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성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李建成
(589 ~ 626)
당나라의 인물. 당고조 이연의 장남. 이연과 정실 태목황후 두씨 소생이다.

2. 생애


성격이 관대하고 간결하면서 술, 여색, 사냥 등을 좋아했으며, 617년 가을 7월 4일에 태원태수에 임명되었다가 618년 1월 22일에 좌원수에 임명되어 왕세충이밀과 싸우자 이를 돕기 위해 좌원수에 임명되어 우원수 이세민과 함께 10만 명을 이끌고 동도로 구원하러 갔다가 4월 24일에 장안으로 돌아갔다.
618년 6월 7일에 황태자에 임명되었고 이건성은 이세민이 공로가 높은 것을 시기했으며, 621년에 유헌성이 부락 수만을 이끌고 변방에서 노략질을 하자 1월 23일에 당고조의 명으로 여러 군사를 통합해 공격했다. 622년에 계호 1천여 명을 붙잡고 그의 추장을 수십 명을 석방하고 관작을 주어 돌아가게 했다가 나머지를 불러 유헌성을 항복시켰다.
그렇지만 거짓으로 주현을 늘려준다고 하면서 성읍을 쌓고 항복한 호족 중 나이 20살 이상인 사람을 모이게 했다가 포위해서 모두 죽였는데, 이 때 죽은 자가 6천여 명이었다.
622년에는 유흑달 공격에 참전했고 624년에는 이세민과의 다툼을 위해 장안과 사방에서 사람을 모집해 동궁의 위사로 삼아 장림문에 주둔해 장림병을 편성했으며, 우우후솔 가달지를 시켜 나예에게 유주의 돌격기병 300명을 징발하고 여러 방에 설치해 동궁의 무관을 보충하려다가 고발당해 당고조에게 책망받았다.
이세민을 불러 짐주로 살해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으며, 진왕부에서 지략이 있어서 꺼릴 사람은 방현령, 두여회라고 해서 그들을 참소해 쫓겨나게 했다. 그러나 626년에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면서 넷째 동생 제왕(齊王) 이원길과 함께 살해당했다. 이건성은 아들이 6명 있었는데, 요절한 태원왕(太原王) 이승종(李承宗)[1]을 제외하고 안육왕(安陸王) 이승도(李承道), 하동왕(河東王) 이승덕(李承德), 무안왕(武安王) 이승훈(李承訓), 여남왕(汝南王) 이승명(李承明), 거록왕(鉅鹿王) 이승의(李承義)는 모두 숙부 이세민에 의해 살해당하고 하나같이 황실의 호적에서도 파였다. 훗날 이세민의 13남 조왕(趙王) 이복(李福)[2]이 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시호는 처음에는 식은왕(息隱王)이었다가 이후 은태자(隱太子)로 변경되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역사의 패자이며 당태종의 사서 개입으로 악의적인 평가를 받는 게 아닌가 의심되기도 한다. 애초에 이건성이 그렇게 못나기만 했다면 위징을 충복으로 삼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애당초 당고조가 황태자에 임명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나 이세민에 비해 군공이 없었던 건 치명적이었다. 혜제같은 경우만 봐도 태자로서 거의 경쟁자가 없었고 그 아비인 고조가 여후를 꺼림칙하게 여겨 혜제 대신 여의를 마음에 둔 적이 있었는데 이때 신하들이 대동단결하여 혜제를 밀자 단념할 수 밖에 없었던 걸 생각하면 이미 이건성이 태자 자리에 있었는데도 이세민이 이건성을 능가하는 힘과 명성이 있었다는 건 그만큼 태자라는 타이틀만으로는 이세민을 밀어낼 수는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건성이 유흑달을 진압하러 간 것만 해도 이세민에 비해 군공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고 이세민의 군공은 사실상 이세민을 그 아비인 이연의 아들이라기보다 동업자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고 그 갭은 결격사유가 없다는 정도로 메워질 수준이 아니었다.
또, 이건성을 태자로 정한 것도 이연이 경쟁자나 다름없는 아들 이세민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게 이연은 여러번 이세민을 내밀 시점에서도 몇번이나 망설이고 다른 카드를 꺼냈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SBS 대하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최정우가 맡았다. 동생 이세민과 달리 그는 당나라 건국 후부터 등장했기 때문에 비교적 등장이 짧은 편이었다. 아이러니 한 건 최정우는 동생 이세민을 맡은 서인석보다 무려 8세나 어리다는 사실.(...) 물론 30대 후반에 죽었다는 걸 감안하면 그래도 배우가 나이가 많지만.

[1] 현무문의 변 이전에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추측된다.[2] 우문씨 소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