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루텐베르크 전투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영국-하노버 연합군
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8년 10월 10일 작센 루텐베르크 마을 인근에서 프랑스군과 영국-하노버 연합군과 맞붙은 전투. 프랑스군이 수적 우위를 앞세워 연합군을 격파했다.

2. 배경


1758년 9월, 프랑스군은 헤센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 수비즈 공작 샤를 드 로앙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아인베크로 진격하자, 연합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헤센을 구원하기 위해 크리스토프 폰 오베르크 휘하 1만 4천 명을 파견했다. 수비즈 공작은 적의 구원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괴팅겐에서 물러났고 이후에는 카셀에서 물러났다. 연합군은 그를 추격했고, 곧 양군은 카셀 근처에서 대치했다. 10월 3일, 오베르크 장군은 콩타드 후작 루이 조르주 에라스므 소속의 강력한 프랑스군 분대 2개가 수비즈 공작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오베르크는 일단 후퇴하기로 결정하고 그날 밤 풀다를 건너 잔더스하우젠 고원에 진을 쳤다.
10월 9일, 콩타드 후작 소속의 2개 분대는 풀다를 건너 연합군 앞에 전열을 형성한 수비즈 공작과 합류했다. 10월 9~10일 밤, 오베르크 장군은 적이 아군보다 훨씬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잔더스하우젠 고원에서 퇴각하여 란트웨르하겐 마을을 가로질렀다. 이때 그는 잔더스하우젠 고원에 분견대를 남겨둬 주력군의 퇴각을 엄호하게 했다. 그는 풀다를 건너 뮌덴으로 가려 했다. 한편 수비즈 공작은 적이 후퇴하고 있다는 걸 모른 채 잔더스하우젠 고원에 주둔한 적을 무찌를 계획을 고안했다. 그는 프랑수아 드 샤베르의 군단에게 적 좌익을 공격하고 피츠제임스 장군의 군대는 적 중앙을 공격하고, 자신은 잔더스하우젠의 고원에서 적 우익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0월 10일 새벽 3시 샤베르 중장과 작센의 프란츠 크사버(일명 크사버 왕자)는 연합군 좌측면을 공격하기 위해 8km에 달하는 행군을 시작하여 풀다의 숲이 우거진 지역을 통과했다. 여기에 피츠제임스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중앙으로 진군했고, 수비즈 공작 본인은 드 브로이 분대, 드 라니언 분대, 그리고 드 카스트리스 분대를 적 우익으로 파견했다. 얼마 후, 브로이 공작은 잔더스하우젠 고원에 어떤 적군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수비즈 공작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수비즈 공작은 이 보고를 듣고 자신의 군단과 피츠제임스의 군단을 6개 대열로 편성하여 베텐하우젠의 개울을 건넜다. 그 후 그는 6개의 대열을 8개 대열로 다시 배열하고 적을 추적했다. 한편 브로이 공작은 란트웨르하겐 마을로 행진했으나 그곳에서도 적이 없는 걸 확인했다.
이때 후방에 남겨둔 분견대로부터 브로이 공작의 군대가 자신의 군대 뒤에 바짝 따라오고 있다는 보고를 접한 오베르크 장군은 이대로 계쏙 뮌덴을 향해 진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루텐베르크 마을을 배후로 삼고 일전을 치르기로 결심했다. 중앙에는 2개 대열의 보병대를 배치하고 기병대를 우익에 배치했으며 좌우익에 기병대를 배치했다. 연합군 우익은 숲과 고지대에 배치되었고, 루텐베르크 마을은 연합군 중앙 뒤에 있었으며, 연합군 좌익은 평원에 배치되었다. 연합군의 전방에는 깊고도 넓은 협곡이 펼쳐져 있었고 그 바닥에는 습지가 깔려 있었다. 또한 오베르크 장군은 루텐베르크 인근 고지에 야전포대를 설치하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프랑스군이 당도하면서, 제1차 루텐베르크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하노버 연합군


  • 사령관: 크리스토프 폰 오베르크
  • 병력: 14.000명

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


오전 7시경, 브로이 공작은 적의 위치를 정찰한 후 수비즈 공작에게 적군이 루텐베르크 마을 인근에 포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에 수비즈 공작은 직접 브로이 공작과 합류한 뒤 프랑스군의 진격 속도를 높이도록 명령했다. 포병을 앞세운 프랑스 군대는 질서정연하게 전진하여 얼마 후 적을 마지보고 배치되었다. 좌익에는 보병대가 풀다의 숲과 비탈길 위에 배치되었다. 또한 중앙은 란트웨르하겐 마을의 울타리를 전방에 세워놓고 발드너 보병 여단과 9개의 뷔르템베르거 대대가 배치되었다. 로앙 보병여단은 좌익과 중앙 사이의 연결 지점에 포진했고 경기병여단과 다른 뷔르템베르거 부대는 로앙 보병여단 뒤에 배치되었다. 피츠제임스 장군의 보병대는 란트웨르하겐의 우측에 배치되어 벤터데까지 연장되었다. 그리고 피츠제임스 휘하의 기병대는 중앙의 제3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벤토데 마을에 도착한 프랑수아 드 샤베르는 좌익 부대를 벤토데의 우편에 배치했고 우익을 시켈린슈타인에 두 줄로 배치했다. 또한 그는 그의 기병대를 제3전선에 배치시켰다.
오후 1시, 프랑스군 전체가 배치를 완료했다. 그 후 한 시간 뒤인 오후 2시, 수비즈 공작은 샤베르 중장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샤베르는 전선에 배치된 프랑스 포병대에게 적을 향해 포격을 퍼붓게 하고는 자신은 세 개의 군단으로 이뤄진 병사들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진군했다. 이때 연합군은 그들의 포병 대부분이 아직 뮌덴으로 향하는 도로에 있어서 적의 포격에 거의 대응할 수 없었다. 수비즈 공작은 곧이어 피츠제임스 장군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다. 오베르크 장군은 이에 맞서 자스트로 소장에게 우익에서 보병 2개 대대와 4개 기병대대를 분리시켜 좌익을 보강하라고 지시했다. 오후 2시 45분, 샤베르 장군의 군단이 연합군 좌측면을 향해 진격했다. 자스트로 소장의 보병대대는 총검으로 그런 프랑스군을 저지해 숲에서 물러나도록 가용했다. 오베르크는 샤베르의 군단이 평원에 배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두번째 대열의 4개 보병 대대와 4개 기병대대를 파견해 자스트로 소장을 돕게 했다. 또한 그는 연합군 좌익과 자스트로 군단 사이의 얕은 숲 후방에 2번째 전선의 2개 보병대대와 드래곤 기병 2개 대대를 배치했다.
오후 4시, 샤베르는 42문에 달하는 대포들로 자신을 가로막은 자스트로 군단에 대한 포격을 개시했다. 그후 기병대가 출격해 전방과 측면에 있는 자스트로 보병대를 공격해 붕괴시켰다. 이에 연합군 좌익 기병대가 이를 막기 위해 진군했으나 계곡과 개울로 인해 지체되었다. 그 사이 샤베르 군단 소속의 피에몬트, 카스텔라, 알자스 보병 여단이 재빨리 진군하여 곧 반대편 비탈에 이르렀고, 포병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연합군 좌익 군단이 샤베르 앞에서 물러나자, 그의 기병대는 평야에 배치되었다. 그후 연합군 기병 8개 대대가 질서정연하게 전진하여 퇴각하는 안군을 엄호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이후 양측 기병대는 다섯 번이나 격돌했으나 연합군 기병대는 수적 열세에 밀려 번번이 밀렸다.
한편 샤베르의 작센 군단이 연합군이 여러 대의 포병 진지를 설치해놓은 스토드베르크 언덕을 급습했다. 그들을 지휘한 크사버 왕자는 척탄병들을 몸소 지휘하여 정면으로 공격했다. 몇 번의 격전 끝에 작센군은 스토드베르크 언덕을 장악했고 연합군 대포 6발을 나포했다. 연합군은 언덕을 되찾고자 역습을 감행했으나 작센군의 거센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때 나머지 프랑스군은 연합군 제1전선으로 돌진했다. 이로 인해 상황이 위급해진데다 아군 좌익이 무너지자, 오베르크 장군은 곧 뮌덴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오베르크 장군은 퇴각을 엄호하기 위해 3~4개의 보병대대를 후미에 세웠다. 프랑스군은 후퇴하는 적을 추격했으나 어둠이 서서히 깔리자 후퇴했다. 연합군은 대부분의 대포를 뮌덴으로 가는 도중에 버렸고, 여러 연합군 병사들이 숲 속에서 프랑스군에게 생포되었다. 이리하여 1차 루텐베르크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5. 결과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3,000~4,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8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으며 28개의 대포를 잃어버렸다. 반면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600명에 불과했다. 이로서 지난해 로스바흐 전투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했던 그는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고 원수 직책을 부여받았다. 또한 프랑수아 드 샤베르는 이 전투에서 맹활약한 공로로 프랑스군 최고 훈장인 '그랑 크루아(Grand Croix)'를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