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세 중좌
1. 개요
일본군 해군의 군인인 히로세 타케오(広瀬武夫; 1868 ~ 1904)가 러일전쟁에서 사망한 사건을 소재로 하는 노래. 원 계급은 소좌이나 전사 후 중좌로 추서되었다. 일본의 '문부성창가(文部省唱歌)' 120곡 중 하나이다. 지금의 일본 소학교(小学校)의 전신인 심상소학교(尋常小学校) 음악 교과서에 수록되었으며, 당시 널리 보급되었다.
2. 배경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있던 여순항을 낡은 화물선을 자침(自沈)시켜 폐쇄시키려던 여순항 봉쇄작전이 3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세 차례에 걸친 봉쇄작전은 전부 다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였으나, 이후 뤼순항에 머무르고 있던 러시아 함대는 황해 해전(1904년) 패배이후 함포도 떼어 지상 포대로 돌리고 수병도 육상 전투 부대로 전환하는 등, 사실상 소멸한다. 이후 뤼순은 203고지에 이어 일본군에 함락된다.
러일전쟁 당시 히로세 소좌는 봉쇄작전에 참가하였다. 2차 봉쇄작전에서는 화물선 후쿠이마루(福井丸)를 이끌고 참가했는데, 러시아 구축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자침해야 할 위치에서 자침하지 못하고 침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퇴선하기 전 부대원들을 확인하기 위해 점호를 하는데, 자폭용 폭약을 점화하러 선창(船倉)으로 내려간 스기노 마고시치(杉野孫七) 중사가 보이지 않았다. 히로세 소좌는 먼저 부하들을 보트에 태우고, 자신은 배 안을 샅샅이 뒤지며 스기노 중사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후쿠이마루에서 퇴선하기 위해 구명보트에 옮겨 타려고 할 때, 뤼순항의 해안포에서 발사한 포탄 중 하나에 맞아 전사했다. 겨우 부하들이 그의 살점을 가져와 스기노 중사의 유품(머리카락이나 개인 소지품)과 함께 장사지냈다고 한다. 시신은 5일 후, 후쿠이마루호 뱃머리 부근에 떠있는 것을 러시아군이 발견해 매장하였다. 이후 일본 최초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으며, 1912년에는 문부성창가로서 그를 기리는 노래인 <히로세 중좌>가 심상소학교(尋常小学校) 4학년의 음악 교과서에 처음으로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