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무장척탄병사단 디를레방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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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에 존재했던 나치 독일의 장성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의 부대.
2. 연혁
출처1 출처2
이 사단 자체가 원래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가 1940년 5월 오라니엔부르크 감옥에서 총기사용에 능숙하고 법을 어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자들 80명을 모으고, 그 중 훈련을 합격한 50명과 ''' '징계경력이 있는' ''' SS 부사관 4명 및 사병들 12명을 모아 만든 부대가 시초이다. '''즉 애초부터 싹수가 노란 부대였던 것.'''
어쩄든 이들은 창설된 후 폴란드로 이동해 폴란드 저항군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었고, 1940년 9월에는 300명으로 규모가 증가했다. 이후 연대 및 여단으로 확대되어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서 파르티잔 토벌 임무를 맡았다. 이 부대에는 국방군출신자들도 일부 있었는데 당연히 부대 시초부터가 그 모양이었으니 부대가 승격할 땐 국방군 형벌부대에서조차 구제불능인 작자들이 갈 수 밖에 없었고,[1] 벨라루스로 이동해 다른 보안사단, 무장친위대, 경찰과 함께 벨라루스 초토화작전에도 당연히 열심히 참여했다.
또한 이 부대는 유대인들에게 독극물인 스트리크닌을 주사하여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만 존재하는 대원도 있었다.
이후 1944년에 바르샤바 봉기에서 카민스키 여단, 아제르바이잔 보병 연대 등과 함께 저지른 잔혹행위로 인해 국방군과 다른 무장친위대마저 기겁하면서[2] 여단장인 디를레방어는 봉기 진압 후 보직해임당했다.[3]
근데 거의 종전까지 여기 사단장을 한 것 보면 전황이 급박해서인지 복귀한 듯. 이후 1945년 2월 사단으로 개편되었는데, 국방군 육군의 공병여단, 척탄병연대, 구축전차대대가 추가되었지만, 말이 사단이지 규모는 여단에 머물렀다.
1945년 4월 16일 시작된 소련군의 공세는 5월 1일 디를레방어 사단의 잔여병력을 쓸어버렸으며, 생존자 700여명은 엘베 강을 건너 미군에 항복했다.
3. 출신 인물
- 율리안 셰르너(Julian Scherner)
쉰들러 리스트에서 초반에 거들먹거리는 그 고위 장교 맞다. 원래 일반친위대 상급지도자[4] 였으나 강제 수용소에서의 잦은 착복이 걸려서 1944년 10월 16일 SS군사 법정에서 유죄를 받고 무장친위대 예비역 최고돌격지도자(SS-Hauptsturmführer der Reserve)[5] 로 강등되어 이 부대에 배속되었다. 폴란드 Niepołomice근교 숲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사인은 불명.
4. 기타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 문서에 보면 어지간한 네오 나치들도 미화를 안 한다고 했는데, 정작 이 사단의 엠블럼인 막대형 수류탄 두 개를 겹쳐 놓은 모양을 상징으로 쓰는 네오 나치 부류가 있다(...).
[1] 애초에 SS부대들 중 정예라 일컫어지던 부대들 중 제 3 SS 토텐코프 사단이 제 1 LSSAH 사단이나 제 2 다스 라이히 사단에 비해 광신적이고 잔학한 행위를 한 것도 1,2 SS 사단과 달리 강제수용소 간수들을 기간병으로 하여 호전적인 테오도어 아이케가 창설했기 때문이다.[2] 이들이 이렇게 기겁한 이유는 학살의 정도도 그렇지만 전투에는 정작 등신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였냐하면 장교 16명을 포함하여 초기 병력은 881명이었지만, 시가전에서 대차게 갈려나가고 이후 2천 5백에 이르는 병력을 추가로 증원받으면서 싸워 봉기가 끝날 즈음에는 손실이 2,733명에 이르렀다. 초기 병력의 무려 315%(...). 심지어 진격로에 보드카 양조장(...)이 있어 진격을 도중간에 멈춘 카민스키 여단보다도 손실률이 컸다.[3] 이 때 몰락에서 자주 언급되어 알려진 헤르만 페겔라인이 히틀러에게 직언하여 디를레방어의 보직해임과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의 암살이 이루어지게 된다.[4] SS-Oberführer, 육군과 공군에 대응계급 없음. 통칭 상급대령이라 칭하나 해군의 Kommodore과 동격으로 볼 수는 없다[5] 대위에 상당하는 친위대 계급. 힘러에게 상납되어야 할 수용소의 물건들을 뒤꽁무니로 빼먹다 여러 번 걸린 거다.