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드 샤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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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장성.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샤베르는 1696년 2월 2일 베르됭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베르됭에서 농장과 방앗간을 운영하는 지역 영주로, 재산은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었지만 왕실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샤베르는 1706년 11살의 나이로 베르됭 수비대의 부관 직을 구입한 어머니 덕분에 장교로서 입대했다. 이후 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던 1706년부터 1710년까지 베르됭의 수비대에 남아서 데 카르네 장군을 보좌했고 1710년 12월 9일 소년 보병대 준령으로 배속되었다. 그 후 그는 1711년 7월 를랑드르 전선으로 보내져서 아를뢰 성 공략전에 참가했다.
1719년 7월 8일, 샤베르는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그 자신만의 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후 1721년 9월 7일엔 대위 계급장을 인가받았고 1732년 11월엔 생 루이스 기사 훈장을 수여받았다. 1732년, 샤베르는 상브르에 있는 에머리의 훈련 숙영지에 배속되었고 1733년엔 메스인 군사 숙영지에서 보병대 참모를 맡았다.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샤베르는 그의 연대와 함께 트라우에르바흐 성 공성전, 필립스부르크 요새 공성전에 참여했으며, 1735년 10월 20일에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클로센 전투에서 활약했다. 1739년 8월 1일, 그는 연대 중령으로 승진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년 10월 20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한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승계를 놓고 카를 6세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와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7세 사이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프랑스, 프로이센, 스페인, 스웨덴, 폴란드는 바이에른 선제후 편을 들었고 오스트리아, 영국, 하노버, 네덜란드, 헤센 등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편을 들었다. 이리하여 발발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는 마일부아 백작 이브 마리 데마레가 이끄는 군단에게 하노버를 공격하게 했고, 그림 벨 아일 공작 샤를 루이 오귀스트 푸케가 이끄는 군단을 바이에른으로 이동시켰다.
1741년 8월 15일, 샤베르는 그림 벨 아일 공작의 군단에 배속된 채 라인강을 도하한 후 바이에른으로 진입한 뒤 11월에 보헤미아로 진군하여 프라하를 포위했다. 프라하 공성전은 11월 25일에 시작되었고 11월 26일 본격적인 공격이 개시되었다. 이때 샤베르는 모리스 드 삭스와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사다리를 통해 조용히 보루 위로 기어올라가 적들을 모조리 몰아냈다. 이후 브로이 공작의 아들 빅토르 프랑수아와 동행한 샤베르는 성문과 도개교 공략에 성공했고, 모리스 드 삭스는 문이 열리자 즉시 성 안으로 들어가서 프라하 시내를 장악했다. 이리하여 프라하 공략에 성공한 샤베르는 카를 7세로부터 프라하 시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1742년 6월,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슐레지엔을 가져가는 걸 용인하는 대가로 오스트리아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할 것을 약속받는 비밀 협약을 체결한 뒤 카를 7세가 프라하에 대부분의 병력을 투입하느라 비어두있던 바이에른을 습격해 순식간에 공략했다. 이후 로브코비츠 후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라하를 포위했고, 그림 벨 아일 공작은 대부분의 프랑스군을 본토로 철수시키면서 프라하에 샤베르와 2,400명의 병력만 남겨뒀다. 샤베르는 프라하에서 몇 달 동안 항전했지만 식량이 바닥나자 더이상 항전해봐야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 1743년 1월 2일 모든 무기와 물자를 싣고 돌아간다는 조건하에 항복했다. 이후 샤베르는 프랑스로 철수하다가 암베르크에서 그림 벨 아일 공작의 본대와 합류했다.
프랑스로 귀환한 샤베르는 프라하에서 중과부적의 상황에서도 몇 달동안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끈질기게 버틴 공을 인정받아 1743년 4월 12일 루이 15세를 알현하는 영예를 얻었다. 이후 샤베르는 1743년 말 14개 대대의 소장을 맡아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내졌다. 이후 그는 1744년 3월 스페인군과 합세한 뒤 바르 강을 도하하여 아프르몽, 유텔, 니스, 카스텔 누오보, 빌프랑슈, 그리고 몽토방 요새 공략전에 참가했다. 또한 샤베르는 리바르노 전투에서 1개 군단을 이끌었지만 패배를 면치 못했다. 그 후 그는 알레산드리아를 향한 우회 공격을 지휘했고, 카잘과 몽페라 공략전에서 맹활약한 뒤 1745년 겨울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1746년, 샤베르는 적에게 포위된 발랑스 구원대를 지휘했지만, 그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발랑스가 항복하면서 무위에 그쳤다. 그 후 그는 아퀴 공방전, 피아첸차 전투, 티돈 전투에 참가해 진가를 발휘했다. 그 후 프랑스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 그는 1747년 6월 1일 다시 이탈리아 방면 프랑스군에 배속되어 7월 1일 몬탈반과 뱅티미유 공략전에 참여했고 이후 니스 부근에서 주둔했다가 적군에 의해 포위된 뱅티미유를 구원했으며, 1748년 5월 10일 중장으로 승진했다.
전쟁이 끝난 후, 샤베르는 1749년 7월 1일 중장으로서 메스 방면 프랑스군으로 전출되어 트루아 에베슈 총독을 맡고 있던 그림 벨 아일 공작의 지휘를 받았다. 이후 1753년엔 민병대 감찰관을 맡았고 1753년 9월과 1754년 9월에 자를루이의 군사 훈련을 지휘했으며, 1754년 3월 28일 성 루이 왕립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에도 군대 훈련을 전담하던 그는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할 무렵 자를루이에 주둔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한 1757년, 샤베르는 하노버 침공 작전에 투입될 데스트레 백작 루이 샤를 세자르 르 텔리어의 군대에 배속되었다. 그는 5월에 뒤셀도르프에서 군대와 합세하여 여러 분견대를 지휘하는 선두 군단을 지휘했다. 7월 26일, 샤베르는 하스텐벡 전투에 참가해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는 몇 시간 동안 적의 저항을 뚫고 오벤스부르크 고지를 점령해 영국-하노버-헤센 연합군 우측면을 돌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상황을 잘못 파악한 데스트레 백작이 자신이 패했다고 오해해 2시간 동안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그는 발목이 묶여서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이후 연합군 총사령관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는 9월 9일 프랑스와 하노버가 전쟁에서 이탈하고 연합군을 해산시키는 내용의 클로스터르제벤 협약을 체결했다. 이 즈음 샤베르는 병에 걸려 프랑스로 돌아왔고 성 루이 최고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훈장은 오직 8명만이 수여받을 수 있도록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샤베르는 그의 일생 최고의 영예를 얻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에서 요양 생활을 하는 사이 상황이 악화되었다. 데스트레 백작이 퐁파두르 부인과의 갈등으로 인해 경질된 뒤 뒤를 이어 하노버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지휘하게 된 리슐리외 공작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 드 비뉴르 뒤 플레시스는 하노버를 심하게 약탈해 하노버 국민들의 적의를 샀고 병사들의 급료를 횡령하는 등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의 지휘하에 재결성된 연합군에게 속절없이 밀려났다. 이후 리슐리외 공작은 경질되었고 클레르몽 백작 루이 드 부르봉-콩데가 부임했지만, 그 역시 크레펠트 전투에서 무능한 면모를 보이는 바람에 콩타드 후작 루이 조르주 에라스므로 대체되었다. 이에 샤베르는 1758년 6월 프랑스군에 복귀하여 콩타드 후작을 보좌했다.
1758년 8월, 샤베르는 1만여 병력을 이끌고 라인강의 우측 둑을 따라 연합군의 보급로로 사용되고 있는 리스 다리를 파괴하고자 진군했다. 그러나 그는 필립 프레이어 폰 임호프 장군의 연합군 3,500명에게 8월 5일 미어 전투에서 패퇴하여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그해 9월, 샤베르는 다시 콩타드 후작의 군대에서 이탈하여 수비즈 공작 샤를 드 로앙의 군대와 합세했다. 그해 10월 10일, 샤베르는 수비즈 공작의 군단 선두에 서서 1차 루텐베르크 전투에서 맹활약해 연합군을 패주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러나 퐁파두르 부인의 총애를 받는 수비즈 공작만 프랑스군 원수로 진급했을 뿐 그에게 돌아간 영예는 단 하나도 없었고, 샤베르는 콩타드 후작의 군대와 합세하라는 지시에 병에 걸렸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프랑스로 귀환했다.
1759년, 프랑스 전쟁 장관을 맡고 있던 그림 벨 아일 공작은 프랑스 해안과 식민지를 위협하는 영국을 응징하기 위해 영국 본토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침공 작전을 계획했다. 샤베르는 영국 침공 작전에 동원된 3개 군단 중 르 아브르 항구에 집결한 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그해 8월 18일 라구스 해전과 11월 20일 키브롱 만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이 궤멸되면서 영국 침공 작전은 폐기되었다. 그 후 샤베르는 1760년 5월부터 7월까지 플랑드르 해안에서 근무했고, 이후엔 노르망디 해안에서 12월까지 근무했다.
1761년 2월, 샤베르는 독일로 돌아와 4월까지 하부 라인강 일대 프랑스군을 임시로 지휘했다가 수비즈 공작에게 넘겨줬다. 이후 샤베르는 프랑스로 돌아와 8월에 클레르몽과 지베의 주지사로 발탁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파리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769년 2월 24일에 사망했다. 향년 7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