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고지

 


1. 개요
2. 영화 二百三高地

203高地 (にひゃくさんこうち、にまるさんこうち)

1. 개요


뤼순 공방전 당시 최대 격전지. 원래 이령산으로 불렸다. 자세한 건 뤼순 공방전 참조.

1.1. 노기 마레스케


203고지에서만 약 1만 명, 뤼순 전체에서 약 3만 명의 병사가 죽었다. 죽은 병사의 유족들은 분노하여 사령관 노기를 죽일듯이 달려들었으나 노기 대장도 전쟁에서 아들'들'을 잃어 어쩔 수 없이 유야무야 넘어가기도 하였다. 다만, 노기 마레스케 탓을 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노기 마레스케나 이치지 참모장의 책임론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제2태평양함대가 오기 전에 뤼순을 함락해야 한다는 상부의 압박 등도 있었기 때문에 시간에 쫓긴 점도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뤼순 공방전은 어떤 의미로 1차대전에서 일어났던 참호전의 전조라 할 수 있는데 서구 열강들도 제대로 체험 못해 본 최신 전장을 먼저 접하게 된 점도 참작할 수 있다. 실제로 뤼순 공방전을 참관한 외국 장교들은 잘 정비된 요새의 특성상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건 당연시했다고 한다.
노기 자신도 수많은 젊은이를 죽인 책임을 통감하고 할복이라도 하려 했으나 메이지 덴노가 "내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돼!" 라고 만류하여 관두었고, 1912년 메이지 덴노가 죽자마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 그것도 부인과 함께 저 세상으로 떠났다. 이 일화는 나중에는 무사도의 표본으로 미화되었지만, 정작 사건이 일어난 당일, 즉 아직까지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기 전이었던 당시 일본에서는 ''''저런 고위직 인사가 그런 전근대적인 짓을 하다니?'''' 하면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참고로 노기 대장은 군인으로서의 실력은 의문이 있지만 개인적인 모습은 모범적이었다 한다. 거기다가 러시아 군 포로들을 신사적으로 대우해서 서방 기자들은 노기를 칭송했다.
[image]
[image]


1.2. 기타


임팔 작전에서도 203고지가 재현될 뻔 했다. 영국군의 요새를 뚫지 못하자 '''시체로 산을 메워''' 그것을 엄폐물로 삼아 진지를 공략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크림 전쟁 당시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솜 전투,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이 비슷한 일을 벌였다. 뭐, 솜 전투와 갈리폴리 전투는 포격으로 제압하고 보병이 전진한다는 '이론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방법이기는 했다. 문제는 솜 전투에 영국군의 포격이 엉망이었고 갈리폴리는 포병과 보병의 손발이 안 맞아서 망했지만. 실제로 솜 전투에서 포병과 보병의 협동이 제대로 이루어진 경우에서는 큰 피해 없이 전선 돌파에 성공한 사례도 드문드문 있기 때문에 작전이 나빴다거나 영국군 수뇌부가 멍청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상 참호전의 무인지대를 돌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다만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달성이 매우 어려운 작전이었다는게 문제였다. 그러나 대전 후반기로 가면서 영국군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성공적인 작전 수행이 가능해졌다.

2. 영화 二百三高地


1980년에 뤼순 공방전을 배경으로 나온 영화. 203고지(영화)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