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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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나라의 인물.
2. 생애
빈주 사람으로 능연각훈신 중 한 명이며, 고창국, 토욕혼 등을 멸망시키는 것에 큰 공을 세웠다.
626년에 우후이자 거기장군을 지내면서 고사렴, 울지경덕과 함께 이건성, 이원길을 주살하라고 권고했으며, 당태종이 즉위하자 좌위장군에 임명되었다. 겨울 11월에 우위대장군으로 있다가 병부상서에 임명되어 조정의 정치에 참여해 의논했으며, 634년에는 토욕혼을 공격하면서 적석도총관에 임명되었다. 635년에 이도종이 모용복윤을 격파하고 추격하는 것을 주저하는 장수들에게 설득해서 추격하게 했다.
643년에 이승건의 반란 모의에 가담했다가 발각당하자 참수당했으며, 죽기 전에 폐하(당태종)를 섬기면서 두 나라(고창국, 토욕혼)를 빼앗았으니, 한 명의 아들을 온전하게 제사를 받들게 해 주기를 빈다고 했다. 당태종이 후군집의 처와 아들은 용서했지만 영남으로 귀양보냈다. 이전에 당태종이 이정에게 후군집에게 병법을 가르쳤으며, 이정, 이도종 등은 훗날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여겼다. 이도종이 후군집에 대해 뜻은 크지만 지혜가 작고 스스로 작은 공로를 자부하면서 방현령, 이정보다 아래에 있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그 뜻을 채울 수 없을 것이라 했다.
3. 고창국 정벌 당시의 일화
전술하였듯 후군집은 고창국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후군집이 고창국 정벌을 맡은 계기는 고창국의 국왕이었던 국문태(麹文泰)가 서역의 교역로를 차단한 것이었다. 당태종이 국문태를 불러 이를 견책하려고 하였지만, 국문태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자, 후군집을 교하도 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고창국 정벌을 맡긴다.
후군집의 군대가 적구(磧口)에 당도하였는데, 고창에서는 일이 어떻게 되려는지 국문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인 국지성(麴智盛)이 고창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고창국은 국문태의 죽음으로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는데, 부하 장수들이 후군집에게 고창을 공격하려면 지금이 기회라고 진언하였다. 하지만 후군집은 적국이 상중인 상황에서 공격하는 것 대신 북을 울리고 시위하며 진군하였다. 고창국은 당나라에 농성으로 맞섰지만, 후군집은 공성병기들을 동원하여 고창국의 농성을 물리쳤다.
한편 국지성은 서돌궐의 원군을 기대하였지만, 서돌궐의 원군은 당도하지 않았고, 결국 후군집에게 항복하였다. 후군집은 군대를 나누어 고창을 공략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후군집은 고창을 정벌한 뒤에 죄가 없는 사람들을 노예로 전락시켰고, 재물을 사사로이 취하였다. 게다가 후군집의 부하 장수들도 앞다투어 약탈을 자행하는 바람에, 후군집은 후환이 두려웠지만 굳이 부하 장수들의 약탈을 막지 않았다.
후군집이 장안으로 개선한 뒤에, 관리가 이 사실을 문제삼았고, 후군집은 조사를 받고 투옥되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