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책

 


'''김책'''
金策
'''본명'''
''' 김홍계 (金洪啓)'''[1]
'''출생'''
1903년 8월 14일
대한제국 함경북도 길성부 학상면 수사리 봉평촌
'''사망'''
1951년 1월 31일(48세)
'''직업'''
군인, 정치가
'''정당'''
중국공산당(1930년-1946년)
조선로동당(1946년-1951년)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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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공산당 초급위원
  • 북조선로동당 대표상임위원
  • 민족보위국 국장(☆☆)
  • 조선인민군 전선사령관(☆☆)
  • 북조선 군사위원회 군사위원
  • 북조선 내각 부수상
  • 북조선 내각 산업상
  •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제 1기 대의원
  • 조선로동당 명예고문, 명예최고위원
  • 예비역 소련군 육군 소령

1. 개요
2. 생애
3. 정치 군사 활동
4. 사망
5. 김책에 대한 김일성의 특별대우
6. 여담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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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건, 최용건, 최현 등과 함께 1930년대 만주빨치산 시절부터 김일성과 함께 한 대표적인 심복. '''북한에서 그의 이름은 이순신[2]을 능가하는 '충성'과 '의리'의 대명사'''로 통한다. 북한 각지에는 그의 이름을 딴 김책시[3], 김책제철소, 김책역, 김책공업종합대학,[4] 근위 서울 김책 제4보병사단 등이 있다.

2. 생애


1903년 함경북도 성진군[5] 학상면 수사리 봉평촌(棒枰村)의 빈농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적에 중국 지린성으로 이주 후[6] 중등학교에 다니던 당시 지하청년단체 활동에 참여하며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일제의 눈에 띄어 몇 번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중국공산당이 조직한 만주 동북항일연군의 무장항일운동에 참여하여 관동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성실하고 입이 무거운 성격이었고, 신중하면서도 온화한 성격으로 중간에서 조정자 역할을 잘해서 당시 속해있던 중국 공산당내에서도 매우 평이 좋아 중국 공산당 내에서의 계급도 김일성보다 높았다. 당시 김책은 소좌(소령), 김일성은 대위였다. 하지만 보천보 전투로 유명해진 9살 연하의 김일성을 이른바 만주빨치산파의 1인자로 추대하고 평생 충성을 바쳤다. 성격이나 행동이 중국에서 많이 존경받는 저우언라이 총리와 비슷했다는 평.
8.15 광복 직후 북한 요인들에 대한 소련의 평가에서도 실질적인 능력이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받은 바 있다.[7] 요지는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이 좋으며 동시에 냉정한 분석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 물론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6.25 전쟁 직전의 당시 한국에 있어서는 김일성, 최용건과 함께 최고의 위험인물'''이었다.

3. 정치 군사 활동


미군정 초기 남한에서 박헌영 등 좌익 세력이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처럼, 광복 직후의 소련군 치하 북한에서도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우익 세력도 상당수 존재했다. 하지만 남한에서 지속된 정치적 혼란과 달리 북한은 신속하게 여론을 통일시키고 정부를 세웠는데, 이런 북한의 수립 과정에서 좌익 계열의 여론을 통합하는데 김책의 공이 크다고 한다.
또한, 북한 지역에 김일성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홍보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김책이다. 광복 직후 북한에 귀국한 김책은 평양, 함흥, 원산 등 북한 주요 도시에 "우리 민족의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 등의 표어를 붙이고 김일성의 업적을 알리는 선전물을 대량 배포하는 등 김일성을 민중들에게 민족의 지도자로 인식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자기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경력도 선배인 김책이 이정도로까지 자신에게 충성을 바쳤으니 김일성으로서는 김책을 빨치산 동료들 중에서도 가장 특별대우할 정도로 고마웠을만도 하다.
북조선인민위원회 당시 민족보위국(인민무력부의 전신)의 국장으로서 활동했다. 당시 북한 정계에서 ''''이름부터가 타고난 '책'략가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정치 공작에 뛰어났다고 한다. 이후 조선인민군을 창설하는데 공헌했고 초대 산업상,[8] 내각 부수상,[9] 등 요직을 역임하며 김일성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image]
1949년 북한의 최대 난관이었던 평원선 개통 후 테이프를 끊는 김책 부수상.[10]
6.25 전쟁에서도 명목상 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북한 수상을 맡으며 상징으로서 평양에 죽치고 있던 김일성에 비해, 김책은 전선사령관으로서 전선 전역에서 실질적인 악명을 떨쳤다. 개전 초기 총참모장 강건과 함께 중서부 전선의 북한군 침공 작전을 계획해 서울을 3일 만에 함락시켰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한 퍼레이드에 직접 참여했다. 이후 충청, 전라 지방을 점령하는데도 성공해 충청북도 충주에있는 수안보에 북한군 전선사령부를 세우지만, 다부동 전투에서의 큰 피해,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유엔군의 기세에 밀려 조치원을 통해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후퇴했다.

4. 사망


6.25 전쟁 당시 한국군UN군이 평양을 향해 진격할 때, 김책 스스로 평양에 남아서 싸우겠다고 자청하여 전선사령관으로서 남았으며, 1951년 1월 31일[11] 죽었다. 지뢰에 폭사한 강건과 더불어 김일성의 동지로서 6.25 전쟁 때 사망한 몇 안되는 사람. 이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매우 괴로워했으며 평생동안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사망 원인으로 전사, 일산화탄소(연탄 가스) 중독, 심근경색, 교통사고, 암살 등이 거론되었으며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과로사(아마도 심근경색인듯)로 기록되어 있다.[12] 김일성이 자기 숙소에서 자고 가라고 했는데, 이를 거절하고 집무실로 가서 철야 업무를 하다가 사망했다고. 이것이 북한에서 발표한 공식적인 사망 원인이다. 한국에서는 항공폭격으로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5. 김책에 대한 김일성의 특별대우


빨치산파의 최연장자이자 혁명 선배인 최용건에게도 뻣뻣하게 굴던 김일성이 김책에게만은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드러냈다고 한다. 혁명 선배들 중에 유독 김책에게만은 존경을 표했으며, 광복 후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어도 길에서 김책과 마주치면 '''먼저 차에서 내려서 김책에게 먼저 깍듯이 인사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후일 자신의 평생 심복이었던 김창봉, 김광협[13] 등도 가차없이 숙청했던 자였건만, 김책만은 특별히 대우했다. 또한 김일성과 이야기를 하면서 반말을 하며 말을 놓을 수 있었던 정말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게다가 김일성한테 그 '''마두(馬頭)'''라는 별명[14]을 부를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일단 그의 사망 직후 김일성이 직접 장례식을 주관했다. 휴전이 성립된 후에는 북한 최고의 영예인 공화국영웅 칭호와 제1급 국기훈장을 수여했으며, 그가 내각 부수상으로 재직하던 당시의 내각 '''집무실 전체를 통째로 옮겨서''' 평양전승기념사적관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몇 년 후 행정구역 개편시 함경북도 성진시를 김책시로, 학성군을 김책군으로 개칭하고[15][16] 북한 최고의 공업대학과 최대의 제철소 이름을 각각 김책공업종합대학, 김책제철소(청진시 소재)로 지었고, 평양에 주둔한 제 4사단을 통칭 '김책 사단'으로 칭하도록 했다. 그리고 김책의 두 아들을 직접 후원하여 만경대혁명학원[17] - 김일성종합대학 - 소련 모스크바대학교 유학-당 간부의 북한 엘리트 코스 테크 트리를 밟게 했다.[18] 이 중 장남 김정태는 국가안전보위부 정찰국 국장이었으나 1.21사태의 실패로 숙청당했다. 하지만 차남 김국태는 요직을 두루 거쳐 김일성이 살아있던 90년대 초반 당 비서를 역임했고 2000년대 김정일을 보좌했으며, 2010년 김정은의 차기 내각 명부에도 이름을 올리며 2013년 12월에 노환으로 죽을 때까지 요직에 있었다. 김국태의 딸[19] 김문경 또한 2017년 7월 기준으로 조선로동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배우자는 외무성 국장 리흥식[20]으로 확인되었다. 그 김정일이 생전에 '''김정일이 김국태에게 사석에서 '형님'으로 존칭했다'''고 하니, 김책 일가는 그야말로 3대를 잇는 김씨 조선의 최측근 심복이자 로열 패밀리의 일원인 셈이다.
김일성의 사무실에는 수십 년 동안 커다란 금고가 하나 있었는데, 모두들 그 안에는 굉장한 보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19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한 후 김정일이 그 금고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딱 하나, '''누렇게 변한 옛날의 김책과 자신이 찍은 사진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21] 스탈린부하린의 일화와도 비슷하다.
이와 비슷한 일화로 역시 김일성 사망 당시 주석궁의 집무실 창가에는 그가 항상 쓰던 망원경[22]이 놓여있었다고 한다. 그 창가로 밖을 내다보면 대성산혁명렬사릉[23]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생전의 김일성은 망원경을 가지고 이 곳을 자주 둘러보며 항일 빨치산 시절을 추억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김정일에게 유언 비슷하게 '''내가 죽으면 동지들과 함께 혁명열사릉에 묻어달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김정일은 아버지의 유언을 외면하고 김일성의 묘를 금수산태양궁전에 건립하여 세습제 정당화 선전에 써먹었다. 어쨌간에 무소불위의 악당 공산 독재자 김일성에게 인간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는 몇 안되는 에피소드들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북한에서 '열심히 하면 수령님께서 알아주신다' 운운하는 찬양 프로파간다에 이 이야기를 너무 많이 써먹은 나머지 식상해졌으며, 이상현실과 동떨어져 있기에 그저 동화의 일종이나 지나간 옛 일 정도로 여겨지는 듯하다. [24]

6. 여담


  • 한국의 미디어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지만 반공드라마에 등장해도 하나같이 빌어먹을 빌런으로 나온다. 최용건에 비해서는 의외로 저돌적이고 악역전문 배우들이 나오는데... 극우세력이 김일성을 미화한다면서 반발해서 13회 만에 조기종영 당한 KBS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25]에서조차도 김책의 성격은 고스란히 김흥기가 주연한 최용건이 가져가고 그냥 저돌적인 김일성 빠돌이로 묘사되고 있다.
  • 제1공화국(드라마)에서는 백인철이 맡았다. 뭘 해도 똑부러지게 할 줄 아는 게 없는 김일성을 어떻게든 커버해주려고 마냥 애쓴다. 그런 만큼 김일성도 김책을 제대로 사부님처럼 모신다.
  • 야인시대에선 태조 왕건에서 능애역으로 등장했던 전병옥 씨가 김책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비중 있는 역할은 아니고, 82회에서 1컷 등장해서 대사 몇 마디 하는 게 전부이긴 하다(나머지 대사도 해설에 의해 묵음 처리). 직접 등장은 아니지만 인민군 장교로 변장한 김기홍이 김책의 부하를 사칭하는 장면이 나온다.
  • 과거 남로당 출신 전향자들의 경우 김책의 죽음은 김책의 전공을 시샘한 김일성의 암살(...)이라고 말하긴 하는데 이건 그들의 이야기일 뿐 이고 80년대만 해도 그냥 비행기 폭격에 맞아 전사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책의 장남 김정태의 아내가 러시아인이었는데 북한 당국에 의해 강제 이혼 당했다. 1950년대 후반 김정태는 소련 모스크바 대학 유학 시절부터 사귄 러시아인 아내를 국내로 데려왔다. 그런데 김정태가 출장을 간 사이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소련으로 추방당했고, 이후 가족은 다시는 재회하지 못했다.[26] 당시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에 의해 스탈린주의가 배척되어 소련과 북한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고, 소련으로부터 받던 원조가 격감한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8월 종파사건 이후 국가스탈린주의가 강화되어가던 북한에서 이 러시아인 아내들이 남편에게 '못된 물'을 들인다고 북한 당국에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국가스탈린주의하의 북한 체제를 비판하던 작가 소만일, 시인 김철 등도 러시아인 아내가 있었는데 비슷한 전철을 밟아야 했다.
  • 북한 영화에서는 주로 사람좋고 인상좋은 동네 아저씨같은 캐릭터로 나온다. 북한에서 선전하는 대로 '"머리 좋고, 인심 좋은 수령님 심복"'의 캐릭터를 재현하기 위해 많이 신경을 쓰고 있다. 간혹 영화상에서 김일성이 그에게 자문을 구하는 장면도 나올 정도다.

7. 관련 문서



[1] 중국에서 가명으로 중국식 이름은 루오둥시엔(羅東賢, 나동현) [2] 도서정리사업 이후 북한에서는 '리순신'조차도 '리씨 조선이라는 봉건 국가에 충성한 전근대적 영웅'으로 깎아내린다. [3] 원래 '''성진시'''였으나, 1950년대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당시 김책을 기린다는 목적으로 최고인민회의에서 만장일치로 1953년 김책시로 개명되었으며, 여기에 소재한 성진제철소, 성진역도 김책제철소, 김책역으로 같이 개명되었다. 상세한 것은 김책시 문서 참조.[4] 참고로 김책공대는 김책시가 아니라 평양에 있다.[5] 북한 정권이 들어선 현재는 김책시로 개칭[6] 차후 김일성 일가도 지린성으로 이주.[7] 심지어 소련군이 '무적의 투사 김일성 장군'으로 내세우려던 것이 김성주가 아닌 김책이었다는 카더라도 있었다.[8] 현재 대한민국의 '산업통상자원부장관'에 해당하는 직책.[9] 현재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에 대응하는 직책.[10] '''뒤에 데로형 전기기관차가 보인다.'''[11] 13일, 30일이라는 설도 있다.[12] 백선엽장군의 6.25 당시를 기록한 회고록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에서도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3] 김광협은 6.25 전쟁 때의 실책으로 잠시 좌천당하긴 했지만 숙청까지 당하진 않았다. 그가 숙청된 건 1970년대 초반이다.[14] 김일성이 원래 마적단이라는 떼강도단 두목 출신이라서 김일성의 프로파간다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별명이다.[15] 이후 김책군이 김책시에 통합되었다.[16] 북한의 시 / 군 단위 이상의 행정구역에서 사람 이름을 딴 지명은 김형직군, 김정숙군, 김형권군, 김책시 넷 뿐 이다. 참고로 김형직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정숙은 김일성의 사실상(?) 정식(둘째) 아내로 김정일의 어머니, 김형권은 김일성의 숙부다. '''김일성 일가가 아닌데도 이 정도의 대우를 받는 인물은 없다.''' 다만 리 단위에서는 몇몇이 더 있는데, 은덕군 아오지읍을 학송로동자구로 개칭한 것이 그 예. 김학송에서 딴 것이다.[17] 항일빨치산과 6.25 전쟁 전사자들의 유가족을 위한 교육기관. 인민무력부가 직접 관리하며 현재 북한 최고의 초중고교 학원으로 이 학원 졸업생은 당 초급 간부 임용이나 김일성종합대학을 위시한 중앙대학 입학이 보장된다.[18] 중국을 움직이는게 공산당 초창기 지도자들의 2, 3세로 이루어진 태자당이듯이, 북에는 빨치산과 한국전참전자들의 2, 3세들이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서 당 - 정 - 군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들이 현재 북을 떠받치는 기둥이다.[19] 1남 1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들 김광일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다.[20] 남북고위급실무자회담 등에서 자주 얼굴을 비추고 있으며, 2017년 6월 인권대사라는 직함으로 오토 웜비어의 죽음에 관해 해명하기 위해 UN에 파견되는 중책을 맡았다.[21] 아마 영화 '시민 케인'를 배껴서 선전용으로 짜집기 한듯. 만화 '떠돌이용병 아레스'에 이와 같은 에피소드가 삽입돼 있다. 작가가 이 얘기를 알았는지는 불명.[22] 정확히는 '포대경'으로, 전산 자동화 도입 이전 근대의 포병이 탄착 예상 지점을 계산하기 위해 사용했던 관측도구이다.[23] 항일 빨치산과 6.25 전쟁 유공자(어디까지나 북한 입장에서)들이 합사된 북한판 국립현충원.[24] 근데 사실 김일성과 혁명렬사릉 이야기는김정일과 북한 정권 입장에선 도움이 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 어쨌든 김일성의 의사를 김정일이 무시한 것이므로 - 정권 차원에서 조작한 프로파간다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25] 이 드라마에서 전광렬이 김일성으로 나오는데, 훗날 북한을 방문해서 자기가 너무 멋져서 강제종영 당했다고 인터뷰 한 적이 있다.[26] 김정태가 불과 10여년 후에 국가안전보위부 정찰국장이라는 요직에 임명되었고, 60년대 소련과 중국이 중소분쟁으로 갈라선 후 소련 - 북한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회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