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순
旅順 / 여순 / Lüshun
중국의 옛 도시 이름. 현재는 다롄시의 구 중 하나다.
영어로는 Port Arthur(포트 아서), 러시아어로는 Порт-Артур(포르트-아르투르). 19세기 이 곳에 정박한 영국군함 함장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만주의 요동반도 끄트머리에 자리잡았다. 주변에 있는 고지가 보호하는 후미진 만(灣)이 있어 천연의 항구 입지를 갖추었으며, 황해와 발해만을 감시,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일찌기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가치를 주목받았다.
대항해시대2에서 나온 보급항인 루이슐항이 이곳이다.
19세기 말 청나라 북양함대의 기지가 설치되었다가, 1895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점령된다. 이 때 현장을 점령한 일본군 여단장이 훗날 같은 장소에서 곤욕을 치르게 되는 노기 마레스케.
이 때 여순에서는 훗날의 남경 대학살 사건을 연상케 하는 대학살이 진행되었는데,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으나 그 발단 및 전개과정이 너무나도 비슷하다. 항복 후 민간인으로 변장한 청군 병사들이 저항했거나 또는 그렇다는 핑계를 대고 일본군이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 이것이 도시 전체에서 수일에 걸쳐 진행된 것을 상부에서 무시하거나 반쯤 조장한 것. 이때 현장에서 학살을 목격한 미국인 특파원에게 일본 외교관이 정말로 학살(Massacre)이 있었느냐고 묻자 그 특파원은 학살이 아니라 '''도살(Butchery)'''이었다고 대답했을 정도로 참혹했다. 최대 희생자는 3만까지 추정할 수 있으나, 일단은 5천 명 내외가 정설이다.
청일전쟁 종전 후 여순, 대련을 포함한 요동반도 남단을 일본이 조차(租借)하려 했으나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압력으로 포기하니, 이것이 삼국간섭이다. 러시아가 일본에 압력을 가한 건 남하정책에 몰두하던 러시아 또한 부동항인 이 곳을 탐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1898년, 러시아와 청나라의 비밀 협정에 의거하여 여순은 대련과 함께 러시아의 조차지가 되어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실질적인 모항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여순이야말로 러시아가 태평양에서 얻은 최초의 부동항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여순에는 군항과 항만방어용 요새가 건설, 확장되니 머잖아 시신으로 산을 이루고 피로 강을 이루는 참극의 현장이 된다. 10년 뒤 일본군에게는 이 곳을 다시 노렸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른바 '''사망 플래그''' 성립(…).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처음엔 러시아 함대를 봉쇄할 목적에서 여순은 그저 포위의 대상이 되었지만, 발트 함대가 다가오면서 통수부에서 여순을 함락시키라고 독촉하기 시작하고, 결국 일본군은 뤼순 공방전을 시도한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으로. 참고로 참호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접근하는 보병에게 난사하는 전술은 이로부터 10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의 유럽전선에서 대규모로 재연된다. 전쟁의 교훈을 망각한 지휘부 때문에 죽어간 병사들 지못미(…).
러일전쟁 당시 여순은 최초로 상정한 수준의 요새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성 요새였다. 애초에 요새화의 계획된 완료시기부터 1909년이었으니 사실상 이제 막 요새 건설의 주춧돌을 놓은 데 불과했던 것.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고 여순이 공격받는 6개월 동안 러시아 공병대는 정말 미친듯이 시설들을 보강하여 강력한 요새로 변모시켰다. '''3년 동안 건축한 것보다 6개월 동안 지은 게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노가다였다고.
본디 항구로서 더 적합한 곳은 여순이 아니라 대련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측은 대련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자재를 쌓아놨지만 방어시설은 고려하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군은 여순 항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공격한 후 바로 대련을 점령, 일본군의 보급항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여순과 요동반도를 연결하는 유일한 육상통로인 금주(金州)는 청나라 시절부터 쌓은 성곽과 참호, 요새시설들이 있었고 러시아 측의 전후분석에서도 '소수병력으로도 한달은 버틸 수 있는 요충지' 로 여겨지던 곳이였으나 금세 점령당했다.
다만 일본군 역시 여순항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지리적인 점이야 이전에 이미 한번 공격한 적이 있으니 정보가 있었지만 러시아군이 어떤식으료 요새화를 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것. 또한 여순은 초기 공격 대상이 아니었고 해군에 의한 함대 무력화와 봉쇄작전만 행하려다 나중에서야 급하게 공략대상이 되다보니 준비도 소홀했다. 결국 일본군은 시설에 대한 정보도 없고 준비도 미흡한 채로 급하게 여순 공략에 나섰고,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여순을 비롯한 주변지역 - 요동반도의 첨단 부분. 10년 전 삼국간섭으로 포기해야 했던 곳을 차지한 일본은 현지를 '''관동주(關東州)'''라 일컫고 관동도독부(이후 관동주청으로 개편)를 설치하여 만주 진출의 발판으로 삼는다. 이곳에 주둔한 군대를 '''"관동군"'''이라 한다.
관동주는 홍콩처럼 조차지로서, 99년 기한으로 청나라[1] 로부터 빌린 땅으로 2004년에는 돌려 주기로 되어 있었다. 당연히 영국이 홍콩이 영원히 자기 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처럼[2] 일본도 관동주도 영원히 자기 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99년은커녕 40년 만에 관동주를 토해내야 했다.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 말기에 소련은 만주국을 기습 침공한다. 과거 러일전쟁에서 수개월간 격전을 치른 끝에 빼앗긴 여순을 이미 정예사단이 다 빠져 잡병이 된 관동군을 몰아내고 소련이 접수하여 예전처럼 해군기지로 이용하려다 1955년 중국에 반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년 뤼순과 다롄을 합쳐 뤼다(旅大 = '''旅'''順 + '''大'''連)라 하였으나, 1981년 뤼다를 다롄으로 변경하면서 다롄시의 구(區)가 되었다. 현재 행정구역명은 다롄시 뤼순커우(旅順口) 구.
안중근이 순국한 '''여순 감옥'''이 이곳에 있다. 더불어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든지 '''묘청의 서경 천도가 천년간 우리 역사상 중대 사건'''이었다는 등의 역사관으로 알려진 사학자이자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을 잘 보여 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도 이곳에서 순국했다.
1. 개요
중국의 옛 도시 이름. 현재는 다롄시의 구 중 하나다.
영어로는 Port Arthur(포트 아서), 러시아어로는 Порт-Артур(포르트-아르투르). 19세기 이 곳에 정박한 영국군함 함장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만주의 요동반도 끄트머리에 자리잡았다. 주변에 있는 고지가 보호하는 후미진 만(灣)이 있어 천연의 항구 입지를 갖추었으며, 황해와 발해만을 감시,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일찌기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가치를 주목받았다.
대항해시대2에서 나온 보급항인 루이슐항이 이곳이다.
2. 역사
2.1. 청일전쟁
19세기 말 청나라 북양함대의 기지가 설치되었다가, 1895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점령된다. 이 때 현장을 점령한 일본군 여단장이 훗날 같은 장소에서 곤욕을 치르게 되는 노기 마레스케.
이 때 여순에서는 훗날의 남경 대학살 사건을 연상케 하는 대학살이 진행되었는데,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으나 그 발단 및 전개과정이 너무나도 비슷하다. 항복 후 민간인으로 변장한 청군 병사들이 저항했거나 또는 그렇다는 핑계를 대고 일본군이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 이것이 도시 전체에서 수일에 걸쳐 진행된 것을 상부에서 무시하거나 반쯤 조장한 것. 이때 현장에서 학살을 목격한 미국인 특파원에게 일본 외교관이 정말로 학살(Massacre)이 있었느냐고 묻자 그 특파원은 학살이 아니라 '''도살(Butchery)'''이었다고 대답했을 정도로 참혹했다. 최대 희생자는 3만까지 추정할 수 있으나, 일단은 5천 명 내외가 정설이다.
청일전쟁 종전 후 여순, 대련을 포함한 요동반도 남단을 일본이 조차(租借)하려 했으나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압력으로 포기하니, 이것이 삼국간섭이다. 러시아가 일본에 압력을 가한 건 남하정책에 몰두하던 러시아 또한 부동항인 이 곳을 탐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1898년, 러시아와 청나라의 비밀 협정에 의거하여 여순은 대련과 함께 러시아의 조차지가 되어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실질적인 모항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여순이야말로 러시아가 태평양에서 얻은 최초의 부동항이었기 때문이다.
2.2. 러일전쟁
이후 여순에는 군항과 항만방어용 요새가 건설, 확장되니 머잖아 시신으로 산을 이루고 피로 강을 이루는 참극의 현장이 된다. 10년 뒤 일본군에게는 이 곳을 다시 노렸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른바 '''사망 플래그''' 성립(…).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처음엔 러시아 함대를 봉쇄할 목적에서 여순은 그저 포위의 대상이 되었지만, 발트 함대가 다가오면서 통수부에서 여순을 함락시키라고 독촉하기 시작하고, 결국 일본군은 뤼순 공방전을 시도한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으로. 참고로 참호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접근하는 보병에게 난사하는 전술은 이로부터 10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의 유럽전선에서 대규모로 재연된다. 전쟁의 교훈을 망각한 지휘부 때문에 죽어간 병사들 지못미(…).
러일전쟁 당시 여순은 최초로 상정한 수준의 요새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성 요새였다. 애초에 요새화의 계획된 완료시기부터 1909년이었으니 사실상 이제 막 요새 건설의 주춧돌을 놓은 데 불과했던 것.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고 여순이 공격받는 6개월 동안 러시아 공병대는 정말 미친듯이 시설들을 보강하여 강력한 요새로 변모시켰다. '''3년 동안 건축한 것보다 6개월 동안 지은 게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노가다였다고.
본디 항구로서 더 적합한 곳은 여순이 아니라 대련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측은 대련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자재를 쌓아놨지만 방어시설은 고려하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군은 여순 항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공격한 후 바로 대련을 점령, 일본군의 보급항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여순과 요동반도를 연결하는 유일한 육상통로인 금주(金州)는 청나라 시절부터 쌓은 성곽과 참호, 요새시설들이 있었고 러시아 측의 전후분석에서도 '소수병력으로도 한달은 버틸 수 있는 요충지' 로 여겨지던 곳이였으나 금세 점령당했다.
다만 일본군 역시 여순항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지리적인 점이야 이전에 이미 한번 공격한 적이 있으니 정보가 있었지만 러시아군이 어떤식으료 요새화를 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것. 또한 여순은 초기 공격 대상이 아니었고 해군에 의한 함대 무력화와 봉쇄작전만 행하려다 나중에서야 급하게 공략대상이 되다보니 준비도 소홀했다. 결국 일본군은 시설에 대한 정보도 없고 준비도 미흡한 채로 급하게 여순 공략에 나섰고,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2.3. 관동군의 시작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여순을 비롯한 주변지역 - 요동반도의 첨단 부분. 10년 전 삼국간섭으로 포기해야 했던 곳을 차지한 일본은 현지를 '''관동주(關東州)'''라 일컫고 관동도독부(이후 관동주청으로 개편)를 설치하여 만주 진출의 발판으로 삼는다. 이곳에 주둔한 군대를 '''"관동군"'''이라 한다.
관동주는 홍콩처럼 조차지로서, 99년 기한으로 청나라[1] 로부터 빌린 땅으로 2004년에는 돌려 주기로 되어 있었다. 당연히 영국이 홍콩이 영원히 자기 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처럼[2] 일본도 관동주도 영원히 자기 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99년은커녕 40년 만에 관동주를 토해내야 했다.
2.4. 태평양 전쟁 후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 말기에 소련은 만주국을 기습 침공한다. 과거 러일전쟁에서 수개월간 격전을 치른 끝에 빼앗긴 여순을 이미 정예사단이 다 빠져 잡병이 된 관동군을 몰아내고 소련이 접수하여 예전처럼 해군기지로 이용하려다 1955년 중국에 반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년 뤼순과 다롄을 합쳐 뤼다(旅大 = '''旅'''順 + '''大'''連)라 하였으나, 1981년 뤼다를 다롄으로 변경하면서 다롄시의 구(區)가 되었다. 현재 행정구역명은 다롄시 뤼순커우(旅順口) 구.
3. 한국과의 관련
안중근이 순국한 '''여순 감옥'''이 이곳에 있다. 더불어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든지 '''묘청의 서경 천도가 천년간 우리 역사상 중대 사건'''이었다는 등의 역사관으로 알려진 사학자이자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을 잘 보여 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도 이곳에서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