훙치허 전투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그 이후
5. 참고 문헌


1. 개요


훙치허 전투(혹은 홍기하 전투)는 1940년 3월 25일 김일성이 이끄는 유격대가 중국 지린성 허룽시 훙치허(紅旗河)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2. 배경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파죽지세로 중국 전선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일본의 남경 점령 이후 중국전선이 조금은 교착되기도 했지만 1938년까지만 해도 전황상으로는 일본군에게 유리해 보였다. 이와 더불어 1938년 일본군은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시기 일본군은 동북항일연군 조직을 와해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1939년 10월부터 일본 관동군은 동남부 치안숙청공작이라는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은 겨울에 눈 속에서 비행기를 띄워 수색하여 유격대를 막다른 지경으로 몰아넣는 작전이었고, 당시 일본 관동군은 김일성을 포함한 독립군 지휘자 5명 각각에게 1만 엔이라는 현상금을 걸었다. 이 상황에서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흩어져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나서야 했다.

3. 전개


이 전투는 피델 카스트로가 몬카다 병영을 공격한 전설적인 전투보다 규모면에서나, 그 비중에서나 훨씬 의미가 큰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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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코드 p.42

일본은 1939년 8월 관동군 6개 연대와 만주군과 경찰병력 2만 명을 동원하여 김일성과 최현이 지휘하는 게릴라 부대를 주요 목표로 6개월간의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당시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를 토벌하고자 했던 마에다 다케시는 조선인이 다수 포함된 다른 특별 경찰대를 이끌고 1940년 초 몇 달 동안 김일성의 유격대를 추격했다. “김일성의 목은 내가 밴다”고 외치고 다녔던 마에다는, “김일성 부대가 허룽현 훙치허의 일본인 목재소를 습격하여 쌀을 탈취해갔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 및 군부대를 출동시켰다. 김일성 부대는 매복해 있다가 반격하기로 결정하고 마에다 부대가 접근해오자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김일성의 유격대가 마에다 부대와의 교전이 있었던 것은 1940년 3월 13일이었다. 어디까지나 마에다 부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마에다 부대는 첫 교전이 있은 뒤로부터 거의 2주 동안 김일성을 뒤쫓았다. 그러던 1940년 3월 25일 김일성 부대가 만든 덫에 빠졌다. 여기서 김일성은 250명의 유격대로 150(혹은 200)명의 일본군 부대와 싸워 승리했다.
당시 훙치허에서 치른 전투에서 김일성의 유격대는 일본군 70~140명을 사살했고, 약 30명 정도의 일본군을 포로로 붙잡았다. 김일성의 유격대는 일본군 토벌대측의 경기관총 5정, 소총 100여 정, 탄알 1만여 발, 무전기 1대를 노획했다. 다만 유격대쪽의 사상자가 얼마나 나왔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어쨌든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기간에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훙치허 전투의 결과는 관동군 헌병대 자료에도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토벌대의 사상자 규모에 대해서는 숫자가 조금 적기는 하나 대체로 인정했고, 현지 주민의 동요 조짐을 보인다고 전했다. 당시 관동군 현병대 측에서 보고한 자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비 주력 150명은 안투 현을 유동중이던 3월 11일 훙치허 삼림경찰대 본부를 습격했다. 현금 1만 1000여 원 및 의복, 식량 다수를 약탈하고 화약고를 폭파하고 주민 145명을 납치해 도주했다. 이 비를 추적 중인 마에다 경찰토벌대는 3월 25일 안투 현 다마루거우 서북방 지구에서 조우, 교전을 두 시간여 하고 이것을 궤주시켰으나, 이 전투에 의해 아빙 전사는 대장 마에다 경정 이하 55명, 부상 26명을 내는 등 그 여세를 경시하기 어렵고 더욱더 경계를 요하는 현상이다. 비습지 부근 주민은 약간 불안 동요의 조짐 있어 헌병은 유언 단속, 민심 선무에 노력하고 있다.

1940년 3월 사상대책월보


4. 그 이후


1940년 3월 일본군 마에다 부대와 싸워 이긴 김일성의 유격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계속 도주해야 했다. 일본군의 토벌작전은 독소전쟁이 일어나기 3개월 전인 1941년 3월 말까지 약 1년 8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훙치허 전투 이후인 1940년 7월 김일성 부대는 340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1940년 9월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게릴라 부대에 대처하기 위해 훨씬 큰 규모의 게릴라 진압부대를 조직했다. 이 시기 후에 북한정권의 지도부가 될 최용건, 김책등이 김일성과 함께 활동했다.[1] 1940년 10월 김일성 부대는 소그룹으로 나누어 국경을 건넜고, 김일성은 훈춘을 떠나 10월 23일 소련으로 갔다.
1941년 2월 김일성과 그의 부대는 해주의 하바롭스크에 정착했다.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 이후인 1942년 8월 동북항일연군 부대는 소련의 붉은군대인 제88특별여단으로 편성됐고, 1945년 8월 소련에서 해방을 맞는다.[2]

5. 참고 문헌


  • 와다 하루끼의 북한현대사, 와다 하루끼, 창비(2014)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현실문화(2017)
  • 간도특설대, 김효순, 서해문집(2014)
  • 김정일 코드, 브루스 커밍스, 따뜻한손(2005)
[1] 즉 김일성, 김책, 최현, 최용건을 비롯한 약 200명의 주요 게릴라 지휘자들은 만주벌판을 셀 수도 없는 한국인의 피로 물들인 무자비한 진압작전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이다.[2] 북한에서는 당시 김일성이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북한으로 진입한 군대는 소련의 붉은 군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