년, 아르바진 근처 한 부족의 수장인 간티무르가 15년 전 청나라에게 귀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들을 이끌고 러시아 제국에 들어가는 사건이 벌어진다. 강희제는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계속 놔둔다면 청의 영향력이 상실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러시아에 사절을 보내고, 러시아도 사절을 보내는 등 서로 간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이 이루어졌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한편 그동안 청은 북방에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1674년부터 지린에 팔기주방을 설치하기 시작했고, 1676년 청 조정에 도착한 러시아 사절에게 간티무르를 송환할 것을 요청한다. 허나 러시아 사절은 이를 거부했고, 청은 무력 충돌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의지를 표명하나 이후 6년 간 소규모 충돌 몇 차례 외에는 별 일이 없었다. 문제는 러시아가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청이 이 지역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고 오판한 것. 러시아는 아무르 강에 군사를 보내고 아르군 강까지 활동 범위를 높이는 등 도발 수위를 높여 갔다.
청은 당시 삼번의 난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이런 도발을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반가운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1681년 삼번의 난이 진압된 것이다. 하지만 강희제는 좀 더 신중히 상황을 지켜봤고, 이후 1683년 대만의 정씨 일가가 복속되어 남방은 완전히 안정되었다. 이후 강희제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특히 강희제가 신경 쓴 점은 러시아가 준가르의 갈단 체렝과 손을 잡을 것인지의 문제였다. 강희제는 준비하는 동안 병기와 식량을 구축하고, 조총을 개조하고, 홍이포보다 강한 대포를 주조하고, 역참제를 정비하고 조선소를 건설해 대형 범선을 건조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준비가 모두 끝나고 1683년 이번원 상서 아이신기오로 아무훌랑(Aisin Gioro Amuhulang, 愛新覺羅 阿穆珊琅)은 러시아군에게 서신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러시아는 무반응으로 대응했다.
러시아의 뚱한 반응에 청은 즉시 군사적 행동을 개시하하였다. 청은 정예 기병 1,000여 기를 보내 아르바진을 포위했다. 아르바진의 군사는 450명으로 아무리 수성 측이 공성 측보다 유리하다고는 하지만 군사의 정예도나 머릿수, 무기의 질과 양[14] 등에서 압도적으로 밀렸다. 아르바진의 암담한 상황이 전해지자 헤이룽 강 상류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이 보트를 타고 아르바진으로 가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상륙도 하지 못하고 격파당했다. 치밀하게 준비한 청군은 혹시나 올 지원병에 대비해 잠수병들을 미리 투입한 상태였다. 잠수병은 등패와 칼로 무장한 상태로 물 속에서는 깊은 곳까지 잠수해 러시아군의 사격으로부터 피했고 사격이 멈추면 즉시 튀어나와 칼을 휘둘러대고는 적이 반격이 할때면 즉시 잠수하고는 했다. 결국 지원은 잠수병들의 활약으로 완전히 실패하여 아르바진에게 도달하지 못하였다.
이후 청군은 아르바진의 포위를 풀었는데, 이때 러시아군은 간신히 도망쳤고 아르바진은 초토화되었다. 당시 아르바진의 군 사령관은 톨부진으로, 톨부진은 네르친스크로 후퇴했다. 이때 톨부진은 네르친스크로 가던 도중 구원병을 만났다. 네르친스크 독군 블라소프였는데, 블라소프와 힘을 합친 톨부진은 다시 아르바진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청군은 아르바진을 불태운 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간 상태였다. 이에 이들은 안심하고 아르바진에 들어가 요새를 재정비하고 장기전을 치를 준비를 했다. 1686년 강희제는 아르바진 요새가 재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람을 보내어 정탄을 한바, 과연 요새는 재건되어 있었다. 이에 강희제는 지난 번보다 두배 많은 2,000여 명의 군사를 보냈다.
아무리 청군이 러시아군을 격파해대도 악착같이 내려오는 러시아 탐험대를 완전히 막으려면 이들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야 했다. 따라서 강희제는 장기전을 치러 이들의 의지를 박살낼 준비를 하길 원했고, 청군 사령관에게 아르바진 주변에 해자를 파라고 명령했다. 이후 청군은 아르바진을 포위한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포위된 아르바진은 보급이 완전히 끊겼고,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어영부영 보급품만 축내다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러시아군은 청군에게 공격을 가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는 해자를 뗏목으로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군사의 정예도, 무기의 질과 양, 군사의 수 등 모든 면에서 청군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해자를 건너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총격과 포격이 러시아군에게 쏟아졌고, 결국 러시아군은 해자를 거의 건너지를 못했다. 심지어는 이 와중에 톨부진이 전사하였다. 기껏 상륙해 봤자 소규모의 군인들만 생존하였을 뿐인지라 청군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전멸했다. 결국 톨부진이 전사한 이후 네르친스크 지원군 사령관 바이돈이 러시아군의 지휘를 맡았지만 그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르바진의 군사와 네르친스크의 군사를 합쳐 총 800명의 군사를 거느렸던 탐험대는 해자에서 벌어진 청군과의 교전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이들 중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100명뿐이었다. 사실 만약 강희제가 이들을 완전히 전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남은 군사들을 죽이는 것도 청군에게는 일도 아니었을 것이나, 혹시나 러시아와 갈단의 연합을 우려한 강희제는 이쯤에서 상황을 정리하기로 하여 러시아에게 서신을 보내었다.
1686년 9월, 이에 대한 답변이 청에게 도착하였다. 1687년에 청군이 퇴각함으로써 아르바진 전투는 완전히 끝났다.
계속되는 패배와 혼란스러운 국내 사정[15] 때문에 러시아는 만주로 영토 확장을 포기하였고 대신 러시아의 상업 활동 허가와 국경 확정에 합의, 1689년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네르친스크 조약 을 통해 아무르강 이북 지역[16] 및 외몽골 일부 지역에 대한 국경을 확정했다.
조약을 맺을 당시 러시아의 전권 대사는 골로빈이었다. 골로빈은 1687년 8월 셀렌기스크에 도착하였다. 그는 곳에서 대화하기를 원하였으므로 셀렌기스크에서 강희제에게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셀렌기스크는 갈단의 위협에 노출될 수 있는 곳이 였기 때문에 강희제는 이러한 골로빈의 제의를 거부하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네르친스크에서 협상이 진행되었다. 1689년 6월, 청 협상 대표단 허서리 송고투(Heseri Songgotu, 赫舍里 索額圖)[17]는 골로빈에게 네르친스크에 도착했음을 알렸고, 곧이어 8월 19일에 그는 회담에서 지켜야 할 사항을 골로빈과 정하였다. 이후 송고투와 골로빈은 협정에 따라 냉병기로 간단히 무장한 채 회담장을 호위하고 있는 경호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잡담을 잠시 나눈 뒤 회담을 시작했다. 당시 골로빈의 사절은 천여 명이었으나 송고투는 선교사 출신 통역사, 만여 명의 승려 및 군사 등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절절과 동행한 상태였다.
회담 초기에는 양측의 군사적 충돌에 대한 신경전이 벌어져 회담장에 긴장감이 맴돌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풀어졌고 이내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해서 맺은 조약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청은 헤이룽 강 북안을 확보했고 러시아는 북경과의 교역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양측에게 긍정적인 조약이었다. 이후 양측은 외몽골과 시베리아에서의 국경 확정을 위해 1727년 캬흐타 조약을 추가로 맺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국 사상 매우 획기적인 유럽식의 '대등 - 평등' 조약으로, 한자로 된 문서는 전혀 작성되지 않았고, 러시아어, 만주어, 그리고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만주어문을 기준으로 노어문과 라틴어문이 작성되었다. 양국은 라틴어문에 날인했다.[18][19] 북경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 2명이 통역으로 참가했다. 러시아 측의 협상단과 당시 유럽 공용어인 라틴어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화이(華夷) 개념에 입각하지 않은 매우 독특한 조약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훗날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영국에게 일방적으로 관광 당하자 러시아도 이때 맺어진 네르친스크 조약불평등 조약으로 간주하여 파기할 것을 요구[20], 수용되었으며 2차 아편전쟁 때는 중재의 대가로 연해주를 얻어낸다.

2.6. 준가르 정벌과 티베트 복속


어쨌거나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킨 강희제는 친친정을 하여 북정(北征)에 나서 오이라트 부족 계통인 세계 최후의 유목 제국 준가르(Züüngar)를 토벌하였다. 준가르의 갈단 칸은 외몽골을 통합하고, 티베트와 연합하여 청나라를 압박하려는 가공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기에 절대로 좌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688년 갈단은 야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어 외몽골의 할하족을 몰살시켰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죽을 힘을 다해 고비 사막을 건너 이 소식을 전했다. 이에 강희제는 직접 대군을 동원하여 고비 사막 너머에 사는 할하족의 복종을 받았다. 첫번째 원정에서 팔기군이 전면전에서 패하고 강희제 본인도 병에 걸리는 등 고전하였지만 서양산 대포의 힘으로[21] 갈단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때 강희제는 갈단을 추격하려 했지만 군량이 부족하고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서 포기했다. 갈단은 포기하지 않고 1695년에 다시 한 번 군대를 진군시켰지만, 미리 정보망을 통해 이를 알고 있던 강희제는 전 병력을 이끌고 갈단을 추격하여 대포와 총으로 공격하였고, 갈단은 병력의 절반과 부인을 잃은채 서쪽으로 도망쳤다.
강희제가 3번째 원정에 나서려고 했을 때 모든 신하들은, "비루한 갈단은 이제 곧 죽을 텐데 사막으로 가서 고생을 하지 마시라"며 막았고, 황제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강희제가 좋아하는 사냥 계획을 잡기도 하였지만, 이 모든 것을 취소시킨 강희제는 다시 8만의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그리고 차오모도 전투에서 강희제는 갈단의 준가르군을 섬멸했다. 결국 수세에 몰린 갈단은 1697년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3회에 걸친 친정을 통해 강희제는 준가르 군대를 격파하여 위협을 제거하였고, 1697년 외몽골 지역 전체를 제패해서 엄청난 판도를 구가하였다. 이때 강희제가 환관에게 쓴 편지에는 그가 크게 기뻐하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갈단은 죽었고, 그의 부하들은 모두 귀순하였다. 이제 짐의 큰 임무가 완수되었다. 두 해 동안 짐은 3번이나 원정하면서 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지는 사막을 건너면서 이틀에 하루씩만 음식을 먹었다. 사막은 초목도 없고 물도 없는 곳이며 황사가 심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고난이라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 천신만고 끝에 큰 공을 세웠는데, 갈단이 없었다면 짐은 하루도 이런 일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들의 도움을 입어 성공하였으니, 짐의 일생은 즐겁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망을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원하던 것을 모두 손에 넣었다고 할 수 있다."

-조너선 스펜스, <강희제>에서 재인용.

그리고 몽골은 일찍이 후금에 복속된 내몽골은 물론 외몽골까지 복속되어 전체적으로 원나라 이후로 두 번째로 중국사와 맞닿게 되었다. 물론 내몽골은 현재까지 중국이 갖고 있다. 그러나 강희제는 몽골의 전통을 존중하여 몽골의 고유 제도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과거 내몽골의 차하르 족과 결혼 동맹을 맺어 만주-몽골을 일체화한 것처럼 몽골 공주를 만주 귀족들의 아내로 맞도록 함으로써 북방의 강력한 민족인 몽골족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역대 황후들 중 몽골 출신이 상당히 많다.[22] 어쨌거나 1697년 이후 청은 러시아가 대두할 때까지 명나라가 당한 것과 같은 북로(北擄)의 참변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갈단의 조카인 체왕 랍탄은 후에 대담하게 타클라마칸 사막의 험지를 건너 티베트를 공격, 포탈라궁을 약탈하자 강희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보냈다. 그런데 뜻밖의 패배를 당하자, 이번에는 아들인 14번째 황자 윤제를 사령관으로 삼고 사천과 차이담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기어코 그들을 쫒아내는 데 성공했다.[23] 강희제는 7대 달라이 라마를 자신들의 손으로 세워 티베트를 중국의 영토에 포함시켜 대략의 판세를 만들었다.[24] 사실 강희제가 티베트 불교를 챙겼던 이유는 예전에 갈단이 차지하고 있던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라는 타이틀을 뺏어서 몽골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갈단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티베트 불교와 조화된 덕분이었는데, 만주족티베트 불교를 손에 넣게 됨에 따라 몽골은 정신적으로 만주족 휘하에 들어간 셈이다.

2.7. 국가의 전성기를 이끌다


이상과 같은 전쟁을 마친 뒤 강희제는 전력으로 국내 통치에 주력했다. 강희제는 효율적인 중국 통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한족 지식인을 포섭하려고 노력했는데, 지식인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고생을 많이 했다.
사절을 보내 초빙하면 등용을 거부하니까 가마에 억지로 태워 시험장으로 끌고 와서 응시하도록 해 관료로 등용하려고 했더니 아예 도망쳐 버리거나 시험을 엉망으로 보아 일부러 낙제했기 때문에 강희제는 쓸 만한 한족 관료를 얻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또, 그렇게 가까스로 얻은 관리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중국의 황제로서의 위엄과 지혜를 보이기 위해 강희제는 유교 경전을 비롯해서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여 막대한 지식을 쌓아올렸다.
강희제의 학구열과 호기심은 유명해 대신들에게 잇따라 질문 공세를 퍼부어 쩔쩔매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으며, 서양 문물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후원하여 예수회 선교사로 대표되는 당대의 유럽인들은 강희제의 풍부한 지식과 교양에 감탄해 "가톨릭을 믿지 않는 점만 빼면 최고의 군주"라고 칭송할 정도였다.
유럽인들이 16세기 중국에 본격적으로 도래한 이래 이런 평가를 받은 중국 군주는 오로지 강희제 뿐이었으며, 이것을 봐도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고 공부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또 강희제는 중국 문화를 애호하여 <강희자전>과 <고금도서집성>을 편찬하게 했다. 강희제는 여러 선교사들을 옆에 두고 그들로부터 지리와 역사, 기하학, 근대 수학 등을 배웠고 서양의 역법이 우수한 것을 인정하면서 역법 역시 배웠다. 심지어 라틴어까지 배우려 했으며 피아노(정확히는 하프시코드)까지 친 적도 있다. 또한 강희제는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예수회 선교사들과 수학 계산을 하며 자기가 푼 문제가 맞는 걸 기뻐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강희제 시대에 활약한 유럽인은 아담 샬(Adam Schall, 1592년 ~ 1666년)을 시작으로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28년 ~1688년), 토마스 페레이라(Thomas Pereira, 1645년 ~ 1703년),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 중국명 장성(張誠), 1654년~ 1707년} 등이 있다. 서양인들은 주로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경우가 많았으며, 천문 역법(曆法)의 계산과 도입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황여전람도(皇輿展覽圖)'와 같은 세밀한 세계 지도가 중국에 등장한 것도 이들의 활약 덕택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유럽인들의 활동은 예수회의 성공을 시기한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의 고발로 교황청이 유교적 예식을 채용하지 않도록 지시함에 따라 1693년부터 20년 이상 배척받게 된다. 이 유럽인들에 대한 배척은 1720년에 교황이 보낸 특사 덕택에 겨우 해소되었다.
강희제는 명대의 1년 치 궁정 예산으로 당대의 국가 통치를 위한 예산을 꾸려갔을 정도로 간소한 정부를 운영했으며 검소를 미덕으로 여겼다.[25] 명나라 시기 수만 명이 넘던 환관과 궁녀를 400명으로 줄이고, 스스로도 될 수 있으면 옷을 꿰매 입으며 모범을 보였다. 서양 선교사 조아섕 부베는 루이 14세에게 보낸 보고에서 "강희제는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군주인데도 그런 군주답지 않게 매우 검소하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2.7.1. 만주족과 한족이 공존하는 천하


강희제는 홍무제영락제와 함께 높이 평가했으며, 남순 중에 주원장의 효릉에서 3번 절을 올리기도 했다. 존경심을 표현할 겸 한족을 포섭하려는 정치적인 제스처였는데 강희제는 사람을 쓰면서도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인 한족을 크게 차별하지 않았다. 대만 정복 당시의 인사 등용만 해도 그렇고, 삼번의 난 진압 중에서도 한족 장수들을 크게 등용했다[26].
강희제는 직접 중국의 여러 지역을 시찰하여 강남을 6회나 순행(巡行)하여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의 남부 지역을 직접 관찰하였다. 보통 역대 중국 군주의 시찰이나 순행이라고 하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많았지만, 강희제는 호위 군사도 대폭 줄이고 소요되는 지출비 자체도 경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배려는 물론 민생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조처였지만 동시에 아직 만주족 통치에 반감과 적개심을 가진 강남 백성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냉정하고 현실적인 정치적 조치이기도 했다.
또 이후 이전 왕조인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를 편찬하며 본기, 열전, 지, 표 등이 완성될 때마다 전부 다 살펴보고, 과도하게 명나라의 황제들을 비난하는 편찬자에게는 주의를 주면서 말했다.
"짐은 군주로서 그들의 단점뿐만 아니라 장점 또한 보고 싶다."
하지만 정통성에 관련된 문제에는 강하게 대처했다. 1711년에 대명세(戴名世)라는 인물이 자신이 저술한 책인 《남산집》(南山集)에 명나라의 잔당 남명의 연호였던 영력(永曆)을 사용한 죄로[27] 그의 일족이 모조리 처형되었다. 이것은 청대에 발생한 문자의 옥 중 하나다.

2.7.2. 죄인도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


강희제가 아직 어린 시절, 죄를 지은 관리에게 강희제는 노하여 사형을 명했는데, 그 관리는 허리가 잘려서 죽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래서 허리를 잘랐는데, 바로 죽지 않고 조금씩 움직이다가 죽게 되었다. 참혹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강희제는 생각을 달리 하게 됐다.
본래 강희제 통치 초반에 정권을 잡은 구왈기야 오보이는 사람을 마구 죽였는데, 강희제 역시 오보이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보이에게서 정권을 찾아오고 그에게 내린 처벌은 사형이 아니라 연금이었고, 구족 몰살이 아니라 타지로 이주시킨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소년 황제의 아량을 칭찬했다.
까딱 잘못했으면 청나라를 멸망시키거나 아니면 북쪽에 쪼그라들게 했을 법한 반란인 삼번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그 처벌은 오직 최고 우두머리들에게만 내려졌다.
그렇다면 부하로서 반란에 적극 참여한 인물들을 어떻게 대했느냐 하면, 그들에게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대신 그곳을 바탕으로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었고, 약간의 시간을 준 뒤 그 자식들도 아무 문제없이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또한 청나라 하면 떠오르는 사상 탄압인 문자의 옥은 강희제 때도 있었지만, 그 규모는 강희제 때가 제일 작았고 옹정제 - 건륭제를 거치며 매우 커진 것이다. 강희제 본인은 문인들을 많이 보호해 준 편.
청나라가 중국에 처음 들어왔을 무렵, 명나라는 상황이 엉망이었고 여진족 역시 한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는데, 그 때문에 사방에 산적과 반란군이 들끓었다. 강희제는 물론 이들을 진압했지만, 사정을 살펴보고 단순히 생계가 어려워 가담한 사람들은 오히려 살 곳을 마련해주고 모든 죄를 사면해 주었다.
  • 1668년 - 35명
  • 1706년 - 25명
  • 1712년 - 32명
  • 1715년 - 15명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냐면, 청나라가 지배하는 만주와 전 중국(하북, 중원, 강남), 내몽골, 대만의 사형 집행 횟수이다. 이 시기 청나라의 인구는 1억 명 이상을 향해 증가하고 있었고, 실질적인 인구, 즉, 호구 조사에 들어가지 않은 인구까지 합치면 훨씬 많았다. 그 정도로 큰 영토에 많은 인구를 지닌 나라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은 숫자가 이 정도(0퍼센트대에 수렴)였던 것이다. [28][29]
강희제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형에 대한 보고를 받으면, 여러 번 읽어본 뒤 어떻게든 사형을 면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1668년 같은 경우에는 본래 48명을 죽이기로 되어 있었지만 강희제가 이를 더 줄인 것이다.
자신이 글자 하나를 그으면, 사람의 목숨이 이에 따라 살아나고 죽게 된다. 그 무게를 잘 알고 있는 강희제는 최종 판결을 내리면서 정말 더없이 신중하게 임했다. 어마어마한 재물에 커다란 궁궐에 살고 있는 강희제였지만, 몇 번을 살피고 살펴 어떻게든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 구멍을 마련해주려고 노력했었다.

"짐은 백성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들이 어떻게든 살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노라. 형부에서 판결 기록을 올릴 때마다 짐은 그것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어 죄인을 살릴 수 있는 이유가 있을지 찾아보고 있도다.

죄인이 죄를 저지른 것,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즉각 처형하기보다는 옥에 가두어 잠시 처형을 미루고 이듬해에 다시 관찰하도록 하라.

죄인들이 곧장 처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겠지만……

아, 그러나 감옥 안에서 몇 달간 살다 보면 그들이 마음을 바로잡고 개과천선하고 싶어도 별다른 방도를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니라. 그들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죄인들에 대한 강희제의 측은지심은 대단했는데, 어느 날 조상들의 묘에 제사를 지내러 떠났던 강희제는 이 지역에 유배된 죄인들이 힘겹고 고통스럽게 사는 것을 보고 놀라고 불쌍하게 여겨 말했다.

"짐은 이제껏 영고탑과 오라(烏喇)로 유배된 죄인들이 이렇게 고초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몸을 쉴 수 있는 집도 없고, 농사를 지을 돈도, 그리고 능력도 없도다.

게다가 그들은 남방 사람이 아닌가? 약한 몸으로 이렇게 추운 곳으로 와서 고향과는 전혀 연락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너무 불쌍하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 지은 죗값을 치르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요양(遼陽) 같은 지역에 유배된 것만 해도 죗값을 치렀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그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주어 생계를 꾸려가도록 하고, 집을 지을 수 있게 하라!"

"죄인들을 유배시킨 것은 본래 그들이 계속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도다. 그런데 그들을 이런 춥고 황량한 곳에 내버려 둔다면 결국 고통받다가 죽게 될 것이니 어찌 본래의 뜻과 동일하겠는가?

앞으로 사형을 면한 죄인들은 모두 상양보로 유배시키고, 샹양보로 보내야 할 죄인들을 요양으로 보내도록 하고, 반란죄를 저지른 죄인들은 오라 지방으로 보내는 대신에 노비가 되지 못하게 하라. 형부는 비록 죄인이지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짐의 뜻을 헤아려 이 규정에 따르도록 하라."

강희제는 죄인들의 고통에 깊게 관심을 가져, 감옥에 있는 죄인들이 덥지 않도록 옥을 시원하게 해주고 청소해 주는 한편, 죄인들이 병에 걸려 고통을 받으면 의사를 보내주었고, 만약 관리가 이를 모른 척 하고 보내지 않으면 크게 처벌했다.

"10월부터 1월까지는 겨울인 데다가 유배당하는 죄인들은 모두 가난하여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니, 몹시 추울 것이니라. 그들이 죄를 저지르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길에서 얼어 죽어 마땅한 것은 아니니 불쌍하기 그지없도다. 앞으로는 10월에서 1월과 한여름인 6월에는 죄인을 유배지로 보내지 마라."

이상의 내용은 수신제가 - 등예쥔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강희제는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힘으로 지키려는 자는 홀로 영웅이 된다.

위엄으로 지키려는 자는 능히 일국을 지킬 수 있다.

허나 덕으로 지키려는 자는 천하를 세울 수 있다."


2.7.3.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


강희 50년인 1711년,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이 실시되었다. '정세'라는 것은 사람의 머릿수만큼 걷는 것. 결국 사람이 늘어나면 세금도 더 걷어 들이게 되는데, 바로 이 해인 강희 50년의 인구를 조사한 다음 정세를 영원히 동결시켜 버렸다. 말 그대로 국가 전체적으로 거둬들이는 정세가 더 이상 안 늘어났다. 이는 엄청난 의미가 있는데, 이때부터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강희 연간의 중국 사람들이 한꺼번에 아이를 많이 낳아서가 아니라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으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나 있던 농민이 그만큼 많았다가 그러한 부담이 사라지면서 이 체제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많이 낳아도 이젠 뭐 부담도 없고…
이 정책으로 전국의 정세 수취량은 고정되었으나 정세를 징수당하는 농민들이 도망하는 일이 발생하여 정세 수취량은 다시 줄기 시작하였다.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지세 1냥 당 약간의 정세를 부과하는 식의 탄정입묘(攤丁入畝) 방법을 고안하였고 이로 인해 정세가 지세로 합쳐지게 되었다.
이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데, 조세의 일원화를 통해 징세 체계가 단순해졌고, 인구 증가에 따라 1인당 조세 부담 액수가 상대적으로 감면됐기 때문이었다.[30]
하도 큰 일이기에 우선 광동성에서 먼저 시험을 해보았고 결과가 괜찮자 사천, 절강, 하남 성에서 시행해서 효과를 보았다. 이리하여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이렇게 시행되었다. 이 지정은제가 시행되기까지 엄청난 논란이 있었으나 옹정제 때 결국 시작되었고,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선 저항이 극심했다. 그 뒷이야기는 옹정제 문서에서 확인하자.
강희제는 전쟁이 일어나도 세수입을 늘리지 않았으며 팔기군의 둔전지로 쓰던 권지(圈地)를 소작농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기까지 하였다. 이는 강희제의 검소함과 유럽과의 무역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인데, 그 덕에 재정 상황이 상당히 풍족해졌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가뭄이 든 지역의 세금 면제는 당연하고 산불로 인해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집값을 지원해주기도 했다고. 심지어는 강희 51년에는 가뭄이나 홍수 등으로 인한 큰 피해가 없어 여지껏 세금 꼬박꼬박 낸 나머지 지역들의 그 해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31]
이러한 정책들 때문에 명나라 말기 1억 명 이하까지 떨어졌던 인구는 강희제가 세상을 떠날 당시 1억 5천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또한 강희 7년에 1,500만 냥이었던 은자는 강희 50년 경에는 5천만 냥이 넘는 양까지 증가했는데,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은의 블랙홀이 된 것[32]과 강희제 치하 청나라 조정의 정책적 성공이 시너지를 일으킨 결과였다.[33]

2.7.4. 문화 사업


만주족이지만 유교, 그리고 성리학에 매우 박식하고 심취했던 강희제는 스스로도 유학자였고, 경연과 조회에서 유학자들과 키배를 떠서 발라버리기도 했다. 더욱이 치세 당초부터 송나라주자(朱子)를 존중하여 그 저술을 출판하고 이에 의해 군신 간의 도덕을 강조했다. 또 고급 문관 시험에 해당되는 과거를 정기적으로 거행하여 지식인의 희망에 부합하려고 했다. 세종대왕처럼 책벌레이기도 해서 아픈 와중에도 책을 보는 것을 놓지 않았으며, 글씨도 제법 잘 써 소림사의 현판을 친히 쓰기도 했다. 또 1679년 특별 시험을 행하여 50명의 재야 인재를 고관에 임용했다. 그중 40%는 상공업의 진보와 함께 고도로 문화가 발달한 강소성, 절강성 출신 문인이 차지했다.
수많은 문화 사업에 손을 댄 강희제는 중국에 존재하던 유사 이래 모든 도서를 모아다가 영구 보존판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전조(前朝)의 역사인 '명사(明史)', 광대한 규모의 백과사전인 '도서집성(圖書集成)' 등 편찬을 위하여 특별 관청을 설치하고 광범위한 학자에게 직책을 주었다. 또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식을 받아들여 중국 최초의 위도를 사용한 지도인 황여전람도를 만들었다.
이 중에 백미는 단연 《강희자전(康熙字典)》. 이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십 명의 학자들과 대신들이 수년 동안 노가다를 뛰며 만든 대작이다. 강희자전의 지은이는 장옥서(張玉書), 진정경 등 30명으로, 모두 42권이고, 글자 수가 47,000자 남짓 된다. 글자 배열 순서는 먼저 나와 있던 자휘(字彙), 정자통(正字通)이 부수가 몇 획이냐에 따라 배열한 것을 그대로 따랐지만, '강희자전 순서'라는 말이 쓰이고 있듯이 뒷날의 부수별 한자 사전의 본보기가 되었다.[34] 이는 근대 이전 최대 규모의 자전이었으며 현대 중국어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업이었다.

2.7.5.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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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과 천문을 보고 있는 강희제
골수 성리학자 강희제는 가톨릭의 교리를 배우지도, 배우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종교를 탄압하지도 않았는데 가톨릭 포교를 허락하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조정의 박해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명나라 때 처음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는 용어 문제 관련해서는 적당히 넘어갔고, 공자를 공경하고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민속으로 규정해 중국 가톨릭 신자는 이런 의식을 집전하거나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예수회의 활동은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의 시기를 받아 고발당했고, 당시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이를 우상 숭배로 여기는 회칙을 발표하였다. 또한 추기경이였던 샤를토마 마야르 드 투르농(Charles-Thomas Maillard de Tournon, 1668년 12월 21일 ~ 1710년 6월 10일)이라는 인물을 특사로 파견하여 "교황청의 관행에 정통하며 교황에게 신임 받는 인물을 대표로 삼아 중국 내의 수도자들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 신자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지만, 강희제는 이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비록 중국에 온 선교사 집단이 모두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모두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교왕[35]

에게 신임받는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대청제국에서는 적임자를 고르는 데 그런 차별을 두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내가 앉아있는 용상과 가까이 있고, 어떤 자는 중간에 있고, 어떤 자는 아주 멀리 떨어져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충성심이 있으며 만일 충성심이 없다면 내가 어떤 일을 맡기겠는가? 그대들 중에 누가 감히 교왕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교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는 하느님을 노엽게 한다면서 거짓말을 금하고 있지 않은가?"

한 마디로 “어차피 똑같이 천주 믿는 사람들끼리 누구는 신임하고 누구는 신임 못하고가 어디 있냐. 누구는 교왕이 신임하니까 믿어도 되고 누구는 교왕이 신임 안 하니까 믿으면 안 되는 게 어디 있냐? 교왕이 신임 안 하면 그 사람은 천주 믿는 사람 아니냐? 그러면 지금까지 신임하지도 않는 사람(예수회)을 우리한테 보내서 천주 믿으라고 전교한 거냐? 니들 지금 우리 무시하냐?”고 교황을 비난한 거다.
그리하여 전례에 관해 마테오 리치의 입장에 찬동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추방시켰다. 그리고 결국 옹정제 때가 되면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 자체를 전부 막아버리고 추방해버리게 된다.

3. 사생활



3.1. 서양 문물 애호


강희제는 대단한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사물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지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즐겨 탐독하고, 천문학, 지도 제작, 광학, 의학, 대수학 등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또한 그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예수회 선교사들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로부터 다양한 공학적, 의학적, 예술적, 천문학적인 이해를 구했다. 예수회 선교사 페르비스트로부터는 기하학을 배웠으며, 프랑스 출신의 제르비용과 부베, 포르투갈 출신의 페레이라 등에게서는 수학을 배웠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인 부베는 강희 21년 중국에 들어와 근 30여년이나 강희제에게 의학, 화학, 물리학의 상식과 라틴어 고전을 가르쳤다.[36]
당시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은 모두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수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강희제는 그들로부터 서양의 역사와 유클리드 기하학 등을 배우게 된다. 심지어 이탈리아 작곡가 테오도리코 페드리니에게 서양 음악까지 배우는 수준.
계산기는 프랑스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처음 발명했던 바로 그 계산기였다.
벨기에인 예수회 선교사인 앙투안느에게 고차방정식의 답을 구하는 비부호화된 대수법인 '차근법'을 배우기도 했고[37] 심지어 신하들 앞에서 수학 문제를 풀고, 풀이 과정을 설명해주면서 즐기기도 하였다. 거기다 즐겨 하던 취미가 술 먹고 잔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을 불러서 수학 문제 풀면서 정답이 맞으면 좋아하는 것이었다.
또 강희제는 서양 의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몽골 원정 중에 말라리아에 걸려 목숨이 오락가락 하다가 간신히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살아났던 적이 있는데, 이 일로 인해 서양 의학에 대한 책도 좀 뒤적거려보고 양약을 자신에게 써보기도 하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했고, 반면에 도사들이 찾아와 "불로장생...", "이거 드시면 신선..." 같은 말을 하면 화를 내면서 쫒아내었다고 한다. 이러한 미신을 배격하는 태도는 그가 죽기 전에 남긴 고별상유를 보면 더욱 잘 드러나는 편이다.

짐이 태어났을 때 결코 신령스럽거나 기이한 징조들이 보이지 않았다.

또 자라날 때도 신기한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8살에 제위에 오른 후 지금까지 57년 동안 역사책에 실려 있는 상서로운 별, 상서로운 구름, 기린과 봉황, 지초가 나타나는 경사라든가 궁궐 앞에 불타는 진주와 옥이 나타나거나 천서가 하늘의 뜻을 나타내려고 떨어지는 것 따위의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상서로운 조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모두 헛된 말일 뿐이다. 짐은 감히 그렇게까지 (잘 다스렸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


3.2. 자식 교육


중국의 황제들 중에서도 가장 자식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쓴 황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자식들 교육 관련으로 항상 한 말이 있다.

"적잖은 귀족 집안의 자식들이 과도하게 귀염만 받고 자라기 때문에 커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나 제멋대로 구는 망나니가 된다. 게다가 그런 자들은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줄로 착각한다. 그렇게 키우는 것은 곧 자손을 망치는 일이다. 그러니 집안의 어른인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자손이 어렸을 때부터 반드시 엄하게 훈육해야 한다."

옹정제는 나중에 강희제의 이런 말들을 모아 「성조인황제정훈격언(聖祖仁皇帝庭訓格言)」을 내기도 하는데 내용은 강희제에 대한 칭찬 및 아부 + 강희제의 격언들이다.
상서방(上書房)은 이런 황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는데, 이곳에선 만주어, 몽골어, 한어 등 3가지의 언어를 배우게 했고 역사책과 여러 경사들을 배우게 함과 동시에 말 타기, 활쏘기, 심지어 수영까지 가르쳤다.
강희제는 이곳에 내각 대학사와 한림원 출신의 최고의 학자들을 직접 선발하여 투입했는데 명재상 장정옥의 아들인 대학사 장영, 이학(理學)의 대가 웅사이, 예부상서 탕빈, 만주어 학자 서원몽 등 다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강희제 시절의 선교사 부베는 황자들의 교육을 이렇게 묘사했다.

'황자들의 교육은 한림원에서 가장 학식이 넒은 사람들이 맡았는데, 그들은 모두 청년 시절부터 궁정에서 특별히 양성된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황자들의 모든 활동과 학습을 친히 관리하고 점검했다. 그는 황자들이 쓴 글을 직접 읽고 평가했을 뿐 아니라, 얼굴을 맞대고 공부한 내용을 구술하게 했다.

황제는 특히 황자들의 도덕성 함양과 신체 단련을 중시했다. 그래서 황자들이 철이 들 무렵부터 말 타기와 활쏘기, 각종 무기를 다루는 법을 익히게 하여 그런 기예들을 오락 겸 취미로 삼게 했다.

그는 황자들이 너무 귀하게만 자라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고생을 해 봄으로써 강해지고, 검소한 생활 습관을 들이기를 바랐다. 앞서 말한 것들은 제르비용 신부가 6년 전 황제를 수행하여 달단산에 여행을 다녀온 후 전해준 이야기다.

군왕은 처음에는 맏아들과 셋째, 넷째 황자만을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러나 사냥을 갈 때면, 그 밖의 황자 4명도 동행하게 했는데, 어린 황자는 9살이었다. 사냥을 하는 1달 동안 어린 황자들은 황제와 함께 하루 종일 말 위에서 바람과 따가운 햇볕을 견뎌야 했다. 어깨에 화살통을 메고, 손에는 활과 쇠뇌를 들고 사냥하는 황자들은 민첩하고 용감했다. 그들 가운데 사냥을 못해 빈손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처음 사냥을 나온 가장 어린 황자도 작은 화살로 사슴 2마리를 잡았다.

황자들은 모두 한어와 만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어렵고 복잡한 한자도 단기간에 익혀나갔다. 그 즈음 막내 황자도 이미 사서 중 3권을 떼고 마지막 권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쁜 영향을 받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는 황자들이 유럽인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에서 자라게 만들었다.

황자들 주위의 신하들은 그 어느 누구도 (황자들의) 아주 작은 실수조차 감춰 줄 수 없었다. 그들이 만약 그렇게 한다면 끔찍한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황자들이 이렇게 배운 좋은 머리와 자질로 싸움질만 했다는 것.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항목을 참고하자.

3.3. 천고일제의 말년


엄청난 업적을 이룩했지만 강희제의 말년은 행복하지만은 못했다. 오랜 통치로 황제의 건강은 매우 나빠졌고[38] 황태자의 비행과 황자들의 암투는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강희제는 아들 35명과 딸 20명[39]을 두었는데, 이 중 허서리 소닌의 손녀인 효성인황후 허서리씨(孝誠仁皇后 赫舍里氏)[40] 소생의 유일한 적자이자 차남[41] 윤잉을 황태자로 정하고 매우 총애해서 수많은 봉읍을 하사하고 동궁인 육경궁(毓慶宮)을 지어주어 거주하게 했고 황제의 상징인 황포를 입는 것을 허락했으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 차별적인 특전을 주고 다른 황자들보다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하였다. 다른 황자들은 다른 궁에서 유모 등에게 맡겨 키웠지만 황태자만은 곁에 두고 직접 길렀다.
게다가 다른 황자들이 황태자의 자리를 위협할까봐 다른 황자들에게 큰 작위도 주지 않았고, 그들을 왕으로 봉하는 것도 꺼렸다. 그러나 20대까지는 황제를 잘 따르고 열심히 일하던 황태자는 30대를 넘어서면서 직무에 태만해지기 시작했고 주색잡기에 빠지기 시작했다.[42] 강희제는 속으로는 황태자를 아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매우 냉정하게 대했는데, 이런 태도는 언제나 빡빡한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형제들의 암투 속에서 살아야 했던 황태자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준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형제들의 암투가 매우 극심했는데, 황자들은 개국 공신 허서리 소닌의 아들인 허서리 송고투(赫舍里 索額圖)와 황태자가 속한 황태자당(皇太子黨)을 포함해서 서자이지만 맏아들인 1황자 인티(윤제)와 그의 외삼촌인 예허나라 나란밍주가 속한 황장자당(皇長子黨), 4황자 인전(후의 옹정제)을 필두로 한 황사자당(皇四子黨), 겉으로는 인망이 뛰어난 인물로 행세하여 많은 이들의 인망을 얻었으나 실제로는 간교하고 이간질에 뛰어나 황자들 간의 분란을 부추긴 8황자 윤사가 속한 황팔자당(皇八子黨) 등으로 나뉘어 황제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강희제는 유교에 심취했기 때문에 당연히 유일한 적자 윤잉을 차기 황태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만주족에게는 적장자 같은 건 상관없이 가장 능력 있는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게 전통이었다. 아직 강희제 대에는 이런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따라서 다른 황자들은 적자만 편애한 강희제의 태도에 매우 반발했던 것으로 보인다.[43]
결국 황태자는 강희제의 후궁을 건드리는 등 몇 차례의 소동을 일으키다가, 끝내는 반역을 일으키려다가 폐위되고[44] 서인으로 강등된 후 함안궁의 냉궁에 유폐되어 죽을 때까지 감금당했다.[45]
강희제는 첫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황태자를 두지 않고 있다가[46] 죽기 직전에야 4황자 인전을 차기 황제로 지명했다. 이 4황자가 바로 옹정제다. 죽기 직전에야 차기 황제를 지명한 이유는 또다시 새 황태자의 주변에 간신과 파벌이 형성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청조 특유의 후계 제도인 태자밀건(太子密建)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태자밀건 제도는 황태자를 미리 정해놓지 않기에 모든 황자들로 하여금 행실을 조심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당시 정황상 강희제의 이러한 후계 지명은 큰 정치적 혼란을 불러왔다.
강희제의 붕어 후, 8황자, 9황자, 10황자 등은 그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였는데 야심가인 4황자 인전의 숙청을 두려워했기 대문이었다. 이들은 또 황제는 十四(십사), 즉 14번째 아들을 후계자로 지목했는데 十(십)자가 第(제)자로 고쳐졌다고(혹은 십자가 지워졌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을 각색한 것이 강희제 독살설 및 전위 조서 위조설.[47] 이 설이 큰 지지를 받은 이유는 제14황자 윤제가 티베트 원정 등에서 공을 세웠고 실제로도 강희제가 아꼈기 때문. 그러나 4황자 인전 역시 그만큼 강희제의 신뢰를 받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강희제 곁에 가장 가까이, 오래 있었던 황태자였던 점을 감안하면 강희제의 독살도, 조서의 위조도 근거도 희박해 보인다.
아무튼 강희제의 치세 말년은 이런저런 문제가 이어져 강희제는 퇴직하는 대신에게 "신하는 사직하고 물러날 수도 있지만 천자인 짐은 그럴 수도 없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말년의 강희제에게 그래도 힘이 된 사람이 바로 훗날 건륭제가 되는 손자 훙리. 아들들의 막장짓에 진저리가 난 강희제에게 똑소리 나고 용감하며 귀여운 훙리는 좋은 손자였다. 그리하여 같이 다니며 먹을 것을 주고 직접 가르치기도 했는데, 옹정제가 후계자가 된 것은 훙리의 공이 크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건륭제 본인도 이 때의 기억이 굉장히 인상 깊은지 평생 강희제를 좋아하고 존경하면서 지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짐은 감히 조부이자 성군인 강희제보다 오래 재위할 수 없다"는 논리로 자신의 재위기간이 강희제의 재위기간인 61년을 넘기기 1년 전에 아들 가경제에게 양위했을 정도였다.

3.4. 기타 이야깃거리


강희제의 통치기(1661년 ~ 1722년)는 한국사현종(顯宗, 1659년 ~ 1674년), 숙종(肅宗, 1674년 ~ 1720년), 경종(景宗, 1720년 ~ 1724년)의 치세와 일치한다. 조선에서 왕 3명이 재위할 동안 청나라는 단 1명이 훨씬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흠좀무한 성과를 내었다.[48]성군 강희제 관련 포스트

4. 비판


하지만 강희제가 단점이 전혀 없는 완벽한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후계자 문제. 결론적으로 따지자면 후계자가 명군인 옹정제가 되었으니 잘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년에 강희제는 후계자를 끝까지 명확히 하지 않고, 죽기 직전 유언에서야 제4황자를 후계로 삼는다는 유지를 내렸다. 물론 이는 황태자 윤잉의 주변에 몰려든 간신들과 그로 인한 윤잉의 비행, 그리고 파벌의 형성을 경계한 것이지만, 이로 인해 황자들의 다툼은 심해졌다는 점만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황태자 윤잉이 처음부터 어긋난 것은 아니다. 강희제가 장자를 황태자로 삼는다는 만주족에게 익숙하지 않은 규칙을 밀어붙인[49] 순간부터 윤잉에겐 고난이 시작된 것이고, 윤잉을 아끼기는 했지만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윤잉한테 고난도의 업무를 시키던 강희제의 태도는 황태자에게 막대한 부담이 되어 흑화의 원인을 가져왔다. 그렇게 자식 교육에 신경을 썼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수신(修身),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성공하였으나 제가(齊家)는 실패한 셈.
문자의 옥 문제도 있다. 이민족으로 중국을 통치한 만주족은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통제를 해야 했기에 자주 문자의 옥이라는 필화 사건을 일으켜 많은 책을 검열하고 분서시켰는데, 덕분에 많은 한족 학자들이 죽어야만 했다. 단, 문자의 옥은 강희제 때가 가장 심한 것이 아니라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가경제 때부터 줄어들었고. 정작 강희제 본인은 한족 지식인들을 포섭하려 굉장히 노력한 편이다.[50]
강희제 말년 황자들 간의 다툼은 당파의 형성, 관리들의 부정부패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 비단 정치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혼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후대인 옹정제 대에 큰 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희제 말년의 문제들이 후세에 크게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전중기 치세에서 다져진 내실과 다음 대 황제인 옹정제의 뛰어난 정치력 때문. 옹정제는 치세 초기부터 매우 불안한 상태에서 보위를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형제들과 보위에 오르는데 도움을 준 공신들을 숙청하여 빠르게 정국을 안정시켰으며, 거의 일 중독 수준의 정무 처리로 강희제 대부터 이어온 부정부패를 해결해나간다.
그 외에도, 현대 중국에서 강경한 민족(원래 그렇지 않았지만, 강제로 만주족으로 병합된 북방 유목민족(모용선비족, 거란족, 청나라로 이주한 조선인(조선인의 경우 유목민족이 아닌 농경민족이다.), 몽골인)들과 청 왕조 만주족이 학살하던 티베트, 위구르, 한족)주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강희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청나라의 통치를 식민지 시절이라 생각하고, 좋은 청나라 황제는 죽은 청나라 황제라고 생각할 만큼 청나라와 만주족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경우, 강희제가 훌륭한 황제인 건 맞지만 한편으로는 시대가 좋았기 때문에 강희제의 치세가 융성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중국의 경제가 활발한 시대이니 청조의 딸리는 군사적 능력[51]을 물량으로 보충할 수 있고[52], 세수가 넘치니 수탈을 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강희제는 청나라의 화기 개발을 억제하였다. 특히 1696년에 강희제는 청나라의 화기의 연구와 개발을 금지시키고 이전에 만들어진 병기에 대한 서적들도 열람을 제한하였다. 왜냐면 강희제는 청나라의 군사가 승승장구한 이유는 오로지 창과 궁시에 달려 있다고 할 정도로 냉병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세력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염려했다는 견해도 일부 있다. 당연히 이 정책은 청나라의 화포와 조총 기술이 쇠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뒤를 이은 황제들도 강희제의 정책을 본받음으로써 결국 청나라의 군사력과 기술력을 약화시키는 실책을 저지르면서 훗날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53] 아이러니한 것은 청나라의 화기를 기존의 홍이포에서 신식 화기로 바꾸어 발전시킨 인물도 강희제라는 것인데, 이는 강희제가 화기의 중요성 자체를 망각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냉병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박하게 대한 편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5. 기타 등등



5.1. 동시대의 조선 정세를 평하다


강희제의 통치기(1661년 ~ 1722년)는 한국의 현종(1659년 ~ 1674년), 숙종(1674년 ~ 1720년), 경종(1720년 ~ 1724년)의 치세와 일치한다. 조선에서 왕 3명이 재위할 동안 청나라는 단 1명이 훨씬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성과를 내었다. 당연히 조선의 사신들을 만난 적도 있고, 그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데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
강희제는 성황사[54]에 새해 인사를 드리고 온 뒤, 조선의 사신들을 자금성 건청궁으로 따로 불러들였다. 먼저 사신들을 가까이 앉게 한 뒤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국왕과 몇 촌인지, 언제 길을 떠날 것인지, 글을 읽었는지, 그리고 부사 정익(鄭榏)의 이름자를 물어본 다음에 말했다.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을 신하가 강한 소치라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
이에 복선군 이남이 대답하였다.
>어찌 신하가 강하여 이렇게 백성이 굶주리게 되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근년 이래로 저희 나라에 홍수와 가뭄이 잇달아 일어나서 연이어 흉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황급해하고 심지어는 대내에 진공하는 물건까지도 모두 줄여가면서 죽어가는 백성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대(事大)의 예를 폐기하지 않고 이번 진헌(進獻)에 힘을 다해 장만하여 겨우 거르는 것을 면하였는데, 어찌 신하가 강하여 백성의 빈궁을 가져오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강희제는 빙그레 웃고는 시랑 중 한 사람에게
>저 사람이 국왕의 가까운 친척[55]이므로 저리 말한 것이다.
라 말하고 사신들을 물러가게 했는데, 그 시랑도 함께 나오면서 역관 이일선(李一善)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그리고 사신들은 나중에 이일선으로부터
>시랑이 말하길, 사신이 황제의 물음에 대답한 말이 매우 좋았다고 하더이다. 또 가로되, 오늘 사신을 대하면서 우리나라 백성의 일까지 염려하셨고 또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라고 명하신 것은 다 국왕을 친근히 여기고 사신을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사신도 이것이 특별한 은총인 줄 아느냐고 하더이다.
라는 말을 듣고 강희제가 좋은 뜻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했다.
첨언하자면 이 시기 조선에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재앙인 경신대기근이 휩쓸고 있었다. 여기서 조선 사신에게 강희제가 "너희 나라 백성들이 다 굶어 죽어가고 있다더구나? 그게 다 군약신강의 나라라서 그런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당시 강희제가 조선의 정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56]
물론 조선에 닥친 천재지변은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 군약신강이라 굶어죽은 것은 절대 아니고, 태종이 가뭄을 핑계로 처남들의 처형을 미루는 척하자 신하들이 역심을 품은 자가 있어 전지조화가 깨진 탓이라 하기도 했고, 이변이 일어나면 임금의 덕이 부족한 탓이니 수신에 힘쓸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청나라도 조선과 같은 재난을 겪고 있었다.[57] 원나라 말부터 줄곧 하락세를 보이던 중국의 연 평균 기온은 딱 강희제 치세에 최저점을 찍고 청나라 말이 되어서야 영상으로 회복[58]되는데, 그에 비해서 청은 상대적으로 기근의 영향이 적었다. 이는 강희제가 엄청나게 잘나서가 아니라 은의 유입이 많아지고 전란으로 인구가 줄은 덕분에 청의 경제가 기근의 영향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보는 평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야자키 이치사다.
조선을 군약신강의 나라라고 비웃는듯한 평을 내린것과는 별개로 을병대기근[59]때는 조선이 도움을 요청하자 조선에 쌀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조선이 기근으로 고생하자 쌀을 보내줬다는 점에서 만력제와 비슷하지만 차이점이라면 명나라 최악의 암군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력제는 임진왜란 당시 원군과 곡식을 보내준 탓[60]에 조선에서만은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줬는데[61] 비해 강희제는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군일 뿐만 아니라 대기근 당시 고통받던 조선에게 쌀을 보내줬음에도 조선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강희제의 할아버지인 숭덕제병자호란으로 조선을 굴복시키고 더 나아가 엄청나게 수탈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악연이 손자 대에까지 영향을 미친 듯하다.
또한 대만 정벌 시기 정씨 정권에서 상국으로 받들 것이니 독자적인 통치를 인정해 달라고 하자 대신 나란밍주가 제후국인 조선의 예를 들어 찬성하자 그와의 대화에서 조선은 언어와 풍속이 달라 중화와 융화될 수 없어 그대로 놔뒀지만 대만은 우리와 풍속이 같으니 그럴 수 없다는 말을 한다.
참고로 같은 시기 일본 에도 막부(1603년 ~ 1868년 / 265년)의 쇼군은 4대 도쿠가와 이에츠나(家綱, 재임 1651년 ~ 1680년), 5대 도쿠가와 츠나요시(綱吉, 재임 1680년 ~ 1709년), 6대 도쿠가와 이에노부(家宣, 재임 1709년 ~ 1712년), 7대 도쿠가와 이에츠쿠(家繼, 재임 1712년 ~ 1716년),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吉宗, 재임 1716년 ~ 1745년) 등 모두 5명이 있었다.

5.2. 동시대 각국의 군주들


강희제 치세 중 유명한 타국 군주는 프랑스[62]의 '태양왕' 루이 14세(재위 1643년 ~ 1715년)[63]러시아표트르 대제(재위 1682년 ~ 1725년)가 있다. 당시 인도 무굴 제국(1526년 ~ 1858년)의 황제는 무굴 제국 전성기의 마지막 시기를 보낸 아우랑제브(1658년 ~ 1707년)였다. 묘하게도 강희제 치세 기간은 동서양에서 특히 왕권이 강한 군주들의 재위 기간과 많이 겹친다. 이들의 재위기간도 대부분 길다.
당시 청에 머물던 선교사들에 의해 강희제의 통치는 유럽까지 알려졌고, 나폴리 동부 대학에는 '중국 학회'까지 세워진다. 유럽의 학자들은 '철인 군주'를 꿈꾸던 플라톤의 이상을 기독교도 안 믿는 중국에서 실현했다면서 유교와 기독교와 연결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64] 의외로 대표적인 인물이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Gottfried von Leibniz)... 물론 그 환상은 열강이 청에 직접 발을 내딛으면서 무참히 깨지고 말지만.
참고로 강희제 본인은 서양 열강의 침입을 예언하기도 했다. 선박들이 해외로 팔려가고 목재는 외국으로 밀반출 되고, 네덜란드인들이 남해에서 버티는 모습을 보고 연해 지방의 총독들을 만난 자리에서 "미래에는 서양의 여러 나라들 때문에 중국이 곤경에 처할까 염려된다. 그것이 걱정이다." "이것이 짐의 예측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정도면 뭐...
제갈량출사표 중 후출사표 중에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즉 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죽기까지 힘쓴다는 말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신하가 본래 제갈량의 이 말이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자세를 가리키며 임금이 가질 자세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자, 강희제는 조용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짐은 하늘을 섬기는 신하다."


5.3. 당시 사람들의 평가


……중국의 황제는, 혹자는 그가 무궁한 재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그의 강토가 광활하고 부유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가장 세력이 강한 군주라고 말해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그렇지만, 그는 진정 자신의 몸에 모두 사치와는 거리가 먼 것을 사용했다. 그 개인과 관련된 부분에서 보면, 그의 말은 소박하고 담백함이 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이에 따라 공봉(供奉)되는 물품을 제외하고, 그는 조금도 사치스러움을 구하지 않았고 매우 일반적인 음식에 만족했으며, 조금도 정도를 지나친 적이 없다. 그의 담백함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

비록 황제가 거주하는 방이라 하더라도, 몇 폭의 서화와 몇 점의 금을 입힌 장식물 및 일부 소박한 주단(紬緞)이 있을 뿐이다. 주단은 중국에서 매우 보편적인 물품으로, 사치품에 속하지 않는다. 간단하고 소박함이 이 방의 거의 모든 장식물에 보인다. 강희제는 북경 근처 3리 떨어진 곳에, 그가 매우 좋아하는 원유(장춘원长春园)를 조성하고, 매년 이 안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이 안에는 그가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개축한 2곳의 대수지(大水池)와 몇 곳의 하도(河道) 말고는, 부유하고 또한 강성한 군주가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호화스러운 기백에 어울리는 물품은 거의 볼 수 없다.

그의 의복은 궁정 안에서 매번 볼 수 있는 겨울을 나는 검은담비 및 은서피(銀鼠皮) 옷을 제외하고, 일부는 중국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항상 볼 수 있지만 일반 백성은 입기 어려운 사주(絲綢) 복장이다. 비가 오는 날에 사람들은 그가 털로 짠 모직물로 만든 외투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흔한 거친 의복이다. 여름에 우리는 그가 보통의 마포단괘(麻布段掛)[65]

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도 역시 일반가정에서 항상 입는 의복이다. 경축일 대전을 거행하는 날을 제외하고 우리가 그의 몸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물품은 큰 구슬이다. 이 구슬은 여름에 만주족의 풍습에 따라 그의 모자에 다는 것이다. 그는 황성 안팎에서 말을 타지 않을 때에는 가마를 이용한다. 이 가마는 담가(擔架)와 비슷한 물품이다. 나무 재질은 일반적인 것이고 옻칠을 했으며, 몇 군데 동편이나 도금으로 장식한 목조이다.

총괄하자면, 그의 주변에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다른 아시아 군주처럼 사치가 극에 달하는 규모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는 개인을 위해 낭비하지 않고, 현명하게 절약함으로써 금전을 제국의 진정한 수요에 사용한다.

군주의 위신과 진정한 위대함은 겉으로 드러나는 호화스러움은 적은 부분이고, 그외 훨씬 많은 부분은 도덕의 찬란함에서 비롯됨을 강희 황제는 깊이 믿고 있다.

─ 조아섕 부베. 강희제전(康熙帝傳), 루이 14세에게 올린 보고문 中

"그라말디는 군주가 가진 놀랄 만한 지식욕은 거의 신앙에 가까울 정도라는 점을 강조했다. 제후들과 제국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멀리서는 흠모해 마지않고, 가까이서 대할 때는 존경을 금치 못하는 그 군주가 페르비스트와 함께 (궁전의) 내실에서 마치 선생을 모신 (온순한) 학생처럼 날마다 서너 시간씩 수학 도구와 책을 통해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클리드의 정리를 터득하고 삼각 함수를 이해했으며, 산술로 천체의 현상을 증명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했다. 최근에 그곳에서 돌아온 르 콩트 신부가 출간한 중국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 군주는 자신의 자식들이 과학의 근본 원리와 여러 진리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게끔 수학에 관한 책을 친히 집필하고자 했다고 한다. 또한 그 군주는 자신의 나라를 밝혀 줄 수 있는 이 지혜가 집안 대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최신 중국 소식> 中

“강희(康煕)는 그 자체로 성군이니, 이적(夷狄)과 똑같이 일률화할 수는 없다.”

-정조

실학자 홍대용정조의 세손 시절,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연행 경험에 대해 묻는 세손에게 "강희제는 실로 영걸한 황제였다."고 극찬했다. 김종수, 홍국영, 정민시 등 꼬장꼬장한 노론계 인물들 앞에서도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였으니, 홍대용이 강희제에 대해 엄청 감동을 받긴 했나 보다.[66] 그런데 홍대용은 원명원이 사치스러웠던 점을 들어 건륭제는 깠다. 건륭제 때부터 청나라가 속에서 곪기 시작한 것을 생각해 보면, 홍대용의 통찰이 실로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종합하면 당대에도 모범적이고 귀감이 되는 군주로서 평가받았고 현대에도 한족우월주의에 인기가 조금 시든 감이 있지만 높이 평가 받고 있는 군주이다.

6. 미디어믹스


중국의 작가 얼웨허(二月河, 이월하)는 제왕 삼부곡이라는 시리즈 소설을 썼는데, 그 중 첫 작품인 '강희대제'는 중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후속작들인 '옹정 황제', '건륭 황제'도 큰 인기를 끌었다.
2001년에는 중국 중앙방송에서 '강희대제'를 원작으로 한 '강희왕조'(康熙王朝)라는 드라마가 방송되어 동시간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천다오밍이 열연한 강희제는 반드시 봐 두자. 한레이(韩磊)가 부른 이 드라마의 타이틀곡인 向天再借五百年 역시 중국에서 매우 유명한 곡이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는 재위 기간도 길고 중국사의 손꼽히는 명군인 만큼 다른 소설이나 드라마[67]에서도 자주 주연급으로 등장하곤 한다. 특히 강희제 같은 경우에는 옹정제를 다룰 시, 옹정제의 황제 계승을 둘러싼 다툼의 흥미로움 때문에 노년의 상태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무협지 팬이라면 김용의 녹정기에서 위소보의 친구로 나온 강희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소설상에서 위소보에게 강희제는 인간적인 매력과 두려운 경외심을 주는 인물로 나오는데, 톡톡 튀는 매력이 은근히 귀엽다.
작중에서는 위소보와 비슷한 나이대의 소년으로 등장. 우연히 강희가 무술 수련하는 방에 숨어들어온 위소보와 대련, 황제인 탓에 친구도 없이 지냈던 터라 자신이 황제란 것도 못 알아보고[68] 대등하게 대해주는 위소보를 마음에 들어하며 그와 친구가 된다. 후에 황제란 것을 들키고도 둘만 있을 때는 서로를 친구로 대하며 계속 우정을 쌓아가며 오배의 체포를 시작으로 여러 모로 공적을 세우는 위소보를 매우 총애하게 된다. 위소보가 자신의 황제 자리를 위협하는[69] 천지회에 들어간 것을 알고도 덮어두고 대만 정씨 왕조를 끝내고 천지회를 박살낸 뒤에도 처벌하지 않았던 것도 위소보와의 우정 때문.
마지막에는 강희와 천지회 잔당 양쪽에게 태도를 확고히 할 것에 시달리던 위소보가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사라지자 그의 죽음을 믿지 않고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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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강희제 서적은 조너선 스펜스 - 강희제와 등예쥔 - 수신제가 성공의 비밀 등이 있다. 조너선 스펜스의 글은 수필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때문에 내용에 출처는 계속 달아 놓았지만 주의해서 보아야만 한다. 등예쥔의 글은 시리즈물이다. 중원을 평정하고 천하를 경영했던 청(淸) 강희제와 옹정제, 건륭제 3대의 130여 년 태평성세의 지혜를 모은 3권의 책으로 수신제가는 강희제, 치국은 옹정제, 평천하는 건륭제를 다루고 있다. 어찌되었든 최근의 중국은 강희제의 치세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는데, 이는 준가르 정벌, 북벌, 대만 정벌 등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중앙 정부의 의향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중국이 강희제를 높이 여기는 분위기에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지만 강희제가 실제로도 대단한 업적을 만들어냈다는것은 부정하긴 힘들 듯 하다. 후진타오 등은 그렇게나 강희제를 본받쟀는데 후임 시진핑은 사극 금지령 등으로 처참하게 말아먹고 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 아시아 왕조에서는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 노년기의 모습으로, 대사나 말투가 대단히 자비롭고 평화주의적이다. 게임 중 보물을 많이 수집하면 다른 적 지도자들은 대부분 "잘났다 그래. 보물 찾았다고 좋아하지 마" 라는 식으로 쏘아붙이거나 "그래, 보물 찾기라도 잘 해야지" 라고 비꼬거나 "네가 보물을 찾는 동안 나는 군대를 모았지" 라며 엄포를 놓거나 하는데, 강희제는 적으로 만나도 "그대의 이재(理財)는 짐이 배워야 할 점이로다"라고 칭찬한다[70]. 게임에서 중국의 컨셉을 유교로 잡아서 그런지 유교적인 대사도 많으며, 영문 원판에서는 늙은 현자 내지 도인(道人) 같은 느낌을 의도한 것 같은데, 간드러지는 목소리여서 간신이나 환관(...) 같다는 평도 있는 모양.

7. 둘러보기



[1] 대표 시호가 인(仁)이기 때문에 짦게 표현하면 인황제(仁皇帝)라고도 한다.[2] 참고로 중국 시안지방에서는 쉬안예 대신 히안예에 가깝게 발음한다[3] 170cm는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고 175cm는 한 블로거가 추정한 키인데 어진을 보면 약 170cm대 초반에서 170cm대 중반으로 보인다.[4] 사실 강희제의 손자이자 제6대 황제인 건륭제가 더 많은 나이에 즉위하여 비슷하게 60년간 재위하다가 강희제의 기록을 경신하지 않고 싶어서 스스로 퇴위하고 향후 4년 동안 섭정했다.(단, 건륭제가 말년에 사치향락을 부리면서 장수할 수 있는 근거라도 있었던 것과는 달리 강희제는 말년에 후계자 분쟁으로 인한 혼란으로 그렇지 않아도 바쁜 정무처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5] 묘호도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나라의 창건자 정도의 업적이 아니면 祖를 붙이지 않는데 조를 썼을 뿐 아니라 성스럽다는 뜻의 聖자도 붙어있어 성조(聖祖)라는 아주 드문 묘호를 썼다. 성조라는 묘호는 중국 주요 왕조 중 추존 군주를 제외하면 사례가 없다. 비슷한 묘호의 사례로는 요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요성종(聖宗) 정도가 있다.[6] Joachim Bouvet, 1656년 7월 18일 ~ 1730년 6월 28일 중국 이름은 백진(白晉)·백진(白進)· 명원(明遠)으로 프랑스 루이 14세가 파견한 프랑스인 예수회 선교사다. 강희제의 신임을 얻어서 강희제에게 유클리드 기하학과 해부학 등을 강의했으며, 강희제에 대한 여러 기록을 남겼다.[7] 한족화된 여진족의 후손으로 퉁기야 씨의 시조가 된다, 그의 후손인 동국강과 동국유는 한인 팔기에 소속되었다가 강희제 즉위 후 특명으로 일족 수백명이 만주 양황기로 편입된다. .[8] 당시, 소닌은 너무 늙었고, 어빌룬과는 같은 팔기 출신이어서 연합하였기에 혼자나 마찬가지인 숙사하를 배제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9] 사실 보정대신 4인이 지정된 것은 도르곤이 섭정왕으로 청나라를 좌지우지하였던 것에 대한 대비책으로 나온 것이었다. 이들 4인 중 원래 숙사하는 도르곤의 부하였고, 남은 3인은 홍타이지의 부하였는데, 도르곤이 섭정할 때에 오보이 따위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을 만큼 미약한 존재였다.(평가에 따라서는 약간 다를 수 있지만 도르곤과 아우 도도는 어머니가 강제로 순장되면서 별볼일 없는 상황 속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서 팔기 중 2기를 장악하였다. 특히나 순치제 시기 강남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을 총지휘하였던 인물이 도도였음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오보이가 무용으로 이름 높았어도 황족, 그것도 누르하치의 친아들을 이길 정도는 아니다.)[10] 그 당시에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알 수밖에 없는 것이 만주족들이 입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고, 청나라의 명령으로 남명정권을 없애겠다고 운남을 지나 미얀마북부까지 공격하던 사람이였다. 이런 인물이 자기 위치가 위협받는다고 갑자기 명나라 부활을 입에 올린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도 믿지 못할 일이였다.[11] 러시아의 어드미럴 쿠즈네초프급 항공 모함을 가져다가 개조한 중국 최초의 항모는 원래 함명으로 이 사람의 이름을 붙이려고 했으나 너무 노골적이어서 찔렸는지 결국 랴오닝급으로 결정되었다.[12] 녹정기에서 위소보에게 불쌍하게 당하는 그 인물이다.[13] 더 정확히는 루스 차르국.[14] 강희제는 기병들에게 강력한 대포를 딸려 보냈다.[15] 당시 러시아는 이복 누이 소피아 알렉세예브나가 반란을 일으켜 어린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를 압박해, 이반 5세가 공동 황제가 되고 소피아가 섭정이 되도록 만든 상태였고, 나선 정벌의 복수도 소피아가 막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네르친스크 조약 역시 소피아가 체결했다.[16] 우다 강 주변은 미결정지[17] 허서리 소닌의 아들이다.[18] 이전에 이곳에 라틴어문이 초안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게 맞다면 출처 요망[19] 네르친스크 조약 뿐만 아니라 당시 러시아와 청조는 자국어(노어, 만주어) 문서와 함께 라틴어 문서를 서로 주고받았다고 한다.[20] 표트르 대제 문서에도 나와 있는데,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이 무효라고 생각했다. 황제였던 표트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섭정이자 제위 찬탈자인 소피아 알렉세예브나의 권한으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된 직후 소피아는 자기 애인과 함께 직접 쿠데타를 일으켜 표트르를 완전히 몰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하여 수녀원에 갇힌다.[21] 강희제는 서양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당시 중국에 들어오던 가톨릭 선교사들로부터 이런저런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22] 르네 그루쎄는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에서 이러한 강희제의 방식을 두고 '체제'는 야만인들을 다루는 중화주의의 행정적 경험이었고, '토대'는 만주의 칸들에게 몽골의 칸들이 복속하는 유목민과 유목민 사이의 관계였다고 표현했다.[23] 일설에 따르면 요시기가 되면서 강희제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고, 아들들 사이에 후계자 분쟁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에 황자들 중 한명을 지휘관으로 파견해서 전쟁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는 말이 있다.(이것이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는 것은 과거 강희제가 자신의 형과 동생을 대장군으로 몽골에 파견하였을 때에 패전으로 인하여서 오히려 강희제가 이들을 처벌한 적이 있었다. 이후 친정으로 갈단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또다시 황자에게 대규모 병력 지휘권을 주었을까라는 의문이 들며, 당시 이러한 대규모 병력을 지휘할 능력을 가진 황자도 몇 명 없었는데, 가장 유력하였던 인물이 열네번째 황자였다. 그리고 열네번째 황자는 동복형 네번째 황자가 아닌 이복형 여덟번째 황자의 파벌에 속한 인물이기도 하였는데, 여덟번째 황자는 당시 신하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조정 내에서 숨은 실세로 입김이 여러 곳에 미치고 있었다. 강희제가 이런 상황을 완전히 모르고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편이다.)[24] 윤제가 돌아오기 전에 강희제는 사망하였다. 상당히 강력한 경쟁자였던 윤제가 이렇게 멀리 떠나있는 사이에 옹정제는 편하게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다.[25] 단, 황제가 강남을 오가던 비용에 일부를 총신들에게 부담시켰는데, 이는 오가는 와중에 황제가 그들 집에 방문하여 일정기간 머물면서 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었으나, 엄청난 부자가 아닌 이상 황제와 수행원들 접대에 허리가 휘청거릴 수 밖에 없었다. [26] 사실 이는 팔기군을 비롯한 만주족 자체의 전투역량이 크게 쇠퇴한 현실적인 문제의 탓도 있었을 것이다[27] 청나라숭정제까지의 명나라와 달리 남명 정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연호 사용건을 현대에 빗대면 대한민국에서 주체연호를 쓰는 것과 같은 격이었다.[28]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한 해 사형당하는 숫자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6천 명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인구 증가 수치를 따져보아도 매우 많은 편.[29] 비슷하다기엔 뭐하지만 만력제 시기에는 줄줄이 사형 집행 건수가 0명인 해가 이어지기도 했는데 이건 당시가 태평성대였다기보다 만력제가 일을 안 해서이다.(...) 유교권에서 사형은 최고 군주의 결재가 있어야만 집행이 가능했는데 황제가 결재 자체를 안해버리니 사형수들이 옥에서 죽거나 시효인 30년이 지나 석방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30] 1. 성세자생인정으로 정세가 고정됐는데, 2. 여기에 탄정입묘로 고정된 정세와 토지에 부과된 정세, 토지 기반의 지세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정세 부담이 현격하게 감소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31] 쉽게 말하면 다른데는 다 면제받아봤는데 얘네만 못받았으면 억울할 테니 너네도 올해는 내지 말라는 것. 재정이 풍족했음은 사실 이 말 하나로 충분히 표현이 가능하다. 이러니 인구가 증가할 수밖에. 그런데 이것도 그 지역 주민들이 실제로 면제해택을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 청나라는 기본적인 관료체계를 명나라에서 이어받았다. 그런데 명나라는 관료 봉급이 매우 짜던 정권으로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제도적으로 만연할 수 밖에 없었다.(많이 준다고 부패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무급이거나 낮은 급료는 자신의 직함을 이용한 횡령을 부추기게 하였다.) 이에 지방관들은 정해진 세금 이상을 걷어서 자기 생활자금과 윗사람에게 뇌물로 바쳤는데, 이러한 모습이 강희제 시기에도 만연하였다. 이에 강희제는 우성룡 같은 청렴한 관료들을 포상하여서 모범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결국 옹정제라는 무자비한 사람에 폭정으로 10몇 년간 정화되었다. 그러나 제도적 모순은 여전하여 옹정제 사후 부정부패가 다시 자라났고, 건륭제 60년 동안 나라를 붕괴시켰다.[32]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전 세계의 은의 1/4 내지 1/3을 빨아들였다고 한다. 아편전쟁은 이렇게 빨려 들어가고도 돌지 않는 은을 털어 무역 적자를 메우려는 영국극단적인 조치가 일으킨 결과였다.[33] 단, 이러한 경제적 풍요는 강희-옹정기간에만 적절한 조치였고, 이후 시기가 되면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인하여서 조정의 人民 장악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었다. 거기에 외세의 공세에 재정 지출이 증가되어야 함에도 고정된 세금량으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34] 유니코드의 한자 영역도 강희자전 부수 순서를 따른다.[35] 강희제는 교황을 교왕으로 불렀다고 한다. 사실 교황을 법왕 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36]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中[37] 본래 중국에 고차방정식의 답을 구하는 방법으로 '천원술'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명나라를 거치면서 그 방법이 잊혀졌지만 강희제가 매곡성이라는 신하에게 "서양 사람들이 말하길, 이것이 동양에서 전파됐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 조사해보아라." 라고 명하여 천원술과 차근법이 같다는 걸 알아내기도 한다.[38] 몽골 원정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고통받았다. 이때문에 당시 황태자였던 윤잉한테 양위할 생각까지 했었다. 물론 병이 낫고 나서 바로 취소했다.[39] 성인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아들 20명, 딸 8명.[40] 강희제와 금슬이 좋아서 강희제가 사랑한 황후였다. 윤잉을 낳은지 얼마 안되어 산고로 22살에 요절했다.[41] 형 승호가 있었지만 3살에 요절했다.[42] 실제로 윤잉은 여성을 굉장히 좋아해서 황태자비인 구왈기야 외에 첩을 13명이나 두었고 그녀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만 해도 9남 14녀나 되었다.[43] 사실 윤잉도 자신의 이복형제들한테 형제라기보다는 '황태자 전하'라고 부르라며 군신의 예의를 요구했기 때문에 형제들한테서 반감을 크게 사고 말았다.[44] 만주족 전통에 따라 피서산장에서 텐트 치고 살던 강희제에게 자객을 보내 죽이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강희제 측의 일방적 주장이지만...[45] 윤잉은 강희제가 죽고나서도 그를 싫어하던 옹정제가 그의 감금과 서인 강등을 풀어주지 않았기에 감금된 지 12년인 옹정 2년에 52살에 죽었다. 그나마 사후 옹정제가 황족의 예로 장례를 치루어주며 윤잉의 황족 지위를 복원시켜주었다.[46] 특히 강희제는 윤잉을 폐위하고 나서 황태자 옹립을 얘기하면 지위고하를 가리지않고 참수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했기에 신하들은 후계자를 언급할수도 없었다.[47] 그러나 四(사)자가 제대로 적힌 강희제의 전위 조서가 발견되었는데다 十(십)자를 第(제)자로 고치는 식은 당시 문장구조에는 맞지 않아 이는 사실상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다.[48] 현종 시대에 조선에 큰 기근이 들었을 무렵 파견된 조선 사신에게 강희제는 "너희 나라 백성들이 이번에 다 굶어 죽게 됐대매? 그게 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서 그런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강희제와 청나라가 조선의 정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 이 대목은 최근에도 당시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종종 쓰인다.[49] 다만 당시 강희제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중국 지배를 위한 선택이었던 측면도 있다. 유능하다면 어떤 황족이든 차기 황제가 될 수 있는 청나라 초기의 황위 계승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되어 청나라 남성 황족들이 서로 자기가 더 유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청나라 황실이 혼란에 빠지고 최악의 경우 청나라가 원나라처럼 일찍 중원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태자밀건법 자체가 그런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장자상속제에 대한 황족들의 반발까지 잠재우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50] 그리고 강희제 시절 문자의 옥은 건륭제 시절만큼 말도 안되는 것도 아닌 탄압할 이유가 충분해서다. 그도 그럴게 걸린 이들이 반체제적 성격을 많이 띄고 있었다.[51] 생각과 다르게 이 시대부터 청은 이미 전술적으로 성과가 나쁜 경우가 많았다. 삼번의 난에서도 고전해서 한인 병사를 모집했고, 조선에 군사를 빌리거나, 정성공의 진압이나 소수민족 정벌도 물량으로 보충하는 등. 사실 팔기군의 군사력이 한창 빛을 보던 초기(중원 입관 전)의 청나라도 이러한 문제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청나라가 승리한 전투인 사르후 전투병자호란조차도 청나라 자체의 역량만으로 이겼다기보다는 적군의 무능함에 힘입어 승리한 것에 가까웠으며, 청나라의 중원 입관 자체도 명나라의 멸망 및 오삼계의 투항에 힘입어 가까스로 성공한 것이다.[52] 이러한 점은 아이러니하게도 한족 왕조인 나라에서 크게 두드러진 바 있다. 결국 중원 입관 이후의 청나라는 군사적 능력으로 승부하던 전형적인 유목제국으로서의 면모가 사라지고, 그러한 유목제국에 비해 떨어지는 군사적 능력을 경제력으로 보충하는 한족 왕조식 체계로 바뀌어간 셈이다.[53] 출처: 훈련도감 설치 및 운영의 동아시아적 특성[54] 이 성황사(城隍祠)라는 말이 원래 성황당(城隍堂)을 가리키는 말인데, 북경의 천단을 폄하해서 이렇게 말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55] 복선군은 인조의 손자로 현종의 사촌이다.[56] 아이러니하게도 강희제와 동시기에 재위했던 조선의 임금은 현종과 숙종으로 역사상 왕권이 가장 강한 시기였다. 심지어 숙종의 경우에는 성년도 체 되지 않은 15세 때부터 친정을 했을 정도. 사실 강희제가 주의깊게 본 것은 단순히 신하들의 권력이 강하다기보다는 선대인 인조나 효종 때부터 반정이니 정통성이니하며 신하들을 쥐잡듯 잡아대던 조선 후기의 정치판이였을 것이다.[57] 천고일제라 칭송받는 강희제의 치세이니만큼 청나라는 상대적으로 대비와 구제가 잘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58] 劉昭民, 기후의 반역 성균관대학교 출판부[59] 경신 대기근에 묻혀서 그렇지 굉장히 참혹한 대기근으로 경신 대기근 때도 반청감정때문에 청의 도움을 안받으려했던 조선이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면 말다했다.[60] 사실 만력제의 막장행적을 생각하면 이것도 진심으로 제후국의 멸망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30여년 넘게 정사에 손을 놓아버린채 술과 여자속에만 빠져지내 신하들과의 관계가 최악에 치닫자 '천자로서 위기에 빠진 제후국을 위해 원병을 파견한다' 는 명분을 통해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61] 다만 이와는 별개로 당대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송시열처럼 만력제에게 매우 부정적이었던 사람들도 있고 이에 대한 관련기록 또한 있다. "이 무렵 황제는 이미 정무를 살피지 않고 환관(宦官)이 용사(用事)하였으므로, 군용(軍用)이 계속되지 못한 데다가 제군이 경솔히 진격하여 패전하자, 유 도독은 스스로 목매어 죽은 터였다(時皇帝已倦勤, 閹豎用事, 軍興不繼, 又諸軍輕進失利, 都督自縊死)."- 조증(詔贈) 요동백(遼東伯) 김 장군(金將軍) 묘비(廟碑)[62] 별명이 유럽의 중국이었다.[63] 실제로 루이 14세는 강희제에게 선교사와 더불어 서신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강희제는 이를 받지 못하고 300여년이 지난 후 루브르 박물관에서 공개되었다고.[64] 다만 유교와의 연결점을 찾는 학풍은, 이보다는 선교와 연결되어 이루어졌다. 즉 어느날 갑자기 "너희들이 생각하던건 다 틀렸다"라고 하는 것 보다는, "공맹께서 하시던 말씀으로 보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설득력이 있다"라고 하는게 훨씬 중국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 이러한 경향을 '보유론(補儒論)'이라 하는데 명나라 시대의 예수회 선교에서부터 나타난 경향이며, 훗날 조선에서 특히 많은 공감을 받았었다. 게다가 선교사들이 생각하기에도,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 보편적 논리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쪽이 훨씬 와닿는 설명이기도 하고.[65] 마포로 만든 홑마고자[66] 그런데 홍대용은 김종수의 형 김종후(홍대용 본인에게는 서원 선배가 된다.)에게 한족이라 하나 변발을 한 중국 선비들을 만났다고 마구 까였다.[67] 강희왕조, 대내군영(大內群英), 군림천하 등이 대표작.[68] 사실 이 시점에서 위소보가 사이비 환관이라는 건 알았다. 제대로 교육 받은 진짜 환관이면 자기 옷보고 바로 정체를 알아봐야 했기 때문. [69] 처음에는 황제 자리에 별 집착이 없었으나 황제 노릇을 하면서 점점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70] 영문 원판에서는 'I can learn much from such an aggressive gatherer(그렇게 열심인 채집가로부터는 많은 걸 배울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